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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23:11:43

하후휘


사마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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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경제의 정후
경회황후 | 景懷皇后
출생 211년
후한 예주 패국 초현
(現 안후이성 보저우시)
사망 234년[1] (향년 23세)
조위 사례 하내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준평릉(峻平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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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초군 하후씨
휘(徽)
부모 부친 창릉도후 하후상
(昌陵悼侯 夏侯尙, ? ~ 225)
모친 덕양향주 조씨
(德陽鄉主 曹氏, ? ~ ?)
배우자 세종 경황제
자녀 5녀 (조졸 추정)
원용(媛容)
작호 부인(夫人) → 황후(皇后)
시호 경회황후(景懷皇后)
}}}}}}}}} ||

1. 개요2. 생애
2.1. 기타2.2. 생애에 대한 반박
3. 미디어 믹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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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여성이며 는 원용(媛容)으로 예주 패국 초현 사람.

사마사의 첫 번째 부인이다. 하후상의 딸, 어머니는 덕양향주 조씨[2][3], 하후현의 여동생.

2. 생애

단아한 성품에 박식하고 도량이 넓어 사마사가 무엇인가 하려는 바가 있으면 늘 미리 예견하고 계획을 세웠다. 상당히 총명한 여인이었기에 이런 성품과 자질이 똑똑한 남편과 잘 맞았는지 처음에는 금슬이 나쁘지 않았던 듯 싶으나[4] 촉한의 북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마씨의 권세가 점점 강해지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228년 조휴, 231년 조진이 죽은 이후 사마의는 자타공인 군부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다. 또 사마의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웅장한 재주와 커다란 모략이 있었다. 당시 그 시점에서 사마씨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하후휘는 남편 사마사가 절대 위나라의 충신이 아님을 눈치챘다. 물론 당시 20대 중반에 불과했던 사마사의 나이를 고려하면 (아버지 사마의가 이때부터 역심을 품고 맏이와 연대한게 아니라면) 구체적인 찬탈 계획을 세워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아버지를 둔 젊은이가 난세에 품은 은밀한 야심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하후씨와 조씨의 피를 이은 그녀로선 미약하다고 하여 불충을 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5]
그리고 그런 아내의 작지 않은 두려움은, 남편의 더욱 큰 경계심으로 과하게 피드백 되었다. 이에 사마사도 그녀를 꺼리기 시작했고 그토록 금슬이 좋았던 그녀를 결국 234년(태평어람에 따르면 235년)에 독살했다. 진서 경회하후황후전에는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 않은 채 하후휘가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바로 윗줄에 적힌 사마사의 역심을 눈치채 그가 그녀를 꺼렸다는 기록과 연관시켜 보면 사마사가 (또는 반드시 사마사가 아니더라도 사마씨 쪽 인물이) 독살했음을 돌려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그녀가 독살된 시점이다. 그녀가 죽은 234년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진행되던 해로 황제 조예는 아직 건재했다. 조예가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일신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촉오의 북벌에 명민한 판단력으로 대응하며 말 그대로 빛나던 시절이었다. 후대에 펼쳐질 조씨와 사마씨의 권력 투쟁도 이때는 없었고[7] 사마사는 아직 새파란 20대 청년이였다. 진서의 기록을 받아들이면 사마사는 도저히 찬탈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던 이때부터 가슴 속에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나라를 집어삼킬 야심을 품고 있었다. 대개 창업과 관련된 기록은 대의, 어쩔수 없는 일로 윤색 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채로운 부분이다.[8]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 그것도 개국 공신 하후씨의 딸을 살해하는데 최고 중신이자 아버지인 사마의에게 일언반구도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도 다른 사인도 아니고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은 일이다. 아예 사마의가 주도를 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합의 내지는 묵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은 조조[9]보다 사마사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으나, 조조는 유명무실해진 한 황실 아래에서 승승장구하던 군벌이었으며 정씨는 조조의 정치적 위치에 이렇다 할 타격을 가할 힘 자체가 없었고, 단순히 안 보고 마는 게 한계였으나 하후휘는 한창 상승세인 위나라 개국공신의 혈육이자, 위 황실의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사마가(家)의 행보에 따라 결국 죽고 죽이는 파국이 될 확률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여하튼 본래 그 시점에서 사마씨 혹은 사마사가 실제로 품은 야심이 어느 정도였든 간에,이것으로 사마사는 되돌릴 수 없는 길에 발을 들여 놓은 셈이 되었다.

이후 그의 행보는 하후휘가 죽기 직전 떠올렸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게 된다. 그녀가 죽기전에 가졌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져 사마씨는 찬탈을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났다.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인해 외사촌 조상 형제들을 비롯한 그녀의 외가가 모두 멸족되었고 254년에는 오빠 하후현이 황제 조방, 폐후 장씨, 조방의 장인 장집, 소삭, 악돈, 유현, 이풍과 함께 사마사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친가마저 멸족당하고 나머지 친족은 낙랑군으로 쫓겨났다.

