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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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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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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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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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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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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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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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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八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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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무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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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은왕
사마위
장사려왕
사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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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실제 행적을 바탕으로 사마량 대신 예장왕 사마치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다. 사마량은 팔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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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제 사마염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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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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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양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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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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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37]
패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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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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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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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초은왕(楚隱王)
司馬瑋 | 사마위
시호 은(隱)
작호 시평왕(始平王) → 초왕(楚王)
사마(司馬)
이름 위(瑋)
언도(彦度)
부모 부황 무제(武帝)
모후 미인(美人) 심씨(審氏)
생몰 271년 ~ 291년 음력 6월 13일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서진의 종친이며 자는 언도(彦度)로 무제 사마염의 5남이자 혜제 사마충의 동생. 봉토는 초(楚), 작위는 왕(王), 시호는 은(隱).

생모는 미인 심씨로 장사왕 사마예의 동복형이다. 성품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성격이 털털하고 호탕하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는지 죄인으로 처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을 때 슬퍼하는 백성들이 사당도 세웠다고 한다.

2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어서인지 팔왕 중 열전 분량이 가장 짧다.[1]

2. 생애

277년 8월 21일 6세의 나이로 시평왕에 봉해졌으며, 그와 동시에 둔기교위로 있다가 초를 봉지로 받으면서 289년에 도독형주제군사, 평남장군, 진남장군이 되었다.

290년 부황 사마염이 죽고 형 사마충이 황제가 되자 외척 양준이 권신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은 계략을 꾸며 양준을 무고하여 몰아내고자 했다. 이때 가남풍은 종실의 번왕들에게, 상경하여 양준을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려보냈다.[2] 이때 가장 먼저 상경한 것이 초왕 사마위였다. 사마위는 이때 형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291년 2월 상경해도 된다는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회남왕 사마윤과 함께 수도 낙양에 도착했다. 같은 해 3월 8일 정변이 일어나자 가남풍은 혜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양준의 모반을 선포했다. 사마위는 사마문에 주둔하면서 입구를 지키다가 금군 400명을 이끌고 가 양준을 잡아 죽이고 그 수하 전원을 참수했다. 황제의 어지가 내려질 때 양준은 황가의 무기창고 남쪽 편 요새 형태 자기 거처에 있다가 군사들이 몰려오자 마구간으로 몸을 숨겼다. 양준은 금군의 창에 찔려 참혹하게 죽었고 가남풍은 양준의 일가와 삼족을 멸한 뒤 대권을 장악했다.

3월 19일 가남풍과 혜제 사마충은 초왕 사마위를 접견하여 궁을 호위하는 금군수령위장군(禁軍首領衛將軍)으로 임명하고 북군중후(北軍中候)를 겸하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양준 때문에 쫓겨나 있던 여남왕 사마량도 다시 불러 태재(太宰)에 임명하고, 태보 위관과 함께 보정을 하도록 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마위는 성격이 거칠고 문체가 과감하며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특히 형벌을 잔인하게 주어 위엄 세우기를 좋아해 온 조정이 그를 꺼렸다. 사마위가 사람죽이기를 좋아한 것 때문에 고명대신인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3], 위관 등이 사마위를 싫어했다. 사마량과 위관은 사마위의 포악한 성품을 미워해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려 그의 병권을 빼앗고자 했다. 처음엔 배해를 북군중후로 삼으려 했으며, 이것이 실패하자[4] 그 대응책으로 여러 친왕들을 봉국으로 가게 했다.

일련의 사건에 그야말로 격노한 초왕 사마위는 사마량과 위관을 원망하고 분해하며 가남풍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가남풍은 막 정권을 잡았지만 마땅히 정무를 보좌할 사람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조정에 돌아온 대신들도 가남풍을 좋게 보지 않았다. 사마량은 선황대부터 황제의 고문이었던 명망가였고 위관은 추앙받는 문인이었다.[5] 이들이 은근하게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가남풍은, 친왕인 사마위가 보좌해주는 것을 그나마 힘으로 여겨 사마위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

사마위에겐 덕행이 부족함에도 총애하는 수하 둘이 있었으니 장사 공손굉과 수행원인 사인 기성이었다. 사마위는 이들을 시켜 황후 가남풍을 찔러보았고, 수작을 받아들인 가남풍은 사마위를 태자소부에 임명하여 그가 봉국으로 가지 않고 계속 남아있게 해주었다.

두 수하 중 기성은 원래 외척 양준과 친했었는데, 위관이 이 점을 싫어하여 체포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기성과 공손굉은 모의하여 사마위의 명령을 빙자해 위관과 사마량을 참소했다. 어차피 가남풍도 애초에 위관과 사마량을 싫어하고 있었으니 잘됐다 하고 받아들였다.

