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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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充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홍도(弘度). 형주 강하군(江夏郡) 출신. 삼국시대 위나라의 맹장이었던 여남태수 이통의 후손. 서진 시기 강주자사 이구(李矩)의 아들.
2. 생애
이충은 젊었을 때 어버지를 여의었는데, 한번은 도적이 이충의 아버지 묘소에 침입하여 그곳에 심어둔 즉백나무를 파괴하였다. 이에 이충이 손수 칼을 뽑아 도적을 죽여서 복수함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이충은 해서체에 능해 그 미묘한 서체로 명성을 얻었고, 형명학을 좋아하여 〈학잠〉(學箴)이라는 글로 현학에 심취해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던 동진의 사대부들을 비판하였다.승상 왕도의 부름을 받고 연(掾)으로 임관하였고, 기실참군으로 옮겨졌다가, 정북장군 저부(褚裒)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이충은 집안이 가난하였기에 직속 상관인 저부에게 외지로의 전출을 희망하니, 저부가 그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넌지시 그 이유를 물었다. 이충은
"궁지에 빠진 원숭이에게 어찌 나무를 가릴 여유가 있겠습니까!"
라 답하였다. 이충의 절박함을 확인한 저부는 이내 그를 제섬(除剡)의 현령으로 내보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사망하여 잠시 관직에서 내려와 상을 치렀고, 상을 마친 후에는 대저작랑(大著作郎)으로 복직되었다. 당시 조정의 전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이러저리 뒤섞이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이충이 문서를 정리하여 번잡함을 제거하고 종류별로 4부로 묶어 매우 조리있게 분류하였다. 이후로 비각(秘閣)은 이충의 분류 체계에 따라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충은 여러차례 승진해 중서시랑까지 올랐고,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문인으로서의 활동도 하여 《상서》, 《주역지》, 《논어》 주석을 달았고, 《석장론》(釋莊論) 상편과 하편을 편찬하였으며, 시부(詩賦)나 잡문 등 240여 수를 지었다. 또, 《한림론》(翰林論) 54권을 집필하여 당대 여러 사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으나, 전란으로 인해 당나라 초에 겨우 3권만 남아있었다고 하며, 그마저도 현재는 사라져 다른 서적에서 인용된 문구로만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