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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무제의 계후 무도황후 | 武悼皇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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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259년 | ||
조위 사례 홍농군 화음현 (現 허난성 싼먼샤시) | |||
사망 | 292년 3월 6일 (향년 33세) | ||
서진 사례 하내군 낙양현 황궁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준양릉(峻陽陵) | ||
재위기간 | 서진 황후 | ||
276년 ~ 290년 5월 16일 | |||
서진 황태후 | |||
290년 5월 16일 ~ 292년 3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 홍농 양씨 | |
휘 | 지(芷) | ||
부모 | 부친 임진후 양준 (臨晉侯 楊駿, ? ~ 291) 모친 고도군 방씨 (高都君 龐氏, ? ~ 292) | ||
배우자 | 세조 무황제 | ||
자녀 |
| ||
아명 | 남윤(男胤) | ||
자 | 계란(季蘭) | ||
작호 | 황후(皇后) → 황태후(皇太后) | ||
시호 | 무도황후(武悼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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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초대 황제인 사마염의 2번째 황후로 자는 계란(季蘭). 어릴 적의 이름은 남윤(男胤)으로 사마염의 첫째 황후인 무원황후 양염의 사촌동생. 양준의 딸로 사례 홍농군 화음현 사람. 무도황후(武悼皇后)라고도 부른다.2. 생애
276년에 황후가 되었고 무도양황후열전에 따르면 온순하고 깨끗해 부인의 미덕이 있었고 이는 숙방에 비쳤기에 은총을 받았다. 283년에 발해상왕 사마회를 낳았지만 1년만에 요절하였고 이후 자녀가 없었다. 288년에 안팎의 부인들을 거느리고 서교에 나아가 친히 양잠을 하고 사람들에게 비단을 차등있게 하사했다.의붓며느리 가남풍[1]은 투기가 심해 자신을 열받게 한 궁의 사람들을 걸핏하면 죽이곤 했다. 한 번은 태자의 아이를 가진 궁녀가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 궁녀를 자신의 앞에 데려와 짧은 창으로 그녀의 배를 찔러 죽여버렸다.[2] 사마염이 폐하려고 하자 양 황후는 가충의 공을 생각해서 만류하였다. 가남풍의 아비인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인 사마소부터의 신하로 마땅히 몇 세대 동안 관후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질투가 많을 나이이니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양 황후는 이렇게 뒤에서는 가남풍을 실드쳐주고 앞에서는 또 사마염에게 찍힐까봐 자신이 먼저 여러 번 가남풍에게 엄히 경고하고 권했다. 그런데 가남풍은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줄도 모르고 양지에게 원한을 품었으며, 사마염 앞에서 자신을 비방했을 거라고 여겨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무제 사마염이 죽자 양지는 황후에서 황태후가 되었고 양지의 아버지인 양준이 정권을 잡아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양준은 사마염이 죽기 전 사경을 헤매는 사이 미리 주변 신하 모두를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해버리고, 견제가 되는 사마량도 허창으로 쫓아버린다. 종실들은 당연히 이를 좋아할 리 없었지만 정작 유조까지 뺏긴 큰어른 사마량이 싸우고 싶지 않아서 모두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이때 황후 가남풍이 이때 초왕 사마위(司馬瑋)를 꼬셔서 양준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무고하면서 사마위, 사마요 등에게 거짓 조서를 내려 양준을 죽이도록 하고 정권을 잡고 사마위를 위장군에 봉한다.
이때 가남풍은 황태후가 양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포하였다. 양준이 죽자 양지 역시 영녕궁으로 보내져, 어머니인 고도군 방씨와 함께 거처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직후 가남풍으로 인해 각종 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 나라에 위해를 가할 것을 기도한 죄, 서신을 화살에 매달아 반란을 획책한 죄, 외척의 자격에 기대어 상중인 폐하 대신 무거운 권한을 맡아 반역을 도모하고 사사로운 당파를 만든 죄, 황궁 안에서 살육을 행하고 조령을 위배하고 역당을 장려한 죄, 백성들을 저버린 죄 등을 둘러쓰고 관리들에게도 공격당하였으며, 상서령 하비왕 사마황 등은 황태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을 것을 거듭 권하였다. 가남풍은 거절하는 척하다가 못 이긴 척 바로 태후를 폐하였다. 그리고 그 가족 모두 주살해야 한다는 주청을 받아 황태후의 어머니 방씨의 사형 집행도 논의한다.
방씨가 사형당하게 되자 그녀는 어머니를 끌어 안고 통곡했으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면서 "제발 이 불쌍한 첩의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가남풍에게 청했다. 며느리에게 자신을 소첩이라고까지 일컬으며 애원했지만 가남풍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끝내 방씨를 살려달라는 청을 외면한 채 기어이 죽이고 말았다. 심지어 양지의 시종 10여 명도 모조리 물리쳤다. 어머니의 죽음에 절망한 양지는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 죽었으며 당시 나이는 34세, 황후가 된 지 15년이었다. 가남풍은 그녀가 하늘에 있는 선제 사마염에게 호소할까 두려워 무당의 말대로 시체를 조정의 반대 방향에 묻고 위에 부적을 붙이고 약물을 뿌린다.
3. 관련 문서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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