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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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何琦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만륜(萬倫). 양주 여강군(廬江郡) 잠현(灊縣) 출신. 서진 시기 후장군 하감(何龕)의 손자. 회남태수 하부(何阜)의 아들. 사공 하충의 사촌형.
2. 생애
하기는 성정이 침착하고 민첩하며, 견식과 도량이 있었고, 옛 것에 박학했다. 14세에 이르렀을 무렵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을 야위었다. 아버지의 상을 마친 후,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의성군(宣城郡) 의양현(陽穀縣)에 거주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봉양했는데, 살림이 풍족하지 않아 늘 어머니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대접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결국 하기는 관직에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군(郡)의 주부로 임관하였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에 제수받았다가, 얼마 안가 경현(涇縣)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사도 왕도가 그를 참군으로 삼으려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어머니가 사망하자 하기는 사직한 뒤에 거상하여 피눈물을 쏟으면서 애도하였고, 몸이 쇠약해진 나머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빈소를 지켰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일어난 불길이 하기의 집까지 뻗치면서 온 집안이 연기로 가득 찼고, 집안의 노복들도 먼저 대피하였음에도 하기는 어머니의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불길은 집의 안채에도 이르지 못 한 채 사그라들었다.
상을 무사히 마친 하기는
"내가 출사한 이유는 지혜와 힘을 능히 발휘하고자 함이 아니라 녹봉을 얻어 사사로이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함이었다. 이제 홀로 남아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썩고 무뎌진 이 몸으로 어찌 맑은 조정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라며 부르짖고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의거를 택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모두 끊고, 홀로 서적을 탐닉하거나 거문거를 타면서 안빈낙도의 삶을 즐겼다. 인근 마을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아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항상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사공 육완, 태위 환온이 명을 내려 그에게 관직을 내리려 했지만, 하기는 이들의 청을 모두 사양했고, 조정에서 박사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내렸을 때도 받들지 않았다.영화 원년(345년) 정월, 무군대장군에 임명된 회계왕 사마욱은 하기의 명성을 전해듣고 그를 참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하기는 병을 핑계로 굳게 사양했다. 그럼에도 사마욱은 하기를 산기시랑, 산기상시에 임명하고, 관용 마차를 보내 그를 데려오게 했는데, 하기는 끝까지 버티며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환온은 하기가 거주하는 현의 경계에 위치한 산에 올라
"이 산 남녘에는 사람이 사는데, 하공(何公)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자로다!"
하기는 자기도 관리도 열심히 하여 늙어도 노쇠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허름한 옷을 입고, 나물만 먹으면서 항상 책 쓰는 일에 몰두해, 생전에 《삼국평론》(三國評論) 등 대략 1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