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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08 20:31:45

고광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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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光
(? ~ 308)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선무(宣茂)로 고유의 아들. 연주 진류군 어현 사람.

2. 생애

어릴 때 가업을 이어받아 형벌을 다스리는 것에 익혀 밝았으며, 처음에는 태자사인을 지내다가 상서랑, 유주자사, 영주태수 등을 지냈다. 당시 무제가 황사옥을 설치해 체포된 죄수를 맡게 하자 고광은 황사어사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정위로 옮겼다.[1]

원강 연간에는 상서에 임명되면서 삼공조를 맡았으며, 사마륜이 찬탈하자 고광은 나라를 지키면서 절조를 보전했다.

301년, 조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과 연합하여 사마륜을 죽이고 폐위됐던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다. 사마경이 정권을 잡아 국정을 보정할 때 고광은 정위로 복귀되었다가 상서로 옮겨 봉거도위를 더했다.

305년, 사마영을 토벌하면서 어가를 호종한 공으로 연능현공에 봉해 읍 1800호를 받았으며, 법에 사용하는 것에 밝다는 이유로 번번히 법을 다스리는 관직을 맡았다.

그 해 11월, 혜제가 장방에게 핍박당해 장안으로 가면서 조정의 관리들은 흩어졌는데, 고광은 홀로 서쪽으로 황제를 모시고 갔다.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혜제가 낙마하면서 발을 다치자, 고광은 한파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혜제에게 바치니, 혜제는 그를 여러 번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후 상서좌복야로 옮겨 산기상시를 더했으며, 형인 고탄과 함께 상관사가 등용되고 고광은 서주자사, 옹주자사를 역임했다. 황제가 낙양으로 돌아가자 소부가 되면서 광록대부를 더했고 상시는 전과 같이 했다.

307년, 회제가 즉위하자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지고 부지(傅祗)와 함께 추앙받았으며, 동년 12월에 상서령이 되었고, 이듬해 병으로 사망해 사공, 시중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낙양이 함락되어 관리들은 고광의 시호를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 고도(高韜)는 벼슬이 우위장군에 이르렀으나 훗날 승상 사마월 암살 작전에 가담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주살당했다.

[1] 그런데 진서 직관지에는 황사옥을 설치한 시기가 268년, 진서 무제기에는 284년 6월이라 황사옥에 관해서는 기록이 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