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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6:16:49

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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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洪
조홍
파일:attachment/조홍/돼지처럼보인다면눈이정상.jpg
시호<colbgcolor=#FFFFFF,#191919>공후(恭侯)
작위국명정후(國明亭侯)→ 야왕후(野王侯)
→ 도양후(都陽侯)→ 낙성후(樂城侯)
최종직위표기장군(驃騎將軍)
성씨(曹)
(洪)
자렴(子廉)
생몰기간?년 ~ 232년
고향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1]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조조의 거병동지2.2. 위나라개국공신2.3. 거부 그리고 말년 조비와의 관계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군공의 측면4.2. 인품의 측면4.3. 조비와의 악연에 대한 이해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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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天下可無洪(천하가무홍): 천하에 홍은 없어도 되지만
不可無曹公(불가무조공): 조공이 없으면 아니 된다네
子廉忠與勇(자렴충여용): 자렴은 충성되고 용맹했으니
千古更誰同(천고갱수동): 천고에 또 누가 이와 같으리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무장.

조조육촌 동생으로 순욱의 아들인 순찬과 혼인하였기에 순욱과 사돈 관계다. 예주 패국 초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2.1. 조조의 거병동지

젊은 시절 기춘현 현장을 지냈다. 반동탁연합이 일어나면서 조조에게 합류해 조인과 함께 장군이 된다.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낙양을 불태웠다. 이 때 조조는 형양 방면으로 서진하다가 서영에게 대패하고 추격당했다. 까지 잃어버리고 낙담한 조조에게, 조홍은 자신의 말을 내어주며 독려한다.
천하에 이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귀공 같은 웅걸(雄傑)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2]
도망가던 중 변수에 이르렀는데 물이 깊어 건널 수가 없자 조홍은 물가를 뒤져 배를 구해 조조와 함께 물을 건너 고향인 예주 패국 초현으로 돌아왔다.
야사집인 《왕자년습유기》[3]에 따르면 조조의 육촌동생 조홍은 막대한 재산과 준마 여러 필을 가지고 있었다. 반동탁 연합군 당시 조조가 한밤 중에 길을 가다가 말 한 필을 잃어버렸다. 조홍이 즉시 자기가 타고 가던 준마 백학(白鶴)을 조조에게 줬는데 그 말이 달리자 마치 허공을 나는 것과 같았으며 수백리를 달리고 나서 보니 조조는 땀으로 범벅이었으나, 백학은 땀 하나 흘리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으며, '허공을 나는 것이 조씨의 백학과 같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조홍은 가병(家兵) 천여 명을 이끌고 친구였던 양주자사 진온의 도움을 받아 여강단양에서 수천 명을 모아온 뒤 조조와 예주 패국 용항현에서 합류했다. 거기서 합류하자 기껏 모은 병력 4천 명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500여 명 빼곤 다 날려먹었다. 이후 패국의 다른 을 돌아다니면서 간신히 천여 명을 모아 원소가 있는 하내로 의탁한다.

2.2. 위나라개국공신

194년, 역적 착융을 도운 점, 헌제의 칙명을 거스른 점 등을 들어 조조는 도겸공격한다. 그런데 이때 장막여포를 수장으로 앉혀 조조의 뒤를 공격한다. 견현, 범현, 동아현 3성을 제외한 연주의 모든 군현이 장막에 함락당하는 등 조조에게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조홍은 동평국을 점거하는 데 성공하고 군량을 징발해 군에 공급한다.

이듬해 여름, 조조가 정도 전투에서 여포를 대파하면서 전세가 반전되자 별도로 군을 이끌고 제음, 산양, 중모, 양무를 비롯한 10여 개의 현을 재점령했다. 앞뒤의 공적으로 응양교위를 거쳐 양무중랑장이 되었다.

