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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1:42:54

구희(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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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팔왕의 난2.2. 급상의 난2.3. 사마월과의 갈등2.4. 서진 멸망
3. 평가4. 기타

1. 개요

苟晞
(? ~ 311)

서진의 장수로 자는 도장(道將).

2. 생애

2.1. 팔왕의 난

사예주 하동군 산양현 출신으로, 미천한 집안 배경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인정받아 약관의 나이에 사예부 종사가 되었는데 상관인 사예교위 석감은 구희를 높게 평가했다. 동해왕 사마월이 시중이 되자, 천거받아 통사령사 되고 승진을 거듭해 어느덧 관직이 양평태수에까지 이르렀다.

301년, 제왕 사마경이 황위를 찬탈한 조왕 사마륜을 제거하고 대사마에 올라 혜제 사마충을 보좌했다. 구희는 중앙으로 부름을 받아 대사마부에 소속되었다가, 상서우승과 상서좌승을 역임하면서 여러 조(曹)의 업무를 감찰하니, 8좌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303년, 장사왕 사마예가 사마경을 주살하고 그 일당들에게 죄를 물을 때 함께 연루되어 면직당했다. 그러나 사마예는 표기장군에 오르면서 구희를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304년 7월, 하간왕 사마옹과 성도왕 사마영이 사마예를 불태워 죽이고 전횡을 일삼자, 동해왕 사마월은 북진해 손쉽게 낙양을 장악하고 황제를 옹립했다. 사마월은 혜제와 함께 북정에 나서면서 구희를 북군중후[1]에 임명했다. 이윽고 사마월이 탕음에서 연패하고 혜제가 사마영에게 사로잡혀 업으로 끌려가자, 구희는 범양왕 사마효에게로 도망쳤다. 사마효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 하여 구희를 행연주자사로 삼았다.

305년, 사마영은 왕준과 동영공 사마등이 이끄는 오환기병 부대에게 연달아 털리며 업을 버리고 낙양으로 도망갔다가 장방에 의해 폐출되었다. 사마영의 부하 공사번(公師藩)이 사마영을 구출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평창공 사마모를 쳤고, 또다른 부하 급상(及桑)도 여러 군현들을 어지럽히며 공사번을 도왔다. 이에 구희는 사마효의 명을 받아 광평태수 정소와 함께 공사번을 격파하니, 공사번은 도주하였다.

306년, 사마효는 업성에 있던 구희를 연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해 9월, 사마영이 돈구태수 풍숭에게 잡혀 업성으로 끌려갔는데, 사마효는 차마 사마영을 죽이지 못하고 유폐시켰다. 이때 공사번은 백마진에서 황하를 건넜다가 관도에서 구희에게 토벌되어 참수당했다.

2.2. 급상의 난

307년 5월, 급상은 하북을 계속 어지럽히면서 대장군을 자칭하고 작년에 살해된 사마영의 원수를 갚겠다며 업성을 쳤다. 업을 지키던 위군태수 풍숭과 신채왕 사마등은 패배하여 풍숭은 전사하고, 사마등은 경기병과 도주하다 급상의 장수 이풍에게 잡혀 살해당하니 업성이 함락되었다. 급상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연주를 침략했다. 태부 사마월은 크게 두려워, 연주자사 구희와 장수 왕찬(王讚)에게 명해 급상을 토벌하게 했다. 구희는 급상의 부하 석륵과 1달간 양평군 ~ 평원군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307년 7월, 허창에 주둔해있던 사마월이 관도로 이동해 구희를 도왔다. 사마월의 지원에 힘 입어 구희는 마침내 동무양(東武陽)에 주둔한 급상의 본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업성으로 도망친 급상은 구희가 두려워, 성 밖에 울타리를 두르고 방어에 열중했다. 이에 구희는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단기로 울타리 앞까지 나아가 큰 소리로 '항복하면 대우받으며 복을 누릴 것이나 저항하면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설파하자, 급상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울타리를 포기하고, 밤을 틈타 후퇴해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윽고 구희는 울타리를 전부 부수고 업성을 함락시켜 탈환한 뒤, 청연(淸淵)으로 도망가는 급상을 추격해 8개의 보루를 격파하니, 죽은 적군이 수 만에 이르렀다. 급상과 석륵은 달아나다 적교(赤橋)에서 정소에게 또 한번 격파당하고, 서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급상 세력은 소멸하였다.