여름 6월, 가남풍은 황제로 하여금 직접 조서를 써서 사마위에게 내리게 했다.
太宰太保欲爲伊霍之事(태재태보욕위이곽지사)
태재와 태보는 이윤과 곽광이 했던 일처럼 하려고 하고 있으니[6]
王宜宣詔令淮南長沙(왕의선조영회남장사)
왕은 마땅히 이 조서를 선포하고, 회남왕과 장사왕과
成都王屯諸宮門(성도왕둔제궁문)
성도왕에게 명령하여 여러 궁궐의 문에 주둔하게 하고
免亮及瓘官(면양급위관)
사마량과 위관의 관직을 파면시키도록 하라.

밤중에, 황문을 통해 보따리에 싸인 조서가 사마위에게 전달되었다. 사마위는 다시 아뢰려했으나 환관이 일이 세어나갈 수 있다며 말리니 묻지 않았다. 사마위는 자신이 장악한 군사들을 파견해 거침없이 사마량과 위관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위는 실수를 하는데 멋대로 조서를 고친 것이었다. 사마위는 36군을 소집하고 자신이 조서를 통해 도독중외제군에 임명되었다고 공표했다. 또 사마량과 위관의 관속들에게 항복만 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말도 했는데, 이 또한 조서에 없는 말을 조서에 있는 척하여 명령한 것이었다. 사마위는 손쉽게 사마량과 세자 사마구를 함께 죽였는데, 이것은 팔왕의 난에서 첫 훙서다. 위관 역시 체포되어 자손 아홉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후 수하 기성은 한밤중에 사마위에게 가씨 일가인 가밀, 곽창 등을 몰아내고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권했지만 사마위는 미적거리며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한편 날이 밝았을 때 가남풍 쪽에서도 태자소부 장화[7], 동맹 등이 설득을 하고 있었는데 "초왕 사마위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사마량과 위관까지 죽인 이상 초왕 사마위가 천하의 권위를 모두 가졌으니, 이제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멋대로 사람을 죽인 죄"로 사마위를 주벌할 것을 권했고 가남풍 역시 이것을 이용하여 사마위를 제거하고 싶던 차라 사마위는 곧바로 희생자가 되었다.

장화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중장군 왕궁을 파견하니 왕궁이 추우를 수놓은 깃발[8]을 휘두르면서 말하였다.
초왕이 조서를 고쳤으니 그의 말을 듣지 마라.
무리들이 모두 무기를 놓고 달아났다. 사마위는 주위에 한 사람도 남지 않자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사마간에게 가려고 했으나 그 전에 붙잡혀 여름 6월 13일,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하다며 탄식하다 참수되었다. 죽기 전에 사마위는 품속에서 푸른 종이에 쓴 조서를 꺼내서 감형(監刑)상서 유송(劉頌)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다행하게도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몸을 의탁하였다가 억울함을 만나 이와 같이 되었구나!

하지만 영녕 원년인 300년, 가남풍이 주살됨에 따라 사마위의 명예도 회복되어 사기장군을 추증받았다. 또한 사마위의 아들인 사마범(司馬範)은 양양왕에게 봉해지고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사마범은 후일 영가의 난석륵왕연을 꾸짖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해 석륵에게 목숨을 구걸할때 홀로 안색이 엄연하여, 돌아보며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을 꾸짖으며 당당하게 죽었다.

3. 창작물에서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최후가 웃기게 묘사되어 있는데, 가남풍에게 놀아난 끝에 최후를 맞게 되자 '이건 혹시 가남풍의 계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지만 가남풍은 '아닐까 좋아하네!' 하며 죽여버린다.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토탈 워: 삼국/세력/사마위 참고.

[1] 가장 긴 건 의외로 사마륜. 문제는 글에 욕 밖에 안 적혀있다.[2] 사실 가장 나이 많은 여남왕 사마량이야말로 양준을 쳐낼 이유가 있었는데도 그는 특유의 신중한 성격으로 정변을 도모하지 않았다.[3] 황족의 최고 웃어른이자 그의 작은할아버지 뻘이 된다.[4] 사마위가 화를 내니 배해는 그 소식을 듣고 알아서 거절했다.[5] 심지어 위관은 황제 사마충이 태자일 때 폐위하라고 간한 적도 있었다.[6] 이윤과 곽광은 황제를 추방한 자들로 이후 군주를 추방하는 이들의 구실이 되었다.[7] "초왕이 사마량과 위관을 죽인 까닭에 천하가 두려워하며 귀의할 터이니 황제가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응당 멋대로 친왕과 대신을 죽인 죄를 물어 벌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적극적으로 사마위 처형의 필연성을 언급했다.[8] 추우번은 전투를 중지하거나 군사를 해산시키는 깃발이고, 백호번은 전투를 독려할 때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