196년, 장안을 탈출해 낙양에 머무르던 헌제를 모셔오는 임무를 맡았다. 원술도 부장 장노 등을 보내 천자를 모셔오려 했다. 헌제의 측근세력인 동승이 원술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조홍은 천자를 모셔오는 데 실패했다. 이에 조조가 직접 나서서 천자를 모셔왔다. 허도로 천도한 후에는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만총전>에 따르면 조조가 대장군이 되자 만총이 허현령이 되었다. 만총이 허현령일 무렵 조홍의 빈객이 조홍의 종실 지위를 빙자하여 수차례 법을 어기므로 만총이 그 빈객을 체포하였다. 조홍이 만총에게 편지를 써 봐주기를 바랐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조에게 알리니 조조가 관계자들을 호출하였다. 만총은 외압이 더 심해지리라 생각해 냉큼 사형을 집행했고 조조는 만총을 칭찬하였다.

<양패전>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장사(長社)[4]현령으로 있던 양패도 조홍의 빈객이 저지르던 불법 징수 행위를 적발하여 다리를 꺾어 죽였다. 역시 조조에게 칭찬받았다. 이후 양패가 현령으로 발령을 받자 권세가였던 조홍과 유훈 등은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197년 조조가 원술과의 전투를 재개한 사이 유표장수남양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조홍이 무음, 섭, 박망, 자양 등 남양군 북부에서 맞섰지만 섭현까지 밀려났다. 진국으로 쳐들어왔었던 원술을 격퇴한 조조가 다시 형주로 내려가 장수·유표 연합군과 싸우자 조홍도 공을 세우고 여봉장군, 국명정후에 올랐다.

200년, 관도대전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대치할 때, 서황과 함께 예주 여남군 은강현의 도적 축비(祝臂)를 공격해 물리쳤고, 조조가 오소의 순우경을 공격하는 사이 본진의 수비를 맡아, 장합고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만약 여기서 조홍이 뚫려버렸다면 오소가 불타든 말든 원소는 그대로 진격에 임하여 결과적으로 조조의 패배로 돌아갔음이 분명했다. 조홍이 어떻게든 막아내면서 오소가 불타는 것과 추가적으로 장합과 고람의 투항까지의 시간을 벌어냈기 때문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18년, 한중 공방전에선 참군 조휴의 진언에 힘입어 촉장 장비마초, 오란뇌동을 물리쳤다.[5] 이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얇은 비단옷을 입은 무희들이 발로 북을 밟으며 춤을 추는 음란한 연회였다.[6] 그 자리에 있던 양부 같다고 질책하자 연회를 그만두고 조홍이 사과했다.

이것이 조홍의 마지막 군사 활동 기록인데, 한중 공방전 내내 촉군의 움직임을 견제하거나 대치하느라 추가적인 기록이 없던 모양이다.

2.3. 거부 그리고 말년 조비와의 관계

거물급 부자였다. 조조가 사공으로 재직할 때 고향인 초현 사람들의 재산을 조사했는데 조홍의 재산은 조조 본가와 동급으로 평가되었다. 조조는 이에 대해 "우리 집이 어찌 자렴(조홍)의 재산과 같단 말인가"라고 불평했다. 이 말은 "내가 조홍이랑 동급이나 될 정도로 돈이 적다고?"가 아니라 반대로 "내가 조홍이랑 동급이나 될 정도로 돈이 많다고?"라는 의미다(...). 참고로 조조 본가의 재산은 조조의 부친 조숭장개에게 살해당할 때 재산을 실은 수레가 100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삼국지 3개국의 최고 부자를 꼽을 때 촉한미축, 손오노숙과 함께 3대 부자로 꼽힌다. 미축은 조상 대대로 재산을 늘려 하인과 노비가 1만 명일 정도로 서주 일대에서 잘 나가는 부자였다. 오랫동안 근거지 없는 객장 신세이던 유비가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런 미축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이었다. 노숙은 집안이 호족이지만 베풀기 좋아했고, 난세가 펼쳐지자 가업을 접고 농토를 싸게 매각하며 가난한 농민들을 돕는 한편 지방 명사들과 친분을 맺어 명성을 얻었다.

