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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15:34:54

곽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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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郭瑀
(? ~ 388)

전량의 은사. 자는 원유(元瑜). 양주(涼州) 돈황군(敦煌郡) 출신.

2. 생애

곽우는 어릴 적부터 세속을 초월한 지조가 있어, 동쪽으로 가 장액(張掖)에 자리잡고, 은사인 곽하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지식을 전부 전수받았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경서에 정통하였고, 언변이 있어 담론에 능하였으며, 글짓기에 재능 역시 있었다. 곽하가 죽자, 곽우는 자신을 낳은 사람은 아버지이나 성장시킨 사람은 스승님이라 하면서 부모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3년상을 치렀다.

3년상을 모두 마친 곽우는 임송산(臨松山)의 해곡(薤谷)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암석을 쪼아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살면서 학술 연구를 하였는데, 훗날 그의 제자 1,000여 명이 그 내용을 모아 《춘추묵설(春秋墨說)》, 《효경착위(孝經錯緯)》 등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전량의 국왕 장천석이 곽우의 명성을 듣고, 맹공명(孟公明)을 사자로 보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맹공명이 임송산에 도착하자, 곽우는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를 가리키며
"저 새가 어찌 새장에 들어가리오!"
라 이르고는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에 맹공명이 곽우의 문하생들을 일단 체포하기 시작하니, 곽우가
"내가 녹을 피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으나, 어찌 은거하여 의를 행하려다 문하생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라 탄식하고는 자진출두하였다. 곽우가 고장(姑臧)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장천석의 모친이 사망하여 한창 장례식이 진행중이었다. 곽우는 머리를 풀고 조문하다가 3번 펄쩍 뛰어올라 춤을 추었고, 이로 인해 도성에서 쫓겨나 다시 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량을 멸망시킨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곽우의 명성을 듣고, 사자를 파견해 곽우로 하여금 예법을 세워줄 것을 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곽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그만 두었고, 대신 태수 신장(辛章)에게 서생 300명을 선발하여 곽우의 수업을 받게 하라 명하였다.

태초 2년(387년) 8월, 전진의 부씨가 패망한 틈을 타, 장천석의 아들인 장대예가 전량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후량의 여광에게 대패하여 참수당했다. 장대예를 섬기던 장사 왕목(王穆)은 그 잔당을 이끌고 주천(酒泉)에서 거병하였는데, 이때 곽우에게 사자를 보내 거사에 함께할 것을 종용하였다. 곽우가 한탄하며 말했다.
"강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도 그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맥병(脈病)을 3년간 앓으면 먹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나, 노중련은 조나라에 가 의리로 말문이 막히지 않았는데, 하물며 미개한 오랑캐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일에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으랴!"
그리고는 색하(索嘏)와 더불어 병사 5,000명을 일으켜 왕목에게 호응하고, 조 30,000석을 운반해 군량으로 보급해주었다. 이에 왕목은 곽우를 태부좌장사, 군사장군으로 삼고, 색하를 돈황태수로 삼았다.

태초 3년(388년), 참언에 휘둘려 색하와 불화하던 왕목이 병사를 이끌고 색하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곽우가 간했다.
"과거 한나라는 천하를 평정한 후에 공신을 주살하였습니다. 아직 대업이 세워지지 않은 마당에 신하를 주살한다면 패망하여 궐 안에 사슴과 고라니가 노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목은 따르지 않고 색하를 사로잡아 죽여버렸다. 곽우는 왕목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성을 빠져나오면서 큰 소리로 곡을 하고, 손을 들어 성을 향해 외쳤다.
"내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못 하겠구나!"
이후 원래 살던 산으로 돌아가 7일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죽음만을 기도하였다. 어느 날 밤에 곽우는 청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집을 벗어나지 못 하는 꿈을 꾸고는 잠에서 깨어나 탄식하였다.
"나는 용을 타고 승천하려 했으나, 집(屋)에 그치고 말았다. '옥(屋)'이라는 글자는 시체(尸) 아래에 이른다(至)로 풀이할 수 있고, 꿈을 풀이하면 용이 시체에 이른 것이니 나는 머지 않아 죽겠구나. 과거 군자는 침실에서 죽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나는 바른 선비조차 아니란 말인가!"
과연 곽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