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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12:26:39

손혜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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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孫惠
생몰연도 미상

서진의 인물로 자는 덕시(德施). 양주 오국(吳國) 당양현(富陽縣) 출신. 삼국시대 오나라 예장태수 손분의 증손자로 오나라의 황족이었다.

2. 생애

학문을 좋아하고 식견과 재주가 있었음에도 말이 어눌하여 주(州)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손혜는 고향을 떠나 소패(蕭沛)에 임시로 머물렀다.

영녕 원년(301년) 6월, 조왕 사마륜을 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대사마 제왕 사마경은 손혜를 진흥현후(晉興縣侯)에 봉하고, 자신의 호조연(戶曹掾)으로 삼았다가 동조속(東曹屬)으로 옮겼다

태안 원년(302년) 12월, 목적을 이루고 황궁을 장악하게 된 제왕 사마경은 교만해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는 백성들의 집 수백 채를 멋대로 헐어버리고 대사마 관저를 서궁(西宮) 만큼 크게 확장했다. 또, 입조하길 거부하고 연회를 즐겼으며,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들만 곁에 두니, 천하의 인심은 사마경에게 실망했다. 손혜는 5난(五難)과 4불가(四不可)의 비유를 들며 간했으나, 사마경은 듣지 않았다. 당시 사마경은 심기를 거스른 이들을 붙잡아 고문했기에, 손혜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표기장군 장사왕 사마예가 낙양성 내에서 들고 일어나, 3일 만에 제왕 사마경의 군대를 격파하고 사마경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사마경의 사망 소식을 접한 대장군 성도왕 사마영은 과거 사마경의 부하였던 손혜를 불러 자신의 참군으로 삼고, 분위장군, 백사독(白沙督)을 더했다.

태안 2년(303년) 8월, 하간왕 사마옹이 장사왕 사마예에 대항해 난을 일으키자, 성도왕 사마영도 이에 호응해 전봉도독 육기, 북중랑장 왕수(王粹), 관군장군 견수 등 20만 대군을 낙양으로 출진시켰다. 육기와 같은 고향 출신이던 손혜는 육기가 화를 당할까 우려해 전봉도독 직책을 왕수에게 양보할 것을 권했지만 육기가 듣지 않았다. 결국, 육기는 황제를 받들고 싸우던 장사왕 사마예에게 대패하고, 돌아와서는 모함을 받아 동생 육운, 육탐과 함께 사마영에 의해 참수되니, 손혜는 크게 상심했다. 이후 사마영이 또 제멋대로 아문장 양준(梁儁)을 죽이는 모습을 본 손혜는 두려워 성(姓)를 바꾸고 도망쳤다.

영흥 원년(304년) 7월, 동해왕 사마월이 합비(下邳)에서 거병하자, 손혜는 사마월에게 스스로를 남악(南嶽)의 은사라 거짓으로 칭하며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살펴본 사마월은 손혜의 문장력에 감탄해, 그를 불러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삼아 함께 일을 모의하고 격문을 쓰게끔 했다.

광희 원년(306년) 6월, 태부에 임명된 사마월은 손혜를 군자좨주에 임명하고 여러 번 그와 더불어 득실을 문의했다.

영가 원년(307년) 정월, 동해왕 사마월이 성공적으로 두 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 손혜는 산기랑, 태자중사인, 종사중랑을 역임했다. 한번은 손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사마월은 주목(周穆) 등을 주살하고, 밤에 참군 왕이를 불러 표문을 작성하게 했다. 하지만 왕이가 벌벌 떨며 글을 쓰지 못하자, 사마월은 탄식하며 말했다.
"손 중랑이었으면 벌써 한참 전에 완성했을 것이오!"
사마월의 손혜에 대한 신임이 이와 같았다. 이후 손혜는 팽성내사, 광릉상, 광무장군, 안풍내사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혜제 사마충이 독살당하고 회제 사마치가 즉위할 때, 손혜에게 사마치의 어가(御駕)를 영접한 공이 있다 하여 임상현공(臨湘縣公)으로 진봉되었다.

영가 4년(310년) 11월, 양주도독(揚州) 주복(周馥)이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손혜는 낭야왕 사마예가 보낸 양위장군 감탁과 함께 주복을 토벌했다. 주복은 이내 패하여 달아났다.

여강 사람 하예(何銳)가 안풍태수에 부임할 무렵, 손혜는 군(郡) 경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하예가 손혜의 하인과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을 빌미로 참소당할 것이 두려웠던 손혜는 하예를 습격해 살해하고 오랑캐의 영역으로 도망쳤다가 머지않아 병사했다. 향년 47세. 그의 시신은 고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나중에 손혜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조정에서도 그의 본심을 이해하고 조의금을 내렸다.

생전에 남긴 문장으로는 〈쇄차부〉(繀車賦), 〈구부〉(龜賦), 〈남류침부〉(楠榴枕賦) 등이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이 작품들을 모아 총 10권으로 구성된 《손혜집》(孫惠集)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