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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3 11:39:06

광일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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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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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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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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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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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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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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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팔달(江左八達)
사곤 필탁 광일 완방 양만 환이 완부 호무보지

光逸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동진 시대 인물로 자는 맹조(孟祖). 청주 낙안군 출신의 명사였으며, 장강 이북이 난리가 나자 강동으로 피난 가 '강좌팔달'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2. 생애

광일은 젊은 시절, 박창현에서 말단 관리로 일했다. 어느 날 현령의 사적인 심부름을 한 뒤 돌아오니 마침 현령은 집을 잠시 비운 상태였다. 그 날은 눈이 쏟아져 무척 추웠고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광일의 몸 또한 홀딱 젖었기에, 광일은 옷을 벗고 현령의 안방으로 가 이불을 덮고 잤다. 귀가한 현령이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노해 엄벌에 처하려 하자 광일이 말했다.
제 옷이 흠뻑 젖었지만 저희 집안은 빈털터리라 갈아입을 옷조차 없습니다. 잠시라도 따뜻해지지 않는다면 필시 얼어죽을 것인데, 어찌 이불 한 개는 아까워하면서 한 사람의 목숨은 아끼지 않으십니까! 저는 현령님을 항상 인애로운 군자라 생각해 두려움 없이 침대에서 잠을 청했던 겁니다.
현령은 광일의 말을 납득하고 그를 용서하였다.

이후로 시간은 꽤 흘러서 어느덧 광일은 문정장(門亭長)[1]으로 승진했다. 당시 현령이 교체되어 광일은 신임 현령을 부임지로 모셔오기 위해 수도로 갔다. 이때 명사 호무보지와 순수(荀邃)는 손님으로 초대받아 그 신임 현령의 집으로 가는 길에 수레를 타고 가던 광일과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광일의 생김새를 보더니 귀인이라 여겨, 수레에 올라타 광일과 함께 대화를 나눴는데 과연 준재의 기개가 있었다. 마침내 수레가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호무보지와 순수는 광일과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현령은 손님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하인에게 묻자, 하인은 그들이 광일과 떠드느라 들어오지 않는다 대답했다. 이에 대노한 현령은 광일을 불러 꾸짖고는 그를 면직시켰다.

면직되고 얼마 뒤, 효렴으로 천거되어 주의 관리로 일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호무보지에게 의탁했다. 당시 사마월 휘하에서 활동하던 호무보지는 사마월에게 광일을 추천했으나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등용을 거절했다. 이후 사마월이 연회 자리에서 호무보지를 향해 쓸만한 인재를 추천하지 않는다며 원망하자 호무보지가 답했다.
지난 날 저는 광일을 천거했지만 승상께서 세가 출신이 아니라며 거절하신 것이지, 제가 천거를 안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사마월은 예를 갖추어 초빙서와 선물을 보내 광일을 불러들였다.

311년, 사마월이 사망하고 천하가 혼란해지자 광일은 호무보지를 따라 강동으로 피난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신세인 사곤, 필탁. 완방, 양만, 환이, 완부 등 여러 명사들과 만나,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어울리니, 사람들은 이들 모임을 가리켜 '팔달(八達)'이라 불렀다.

낭야왕 사마예는 광일의 명성을 듣고 그를 군자좨주로 삼았다. 동진 건국 후에는 사중(事中)이 되었으나, 얼마 안지나 사망하였다.


[1] 각 현마다 하나씩 두었던 관리이다. 원래 한나라 시절부터 있던 관직으로, 문졸과 문리 몇을 거느리며 관청의 출입통제 따위의 업무를 맡았으나, 서진 대에 현령의 업무 보좌하고 새로 부임한 현령의 인수인계를 도와주는 등으로 역할이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