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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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羅企生(364 ~ 400)
동진의 인물. 자는 종백(宗伯). 양주 예장군(豫章郡) 출신.
2. 생애
나기생은 다재다능하여 조정에 출사해 좌저작랑을 지내던 중,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임여(臨汝)의 현령으로 부임하길 청하니, 강주자사 왕의지(王凝之)가 그를 불러 별가로 삼았다. 이후 형주자사 은중감의 부름에 응해 그의 공조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무릉태수에 임명되었다.융안 3년(399년) 12월, 나기생이 무릉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환현이 군대를 거느리고 강릉(江陵)을 공격해 오자, 은중감은 즉시 명을 내려 나기생을 자의참군으로 삼았다. 나기생은 은중감이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인 것을 보고 심히 걱정하며 동생 나준생(羅遵生)에게 이르길,
"은후(殷侯)께선 인자하시나 결단력이 없어 반드시 일을 성공시키지 못 할 것이다. 다만 성공과 실패는 하늘과 땅에 달려 있으므로 나는 마땅히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라 하였다. 과연 은중감이 환현에게 패하여 도망치자, 나기생을 제외한 휘하의 문무 관리들 중 누구도 그를 수행하려 하지 않았다. 나기생이 장차 은중감을 따라가기 위해 문 밖으로 나설 때, 나준생이 형에게 말했다.
"이처럼 헤어져야만 하는데 어찌 악수조차 하지 않고 떠나려 합니까!"
이미 죽음을 각오한 나기생 역시 동생을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고, 동생과 악수를 나누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나기생이 나준생의 손을 잡자, 나준생은 형을 붙잡을 작정으로 손을 놓아주지 않고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며 말했다."집에 노모도 계시는데 장차 어딜 가시렵니까?"
그러자 나기생 또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늘의 일로 나는 분명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아들로서의 도리를 잃지 말고 부모님을 봉양한다면, 우리 문중은 충과 효를 동시에 이루는 셈인데 한스러울 일이 어디 있겠느냐! "
하지만 나준생은 계속 형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편, 멀찍이 떨어져 나기생을 기다리던 은중감은 그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먼저 떠나려 하자, 나기생이 외쳤다."생사를 함께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은중감은 그 소리를 듣고도 말을 더욱 채찍질하며 나기생을 남겨둔 채 길을 떠났다.환현이 군대를 이끌고 강릉에 입성하니, 강릉의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환현을 영접했지만 나기생만은 가지 않고 은중감의 저택을 관리했다. 혹자가 그에게 환현을 만나볼 것을 권했으나, 나기생은 오히려 정색하고
"나는 은후(殷侯)의 관리로, 본래대로라면 그 분과 도망쳐야 했지만 동생이 나를 힘으로 붙잡는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결국 함께 참수당하지 못 하고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소. 이런 내가 무슨 낯짝으로 환현에게 굴복해 목숨을 구걸하겠소!"
그 말을 전해들은 환현은 무척 노여워했으나, 그를 여전히 잘 대접해주면서 동시에 일전의 언행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나기생은 끝까지 환현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니, 결국 무슨 짓을 해도 나기생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환현은 그를 불러,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물었다. 이에 나기생이 답했다.환현은 이를 허락하고 나기생을 처형했다. 향년 37세. 이후 환현은 약속대로 정월 말에 대사면령을 내려 나준생에게 따로 죄를 묻지 않았다.일전에 환현은 나기생의 모친 호씨(胡氏)에게 고구(羔裘)[1] 한 벌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환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 바로 선물 받은 고구를 불태워버렸다.
[1] 질 좋은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갖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