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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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羅含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군장(君章). 형주 계양군(桂陽郡) 뇌양현(耒陽縣) 출신. 임해태수 나언(羅彥)의 증손자. 형양태수 나수(羅綏)의 아들.
2. 생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숙모 주씨(朱氏)에 의해 거두어졌다. 나함은 일찍이 고상한 뜻을 품었는데, 어느 날 낮잠을 자던 중 광채와 무늬가 화려한 새 한 마리가 입 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고는 깜짝 놀라, 자다가 벌떡 일어나 숙모에게 꿈 내용을 털어놓았다. 이에 주씨가 말했다."새의 광채와 무늬가 화려하다고 하였으니, 너는 후에 반드시 문장의 재능을 얻을 것이다."
과연 그 날의 꿈 이후로 나함의 글재주는 나날이 새로워져 갔다.약관의 나이가 되어 주(州)로부터 3번에 걸쳐 부름을 받았으나, 나함은 모두 사양하고 임관하지 않았다. 과거 나함의 아버지는 신감현(新淦縣)의 재(宰)를 지낼 때, 신감현 사람 양선(楊羨)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양선이 장차 형주자사로 부임하면서 나함을 주부로 초빙하니, 나함은 이번에도 건방지게 응하지 않다가, 양선의 계속되는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출사하였다. 얼마 뒤, 양선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나함은 양선을 수행하여 신감현에 이르렀다. 그때 신감현의 백성들이 나함이 나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뇌물을 보내왔다. 나함은 뇌물을 보내는 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모두 받아두었다가, 신감현을 떠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봉한 다음 그대로 놔두고 떠났다. 훗날 이 일화가 알려져 나함을 진심으로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군(郡)의 공조를 지내던 중, 유량(庾亮)이 형주자사에 임명되자 강하종사(江夏從事)로 부임하였다. 세속 외의 것을 좋아하던 강하태수 사상은 취향이 비슷한 나함을 마음에 들어하며
"나군장(羅君章)은 가히 상주(湘州) 지역의 보배라 할 수 있소."
라 칭송하였다. 영화 원년(345년) 9월, 여러 차례 관직이 옮겨져 주에서 주부를 지낼 때, 환온이 형주자사로 부임하자 나함을 정서참군으로 삼고, 그를 파견해 사상을 탄핵시킬만한 건수를 조사하게 하였다. 하지만 나함은 군에 도착해 업무에 대해 묻기는 커녕 연일 사상과 더불어 술을 퍼마시고 돌아왔다. 환온이 조사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나함이 역으로 질문하였다.
"공께서는 사상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환온이 답했다."나보다도 나은 사람이오."
나함이 말했다."그렇다면 어찌 공보다 나은 이에게 허물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환온은 나함의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명령을 위반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후 나함은 형주별가로 전임되었다.나함은 소란스럽다는 이유로 관사를 나와서 성 서쪽 연못가의 작은 섬 위에 초가집을 짓고, 갈대를 꺾어 돗자리로 삼아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한번은 환온이 관속들을 거느리고 연회를 하는데, 나함이 지각을 하여 뒤늦게 입장하였다. 이에 환온이 좌중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자가 누구더냐?"
어떤 이가 답했다."형초(荊楚)의 재목이라 할 만한 자입니다."
이에 환온이 말했다."저 자는 강좌(江左)의 수재이거늘, 어찌 형초에만 한정할 수 있겠는가?"
환온은 나함의 재능을 중히 여겨, 나중에 나함이 상서랑으로 중앙에 불러갈 때도 그를 정서호조참군으로 삼아 곁에 두었다. 나함은 환온 밑에서 의도태수로 승진했다가, 환온이 성한을 정벌한 공으로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질 때 낭중령에 임명되어 계속 환온을 섬겼다. 이후 정원랑(正員郎)으로 중앙에 징소되고, 누차 승진하여 산기상시, 시중, 정위, 장사상(長沙相)을 역임하였다.나함이 노년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니, 조정에서 그에게 명예직인 중산대부(中散大夫)를 더하고, 그의 집 문에 행마를 두게 하였다. 은퇴한 나함은 수도 건강(建康)의 관사를 나와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상중기》(湘中記) 3권을 편찬하고, 〈갱생론〉(更生論), 〈답손안국서〉(答孫安國書) 등의 글을 써 세상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