307년 9월, 사마월은 다시 허창으로 돌아와 구희의 공을 크게 칭찬해, 그를 무군장군, 도독청연주제군사로 임명하고 가절을 더해 식읍 1만여 호의 동평군후에 봉했다. 구희는 이어서 고밀왕 사마태(司馬泰)의 구원 요청을 받고 청주의 악명 높은 도적 유근(劉根)까지 뿌리 뽑으니, 당시 사람들은 구희를 한신, 백기에 비유했다.

2.3. 사마월과의 갈등

급상의 세력을 멸한 직후, 사마월은 구희를 집에 초대해 자신의 어머니를 뵙게 하고는 그 앞에서 함께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남윤 반도(潘滔)가 사마월에게 건의했다.
연주는 천하의 요충지로, 위무제가 이 땅을 기반으로 한 황실을 보좌한 바 있습니다. 구희는 큰 뜻을 가지고 있으니 신하로 남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진데, 장기간 그에게 연주를 맡긴다면 걱정거리가 내부에서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구희를 청주로 옮기고, 그 대신 상과 명예로 극진히 대접해 그를 기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전하께서 직접 연주를 손에 넣어 천하의 땅을 통솔해 진 황실을 지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소위,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책을 세우는 것이고 어지럽혀 지기 전에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지당하다 여긴 사마월은 동년 12월 27일, 스스로 승상, 영연주목, 도독연예사기유병6주제군사에 오른 후, 구희를 정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시중, 도독청주제군사, 영청주자사로 삼고 동평군공에 봉하였다. 구희는 순순히 청주에 부임했으나 둘 사이는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돈구태수 위식(魏植)이 유민들에게 겁박받아 무리 5 ~ 6만을 이끌고 연주를 노략질했다. 구희는 동생 구순(苟純)에게 청주를 맡기고, 연주 무염(無鹽)에 주둔해 위식을 격파했다. 한편, 구희 대신 청주를 통치하게 된 구순은 왕미의 침략을 막는 공을 세웠지만 형보다 훨씬 엄격한 형벌로 지역을 다스리니, 백성들 사이에선 '소구(小苟)가 대구(大苟)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308년 4월, 한나라의 진동대장군 왕미가 일전에 구순에게 패해 흩어졌던 무리들을 규합해 청, 서, 연, 예주를 공격하고, 지나는 군현마다 그 수령을 죽였다. 구희는 왕미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고, 오히려 13일에 왕미에게 허창을 내어주고 만다. 왕미는 19일에 낙양까지 진격했다가 장궤가 보낸 장수 북궁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310년, 반도와 상서 유망(劉望)이 또 구순을 모함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알고 분노한 구희는 사마월에게 반도 등의 목을 구하고, 종사중랑 유흡(劉洽)에게 군을 맡겨달라 청했으나, 사마월은 전부 불허했다. 답변을 받은 구희는 울부짖으며 사마월과 완전한 결별을 표했다.
사마원초는 재상이 되어서도 공정하지 못해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이 구도장이 어찌 도(道)를 등진 채 그를 섬길 수 있겠는가! 한신도 한고조에게 의식(衣食)의 은혜도 갚지 못하고, 누명을 써 여인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 국가의 도적을 주살하고 황실을 받들어, 제환공진문공의 예에 따르겠노라!
이리하여 여러 주에 격문을 보내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고 사마월의 죄상을 늘어놓았다. 당시 진회제 또한 전권을 쥐고 있던 사마월을 미워해 구희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짐이 부덕하여 위로는 종묘를 번거롭게할까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곤궁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지금이야말로 지방관들이 나라의 병풍이 되어주어야 한다 생각한다. 공사번, 급상 등을 주살하고, 유교와 여랑을 달아나게 하고, 위식 도당을 주살한 그대의 위덕이 왕성히 빛나니, 어찌 높은 식견과 뛰어난 판단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짐은 그대에게 의지해 성과를 얻으려 한다. 더불어 왕미와 석륵이 사직의 우려가 되고 있으므로, 이 조서를 통해 6개 주의 통치를 그대에게 맡기겠다. 지금 이 조서를 보았다면 그대는 6개 주에 다시 격문을 띄워, 공동으로 거사를 이룩해 국난을 제거하고 짐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구희는 황망히 조서를 받들고는 휘하의 제장과 주군의 지방관들에게 격문을 다시 돌려 군사를 소집했다.

