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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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宋矩(? ~ 346)
전량의 인물. 자는 처규(處規). 양주(涼州) 돈황군(敦煌郡) 출신. 성품이 강개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영화 2년(346년) 5월, 전량의 문왕 장준이 붕어하고 왕세자 장중화가 가양왕(假涼王) 자리를 계승하자, 송구는 완수도위에 임명되었다. 새로운 왕의 즉위로 불안정한 정세를 틈타 후조의 천왕 석호가 양주자사 마추(麻秋), 장수 손복도를 파견해 전량을 침공해왔다. 그때 대하태수 송안(宋晏)은 그의 호군 양식(梁式)에게 배반당해 사로잡히고 마추의 진영으로 보내졌다. 마추가 송안으로 하여금 투항하라는 서신을 쓰게 하고 송구에게 보내니, 송안의 서신을 받은 송구가 말했다."아버지를 여의고 임금을 섬긴 것은 마땅히 공과 의로움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확실한 공과 의를 세우지 못 했다면 응당 명분과 절개를 지킬 따름이다. 나는 끝내 주인을 배반하고 적에게 복종하면서까지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자식을 모두 죽인 후, 그 스스로도 칼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이를 알게 된 마추는 "의사(義士)로다!"라며 감탄하고, 부하들에게 명을 내려 송구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훗날 송구의 의로운 죽음을 전해들은 환왕 장중화는 그의 성절을 기리고 진위장군으로 추증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