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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9:06:57

무선황후 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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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태후 | 永壽太后
조위 명제조 태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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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1년 1월 29일
후한 청주 제군 백정
(現 산둥성 쯔보시 일대)
사망 230년 7월 9일 (향년 70세)
조위 하남윤 낙양 황궁 영수궁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고릉(高陵)
재위기간 후한 위왕후
219년 ~ 220년 3월 15일
후한 위왕태후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조위 황태후
220년 11월 25일 ~ 226년 6월 29일
조위 태황태후
226년 6월 29일 ~ 230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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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개양경후 변원
(開陽敬侯 卞遠, ? ~ ?)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태조 무황제
자녀 4남
봉작 위왕후(魏王后)
→ 위왕태후(魏王太后)
→ 황태후(皇太后)
→ 태황태후(太皇太后)
궁호 영수궁(永壽宮)
존호 영수태후(永壽太后)
시호 무선황후(武宣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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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기타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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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과 조위의 여성이자 서주 낭야국(郎耶國) 개양현(開陽縣) 사람으로 조조의 계실,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의 친모. 성은 변씨(卞氏), 이름은 불명, 시호는 무선황후(武宣皇后).

2. 정사 삼국지

위서에 따르면 무선황후가 태어날 때 누런 기운이 집 위에 가득했다. 그녀의 아버지 변경후(卞敬侯)가 이 현상을 점쟁이 왕단(王旦)에게 물으니 왕단은 길조라고 답했다.

무선황후는 본래 가기 출신으로, 20세에 조조이 되었다. 나중에 조조를 따라 낙양으로 올라왔는데, 조조가 동탁을 피해 달아났고, 원술이 조조가 죽었다고 전했다. 무선황후는 이를 믿지 않았고, 이를 듣고 돌아가려던 조조의 첩들을 막았으며 첩들은 무선황후의 말을 따랐다. 조조는 나중에 이를 듣고 무선황후를 잘 대해주었다.

건안 초엽(197년), 조조는 원래 정실이었던 정부인이 자신을 떠나자[1] 무선황후를 새로이 정실로 삼았고, 조조의 명령에 따라 어머니 없이 남겨진 조조의 자식들을 길렀다.

예전에 정부인이 정실(正室)이었고, 또한 조앙도 살아 있었을 때 정부인은 무선황후와 그 자식들을 깔보았다. 나중에 무선황후가 정실이 되었는데 무선황후는 그때의 구박은 잊고 조조가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을 파견하여 물품을 정부인에게 주거나, 가끔 만나기도 했다. 정부인을 만났을 땐 정부인을 상석에 앉히고 자기는 하석에 앉았다. 조조의 정실이 되었음에도 정부인을 존중했는데, 이에 정부인은 감사해하며 "나는 이미 폐출된 몸인데, 어찌 그대는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오?"라고 했었다. 정부인이 죽은 후에, 무선황후는 조조에게 부탁해서 제사 지내기를 청하였고 허락을 받아 허도의 성 남쪽에 장사지냈다.

위서에 의하면 무선황후는 천성이 검약하여 화려한 비단이나 보석을 멀리 했으며 그녀가 쓰는 물품들은 모두 검은 옻칠을 한 것들이었다. 조조가 귀한 귀걸이들을 가져와 골라보라 하면 늘 중등품을 골랐다. 조조가 까닭을 묻자 상등품을 고르면 탐욕이고 하등품을 고르면 위선이니 가운데 것을 골랐다고 대답했다.

조비가 태자가 되자 측근인 궁녀가 무선황후에게 축하하며 말하길 조비가 태자가 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창고의 보물들을 나눠줘야 한다고 했다. 무선황후는 단지 조비가 나이가 많아서 태자가 된 것일 뿐이라며 절도를 잃지 않았고 이를 들은 조조는 기뻐했다.

위서에서는 이렇게 무선황후의 미덕을 칭송하고 있는데, 위략에서는 이런 미담들과는 반대로 부정적인 기록도 나온다. 위략에 따르면 무선황후가 자신의 남동생 변병의 벼슬이 낮다고 원망하는 말을 하자 조조가 "단지 네가 나랑 얽혀서 처남이 된 것이라 오히려 많은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무선황후가 돈과 비단이라도 동생에게 더 내려주길 원하자 조조가 "단지 그대가 훔쳐다가 주는 것일 뿐인데, 그래도 모자라냐?"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조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변병의 관직은 변함이 없었고, 재산 또한 늘지 않았다.[2]

