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1:20:05

우예(외척)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虞豫
생몰연도 미상

서진의 인물이자 동진의 외척. 연주 제양군(濟陽郡) 외황현(外黃縣) 출신. 경황후 우맹모의 아버지.

2. 생애

젊었을 적 명성이 높아 주와 군에서 예를 갖추어 우예를 초빙하려 하였으나, 우예는 이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후 남양왕 사마모의 문학으로 출사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딸 우맹모는 낭야왕 사마예의 왕비가 되었으나, 사마예가 황제를 칭하기도 전에 35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면서 생전에 황후에 오르지 못 하였다. 그리고 수 년 후에 사마예가 황제를 칭하고, 우맹모를 경황후로 추존하여 사후에 그의 가문은 동진의 외척이 되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원제 사마예가 붕어하고 명제 사마소가 즉위하였다. 명제 사마소는 친모가 아님에도 자신을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던 경황후의 은혜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우예를 뒤늦게나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하고, 평산현후(平山縣侯)에 추봉하였다. 그 작위는 우예의 아들이자 경황후의 동생인 우윤(虞胤)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아들 우윤은 동진에서 산기상시, 보병교위, 우위장군, 종정경, 계양태수, 낭야태수, 노릉태수를 역임했으며, 남돈왕 사마종(司馬宗), 명제 사마소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남돈왕 사마종이 반란을 꾸미다가 들켰을 때 연루당할 뻔 했지만 황제의 비호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우윤은 사후 위장군으로 추증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아들 우홍(虞洪)이 습작하여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