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榮 서영 | |
<colbgcolor=#BDBDBD><colcolor=#232323> 최종직위 | <colbgcolor=#ffffff,#191919>중랑장(中郞將) |
성 | 서(徐) |
이름 | 영(榮) |
생몰 | ?년 ~ 192년 |
고향 |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혹은 현도군(玄菟郡) |
사망지 |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경조윤(京兆尹) 신풍현(新豊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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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동탁 휘하의 무장으로 유주 요동군 양평현 출신. 일설에는 유주 현도군 출신.나관중의 《삼국지연의》로 인해 굉장히 심하게 각색되어 일말의 비중도 받지 못하고 묻힌 대표적인 케이스. 존재감도 없는 연의의 모습과 다르게 실제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와 손견을 대패시키면서 목숨까지 위협한 맹장이다. 이 공 때문에 삼국시대 초반부의 최강자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 외에도 삼국시대의 세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동연의 시조격 군벌인 공손도를 동탁에게 추천하는 등 결과적으로 본인 사후인 삼국시대의 주요 세력들의 시조격 군벌들과 접점이 많은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반동탁 연합군의 손발이 안 맞아 답답해진 조조와 포신이 독자적으로 동탁을 공격하자, 서영이 요격을 맡아 이들을 털어버리고 조조 휘하의 위자와 포신의 아우 포도를 죽여버렸다. 심지어 조조는 화살을 맞고 말이 창에 찔려 죽어 조홍의 말을 빌려타 겨우 살아남는 참패를 당한다.조조와의 전투 기록을 보면 이 전투에서 2명의 지휘관 중 한 명인 포신이 부상당하고 동생 포도가 전사했으며, 나머지 한 명의 지휘관인 조조마저 부장 위자와 자신의 말을 잃어버리고 야음을 틈타 도망쳐야 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매우 큰 승리를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서영은 조조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온종일 힘써 싸웠으나 조조군의 남은 군세를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하고 제후군이 모인 산조(酸棗)까지 공략할 수는 없다고 여겨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그리고 낙양을 노리고 북상하던 손견을 기습해서 겨우 몇십 기만 추려 도망가는 대패를 당하게 했다. 손견과의 전투 기록 역시 손견의 병사 수십 기만 남고 부장 조무가 손견의 두건을 대신 쓰고 도망치게 했을 정도이니 역시 대승을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 손견 두 사람의 일생을 통틀어 전장에서 이 정도로 큰 위기에 빠진 적은 흔치 않다. 조조는 평생을 통틀어 서영과의 형양 전투 이후로 장수와의 완성 전투, 적벽대전, 마초와의 동관 전투로 죽을 뻔한 적을 포함해 흔치 않고[2] 손견 역시 이 정도의 기록된 대패는 이 일을 제외하면 손견 본인이 목숨을 잃는 유표와의 양양 전투 정도 밖에 없다.
190년에는 고향 사람이자 전 기주자사인 공손도를 동탁에게 추천했으며, 192년에 동탁이 죽자 왕윤의 명령으로 동탁의 옛 장수 양정, 호진과 함께 이각, 곽사와 싸웠으나 처음부터 배반할 생각인 양정, 호진[3]이 투항해 이각, 곽사에게 붙게 되어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했다.
3. 삼국지연의
반동탁 연합군에서 동탁 측의 단역으로 등장.연의에서는 곧 관우의 밥이 될 화웅을 띄우기 위한 장치로 써먹기 위해 손견을 패퇴시킨 서영의 전공을 화웅의 전공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동탁이 낙양을 전소(全燒)시키고 장안으로 퇴각할 때에, 이유가 반동탁연맹군의 추격을 두려워해 그를 시켜 형양에서 군을 이끌고 매복할 것을 지시했다. 이유의 예측대로 조조가 동탁을 추격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이때에 조조군에게 기습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조조 본인까지도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조조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은 몇 안 되는 장수로 이에 필적하는 기록을 세운 장수는 장수나 마초 정도지만, 때 마침 지원하러 온 하후돈에게 살해 당한다.
4. 평가
본격적인 삼국시대의 개막을 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지만, 군사 지휘관으로서 유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조조, 손견 등 능력을 인정받은 준걸들조차 전투에서 패배시켰을 정도. 덕분에 일부 매니아들은 서영이 조조, 손견조차 능가하는 야전 지휘관인데 아깝게 배신으로 죽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덕분에 이 주제를 두고 서영의 능력치가 과대평가되고 있는지, 과소평가되고 있는지 논란이 일기도 한다.4.1. 과대평가?