<조홍전>에 따르면 성정이 인색하였다 한다. 조카인 조비가 태자 시절에 조홍에게 비단 백 필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절한 적이 있었다.[7] 조비 즉위 후 위장군에 임명되었다가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는데, 226년 조홍한테 돈 빌려주기를 거절당했던 걸 기억해낸 조비가 조홍이 거느리던 빈객의 죄를 트집잡아 조홍을 죽이려 했다. 조홍이 아무리 개인적인 흠이 있더라도 일단은 조조의 혈육 겸 위나라 황족으로 조비의 친척 아저씨고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한 일화까지 있는 데다가, 군에 복무한 최고참 개국공신 중 한 명이자 조씨 가문 최고 연장자였다. 개국자인 조조부터 거병 동지인 하후돈하후연, 초기부터 활동한 조인 등 친인척 1세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당시 위나라 1세대 친인척 개국공신은 조홍이 유일했다. 이 때문에 이 처분을 원망한 이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조홍에게 조롱당한 적이 있던 조진[8]마저도 "지금 조홍을 주살하면 조홍은 필시 내가 참소했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며 말렸을 정도. 하지만 조비는 "내가 직접 작살내는 것뿐이니 댁은 걱정 마라"라며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결국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던 조조의 아내 황태후 변씨까지 "양국패국에서 자렴(조홍)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없었다"(=조홍이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일찌감치 죽었을 거고 당연히 지금 조위의 황제 조비의 치세 따위도 없었다)며 질책하고 조비의 황후 곽여왕에게까지 "오늘 조홍이 죽는다면 내일 황제에게 조칙을 내려 너를 황후에서 폐하겠노라"라고 강경하게 나선 덕분에 간신히 죽지는 않고 제명으로 끝났다.[9] 처음에는 조홍을 석방한 대신 재산을 몰수했는데, 변씨가 다시 조비를 꾸짖자 재산도 돌려줬다. 조홍은 억울하게 죽을 뻔했다가 관직과 작위 박탈로 끝나자 매우 기뻐하며 조비의 덕을 찬양하는 매우 비굴한 내용의 글을 써서 바쳤다. 더러워도 결국 절대적 윗선인 황제에게 괜히 트집거리를 제공하느니 말년이라도 편히 보내기 위한 아부라도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10]

이 해에 적절히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면서 복직되어 후장군을 거쳐 다시 표기장군이 되었고 특진까지 받았다. 다만 조조 시절의 거병동지이자 개국 공신인 조홍이 제갈량의 북벌 시기 때 촉한이나 손오를 상대로 한 전선에 투입됐다는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능력과는 별개로 전선에서 활동하기에는 몸상태나 연령대가 영 버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조와 같은 세대였고, 조조가 220년 60대 중후반 나이에 사망했으니 조홍도 조비와 조예 시기면 적게 잡아도 70에서 80대 사이 정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조조의 "종제"라고 했으니 조조보단 어린, 즉 155년 이후 태생일 확률이 높으니 죽을때는 최대 7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232년 죽어서 야왕후 작위는 자식이 물려받았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은근히 일 대 일 대결에서 활약이 많고, 위기에 빠진 조조를 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남에서는 하만과 50합을 싸우다 타도배감(拖刀背砍)[11]으로 벤다든가 남피에서는 원담을 베어 죽이고 마초를 상대로 50합을 버티는 등 조조 휘하의 용장으로 묘사된다.[12]

