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6-10-11 15:02:51

만총


파일:위 예서.svg
위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4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본기(本紀)]
{{{#!wiki style="margin: -5px -1px"
<rowcolor=#fff> 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조조 (조등 · 왕준) 조비
<rowcolor=#fff> 3권 「명제기(明帝紀)」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조예 (학소 · 진랑 · 맹타) 조방 (장특) · 조모 · 조환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4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열전(列傳)]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5권 「후비전(后妃傳)」
무선황후 · 문소황후 · 문덕황후 · 명도황후 · 명원황후
<rowcolor=#fff>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동탁 (이각 · 곽사 · 마등 · 한수)
원소 (저수 · 전풍 · 원담 · 원희 · 원상) · 원술
유표 (유종 · 부손 · 괴월 · 한숭 · 채모)
여포 (장막 · 진궁 · 진등) · 장홍 공손찬 (유우) · 도겸 · 장양
공손도 (공손연)
장연 · 장수 · 장로
<rowcolor=#fff>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하후패, · 조인 ,조순, · 조홍 · 조휴 ,조조(肇),
조진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rowcolor=#fff>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왕렬 장천 호소,
최염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종육, · 화흠 · 왕랑 ,왕숙,
<rowcolor=#fff>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유도, · 장제 · 유방 ,손자,
유복 ,유정, · 사마랑 · 양습 ,왕사,
장기 ,유초 장집, · 온회 ,맹건, · 가규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두서 악상,
정혼 ,정태, · 창자 ,안비 영호소,
<rowcolor=#fff>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손관, · 문빙 · 여건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방육 ,조아, · 염온
<rowcolor=#fff>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조거 · 조우 ·조림(林) · 조곤 ·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霖)
<rowcolor=#fff>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시묘, · 양준 ·두습 · 조엄 · 배잠 ,배수,
<rowcolor=#fff>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rowcolor=#fff>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선고 영호우, · 관구검 ,문흠, · 제갈탄 ,당자, · 등애 ,주태, · 종회 ,장창포 왕필,
<rowcolor=#fff>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rowcolor=#fff>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왜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관련 틀: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
}}}}}}}}}}}} ||
{{{#!wiki style="min-height: calc(1.5em + 10px); padding-top: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57 0%, #00008b 20%, #00008b 80%, #00005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행태위사
가후 종요 화흠 장패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사마의 만총 장제 왕릉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사마부 고유 등애 왕상
추증
위진 순욱
<nopad> }}}}}}}}}
창읍경후(昌邑景侯)
만총
滿寵(만충)[1]
파일:만총석상.jpg
성씨 <colbgcolor=#ffffff,#191919>만(滿)
휘 총(寵)
출생 미상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창읍현(昌邑縣)
(現 산둥성 허쩌시 쥐예현 다셰지진 첸창이촌)
사망 242년
자 백녕(伯寧)
시호 경(景)
신장 188cm
가족 만위(滿偉), 만병(滿炳) (아들)
사마간(司馬幹) (사위)
작위 관내후(關內侯) → 안창정후(安昌亭侯) →남향후(南鄉侯) → 창읍후(昌邑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태위 재임기간 239년 3월 ~ 242년 3월

1. 개요2. 생애3. 삼국지연의4. 평가5. 기타6.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중신으로 자는 백녕(伯寧). 만위, 만병의 아버지. 시호는 경후(景侯).

2. 생애

만총은 18세에 군(郡)의 독우가 되었다. 당시 군내의 이삭(李朔) 등은 사병을 거느리고 백성을 괴롭혔다. 태수는 만총에게 이들을 조사하게 했고, 이삭 등은 죄를 인정한 뒤 더는 백성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후 고평현령을 지낼 때는 고평현 출신으로 군의 독우였던 장포(張苞)가 뇌물을 받고 행정을 어지럽혔다. 만총은 장포가 객사에 머무는 틈을 타 관리와 병졸을 이끌고 그를 체포해 가혹한 고문으로 죄를 추궁했다. 심문을 마친 만총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조가 연주(兗州)를 평정한 뒤 만총을 불러 종사로 삼았다.

196년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대장군이 된 뒤, 만총을 허현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당시 조조의 친족인 조홍의 빈객들이 허현에서 여러 차례 법을 어겼다. 만총은 이들을 체포해 다스렸고, 조홍이 서신을 보내 선처를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홍이 조조에게 호소하자 조조는 허현의 관리인 만총을 불러들였다. 만총은 조조가 빈객들을 사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전에 이들을 서둘러 처형했다. 조조는 이를 듣고 "일을 맡으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만총을 칭찬했다.[2]

양표는 아내가 원술의 누이였기 때문에 원술과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이를 빌미로 양표가 원술과 내통해 황제를 폐위하려 한다고 무고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뒤 만총에게 심문하게 했다.

