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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23:57:23

왕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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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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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무릉강후(武陵康侯)
王廙 | 왕이
시호 (康)
작위 무릉현후(武陵縣侯)
(王)
(廙)
세장(世將)
생몰 276년 ~ 322년 11월 4일
출신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부모 부친 - 왕정(王正)
모친 - 하후씨(夏侯氏)
배우자 극씨(郤氏)
자녀 왕이지(王頤之), 왕호지(王胡之) 외 2명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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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승상 왕도과 대장군 왕돈의 사촌동생. 아버지 왕정은 광록대부 왕람의 4남으로, 서진 시기 상서랑을 지냈다. 동생으로는 왕빈이 있다.

2. 생애

젊은 시절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서예, 그림, 음악, 사격, 마차 운전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바둑이나 노름과 같은 잡기(雜伎)도 즐겨했다. 초기에 태부 동해왕 사마월에게 발탁되어 그의 참군으로 일하던 중, 황태제 사마치의 어가를 영접한 공으로 무릉현후(武陵縣侯)에 봉해졌다. 이후 상서랑에 임명되었다가 복양태수로 옮겨졌다.

영가 원년(307년) 9월, 안동대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사마월의 명을 받고, 장강을 건너서 건업(建業)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왕이가 태수직을 버리고 사마예를 쫓아오니, 사마예는 매우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다. 왕이는 여강(廬江)과 파양(鄱陽) 두 군의 태수가 되고, 주복, 두도의 반란 진압에 참여해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봉읍이 더해졌다. 이후 관군장군에 제수받고 석두성(石頭城)에 주둔해 사마예의 자의참군을 겸하였다.

건흥 3년(315년) 8월, 진동대장군 왕돈의 심복인 전봉(錢鳳)이 형주자사 도간의 공적을 시기해, 매번 왕돈 앞에서 도간을 헐뜯었다. 이를 알게 된 도간이 스스로를 변호하고자 왕돈을 찾아가려 했지만, 본래 도간을 안 좋게 보았던 왕돈은 그대로 그를 붙잡아 두다가 광주자사로 좌천시키고 사촌동생 왕이를 형주자사로 삼았다. 형주 소속 장수 마준(馬俊)과 정반(鄭攀)이 왕돈에게 서신으로 도간의 유임을 청했으나, 왕돈은 불허하였다. 이에 마준과 정반은 억울하게 도간이 좌천당하는 것에 분개하며,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운구(溳口)에서 반란군 두증의 무리를 영접했다. 형주로 부임하던 왕이는 정반 등에게 기습을 받고 강안(江安)으로 도주했다. 두증은 장안의 민황제 사마업이 임명한 형주자사 제오의(第五猗)를 받들고 왕이를 다시 공격하니, 왕이는 군대를 독려해 힘껏 맞서 싸웠지만 또 패하고 말았다.

건무 원년(317년) 9월, 왕돈이 무창태수 조유, 양양태수 주궤(朱軌)를 파견해 두증, 정반 등의 무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왕이는 형주로 부임하기 위해 유준에게 양구(揚口)를 맡기고 강릉(江陵)으로 향했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두증과 정반은 다시 배반해 양구루(揚口壘)를 함락시키고, 여관호(女觀湖)에서 조유, 주궤 등의 군대를 대파해 모두 패사시켰다. 이에 왕돈이 상주자사 감탁, 예장태수 주방 등의 명장을 총동원해 두증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니, 왕이는 마침내 강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사마예가 황제에 즉위하자 왕이는 〈중흥부(中興賦)〉라는 글을 지어 원황제 사마예에게 바쳤다. 당초, 왕이는 시기심이 많고 사나워, 전임 형주자사 도간의 장수와 보좌관들을 수도 없이 처단했고, 도간이 공경하던 명사 황보방회(皇甫方回)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참수하니, 형주의 병사와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고 관리들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원제 사마예는 왕이를 불러들여 보국장군으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하였다. 이후 왕이는 어머니의 사망을 이유로 사직해 상을 치렀고, 상을 마친 뒤 복직되어 정로장군, 좌위장군을 역임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거병하자, 원제는 왕이를 파견해 왕돈을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왕돈을 만나본 왕이는 그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단번에 눈치채고, 오히려 왕돈의 진영에 남아서 그의 반란을 도왔다. 이후 석두성에서 왕돈은 원제의 친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뜻을 이루었다. 왕이는 왕돈을 도운 공으로 평남장군, 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 형주자사에 임명되어 왕돈에게 대항했던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承)을 주살했다.[1] 하지만 그는 권세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동년 10월 9일에 병사하였다.[2] 향년 47세.

사마예는 비록 왕이에게 한 번 배신을 당했음에도, 그와 이종사촌 관계였던지라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왕이의 관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건강에 당도하자, 황태자 사마소가 친히 찾아와 가족에 대한 예에 따라 그 앞에서 절했다. 사후 시중, 표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강(康)'. 장남 왕이지가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동해내사에 이르렀다.


[1] 서진의 무읍왕 사마승과 한자까지 똑같으나 동명이인이다.[2] 양력으로 계산할 시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