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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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沈勁(? ~ 365)
동진의 인물. 자는 세견(世堅). 양주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출신. 왕돈의 심복으로 활동했던 심충의 아들.
2. 생애
아버지 심충은 대장군 왕돈의 최측근으로서, 왕돈의 반란이 실패한 후 도망치다가 부곡장 오유(吳儒)에게 살해당했다. 심경 또한 아버지의 역모죄에 연좌되어 마땅히 살해당해야 했으나, 전거(錢舉)라는 마을 사람이 그를 숨겨준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어느정도 상황이 안정되자, 심경은 아버지를 죽인 오유와 그 일족을 전부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심경은 젊어서부터 지조가 있어, 나라에 공훈을 세워서 아버지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을 설욕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아버지의 행적 탓에 30세가 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 했다. 평소 그를 눈여겨 보던 오흥태수 왕호지는 조정으로부터 사주자사에 임명받고 낙양(洛陽)에 진수하게 되자, 조정에 상소하여 심충 가문의 죄를 사면하고 심경을 자신의 주부로 배속시켜 줄 것을 청했다. 조정에서 왕호지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심경이 명령에 응하려 할 때 왕호지가 지병으로 인해 해직되면서 무산되었다.
흥녕 2년(364년) 9월, 태재, 태원왕 모용각이 낙양을 노리고 사방에 사람을 파견해 낙양 인근의 성채를 전연에 귀부시켰다. 그리고 사마 열희(悅希)를 보내 황하 맹진(盟津)에 주둔하게 하고, 예주자사 손흥(孫興)을 보내 성고(成皋)에 주둔하게 하면서 낙양성을 압박해왔다. 당시 낙양을 수비하던 관군장군 진우(陳祐)는 병력이 고작 2,000여 명 밖에 없어 바로 조정에 위급함을 알렸다. 이때 심경이 낙양을 구원하러 가길 자청하니,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이고 관군장군의 장사로 삼는 대신, 그가 직접 함께할 병사를 모집하게 했다. 심경은 1,000여 명의 병력을 모으고 낙양성으로 들어갔다.
심경은 여러 차례 출격해 적은 수로도 전연군을 격파하였지만 낙양의 포위망을 풀 정도는 되지 못 하였다. 성 내의 양식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 가고 본국의 원조마저 끊어지니, 진우는 더이상 버티지 못 할 것이라 직감했다. 진우는 허창(許昌)을 구원하러 가겠다는 명목으로 낙양성에 심경과 병력 500명만 남기고, 나머지 무리를 거느린 채 동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도망치던 진우는 허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애오(崖塢)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낙양성에 남겨진 심경은 오히려 나라의 명을 받들다가 죽을 수 있음에 기뻐하였다.
흥녕 3년(365년) 3월, 태원왕 모용각과 오왕 모용수가 낙양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심경을 사로잡았다. 포로로 잡힌 심경의 기색이 자못 침착한 것을 본 모용각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용서해주려 하자, 중군장군 모여건(慕輿虔)이 나서서 말했다.
"심경은 비록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이나, 그 뜻과 기개를 보건대 끝내 우리의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지금 그를 용서하신다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모용각 또한 모여건의 말을 옳게 여기고 심경을 처형하였다. 낙양을 점령한 모용각은 홍농군까지 뻗어나가 효곡(崤谷)과 민지(澠池)까지 장악한 뒤 전연의 수도 업(鄴)으로 돌아갔다. 모용각은 돌아가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이전에 내가 광고(廣固)를 평정할 때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벽려울(辟閭蔚)을 구원하지 못하였소. 지금 낙양을 정복하고 심경을 처형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내 본심이 아니었소. 내가 원수로서 군을 이끌고 있으니 사해(四海)에 부끄러움을 느끼오."
한편, 동진 조정은 심경의 의로운 죽음을 기특히 여겨, 그를 동양태수로 추증하고 아들 심적검(沈赤黔)을 대장추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