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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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恂(? ~ 278)
서진의 인물. 자는 양부(良夫). 서주 동해군 담현 출신. 난릉경후 왕숙의 아들. 문명황후 왕원희의 동생. 왕건, 왕개의 형.
2. 생애
왕순은 문장의 뜻에 통달했고, 조정에 충성스러우며 바른 신하였디고 한다. 그는 출사한 뒤로 누차 승진하여 관직이 하남윤에 이르렀고, 두 개의 대학을 세워 《오경(五經)》의 학문을 숭상하였다. 왕순이 하남윤, 시중 등을 역임하고 재임하는 시절에 평판이 높았고, 마음 속으로 항상 공평함을 지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 한번은 격현(鬲縣)의 현령 원의가 준마 한 마리를 왕순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왕순은 받지 않았다. 훗날 원의가 뇌물 뿌린 것이 들통나 실각당하면서 원의로부터 수뢰한 이들도 전부 관직에서 쫓겨났으나, 원의의 선물을 거절한 왕순만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경원 4년(263년), 조정에서 형 왕운(王惲) 사후 폐지되었던 봉국인 난릉후 작위를 되살리고 왕순을 난릉후에 봉하였다.
함희 원년(264년), 오등작 제도가 신설되자 아버지 왕숙이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에 왕순은 승자(氶子)로 고쳐 봉해졌다.
태원의 여러 부(部)에서 흉노 사람들이 경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민족 수 천 명을 소작농으로 고용하였으나, 위나라가 멸망하고 서진이 들어서자, 무제 사마염은 명령을 내려 이민족을 이주시키고 그들의 경작을 금지시켰다. 왕순은 사마염의 뜻에 따라 일을 처리해 왕순 휘하에는 이민족을 사용하는 관리가 없었다.
함녕 4년(278년), 나이 40을 조금 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거기장군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