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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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龔壯생몰연도 불명
성한의 은사. 자는 자위(子瑋). 익주 파서군(巴西郡) 출신.
2. 생애
공장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지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초주의 손자인 초수와 함께 명성이 높았다. 이후 아버지와 숙부가 모두 이특에게 살해당하자, 공장은 당장 힘이 약해 원수를 갚지 못 하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상복을 벗지 않았다.옥항 4년(338년) 4월, 성(成)의 황제 이기의 포학함과 교만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조정의 대신들을 여럿 주살하였다. 이기는 당시 부(涪)에 주둔하고 있던 한왕(漢王) 이수를 꺼렸는데, 이수 역시 이를 알고 조회 참석을 누차 거절하였다. 반란을 고민하던 이수는 공장이 이특에게 아직도 복수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였다. 황제는 이기는 이특의 손자였기에, 공장 역시 이수를 이용해 복수할 생각으로 그를 설득하였다.
"익주는 본래 진(晉)의 땅으로, 만약 장수를 보내 서쪽 성도를 공략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다면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쉽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으니, 성도 공략에 그리 대단한 계책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수는 공장의 말을 옳게 여겨, 즉시 보•기 10,000명을 모아 이혁(李奕)을 선봉으로 삼고 성도를 습격하니, 과연 성도는 별다른 전투도 없이 쉽게 함락당했다. 이수는 성도에 입성해 이기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이수는 안거(安車)[1]와 비단 5필을 공장에게 하사하면서 그를 태사에 임명했으나, 공장은 벼슬은 물론 이수가 하사한 재물들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옥항 4년(338년) 8월, 장마로 폭우가 쏟아져 촉 땅의 많은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렸다. 이에 공장은 이수에게 동진에 귀순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공장의 상소를 읽은 이수는 내심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내용을 비밀로 하고 알리지 않았다.
한흥 3년(340년) 9월, 이수가 후조의 천왕 석호와 동맹을 맺고, 함께 동진을 정벌하여 그 땅을 나눠 갖기로 약조하였다. 이때 공장이 오랑캐랑 동맹을 맺었다 비판하고 동진을 정벌해서는 안 된다 강력히 주장하였다. 해사명(解思明)을 비롯한 여러 조정의 대신들도 공장을 지지하자, 이수는 하는 수 없이 동진 정벌을 철회하였다.
공장은 충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수가 이기를 몰아냄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성공적으로 갚자, 이번에는 이수에게 동진에 항복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여러 번 간하였다. 하지만 이수가 번번이 따르지 않으니, 공장은 귀머거리를 자처하고 손으로 물건도 잡지 못 하는 척하여 이수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공장은 다시는 성도에 발을 들이지 않고, 집에서 경전과 문장을 연구하다가 이세 재위기에 사망하였다. 생전에 여러 저서를 저술하였으나, 《매덕론》(邁德論)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1] 덮개가 있고 노약자도 쉽게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수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