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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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庾闡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중초(仲初). 예주 영천군(潁川郡) 언릉현(鄢陵縣) 출신.
2. 생애
유천은 공부를 좋아하여 9살이 되었을 때부터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 젊은 나이에 외삼촌 손씨(孫氏)를 따라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왔고, 형 유조(庾肇)가 낙안군의 장사로 임관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항성(項城)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영가 말기에 항성이 석륵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는데, 이때 유천의 어머니가 난리통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유천은 어머니와 사별한 이후로 머리를 빗거나 목욕을 하지 않았고, 출사나 결혼도 모두 거부했으며, 술과 고기를 끊은 채 20년 동안 어머니를 위해 애도하였다.주에서 수재로 천거받고,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을 칭했을 때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진 조정에 태재로 임관하였고, 서양왕 사마양의 연(掾)으로 옮겨졌다가 누차 승진하여 직위가 상서랑에 이르렀다.
함화 4년(328년) 정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建康)을 함락시키자, 유천은 건강을 탈출해 사공 치감에게 달아나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소준이 평정된 후에는 공을 인정받아 길양현남(吉陽縣男)에 봉해지고 팽성내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감의 요청으로 다시 그의 휘하로 들어가 종사중랑이 되었으며, 산기상시, 영 대저작(領大著作), 영릉태수를 역임하였다.
영릉태수를 지내던 중 병이 들어 중앙으로 소환되고 급사중에 임명되었다가 영 저작(領著作)으로 옮겨졌다. 그 뒤로도 오국내사 우담이 태백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때 그 문구를 적는가하면, 〈양도부(揚都賦)>라는 시를 남겨 세상에 알리는 등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지속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 시호는 '정(貞)'.
아들 유숙지(庾肅之) 역시 아버지처럼 글재주가 있었으며, 급사중, 상부기실(相府記室), 상동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