이건 정사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서영(연의에서는 거의 여포)에게 패배했을 때 목숨을 걸고 조조를 지켜낸 것외에도 완성에서 죽을 뻔한 조조를 구해낸 것 외에도 난전 중이거나 상대가 무려 장합, 마초, 장비인데 나름 선전을 했다는 것은 꽤 눈여겨 볼만한 부분. 특히 장비는 연의 기준으로 만났다하면 거의 무조건 죽었다고 복창해야할 정도의 사망 플래그인데도 살아 남았다. 물론 그 중에서 본인이 이긴 전적이 없다는 게 문제긴 한데 애초에 마초, 장비, 감녕 같은 연의 기준 손꼽히는 강자들이랑 싸워서 이기기까지 했으면 조홍이야말로 삼국지의 명장으로 남았을 것이다. 즉 적어도 용력 면에서는 저평가 되진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래에도 나오듯 인품 면에서는 영 안 좋은 내용 밖에 없다.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싸잡아 놀릴 때 '조자효(조인)는 인색하니 요전태수라고 부르자'라고 말했는데, 요전태수는 '돈에 환장한 태수'라는 뜻이다. 실제로 돈을 밝히던 조홍 대신 잘못 욕을 먹었다(조인의 검소함을 인색하다고 조롱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저 상황은 조조가 언급한 장수들을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언급이 안 되었을 뿐 헷갈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조홍이 인색하다는 사실은 연의에서 일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예형은 나머지 장수들도 '입만 아프지만 굳이 말하자면' 식으로 까댄다. 이 나머지에 조홍이 낀 셈이다.

유명한 일화로는 동관을 10일간 지키라는 조조의 명을 받고 서황과 함께 주둔 중 마초의 지속적인 도발에 넘어가 9일 만에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 동관을 뺏기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조조가 서황에게도 "조홍은 나이 어려서 그렇다 쳐도[13] 너는 사리분별을 알아야 할 게 아닌가"며 책임을 묻자 서황은 사실대로 대답했고,[14] 이에 조조는 화가 나서 조홍의 목을 베려다 부하들의 만류로 관뒀다. 이후 조조가 마초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마초에게 죽을 위기에 놓이자[15] 마초와 50합을 겨루는 기염을 토한 덕분에(앞서 장합이 단 30합만에 캐발린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활약이다) 시간을 벌고 조조의 목숨을 구한다(조홍이 밀리는 상황이라 계속 싸우면 끔살당했을 것이지만 위급한 순간에 하후연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마초를 쫓아버려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조조는 "어제 내가 조홍의 목을 베었더라면 오늘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조홍을 칭찬한다.

한중 공방전 즈음에선 침착한 숙장이 되어 마초장비를 상대로 무턱대고 싸우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오란의 정찰대를 쳐부수고 임기도 참하지만 더이상 덤비지 않고 남정으로 돌아온다. 반면에 장합은 장비를 업신여기며 자꾸 출전하려고 하기에 조홍이 말린다. 하지만 결국 장합이 나가서는 소소하게 뇌동만 잡았을 뿐 처절하게 관광당한다. 당연히 조홍은 그런 장합에게 열불을 낸다.

한참 뒤인 조비의 황제 찬탈 시점에선 화흠 일당과 함께 궁궐로 쳐들어갔고, 이때 부보랑(옥새지기) 조필을 불러냈으나 그가 옥새를 내놓길 거부하자 즉석에서 참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연의에서 인성이 영 안좋다고 인식되는 조홍이지만 의외로 대놓고 악당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이곳이 유일하다. 다만 황제의 신하를 대놓고 참하는 찬탈의 수하 노릇을 단단히 했기 때문에 이거 하나 만으로도 조홍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기엔 충분하다.

종합적으론 연의에서 수혜와 피해를 모두 본 편인데 부보랑을 죽이는 장면의 임팩트가 너무 큰 나머지 이미지가 상당히 나쁘며, 연의의 영향이 큰 창작물에서 조홍의 대접이 좋은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

4. 평가

여타 무장에 비하면 명확하진 않고, 인성 면에서 다소 의심을 받으나 전반적인 공적은 무시하지 못할 위나라공신. 굵직한 것만 추려내보면 조조를 생명의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장합고람의 투항을 받아내고, 장비마초를 물리친 전적이 있다. 그 실적에 비해 전반적인 인식이나 평가가 비교적 영 박한 인물 중 하나.