이런 차이는 사서의 특성에서 기인한 듯 한데,[3] 위략과 위서의 무선황후에 대한 180도 다른 서술은 다른 사안에서도 보인다. 무선변황후전 주석 위서에서는 조비가 조식을 벌하려 하자 나는 신경쓰지 말고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반면에, 진사왕식전 주석 위략에서는 조식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모습이다.[4]

사실 위의 기록들로 인해 무선황후의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진다고 보긴 힘들다. 상충되는 기록은 조식에 대한 처우 정도인데, 어머니가 아들을 살려내려고 애쓴 것이나 동생이 궁핍하게 사는 것이 안쓰러워 남편에게 간청하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보긴 어렵다. 즉 위략의 내용이 맞다고 해도 인간적인 연민으로 공과사를 잠깐 구분하지 못한 정도의 흠 정도 밖에 없다.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고 이후 219년 무선황후는 왕후가 되었다. 220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을 이어받아 왕태후로 높여졌으며, 같은 해 조비헌제로부터 양위 받아 황제가 되고 를 창건하면서 황태후로 높여졌고 영수궁(永壽宮)이라 일컬었다. 조비가 재물 문제로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조홍을 죽이려 하자, 태후는 조비의 첫 번째 부인이기도 했던 문소황후 견씨를 조비가 죽게 만든 후 새로 들인 곽여왕에게 만약 조홍이 죽으면 내가 황제에게 조칙을 내려 너를 폐하겠다고 압박해 곽여왕이 울면서 조비에게 애걸복걸했다.[5] 그래서 조홍은 겨우 살아났지만 면직되고 관작과 봉토를 깎였다. 이번엔 조비가 조홍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하자 재산도 돌려주게 했다.

세설신어 현원편(賢媛篇)에 이런 일화가 있다. 무선황후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갔는데 조비는 아버지의 측실들을 자신의 측실로 두고 있었다(!)[6] 경악한 무선황후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매몰차게 대답하였으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

황초 7년(226년) 5월 17일, 조비가 죽고 태자(조예)가 제위를 계승하면서 태황태후까지 높여졌다. 황후가 되지 못한 평원왕비 우씨를 위로했지만 도리어 출신만 폄하당했다.[7]

228년, 조예가 친정을 나간 사이 조예가 죽었다는 참언이 돌아서 무선황후가 두려워했는데 조예가 무사히 돌아오자 무선황후는 기뻐했고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잡아들이려고 하였지만 조예가 이를 만류했다.[8]

이전에 조비가 무선황후의 부모에게 작위를 추증하려고 하자 진군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비는 진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만두고 앞으로도 작위를 추증할 수 없게 정했지만 이후 230년 조예가 이를 위반하고 무선황후의 부모에게 작위를 추증했다. 조비의 뜻을 위반하면서까지 작위를 추증한 것을 보면 무선황후와 문소황후의 사이가 좋았던 것처럼 무선황후와 조예의 사이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화 4년(230년) 5월 혹은 6월 무자일, 무선황후가 사망했고 7월에 조조의 고릉에 합장되었다.

3. 삼국지연의

조앙의 죽음으로 정부인조조를 떠났다는 이야기가 상큼하게 생략되었다.[9] 그래서 조조가 위왕이 된 후 본처인 정부인이 자식이 없어서 내쫓고(!) 변씨를 왕비로 삼았다고 나온다. 연의는 참 여러사람 죽인다.

조조 사후 조비가 동생 조웅을 압박해서 자결하게 만들었고 변씨는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조비에게 조식까지 죽이지 못하게 힘쓴다.[10]

4. 기타

2009년 중국 허난성에서 발굴된 조조 무덤이라 주장하는 고분에서 세 개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각각 장년 남성, 장년 여성(40대), 젊은 여성의 유골이었는데 무선황후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11] 사서에 무선황후는 조조와 합장되었다고 기록된 것과 배치된다. 또한 무선황후의 태황태후의 인새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이야 얼마든지 도굴될 수 있지만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치명적이다. 이 무덤을 조조 무덤이라 단정지을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 고분을 조조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건 중국 국가 문물국과 발굴과 관련된 몇몇 인물들 뿐이고 중국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인물 중에 이걸 조조의 무덤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학계 인물 중에서 이 고분을 조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발굴 관련 인물들과 뭔가 커넥션이 있거나 이권이 걸려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무선황후의 남아있는 글로는 양태위부인 원씨에게 보낸 편지 기록이 있다. 양태위부인 원씨 문서 참고.

조예가 황제로 재위 중일 때 사마지가 조홍의 유모 을 감옥에 가두자 무선황후가 황문 오달을 시켜서 사마지에게 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사마지가 듣지 않았던 일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마지 문서 참조.