조카 사마염이 황제가 될 때 처음엔 추숭되지 않았다가 경헌황후가 여러번 건의하여 266년 처음으로 시호가 더해져 경회황후(景懷皇后)로 추존되었다. 하후휘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낳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외에 기록이 전무한 걸로 봐서는 모두 요절한 듯 하다.

2.1. 기타

하후휘 이후 사마사는 2번 다시 결혼 관계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심지어 하후휘보다도 오래 같이 살았던 세 번째 부인 양휘유와도 자식이 없었다. 아내로서 현명하게 남편을 보필했다는 동서 왕원희와는 달리 그 자신이 남편 사마사가 하려고자 하는일을 늘 미리 예견하고 계획을 세우는게 가능할 정도의 명석함을 지녔고 남편의 숨겨진 심지를 파악할 정도로 그에 대한 이해가 깊은 여성이었다면 그 관계는 매우 진지한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20대 젊은 나이에 자식을 다섯이나 보진 않았을 테고.

그러나 사마사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이런 여자를 죽였고, 그 이후 그 어떤 여자 관계에서도 자식을 가지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그녀의 오빠 하후현마저 죽여버렸다. 굉장히 섬뜩하면서도 씁쓸한 이야기이도 하다. 어쩌면, 사마사와 20여년간 결혼 생활을 했던 양휘유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자신과는 별 관계도 없었을 하후휘에 대한 추숭을 여러번 건의한 것도 사마사의 이런 복잡 다단한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마씨와 하후씨는 이후에도 사돈을 한번 더 맺는데 바로 사마사의 조카인 사마근이 하후휘의 조카뻘이자 하후연의 증손녀인 하후광희와 결혼한 것. 이 둘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바로 동진의 창업주인 진원제다.

2.2. 생애에 대한 반박

진 경제 사마사와 경회황후 하후휘간의 이야기는 전근대때엔 진 경제의 대역무도함을 강조하고 비난하기 위해, 현대에는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두 사람이고 비극적이고 잔혹한 로맨스를 위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역사학적으로 분석해 돌이켜보자면 이 이야기 자체, 진서 경회황후 열전 이야기 자체가 후대에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대체 하후휘가 사마사에게 암살된 이야기가 어떻게 밖으로 퍼져나갔느냐는 것이다.[10] 경회황후 열전에 따르면 하후휘의 암살은 사마사가 비밀스럽게 행한 일로 사마가 내부에서 은밀히 벌어진 암살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고평릉 사변 이전에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면 조씨 황실을 비롯해 하후씨들도 사마씨를 견제하고 의심했을 것이고 사마사의 처남인 하후현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사마씨와 거리를 두거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적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사는 하후휘가 죽은 후에도 조상 일파와 친하게 지냈으며 하후현은 옛 사돈어른인 사마의에게 구품관인법의 개선을 요청하는 등 완전히 그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즉, 당시에 사마사가 하후휘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정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평릉 사변 이후에 이런 암살 과정이 흘러나왔다고 해도, 이전까지는 아예 새어나간 적이 없는 이야기가 고평릉 이후에나 갑자기 새어나갔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몰래 정예병을 기르면서 전혀 들키지 않고 거사를 이행한 사마사의 주도면밀함을 보건데 뜬금없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므로 처남 하후현을 비롯한 조상 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사마사의 잔인함을 보고, 예전에 병으로 죽은 하후휘도 사실 사마사에게 암살당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역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렇게 볼 경우 총명하여 남편 사마사의 야심을 알아챈 바람에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내고 보면 하후휘의 생애는 사마사에게 시집와 아이 다섯을 낳은 후 일찍 세상을 떴고 이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다는 사실만 남기 때문에 사실상 열전의 핵심 서사구조가 성립되지 않는 셈이다. 진서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의 역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검증되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나 설화를 꽤나 집어넣은 편이고 나아가 진나라의 치부를 억지로 비난하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설화를 마구 집어넣은, 당나라 정권의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이 있어 주의해야 하는 사서인데, 이런 사례에 걸맞은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사마사와 하후휘의 일화인 것이다.