4.1. 군공의 측면

조조의 인척이며 충성심은 확실했던지 초중반 조조가 부재한 주요 전선에서 자주 조조의 대리역을 맡았고 다양한 활약을 하였다. 다만 패전이 더러 있고 아주 두드러지는 군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관도 본진의 수비를 맡으면서 강화된 원소의 공세를 막아낸 것이 큰 공훈 중 하나인데 오소의 순우경 군이 조조에게 하룻밤 사이에 전멸하면서 계산이 전부 꼬여버린 원소군 지휘부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을 일으킨 덕분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만약 조홍이 관도 본진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원소군은 오소가 날아갔음에도 전력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돌진하여 승리를 거머쥐었을 것이 분명했으며, 관도전투 자체가 천하의 큰 판세를 가르는 전투였기에 더더욱 그 분기점에서 본진을 맡기고 그걸 해냈다는 공적이 큰 의미를 가짐은 분명하다.

한중 공방전에서 장비마초를 동시에 내쫒고 오란뇌동을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이렇게 관도 본진의 수비, 무도에서 장비, 마초를 패퇴시킨 공적이 있는데 공적에 비해 은근히 평가가 좋지는 않은 인물.[16]

4.2. 인품의 측면

대놓고 인색하다는 평가가 정사 삼국지에 남았을 정도고 만총이 허현령일 무렵 조홍의 빈객이 조홍의 종실 지위를 빙자하여 수차례 법을 어기므로 만총이 그 빈객을 체포했다는 기록과 조홍이 주변에 조심하라고 일러도 양패가 조홍의 빈객이 저지르던 불법 징수행위를 적발하여 다리를 꺾어 죽였다는 걸 보면 주변관리를 영 잘 못했던 듯 싶다.

그러나 조홍과 마찬가지로 사치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석숭은 기분에 따라 노복을 죽이거나 반장은 아예 부하들의 재물을 탐하여 죽이고 재산을 적몰하기 일쑤었지만 조홍은 사치스럽고 주위 관리를 못 했을지언정 주변에 조심하라고 충고하거나 자기 이름을 팔아대는 빈객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여인들이 맨발로 북을 두드리는 음란한 연회를 벌이자[17] 양부에게 일갈을 듣기도 했는데 그 인품 좋은 하후돈도 한때, 위진에게 아내를 연회에 대려오라고 했다가 올바른 예절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격노해서 감금했다가 풀어준 적이 있었지만 조홍은 양부에게 곧바로 사과하고 연회를 파하였다.

이걸보면 조홍이 비록 성정이 인색했으되 최소한의 도를 넘진 않았으며 잘못을 시정할 줄 아는 풍모가 있었다고 보인다. 빈객 문제로 조비에게 트집잡혀 죽을 뻔했을 때 많은 관료들이 조비의 결정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보면 조홍이 공신이고 조비의 결정이 영 타당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저러한 조홍의 풍모 또한 조홍이 주변에게서 비호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북당서초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조홍에게 교제를 요구받자 굽히고자 찾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해, 병이 있다고 지팡이를 잡았다. 한을 품은 조홍은 조조에게 말했다. 이에 조조가 사마의를 벽소(辟召, 등용)했고 그러자 사마의가 바로 지팡이를 던지고 명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4.3. 조비와의 악연에 대한 이해

조비가 잘 대우한 공신도 많고 개국공신같이 중한 사람을 하찮은 이유로 트집 잡아 죽이려 한 것을 보면 그만큼 조홍은 막장이라며 조비가 조홍을 죽이려 든 것까지 옹호하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다. 조비는 상당히 똑똑한 면도 많았지만 조조의 단점도 많이 닮았고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별로 삼가는 일이 없었다. 그가 대우해줬다는 공신들은 조비와 원한이 없었기에 잘 대접받은 거고, 일단 조비가 앙심을 품은 사람은 지위고하와 막론하고 해를 입었다.[18]