순욱과 공융은 만총에게 양표의 진술만 받고 고문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만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법에 따라 양표를 심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욱과 공융은 만총에게 화를 냈다.

며칠 뒤 만총은 조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합니다. 양표는 사해 안에서 명성이 있으므로, 죄가 명확하지 않은데 처형하면 명공께서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사로이 명공을 위해 그 점을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그날 양표를 사면해 석방했다. 순욱과 공융은 처음에는 만총의 심문 방식에 분노했지만, 그의 보고로 양표가 풀려나자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와 원소가 맞서 싸우던 무렵, 원소의 본거지였던 여남에서는 원소를 지지하는 세력이 계속 저항했다. 여남은 원씨 가문의 본거지였고, 원소가 젊은 시절 이곳에서 6년상을 치르며 인재를 모은 곳이기도 했다. 조조는 만총을 여남태수로 임명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만총은 자신을 따르는 병사 500명을 이끌고 20여 곳의 거점을 함락했으며, 항복하지 않은 우두머리들을 처단해 여남을 평정했다. 그 결과 호구 2만과 병사 2천 명을 확보해 농업에 복귀시켰다.

이후 여남태수는 이통이 맡았다. 이통이 죽고 손권의 동쪽 침입이 잦아지자 조조는 만총을 다시 불러 여남태수로 삼았다. 이통이 만총의 뒤를 이어 여남을 맡은 이유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만총이 지역을 평정한 뒤에는 이통처럼 군사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 그곳을 맡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은 있다.

완성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킨 뒤 관우가 북상해 양양을 포위하자, 만총은 번성에 주둔한 조인을 도와 관우에 맞섰다. 조조가 구원군으로 보낸 우금의 부대는 장마로 한수가 범람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다. 물이 번성까지 차올라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조인과 만총은 성 안에 고립됐다.

성 안팎의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조인은 퇴각을 고려했다. 만총은 홍수가 빠르게 불어난 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관우가 더 진격하지 못하는 것은 후방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을 경계하기 때문이라며, 번성을 버리면 황하 이남을 지킬 수 없게 된다고 설득했다. 조인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성을 지켰다. 이후 서황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물도 빠지면서 관우의 포위망이 풀렸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세운 뒤, 만총은 양무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강릉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한 공으로 복파장군에 오르고 신야에 주둔했다.

조비가 다시 남쪽으로 출병했을 때 만총은 선봉 부대를 지휘해 정호(精湖)에 이르렀다. 적군과 물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중, 만총은 그날 밤 강한 바람이 불 것을 보고 적이 진영에 불을 지르려 할 것이라 예상해 경계를 강화했다. 한밤중 적군이 실제로 불을 놓으려 하자 만총은 이를 격퇴했다.

222년 만총은 오나라군을 격퇴한 공으로 남향후에 봉해지고, 절월을 받아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얻었다. 224년에는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명제가 즉위한 뒤에는 창읍후에 봉해졌다. 228년에는 예주자사를 겸했다.

석정 전투에서 오나라 장수 주방은 거짓으로 항복해 조휴를 유인했다. 조휴가 이를 믿고 진격하자 만총은 진격로가 물러나기 어려운 지형이라며 조정에 경고하고, 무강구로 들어갈 경우 대비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러나 상소에 대한 답이 오기 전에 조휴는 이미 진격했고, 오군은 무강구에서 협석으로 가는 퇴로를 끊었다. 조휴가 패해 퇴각하던 중 가규와 주령 등이 이끈 지원군이 오군과 맞닥뜨리자 오군이 물러났고, 조휴는 군대를 수습해 돌아갈 수 있었다. 조휴가 그해 사망한 뒤 만총은 전장군으로서 양주 도독의 군무를 대신 맡았다.[3]

229년 봄, 오나라에서 항복한 사람이 오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켰으며 손권이 직접 강북으로 사냥을 나선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만총은 손권이 실제로는 위의 영토를 공격하려는 것이라 판단해 대비했다. 손권은 방비가 갖춰졌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만총이 여남을 떠날 때는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조예는 만총에게 친위병 1천 명을 딸려 보내 호위하게 했다.