310년 12월, 왕미는 조억(曹嶷)을 보내 서주 낭야군을 격파하고 북진해 청주 제(齊)군까지 손에 넣으니 군영이 수십 리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막강하였다. 구희는 청주로 돌아와 조억과 여러 번 싸워 격파했다. 그러나 조억의 군사는 무척 많아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311년 1월 14일, 성벽 위에서 적 군영을 바라보던 구희는 이번엔 적들을 확실하게 격파하기 위해 정예병을 골라 성에서 나와
조억과 크게 싸웠다. 이때 돌연 분 강풍으로 인해 흙먼지가 일면서 구희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했고, 결국 조억에게 대패해 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하였다. 조억이 추격해 동산(東山)에 이르자 휘하 병력들은 모두 조억에게 항복해버렸다. 구희는 다시 단기로 고평(高平)까지 도망친 뒤, 식량창고를 열어 군사 수천을 모았다.

조억과의 전투에서 패배 이후, 구희는 회제와 서로 밀서를 주고받으며 사마월을 도모하고자 했다. 사마월은 이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성고(成皐)에 기병을 풀어 동향을 감시했는데, 과연 구희의 심부름꾼이 잡혀 밀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예주에 있던 사마월은 그 내용을 보고는 몹시 노여워하며 격문을 띄워 구희의 죄상을 나열했다. 그리고 종사중랑 양모(楊瑁)를 연주자사로 삼아, 서주자사 배순(裴盾)과 함께 구희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구희도 본격적으로 움직여, 먼저 기병을 보내 하남윤 반도와 그 무리들을 사로잡았다. 반도는 밤에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상서 유증(劉曾), 시중 정연(程延) 등은 구희에게 참살당했다. 자신의 측근들이 숙청되자 사마월은 울분을 토하다 이내 311년 3월에 항현(項縣)에서 분사하였고, 배순 등도 왕상에게 패배해 죽임을 당했다. 회제는 죽은 사마월을 현왕(縣)으로 격하시킨 뒤, 구희를 대장군, 대도독, 독청서연예형양육주제군사로 삼고, 식읍을 2만 호로 늘린 다음 황금 도끼를 하사했다.

2.4. 서진 멸망

311년 5월, 당시 낙양에 심한 기근이 들었고 한나라 유총도 쉴 틈 없이 공격해왔다. 이에 구희는 상소하여 연주 진류군에 위치한 창원(倉垣)으로 천도를 권했고 종사중랑 유회(劉會)에게 배 수 척, 군사 500명, 곡식 1천곡으로 회제를 영접하게 했다. 회제는 구희의 말에 따라 천도를 하려 했으나 백관과 궁중 사람들이 낙양에 남겨질 제물에 연연해 미적거리는 바람에 실행하진 못했다.