반면에 조홍은 재물 문제로 조비와 원한관계가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19] 그럼에도 조홍이 다른 공신보다 대우를 못 받았으니 조홍이 막장이라며 다른 공신과 조홍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조홍이 조비에게 받은 처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홍은 평소에 사고를 쳤음에도 인망과 평판이 나쁘진 않았던 것이다. 설령 조홍이 막장이 맞다쳐도 많은 사람들이 행실이 개판인 사람을 편들었다면, 조비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처분을 내렸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조홍이 평소 행실이 개막장이라 모두의 원한을 사는 사람이었다면 처형 위기에 몰렸을때 이례적으로 조조의 아내였던 변씨까지 나섰을까?

그리고 조비는 애초에 상대를 봐 가며 납득이 가게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다. 조비가 과거의 원한으로 트집잡아 죽인 포훈도 아버지 포신조조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공신이자 은인이었다. 그리고 포훈이 죽을 때 사람들이 구명하려 했고 또 포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한탄했다. 그 원한이라는 것도 조비의 처인, 곽여왕의 동생이 절도를 하자 법대로 주살한 것과 사냥을 자제하라고 간언한 것이다. 반면 조홍이 법을 어긴 자신의 빈객들을 죽였다고 만총과 양패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기록이나 자신의 행동을 지적한 양부를 원망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리고 개국공신은 아니지만 조강지처인 문소황후도 자신을 원망하는 말을 했다는 하찮은 이유로 트집 잡아 죽인 게 조비가 아니던가. 포훈이나 문소황후를 조비가 하찮은 이유로 죽였다고 이들을 막장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개국공신인 조홍이 오질의 눈치를 봤다고 조홍이 입지가 낮았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홍이 문제인 게 아니라 일개 중랑장에 불과한 오질이 조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마구 위세를 부렸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군부의 실세였던 조진조차 오질에게 화만 낼 뿐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20] 즉 공신들이 공적도 없는 오질의 눈치나 봐야했을 만큼 조비의 비호가 심했다는 뜻이므로 규율을 엉망으로 만든 조비와 방자함이 지나친 오질의 문제이지 조홍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오질이 죽고나서 처음으로 받은 시호는 추후()[21]로 이는 위세만 믿고 멋대로 설쳐댔다는 뜻이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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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후이성 보저우시[2] 서영군이 바로 등 뒤까지 추격해온 상황은 아니었기에 조홍도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말을 내어준 상황에 적 기병이 근처까지 쫓아왔다면 조홍은 꼼짝없이 죽었을테니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는 마음으로 임한건 맞다.[3]습유기》 자체가 전설을 모아 만든 책이다.[4]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 창거시[5] 정확히는 오란과 뇌동이 털리며 허장성세로 시간끌기에 실패한 장비가 별동대를 이끌고 퇴각했다.[6] 군 연회에서 스트리퍼들을 불러서 스트립쇼를 주최한거나 마찬가지다.[7] 조홍의 인색함보다는 조비의 됨됨이를 비판할 일화로, 비단 백 필은 조홍 입장에서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거니와 조비는 이미 이전에도 조홍에게 돈을 여러 차례 빌리고서는 갚은 적이 거의 없었다.[8] 224년 조비가 총애하는 오질이 연회에서 조진을 뚱뚱하다며 놀리자 조홍은 왕충과 함께 오질 편을 들기도 했다. 