일단 조조를 보면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면서 군사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았다지만 전체 커리어로 치면 데뷔 초창기에 해당한다. 아직 산전수전 다 겪은 대 군략가 조조가 아닌 것이다.[4] 게다가 당시 상황 자체가 반동탁연합군이 미적거리는 상황이라 장막 이외에는 도움을 주는 제후도 없었다.[5] 이런 조건에서 포신과 함께 단독 공격을 하려다가 털린 것이므로, 조조의 패배가 그렇게 놀라운 일까지는 아닌 것이다.손견 역시 대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거지에서 3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려온 손견군이 피로해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손견은 패배한 군세를 수습하고 나서는 동탁군을 잘 몰아붙였다고 하니, 손견이 입은 타격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동탁은 손견이 기세를 타기 시작하자 서영을 보내는 대신 혼인동맹을 맺자고 뻐꾸기를 날렸다. 서영이 손견과 조조를 쌈싸먹을 만큼 유능하다면 서영을 다시 보냈어도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동탁이 보기에 서영이 그 정도 레벨까진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고수전쟁에 써먹었던 화전양면전술로 비교하는지 넌센스나 다름없는 거다. 애초에 화전양면전술은 대부분 약국이 강국에게 친한 척하고 뒤에서 칼 꼽는거지 강국이 약국에게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거다.
물론 서영이 조조, 손견 두 영웅에게 참패를 안겨준 것은 사실이므로 서영을 지나치게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예를들어 부정적 평가에 나왔던 "호진과 양정의 배신으로 졌다."라는 것 역시 감안하고 평가하며, 이를 부정하진 않는다.
이는 부정적 평가에 나온 예시로 반박가능하다. 을지문덕을 언급하는데 살수대첩에 졌던 우중문, 우문술 등은 패했으니 부정적 평가의 논리면 그냥 단순히 멍청한 장군이란 소리며 이유 없는 내려치기다. 실제론 두 장군은 수나라의 명장이었으며 이는 역사에 정사로 기록 됐다. 살수대첩 단 하나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때의 상황, 전략의 문제, 당시의 병력 등등 여러가지를 고려해 평가해야 맞는거다.
그러므로 손견, 조조의 리즈 시절에 비추어 서영의 평가를 비례 상승시키는 것도 무리수일 수 있다는 것이다.
4.2. 과대평가가 아니다?
조조와 손견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불리했다고는 하지만, 싸우기 전에 조건을 갖춰 놓는 것도 재주고 유리함은 살리는 것이 정도이다. 역사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공평하게 승부하는 전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식으로든 유, 불리가 나뉘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조와 손견의 기세를 꺾어 놓은 서영의 공로를 굳이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어찌되었던 간에 동탁이 가장 두려워하던 숙적 손견을 두들겨 팬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탁이 서영을 고평가하지 않아서 다시 손견과 싸우게 하지 않고 화해를 시도했다는 부분도 너무 단편적인 서술이다.[6]서영이 이각, 곽사에게 패배한 것도 맞지만, 이 둘은 삼국지연의의 이미지 때문에 능력이 부각되지 않았을 뿐 마등, 한수, 유언, 주준, 여포 등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한 전적이 있는 엄연한 군벌이다. 게다가 서영은 이 둘과 정면대결로 패한 것이 아니고 호진과 양정 등 양주(涼州) 출신 장수들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한 것이다. 조조와 손견이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받아들인다면, 서영이 배신당해서 졌다는 변명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서영(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게다가 《영웅기》 기록에서는 당시 조조와 함께 있었던 인물 중에서는 유비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사실이라면 삼국의 모든 1세대 군벌들을 다 격파해본셈.[2] 관점에 따라서는 좀 더 많아질 수 있긴 하다. 복양 전투에서 낙마하고 화상 입었을 때도 사실 죽었을 수도 있다. 관도대전도 사실 허유가 항복해 오기 전까지는 오늘내일하는 처지라 죽기 직전까지 다다른 거나 다름이 없을 수 있다. 심배에게 화살 맞았을 때도 죽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엉망진창으로 깨지면서 도망가다가 크게 죽을 뻔했다는 것으로는 딱 저렇게 4번 뿐이었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복양 전투 역시 지고 튀다가 낙마해서 화상 입은 걸 부하가 도와줘서 달아난 것이니 지고 튀다가 죽을 뻔한 것 목록에는 아무래도 복양 전투까지는 포함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3] 이 둘은 양주(涼州) 출신이다.[4] 사실 황건적의 난이 워낙 규모가 큰 사건이라, 당시 어지간한 힘이 있는 사람들은 죄다 황건적의 난 토벌에 참여해서 군사 경험을 쌓았다. 공융, 왕윤처럼 군략가로서의 재능이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5] 이를테면 원소는 이 때 하내에 있었고 한복이 군량 공급을 끊어 무력화된 상황이라 산조에 있던 조조를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다.[6] 고수전쟁 때 고구려가 살수대첩 1방으로 사실상 수나라를 침몰시킨 대영웅 을지문덕의 존재에도 수나라랑 이후 계속 화친을 시도했다는게 을지문덕의 평가를 깎아먹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