3. 미디어 믹스

이렇게 굉장히 흥미로운 떡밥을 지닌 여성임에도 여타 삼국지 매체에서 등장은 거의 없는 편이다. 동서인 왕원희가 여러 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것과 묘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삼국 시대 말기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독살은 피비린내나는 찬탈 행보의 시작점이라 사마씨의 탈법성, 부도덕성, 실정을 어떻게든 가리려드는 창작물(ex: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선 나오기 힘들다.[11]

대군사 사마의에 등장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실제와 다르게 각색한다. 심지어 이 작품에서는 사마소가 형수인 하후휘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후휘가 사마사의 사병 계획을 눈치채자 사마소는 그냥 다 잊고 둘이 내려가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안그래도 사병 계획 때문에 사마가 집안에 배신감을 느꼈던 하후휘는 시동생의 어이없는 제안에 도망치려 하다 사마소에게 교살당한다. 사마사는 하후휘가 왜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채 쓸쓸히 부인의 묘소를 청소한다. 사마사가 하후휘를 독살한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장남인 사마사가 자신의 부인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사마의가 몰랐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고 사마의가 주도적으로 하후휘를 죽였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이 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사마의가 아들의 역심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분석은 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할때 본작의 사마소가 하후휘를 죽였다는 각색은 사마사와 사마의의 역심을 감추는 묘사로 비춰질 여지가 다분하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장수로 등장했다.#

파일:external/img.altema.jp/347.jpg

모바일게임 삼국대전 스매쉬에서 일러스트로 등장했다.

4. 둘러보기

진서 후비전(后妃傳)
장춘화 하후휘 양휘유 왕원희 양염 양지 좌분 호방 제갈완 가남풍 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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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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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평어람에 따르면 몰년이 청룡 3년, 즉, 235년이라고 한다.[2] 어머니 덕양향주가 조진의 누이이기 때문에 하후휘는 조진의 조카이자 조상의 사촌이 된다.[3] 가정적으로 화목한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인 하후상이 어머니 덕양향주보다 첩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조비가 그 첩을 살해하고, 아버지가 첩을 잃어버리고 상심하여 병이 깊어져 사망했다. 따지고 보면 로맨스가 많지 않은 삼국지에 부녀가 다 로맨스 스토리의 주인공들인 케이스다. 양쪽 다 당사자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이여서 문제지(...).[4] 하후휘가 죽을 때 하후휘는 24살, 사마사는 27살이었다. 둘이 처음부터 사이가 냉랭했다면 20대 젊은 나이에 자식을 다섯이나 두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사마사는 두 번째 결혼한 오질의 딸과는 금방 이혼했고 세 번째 부인인 양휘유와는 죽을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5] 하후휘는 개국 공신으로 평생 조조를 위해 싸우다 아들과 나란히 전사한 하후연의 질손녀이자 조비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하후상의 딸이다. 또한 본래 진씨였으나 그 아비가 조조를 대신해 목숨을 버린 보답으로 조씨 성을 받아 사직의 기둥이 된 조진의 조카다. 그러니 하후휘의 조위 사직에 대한 감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6] 헌제의 후궁이었으니 당연히 동귀인이 임신한 아이는 당연히 헌제의 아이다. 그런데도 죽였다는 것이다.[7] 만약에 조예가 쌩쌩했던 이 시절부터 권력 장악의 의지를 내보였다면 사마의는 아예 목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8]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인물상이 상당히 독특한 축에 들어간다. 형은 나라가 반석에 있던 시절부터 딴 마음을 품었다고 대놓고 언급된 인물이고 동생은 형과 아버지가 1년 넘게 추진해 온 거사 시도를 거사 직전에야 알았고 정적 하후현을 살려주려 애쓰는 등 단일하게 묘사하기 힘든 입체적인 면모를 보인다.[9] 조조의 첫 번째 정실이었던 정부인은 자식이 없어서, 요절한 첩실 유부인 소생의 조앙을 양자로 거두어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후일 조조가 완성에서 뻘짓을 하는 바람에 조앙이 죽자 정씨는 몹시 애통해하고 분노하며 조조를 원망했고, 이에 조조는 정씨를 친정으로 보내버렸다가 나중에야 다시 찾아가서 싹싹 빌고 애걸복걸하며 재결합을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조조에게 눈길도 한 번 안 주고 철저하게 무시하고 외면했으며, 조조는 끝내 용서받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말년에 그는 "내가 다른 건 하나도 후회하는 게 없는데 조앙을 그렇게 잃고 정씨와 헤어진 건 후회된다. 저승에서 조앙이 나더러 자기 어머니 안부를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겠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서주 대학살을 비롯하여 무수한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것도 후회스러운 게 없다고 말한 조조임에도, 정씨와 그렇게 갈라서게 된 것만은 두고두고 고통스럽게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10] 비슷한 예로 사구정변이 있다. 공통점이라면, (사건이 사실이라해도) 주모자들이 최대한 사건을 외부에 퍼져나가지 않도록 은밀하게 진행시켰을 것인데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지 의문점이 존재한다는 것.[11] 진삼국무쌍의 진 사나리오는 사마씨의 탈법적 행보를 전부 금칠해버리는 바람에 사마씨 외의 캐릭터들은 사마씨 빠돌이 아니면 찌질이로 단순화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