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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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郭琦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기의 은사. 자는 공위(公偉). 병주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출신.
2. 생애
곽기는 어릴 적부터 성정이 올곧고 정직하였으며 도량이 깊었다. 그는 학문을 널리 익혔는데, 그 중 오행에 특히 뛰어나 《천문지(天文志)》, 《오행전(五行傳)》을 저술하였다. 또, 《춘추》와 《주역》에도 조예가 깊어, 《곡량전(穀梁傳)》에 주석을 달고, 《양씨역(京氏易)》 100권을 집필하니, 마을 사람, 왕족 할 거 없이 모두 곽기로부터 배움을 받으려 하였다.무제 사마염이 곽기를 좌저작랑으로 삼고자, 그의 친족인 상서 곽창(郭彰)에게 곽기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본디 곽기를 증오하던 곽창은 모른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에 무제 사마염이 말했다.
"만약 경의 말대로라면 오환족의 애송이도 능히 경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즉시 곽기를 불러 낭(郎)에 임명해야겠소."
그리고는 곧바로 곽기를 좌저작랑에 임명하였다. 이후 무제 사마염이 붕어하자 사직하였다.영녕 원년(301년) 정월,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조왕 사마륜이 마침내 혜제 사마충을 위협하여 인수와 인새를 강탈하고, 갑사들을 거느리고 궁으로 들어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사마륜은 곽기를 쓰려 했으나, 곽기는
"나는 이미 무제의 관리가 되었으니, 더이상 이승의 관리로 복직할 수 없소."
라며 거절하고, 평생 집에 머물다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