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14:23:04

서묘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徐苗
(? ~ 302)

서진의 인물. 자는 숙주(叔胄). 청주 고밀군(高密郡) 돈우현(淳于縣) 출신. 조위 시기 상서랑을 지낸 서소(徐邵)의 손자.

2. 생애

서묘는 어릴 적부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공부를 좋아하여, 낮에는 쟁기를 들고 일하고, 밤에는 경전을 읊으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동생 서가(徐賈)와 함께 제남군의 박사 송균(宋鈞)의 제자로 들어가 그의 수업을 들었다.

서묘는 항상 열정이 넘치고 재산을 경시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학에 통달하고 여러 지식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 형제 간의 우애도 깊어, 동생이 농궤(膿潰)를 앓자 서묘가 직접 고름을 빨아주기도 했고, 형제가 요절하면 서묘는 홀로 남겨진 조카들을 거두어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서묘의 이런 선행은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에게도 미쳐, 이웃이나 그와 함께 수학하던 문하생 등도 그의 대가 없는 도움을 받았다. 서묘의 순수함과 의로움이 이와 같으니, 그의 스승인 송균도 그 행실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군(郡)에서 효렴으로 살펴져, 주(州)에서 서묘를 종사, 별가, 치중으로 징소하고, 조정으로부터 5차례나 박사로 초청받았으나, 서묘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서묘는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오경동이평》(五經同異評), 《현미론》(玄微論)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영녕 2년(3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명에 따라 장례는 매우 소박하게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