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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3:50:16

응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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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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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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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應貞
(? ~ 269)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관리이자 문학가. 자는 길보(吉甫). 예주 여남군(汝南郡) 남돈현(南頓縣) 출신. 위나라에서 시중을 지낸 응거의 아들.

2. 생애

응정은 담론을 잘했고 학식과 재능으로 명성을 얻어, 일찍이 하후현과 오언시를 나누면서 교류하였다. 이후 고제로 천거되어 여러 현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마소가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자 응정은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경원 4년(263년), 등애, 종회가 촉을 평정한 후, 오등작을 부활시키기 위해 순의가 그 예를 정하게 되었는데, 응정은 양호, 임개, 경준, 공호 등과 함께 옛 글을 고쳐서 진례(晉禮)를 지었다.

태시 원년(265년) 12월, 원제 조환이 폐위되고 진왕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진나라가 세워지자, 응정은 급사중에 제수받았다. 무제 사마염이 화림원(華林園)에서 잔치를 열 때, 대신들은 부시(賦詩)를 지어 건국을 축하했는데 그 중 응정이 지은 것이 최고로 아름다웠다.

얼마 뒤, 호군장사 공순(孔恂)과 함께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다가 산기상시로 승진했으며, 태위 순의와 더불어 유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예법을 정했으나 이를 시행하진 못했다.

태시 5년(269년), 사망하였고 문집을 세상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