오질은 조비가 총애하는 것을 넘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입지였기에 조홍과 왕충은 좋든 싫든 오질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원로인 조홍이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조비의 막장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9] 이때 굳이 곽여왕에게 황후에서 폐하겠다는 소리까지 한 건 변씨와 친한 견씨가 조비에게 죽을 때 곽여왕이 관련되어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10] 조홍의 글솜씨에 대한 얘기가 있는데 조홍이 집에 있는 서생을 써서 혹은 외부의 서생을 초청해서 대필했을 수도 있고 문재가 대단친 않아도 직접 썼는데 조비가 별 신경 안 썼을 수도 있고 조홍의 글솜씨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중국은 역사적으로 문인을 찬양했는데 만약 조홍의 글솜씨가 내세울 정도가 됐다면 거의 무조건 언급이 됐거나 스스로 뽐내고 다녔을 것이다.[11] 약칭 '타도계'로 불리는 싸움의 기술. 일부러 도망치는 척 하다가 베어버리는 기술이다.[12] 남군공방전에서 감녕, 한당에게는 각각 20합, 30합만에 패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후 전개를 보면 유인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13] 생각해보면 은근히 웃긴데, 조홍은 조조가 거병할 때부터 따라서 활동한 조조의 형제뻘 인물이다. 동탁 토벌 당시의 나이를 낮게 잡아서 10대 중후반으로 쳐도 이때쯤이면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된다.[14] 서황은 9일 동안 계속 조홍의 출전을 말렸다. 그런데 9일째 되는 날에 서량군이 일부러 빈틈을 보였고, 마침 서황은 군량과 군마를 점검하러 가고 없어서 조홍이 덜컥 출전해 버렸다. 서황은 급히 출동해 조홍을 데리러 오려 했지만, 마초군의 복병에 크게 패하고 동관까지 빼앗겼다.[15] 전포를 입고 있는 것이 조조라는 말에 전포를 벗어던졌으며, 수염이 긴 사람이 조조라는 말에 수염까지 스스로 잘라버리는 등 말 그대로 마초를 상대로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어야만 했다.[16] 이는 조비에게 욕을 먹었던 게 이유일 수 있다. 일단 당시 시대상이 황제랑 신하 둘이 사이가 안 좋으면 설령 황제가 잘못했다 치더라도 신하가 더 평가가 깎이는 시대였다. 왜냐하면 황제랑 반목했는데도 신하를 높게 평가해버리면 그 신하를 갈군 황제가 암군 폭군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비는 정말로 인성이 불량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17] 원래 전근대 중국에서 여성이 맨발을 보인다는 것은 알몸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18] 조비는 조홍, 포훈 등 조조 시절 공신들도 자기 맘에 수틀리면 치워버리려 드는 인간군상이었는데, 선전은 잘 했으며 위의 두 형이 빨리 죽어서 삼남임에도 사실상 조조의 장남 취급이었기에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을 수는 있었다.[19] 그것도 조비 측에서 먼저 비단 백 필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이를 거절했고 이걸 조비가 문제삼아서 죽이려 했다는 건데 애당초 조비는 이전에도 조홍에게서 여러번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사적으로는 숙질간이고 공적으로는 주종 관계라 하더라도, 빌려가 놓고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떼먹은 사람에게 선뜻 돈을 빌려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20] 조진은 조비의 탁고대신 중 하나였고, 조예가 즉위하자 대장군에 임명된 만큼 입지를 논할 필요가 없는 실세 중 실세였다. 그런 조진을 대놓고 욕하면서 그 면전에서 칼을 만지작거리며 협박한 오질이 패악한 것이고, 지 친구란 것만으로 이런 횡포를 용납한 조비도 군주로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실제로 조비는 아버지가 자식처럼 키운 (즉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덕양향주 조씨를 친구 하후상과 결혼시켜놓고 하후상이 만 예뻐하자 첩을 바로 죽여버릴 정도로 자기 성깔을 건드리면 가차없었다. 조비가 총애하는 인간을 건드리면 단단히 찍힐게 뻔했으므로 아무도 못 건드린 것 뿐이다. 하후상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친구고 뭐고 안 봐주는 인물이 조비이다. (조비 입장에서 보면) 친구도 그런데 하물며 평상시 안 좋게 보던 당숙 따위야 말할 것도 없다.[21] "추할 추"자로 아들 오응은 아버지의 시호가 너무 비하적이라며 바꿔달라고 청원해 결국 위후(候)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