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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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蘊(330 ~ 384)
동진의 인물. 자는 숙인(叔仁). 병주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출신. 효무제 사마요의 정황후 왕법혜의 아버지. 사도 좌장사 왕몽의 아들. 왕공의 아버지. 애제 사마비의 애정황후 왕목지의 남자 형제로, 그의 집안에서 황후가 2명이나 배출된 셈이다.
2. 생애
초기에 좌저작랑으로 임관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상서이부랑에 임명되었다. 평온한 성품의 소유자에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도 무시하지 않았으므로, 관직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한 자리 꿰차기 위해 최소 10명의 사람들이 왕온에게 줄을 섰으나, 왕온은 청탁을 거절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다.영화 원년(345년) 정월, 회계왕 사마욱이 무군대장군, 녹상서육조사에 제수받고 강헌황태후 저산자의 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왕온이 인재를 천거하고 적재적소에 배치시키니, 관료들 가운데 원망을 품는 이가 없었다. 이후 오흥태수로 부임하여 덕정을 펼쳤는데, 오흥군에 기근이 들자 왕온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였다. 군의 주부가 상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간하자 왕온이 말했다.
"지금 백성들이 슬피 울부짖고, 길거리에는 기근으로 고통받는 자들이 있는데, 표를 올려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린다면 곧 죽을 생명들을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죄는 태수인 나에게 있으니, 인의를 행하다 패망한다 한들 한스러워 할 것 없다."
그리하여 구휼이 크게 행해지고 많은 백성들을 구할 수 있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왕온이 법을 위반한 사실을 책망하며 장차 면직시키려 했으나, 백성들이 궐 아래에서 왕온의 선처를 호소하여 특별히 진릉태수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끝났다. 왕온은 다시 선정을 베풀었고, 백성들은 그 은혜에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영강 3년(375년) 8월, 효무제 사마요가 왕온의 딸인 왕법혜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왕온은 황후의 아버지가 되어 광록대부, 영 오병상서, 본주대중정으로 승진하고,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온은 황제의 은택만으로 작위를 받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작위는 굳게 사양하였다.
태원 2년(377년) 10월, 조정에서도 이후로 수차례 작위를 받아달라 간절히 권고했지만 왕온은 끝내 받들지 않았다. 이에 시중 사안은 도독경구제군사(都督京口諸軍事), 좌장군, 서주자사, 가절을 수여했으나, 왕온은 이것마저 받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사안의 간곡한 설득에 이내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경구(京口)에 주둔하였다.
태원 4년(379년) 8월, 왕온은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돌아갔고, 단양윤으로 승진하여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그러나 외척이라는 신분이 부담스러웠던 왕온이 외직을 자청하자, 조정에서 그를 도독절강동5군제군사(都督浙江東五郡諸軍事), 진군장군, 회계내사로 삼고 산기상시는 전과 같이 하였다.
왕온은 원래 술을 좋아하였는데, 말년에 들어서는 특히 심해졌다. 그는 회계내사 재임 중에 술에 취해있는 날이 훨씬 많았지만 정치 자체는 간략하고 온화하게 하여 백성들로부터 사랑받았다.
태원 9년(384년), 왕온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 사후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장남 왕화(王華)는 요절하였고, 차남 왕공은 동진의 군벌이 되어 훗날 반란을 일으킨다. 왕공의 동생 왕상(王爽)은 강직하고 기개와 완력이 있어, 효무제가 붕어했을 당시 간신 왕국보가 야밤에 몰래 황궁에 침입해 농간 부리려던 것을 막았다. 다만 그 강직함 때문에 회계왕 사마도자와의 술자리에서 간신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고 면직당했다. 이후 왕상은 형 왕공의 1차 반란이 성공하여 영삭장군으로 복직되었으나, 왕공의 2차 반란이 실패하면서 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