230년 겨울, 손권이 합비로 진격하겠다고 공언하자 만총은 연주와 예주의 병력을 소집했다. 손권이 군대를 물린 뒤 조정은 병력을 해산하라고 명했지만, 만총은 이를 철수를 가장해 위군의 경계를 풀려는 계략으로 의심했다. 그는 병력을 그대로 대기시키자고 상소했고, 열흘 남짓 뒤 손권은 다시 합비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231년 오나라 장수 손포(孫布)가 항복을 청하며, 길이 멀어 직접 갈 수 없으니 군대를 보내 맞이해 달라고 했다. 양주자사 왕릉은 병력을 요청해 손포를 맞이하려 했지만, 만총은 거짓 항복이라고 판단해 병력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왕릉의 이름으로 손포에게 보낼 답장을 작성해 주었다.

당시 왕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만총은 왕릉의 측근들이 자신을 늙고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이라고 비난한 탓에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만총은 조정으로 떠나기 전 도독부 장사에게 왕릉이 병력을 요청하더라도 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왕릉은 병력을 얻지 못하자 독장 한 명과 보병·기병 700명을 보내 손포를 맞이하게 했다. 손포의 군대가 매복해 있다가 공격했고, 왕릉의 군대는 절반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조예는 조정에 도착한 만총을 직접 만나 보니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해, 다시 양주로 돌려보냈다. 만총은 늙었다며 조정에 남게 해 달라고 청했지만, 조예는 염파와 마원도 늙어서까지 나라를 위해 힘썼다며 만총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32년 오나라 장수 육손이 여강으로 진격하자,[4] 조정에서는 구원군을 서둘러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만총은 여강의 수비군이 정예병과 유능한 장수를 갖춰 한동안 버틸 수 있고, 오군은 배를 버리고 200리나 들어와 후방이 비었다고 판단했다. 오군이 아군을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계략일 수 있으니, 성급히 구원하지 말고 적이 더 진격하도록 두자는 것이었다.

만총은 군대를 정비해 양의구(楊宜口)로 진군했다. 오군은 위군이 동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철수했다.

233년 만총은 합비의 옛 성을 서쪽으로 30리 옮겨 새 성을 쌓자고 조예에게 건의했다. 옛 성은 남쪽으로 강과 호수에 접해 있어 오군이 물길을 이용해 공격하기 쉬웠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어 위군의 구원도 어려웠다. 장제는 성을 옮기면 오군의 기세만 높여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조예는 만총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 성을 쌓게 했다.

그해 손권이 합비신성을 포위하러 왔으나, 성이 물가에서 멀어 20일 동안 상륙하지 않았다. 이때 손권은 위가 성을 옮긴 것을 오군의 위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병력을 도열하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만총은 보병과 기병 6천 명을 비성 부근에 매복시켰다. 손권군이 상륙해 위세를 보이자 매복군이 기습해 수백 명을 죽였고, 일부는 물에 빠져 죽었다. 손권군은 물러났다.

234년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공격하자 만총은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고, 직접 성을 구원하러 나섰다. 그는 수십 명의 용사를 모아 소나무 가지로 횃불을 만들고 마유를 뿌린 뒤, 바람을 이용해 오군의 공성 장비를 불태웠다. 이때 손권의 조카 손태도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오군은 물러났다.

235년 봄 손권은 병사와 가족 수천 호를 강북에 보내 둔전을 시켰다. 그해 8월, 만총은 수확철이 되어 사람들이 들에 흩어져 있고 주둔 병력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을 노려 기습을 명했다. 위군은 오군의 주둔지를 무너뜨리고 곡식을 불태운 뒤 돌아왔으며, 조정은 만총을 치하하고 전리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38년 만총은 나이가 들어 조정으로 소환되었고, 태위에 올랐다. 그는 재산을 모으지 않아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들은 조예는 만총의 청렴함을 치하하며 밭 10경과 곡식 500곡, 돈 20만 전을 하사했다. 만총의 식읍은 생전에 모두 9천 6백 호까지 늘어났다.[5]

242년 만총이 사망한 뒤에는 아들 만위가 작위를 이었다. 그러나 260년, 손자 만장무는 조모의 변고 때 사마소의 동생 사간이 궁문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고 동쪽 문으로 안내했다가 사마소의 참군 왕헌에게 고발당했다. 만장무는 매를 맞고 죽었으며, 만위도 연좌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억울하게 여겼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만총의 무관으로서의 활약은 제한적이다. 제갈량의 북벌 때 계책을 간파해 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장면이 나오지만, 대오 전선에서 오의 공격을 막아낸 정사에서의 활약에 비하면 존재감은 미미하다. 이 때문에 만총은 연의의 피해자로 꼽히기도 한다.

