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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玄
(217 ~ 278)
1. 개요
삼국시대, 서진의 인물. 자는 휴혁(休奕). 양주 북지군 영주현으로 부간의 아들, 부섭의 손자. 전처 소생의 아들로 부함이 있고, 후처는 엄헌의 딸 두위다.2. 생애
아버지 부간은 어린 부현을 데리고 피난하여 하내에 정착했지만 얼마 안가 죽고 집안이 가난해졌다. 부현은 어려서부터 박학해 글과 음악에 능했으며, 성품은 강직해 남의 허물을 덮지 못했다. 군에서 하급 관리인 계리를 지내던 중 두 차례에 걸쳐 효렴으로 천거되고 태위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주에서는 부현을 주의 수재로 천거하여 낭중을 지냈는데 명성이 높아, 동해 사람 무시(繆施)와 함께 저작랑이 되어 《위서(魏書)》를 편찬하는 작업을 맡았다.이후 사마소 휘하에서 안동장군, 위장군을 지내며 군사 업무를 맡다가 온현령, 홍농태수, 전농교위 등을 역임했다. 부현은 어떠한 관직을 맡아도 직무에 적합했고 여러 차례 나라를 다스릴 방법에 대해 상소하여 정치를 바로잡아 고치고자 노력하였다.
264년, 나라에서 오등작을 다시 세우면서 순고남(鶉觚男)에 봉해졌다.
265년에 사마염이 진왕이 되자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마염이 선양받으면서 서진이 건국되자 순고자로 작위가 한 단계 높아지고 부마도위가 되었다. 사마염이 갓 즉위했을 때, 대신들에게 직언을 장려하고 간관 제도를 두었는데, 이때 부현과 산기상시 황보도(皇甫陶)는 간관으로 임명받아 인재 등용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사마염은 만족하며 포상을 내렸고 부현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266년 9월, 본래 황보도는 부현의 추천을 받고 들어온 인사였지만 둘은 공무를 처리함에 있어 자주 충돌하였다. 결국 둘은 한 안건을 두고 심하게 다투다가 관련 부서에서 탄핵을 받으며 면직되었다.
268년, 어사중승이 되었고 당시 수해, 가뭄 등이 일어나자 이에 대해 다섯 가지의 의견을 적은 오조정견을 올렸다.
269년, 태복에 임명되었다. 당시 몇 해 동안 흉년이 계속되었고 서강족들이 변경을 어지럽히니, 무제가 조서를 내려 공경들을 모아 논의하게 했다. 부현은 무제가 물어보는 질문에 전부 대답을 하였으며, 사리에 맞는 해결 방안을 내놓았으나 대부분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후 사예교위로 옮겨졌다.
278년에 경헌황후가 붕어하면서 홍훈궁에서 장례가 열렸다. 종래의 제도에는 사예교위의 자리를 궁성의 정문인 단문 바깥에서 여러 경의 위에 있는 별석으로 마련해야 하지만, 알자는 홍훈궁을 궁 안으로 간주하고는 실수로 사예교위의 자리를 여러 경의 말석으로 두었다. 부현은 이 조치에 격노하여 그 자리에서 알자를 불러와 큰 소리로 호통치니, 알자는 상서가 이를 주관했다고 둘러댔다. 단단히 빡친 부현은 상서를 불러와 여러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한 뒤 자리를 떴다. 어사중승 유순은 황후의 장례식에서 불경한 짓을 했다 하여 부현을 탄핵하였고, 대신들을 불러 사실 확인까지 마친 무제의 의해 면직되었다. 관직에서 부현은 얼마 후 집에서 사망했다. 사후 청천후(清泉侯)로 추봉되었고 아들 부함이 그 작위를 이었다. 시호는 강(剛).
부현은 성정이 엄격하고 급해 매번 다른 사람의 죄상을 상주해 거침없이 탄핵했으며, 시간이 늦어지게 되면 탄핵문을 가지고 의관을 정제한 채로 공손히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로 인해 여러 왕공과 귀족들이 부현을 두려워해 조정의 기풍이 청렴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