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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31 17:19:11

색정

일대이묘
위관 색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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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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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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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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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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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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索靖
(239년 ~ 303년)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유안(幼安)으로 색담의 아들. 장지넛손자 양주 돈황군 사람.

대대로 벼슬을 지낸 집안이며, 젊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태학에 들어가서 동향 사람인 범충(范衷), 장차(張䖕), 색계(索紒), 색영(索永) 등과 함께 돈황오룡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돈황에서 별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군의 부름을 받고 현량방정으로 천거되었으며, 부현, 장화 등이 색정을 만나자 매우 기뻐해 교우했다. 이후 부마도위를 역임하다가 서역에 부임해 기교위를 지냈으며, 다시 옮겨 상서, 상서랑, 안문태수, 노국상, 주천태수 등을 지냈다. 290년에는 사마충이 즉위하자 관내후에 봉해졌고 색정은 천하에 혼란이 일어날 것을 짐작해 궁성 안에 있는 구리로 만든 낙타상을 보고 얼마 안 있어 폐허 속에 볼 것이라고 했으며, 원강 연간(291 ~ 299년)에 서융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사마융의 좌사마가 되어 이를 토벌해 그 공으로 시평내사가 되었다.

301년에는 사마륜이 황제를 칭해 반란을 일으키자 좌위장군을 지내다가 손수를 토벌한 공으로 산기상시가 되었으며, 303년에는 사마옹의 군사와 싸우던 도중에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가 죽자 안락정후에 봉해지고 시호는 장(莊)이라고 했다.

서예에 뛰어나 위관과 함께 일대이묘라 불릴 정도였으며, 장초로 유명했고 장지가 쓰는 초서의 법을 배워 형태를 다르게 했으며, 그의 초서는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솔개가 살짝 날아가는 것 같다는 평을 받았다. 남조 때 송나라의 양흔은 그의 글씨에 대해 색정은 장지의 살을 얻었다는 평가를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인소원법첩, 월의첩, 희홍당법첩, 출사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그의 초서 이론을 담은 초서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