반면 문관으로서의 행적은 각색을 통해 늘어났다. 연의에서 만총은 서황의 친구로 등장하며, 그를 설득해 조조에게 귀순시킨다. 이때 만총은 서황에게 양봉을 죽이고 그 목을 가져가면 조조가 기뻐할 것이라고 권하지만, 서황은 자신이 섬겼던 주군을 죽일 수 없다며 거절한다. 만총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황을 충의지사라고 칭찬한다.[6]

이 밖에도 만총은 조조와 유비에게 공손찬의 죽음을 알리고, 관우를 치기 위해 위와 오가 연계할 때 사신으로 나서는 등 문관으로서도 여러 장면에 등장한다.[7] 무관으로서의 활약은 축소된 반면 문관으로서의 역할은 늘어나, 연의의 만총은 문관과 장수의 경계에 놓인 듯한 인상을 준다.

4. 평가

만총은 무관으로서 조인이나 오자양장에 비견될 만한 군공을 세웠고, 문관으로서도 행정·사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처럼 활약 분야가 넓었지만, 오히려 뚜렷한 한 가지 특성으로 기억되기 어려웠던 탓에 연의에서는⁠ 단역에 그친 '연의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군사적으로는 적의 책략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나 육손 같은 최상위 기책사들의 계책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적을 공격할 적기를 포착하는 데에도 능했다. 만총이 합비 수비를 맡은 동안 손권은 끝내 그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한편 만총은 신중한 수비에만 능한 인물도 아니었다. 원소와 조조가 대립하던 시기에는 고작 500명의 병력으로 20개 성을 빠르게 공략하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일거에 소탕했다. 원소를 지지하는 세력이 강했던 여남군을 단번에 평정한 일화는 만총의 과감한 판단력과 신속한 대응 능력을 보여준다.

성품 면에서는 원칙을 중시하고 청렴했다. 법을 집행할 때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식읍을 많이 거느렸는데도 사후에 남은 재산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강직한 성품은 그의 출세가 더뎠던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조조의 공신에 가까웠음에도 뒤늦게 임관한 장수들이 먼저 높은 직위에 오르는 일이 잦았지만, 만총은 불만을 드러내기보다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노년에 이르러 군사도독과 태위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종합하면 만총은 원칙과 신중함을 지키면서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줄 알았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5. 기타

6. 미디어 믹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만총/기타 창작물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만총/기타 창작물#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만총/기타 창작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한어병음:Mǎn Chǒng[2] 조홍은 조조의 친족이자 초창기부터 가산을 털어가며 조조를 지원한 핵심 인물이었다. 거기에 몸을 던져가며 조조를 구한 공까지 있다 보니 제아무리 죄를 저질렀어도 조홍의 빈객을 무작정 처벌하기는 다소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만총이 서둘러 형을 집행해버렸으니, 우선 그 덕분에 규율의 엄함은 섰고 동시에 조조는 조홍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뉘앙스는 취했지만 만총이 독단적으로 형을 집행했다고 변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총이 조조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잘 긁어준 셈.[3] 《삼국지》 만총전은 이 원정과 조휴의 사망을 태화 3년(229년) 기사에 기록하지만, 조휴전과 위 명제기에 기록된 석정 전투 및 조휴의 사망 연도는 228년이다.[4] 여강은 위와 오의 지역이 나뉘어 있었다.[5] 등애, 장로, 종회, 조창에 이은 다섯 번째로 많은 식읍이었다. 등애와 종회가 촉을 멸망시킨 엄청난 공이 있고 장로는 한때 한 지방의 군주였고 조창은 조비의 동생이자 왕이었다는 걸 고려해 보면 만총은 사실상 위를 섬긴 모든 무관/문관들 중 최고 수준의 식읍을 받은 것이다.[6] 이 장면은 서황의 충의로운 성품을 드러내는 한편, 만총을 주군을 배신하도록 부추기는 인물로 묘사한다. 앞서 동탁의 명을 받은 이숙이 여포에게 정원을 배신하라고 설득한 장면과도 대비된다. 여포는 정원을 죽이고 그 목을 동탁에게 바쳤지만, 서황은 양봉을 죽이지 않고 자신만 조조에게 귀순한다.[7] 다만 관우를 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는 장면은 정사와 다르다. 당시 만총은 번성에서 조인의 지휘를 받으며 수성 중이었기 때문이다.[8] 손권의 합비 공격은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한 여러 전선 가운데 하나였다. 오군의 철수가 협공 계획에 타격을 준 것은 맞지만, 이를 제갈량의 북벌 전체가 수포로 돌아간 원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