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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02:34:23

육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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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흥평강백(興平康伯)
陸玩 | 육완
시호 (康)
작위 흥평백(興平伯)
(陸)
(玩)
사요(士瑤)
생몰 278년 ~ 342년 1월 7일
출신 오군(吳郡) 오현(吳縣)
부모 부친 - 육희(陸喜)
자녀 아들 - 육시(陸始), 육납(陸納)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요(士瑤). 양주 오군(吳郡) 오현(吳縣) 출신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문가인 오군 육씨 집안 출신이다. 형 육엽과 마찬가지로 동진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다. 아들로는 동진에서 상서를 지낸 육시와 상서령을 지낸 육납이 있다.

2. 생애

도량이 깊고 우아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부터 이미 아름다운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명사 하순은 매번 그를 가리켜 청렴하고 공정하다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여러 군(郡)은 물론이고 동해왕 사마월 또한 육완을 초빙하려 했으나, 육완이 이를 전부 거절했다.

건흥 원년(313년) 5월, 낭야왕 사마예가 좌승상에 임명되자, 육완은 그의 부름을 받고 출사해 승상참군이 되었다. 당시 낭야왕 사마예의 총신인 왕도는 강남에서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명문가인 오군 육씨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고자 육완에게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육완이 말했다.
"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함께 자랄 수 없고, 같은 화분에 향초와 누린내풀을 함께 기를 수 없습니다. 이 완은 비록 재주가 없는 인물이나, 인륜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의리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왕도는 육완의 말을 듣고 혼사를 포기했다. 이후 육완이 왕도의 집에 방문해 우유를 마셨다가 병이 들어, 왕도에게 쪽지를 보내 말했다.
"저는 비록 오인(吳人)이나, 하마터면 북방의 귀신이 될 뻔했습니다."
육완이 권세를 가볍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이후로도 육완은 낭야왕 사마예의 밑에서 누차 승진해 분무장군, 시중을 역임했으나 이내 병으로 사직했다.

대장군 왕돈이 육완에게 자신의 장사(長史)가 되라며 군령으로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왕돈 휘하로 들어갔다. 얼마 뒤, 명제 사마소 왕돈의 난을 평정하자, 상서령 치감이 왕돈의 부하들은 간악을 보고도 바로잡지 못한 죄를 물어 모두 면직시키고 금고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육완은 온교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여기에 연좌되지 않고 시중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이부상서, 회계왕사(會稽王師)에 임명받았으나 사양하니, 상서좌복야, 양주대중정으로 옮겨졌다.

함화 2년(327년) 12월, 역양내사 소준이 예주자사 조약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성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궁을 대거 약탈했다. 육완은 형 좌광록대부 육엽과 함께 궁성을 지켰다.

함화 4년(329년) 정월, 당시 소준은 의병과 싸우기 위해 석두성에 주둔했고, 부하인 광술을 남겨 건강의 궁성을 지키게 했다. 머지않아 소준이 허무하게 전사하자 광술은 육엽과 육완의 설득에 넘어가 동진에 귀순했다. 소준의 난이 평정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흥평백(興平伯)에 봉해졌다.

함화 6년(331년) 8월, 조정에서 육완을 상서령 삼았다가, 조서를 내려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육완은 두 차례에 걸쳐 사양했으나 조정에서 전부 불허하여 하는 수 없이 관직을 받아야 했다.

함강 6년(340년) 정월, 승상 왕도, 태위 치감에 이어 사공 유량까지 조정의 유력 대신들이 줄줄이 사망해 조정 내외로 크게 근심했다. 조정에서는 덕망이 높은 육완을 시중, 사공으로 삼고 우림군 40명을 붙여주어 그 빈 자리를 채우고자 했다. 육완 또한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기꺼이 관직을 받았다.

육완이 사공에 임명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저택을 찾아와 기둥과 들보 사이에 술 한 잔을 따르고는 말했다.
"오늘날 재목이 부족하여 그대가 주춧돌이 된 것이니, 그대는 나라의 들보를 넘어뜨리지 말지어다!"
육완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답했다.
"경의 좋은 말, 잘 새겨 듣도록 하겠소."
이윽고 자신의 빈객들을 향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삼공이 된 것은 천하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구나."
동진의 사대부들은 이 일화를 전해듣고 육완을 지혜롭다 여겼다.

육완은 비록 사공에 올랐으나 겸양하는 자세로 속관들을 임용하지 않았다. 결국, 성제 사마연이 보다못해 속관을 두라고 권고하니, 육완은 비로소 사공부에 속관을 두었는데 모두 행실이 올바른 인재들이었다. 육완은 명석하고 항상 위엄이 있어 황제와 조정의 여러 대신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다. 그렇게 그가 사공을 지낸지 2년이 지났을 무렵, 병이 심해져 스스로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육완은 상표하여 성제 사마연에게 감사함과 더이상 보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스러움을 전했다.

함강 7년(341년) 12월 14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동진 조정에서는 그의 집안에 사병 1,000명을 하사하고 그를 태위로 추증했다. 향년 64세.[1] 시호는 강(康). 아들 육시(陸始)가 후사를 이었다. 훗날 조정에서 동진의 공신 집안에 대한 대우를 대대적으로 삭감한 일이 있었는데, 육완의 집안을 포함한 6개 가문만은 삭감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342년 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