동년 6월, 한나라의 시안왕 유요가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유폐시키자, 회제의 차남 예장왕 사마단(司馬端)이 창원(倉垣)으로 도망쳐왔다. 구희는 사마단을 황태자로 받들고 행대를 세우니, 승제하여 영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를 겸하고 예주 몽성(夢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본래 구희는 미천한 집안 출신었으나, 어느덧 명실상부 서진의 1인자가 되어 거느리는 노비만 천 명에 첩만 수십 명이 넘어갔다. 그는 연일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과거 자사 시절처럼 형벌과 법률만 엄격하게 집행하면서 기분 내키는대로 다스렸다. 전 요서태수 염형(閻亨)이 상소하여 그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구희는 분노해 염형을 죽였다. 구희의 중사종랑 명예(明預)는 병을 앓다가 이 소식을 듣고 집에서 나와 구희에게 간했다.
진조(晉朝)가 106의 수를 만나 위난을 겪고 있을 때, 대장군께서는 스스로 큰 뜻을 세워 국가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염형은 뛰어난 선비인데, 어찌 아무런 죄도 없는 그를 죽여버렸나이까!
그러자 구희가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원해서 염형을 죽였거늘, 왜 종사중랑은 남의 일에 연루되고 싶어해 병든 몸을 이끌고 나를 욕하는가!
좌우 사람들은 구희의 분노한 모습을 보고 두려워, 모두 나아가 명예를 내보내려 했으나 명예는 떨쳐내고 다시 간했다.
장군께서 예를 따라 섬겼기 때문에 저 또한 예에 따라 장군을 섬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장군께선 저조차도 원망하게 만들었는데, 먼 곳의 사람들이 장군을 원망하는 것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옛 요순이 통치할 때는 온화하게 대처함으로써 나라가 번성할 수 있었으나, 걸왕주왕은 악독한 처사로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천자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신하된 몸이면 매 처사에 주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화를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다시 곱씹어주시기 바랍니다.
명예가 이렇게 간언을 했음에도 구희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주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해 인심이 떠났고 인재들은 구희를 찾아오지 않았다.

311년 9월, 예주에 역병과 기근까지 덮치면서 그의 부하 온기(溫機)와 부선(傅宣)이 배반해 난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석륵이 양하(陽夏)에서 진류태수 왕찬을 포로로 잡고 재빨리 몽성까지 습격해 함락시켰다. 석륵은 구희와 사마단을 사로잡아 목에 쇄사슬을 매어놓고 자신의 좌사마로 삼았다.

311년 10월, 구희와 왕찬은 석륵에 반란하기 위해 모의했다가 걸렸다. 석륵은 구희와 왕찬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동생 구순 등도 연루시켜 살해했다.

3. 평가

구희는 미천한 집안에서 발탁되어 마침내 상장까지 올랐으나, 황제를 보위하는 공을 세우지 못하고, 탐욕과 포학을 명백히 발동해 많은 이들을 도륙내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사람을 그렇게 죽여댔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라는 평이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장(道將)은 여러 차례 적을 무찔러 그 위명을 떨쳤으나, 살육의 명성 또한 자자했고, 충직함을 취하지 않았다.
방현령

4. 기타

구희는 장수로서 주로 장수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문관으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가 연주자사에 재직하던 시절, 관청의 문서 업무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문서나 장부가 산적해 있어도 순식간에 처리했지만 빈 틈이 없어 휘하 관원들은 감히 그를 속이려 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구희는 강직한 면모도 있어 디음과 같은 일화가 존재한다.
어느 날, 어린 시절부터 잘 챙겨주었던 구희의 이모가 자신의 아들을 장군에 임명시켜 달라 부탁하자 구희가 그녀를 만류하며 말했다.
"이 구희는 왕조의 법률을 남에게 집행함에 있어 관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의 이모가 워낙 강하게 요청한 탓에 구희는 하는 수 없이 조카를 독호에 임명하였다. 이후 조카가 법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지만 구희는 군법에 따라 그를 베었다. 그렇게 처형식이 끝난 후, 구희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조카 장례식에 참가해 목 놓아 울면서 말했다.
"그대를 죽인 자는 연주자사고, 동생을 위해 우는 자는 구도장(道將)이네."
구희가 법을 지킴이 이와 같았다.
진서, 구희전
하지만 그의 이런 성격 때문에 법을 무척 엄격히 집행해 그가 자사로 있던 주의 태수와 현령은 자주 교체되었고, 처형 또한 매일 이루어져 그 피가 강을 이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희의 엄정한 통치를 견디다 못해 방랑을 택하는 사람들도 생겼으며, 백성들은 구희를 가리켜 '도백(屠伯)'이라 불렀다.

약관의 나이일 때 사례도위 석감이 그의 상관이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2] 246년~251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1] 작위를 뜻하는 제후 후(侯)가 아닌 기후 후(候)다. 진나라 시절부터 존재해왔던 관직으로 역할은 각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로 황궁이 있는 성문의 수비를 담당했다.[2] 석감이 이 자리에 265년에서 270년까지 5년 동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