원수의 집안으로 재가를 하게 된 큰며느리 문소황후와의 사이도 좋아 고부 간의 갈등도 없었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본인 소생의 아들들끼리 불화했다는 것인데 이건 대부분 조비가 잘못한 것이다.

위나라의 태황태후로서 황실의 제일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말년을 편하게 보낸것처럼 보이나 기구한 삶을 살았다. 남편 조조를 포함하여 하후돈, 하후연, 조인 등 집안 사람들을 먼저 보냈으며, 큰며느리 견씨, 큰아들 조비[12]를 먼저 떠나보냈고, 다른 아들인 조창, 조식은 조비가 봉지에 연금시킨 탓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조비 시절 위나라의 중신이자 노신이던 종요가 아내 손씨를 내치고 48살이나 어린 장창포를 새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자 이게 좀 아니다 싶었는지 조비에게 말해 종요가 다시 손씨와 재결합하라고 건의하여 전달됐지만 종요가 자살시도까지 해가며 뻗대자 결국 조비도 GG쳤다고 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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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둘러보기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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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조가 완성 전투 때 장수의 숙모를 데려다 능욕했고 이에 분노한 장수가 기강이 해이해진 조조군을 급습, 조조는 간신히 살았지만 그의 맏아들 조앙이 아버지를 지키려다 죽었다. 조앙은 원래 조조의 첩 유씨의 소생이지만 생모가 일찍 죽어 정부인이 거두어서 친자식처럼 길렀는데, 그가 이렇게 죽자 정씨는 '내 아들을 죽여 놓고 당신은 왜 살아 돌아왔냐,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조조를 원망하며 통곡했다. 이에 조조는 정씨를 친정으로 보내 버렸다가 뒤늦게 사과하러 찾아가서 싹싹 빌며 재결합을 청했지만, 정씨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끝내 조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2] 변병 본인이 치부는 고사하고 조조의 처남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청빈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동생 밥이나 제대로 먹이려 했다가 까인 사례일지도 모른다. 조조의 답변 또한 아무리 누나라도 동생 너무 챙기려고 들면 그것도 좋은 건 아니라고 충고하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군벌 출신 조조는 청류파를 포섭해 일으킨 정권이자 외척에게 권력이 가는 걸 극도로 경계해서 외척에게 힘을 주지 않으려 했던 조위 정권의 특성도 작용했을 것이다.[3] 위서는 위 왕조 주도하에 왕침이 공식적으로 쓴 책이고, 위략은 어환 개인이 쓴 책이다.[4] 상식적으로 봤을 때 무선황후는 조식을 살리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위서의 해당 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위서의 다른 기록도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이유는 없다. 다른 사서와 상충되는 것이 없다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서에서 상충되는 기록이 보이는 경우, 기본적으로 위서는 위나라 인물에 대한 용비어천가 경향을 띠며 부정적 기록이 거의 없는 반면에, 위략은 부정적 기록도 종종 보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5] 문소황후는 며느리로서 무선황후를 극진히 대우했기에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는데, 동시에 곽여왕이 문소황후를 참소해 죽음으로 몰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신뢰한다면 무선황후 입장에서 곽여왕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폐후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굉장히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조비의 행동이 치졸하다지만 나라의 가장 지존인 황제에게 대놓고 압박을 가할 수 없으니 곽여왕을 압박하여 조비에게 메시지를 보낸 의도도 겸했을 수 있다.[6] 조조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을 모신 측실들에게 재물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유언했다.[7] 우씨는 자신보다 출신이 비천한 첩실이었던 모씨가, 본래의 정실인 자신을 제치고 황후로 봉해진 것이 분한 나머지, "위나라는 천한 여자를 황후로 삼으니 오래 못 갈 것" 운운하며 악담을 했다. 실제로 위나라의 역대 황후들 중에는 몰락한 집안 출신이거나 하층민 출신인 사람이 많았으며 그중 끝판왕이 아예 가기 출신이었던 무선황후. 즉 우씨는 모씨를 욕하려다가 시계모와 시조모까지 싸잡아 저격하는 발언을, 그것도 시조모 면전에다 대고 해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씨는 쫓겨나서 업성의 궁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8] 출처: 명제기 주석 위략.[9] 이문열평역 삼국지에서 언급해주기는 하지만 다른 글들에 묻혔다.[10] 정사에서 이 부분은 위략과 위서에서의 기록이 다른데 연의에서는 위략의 기록을 채택했다.[11] 무선황후는 사망 당시 70대였으니 장년 여성의 유골은 무선황후의 유골이 아니다.[12] 사실 조비의 경우, 자기 아버지의 첩을 본인의 첩으로 두는 막장행각을 벌였기 때문에 이미 의절을 선언한 상태라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죽었을 때 무덤에도 안 갔을 정도니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