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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유도, · 장제 · 유방 ,손자, | 유복 ,유정, · 사마랑 · 양습 ,왕사, 장기 ,유초 장집, · 온회 ,맹건, · 가규 ,가충, | 임준 · 소칙 · 두기(畿) ,두서 악상, 정혼 ,정태, · 창자 ,안비 영호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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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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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 작위 | 업후(鄴侯)[1] |
성 | 원(袁) |
명 | 상(尙) |
자 | 현보(顯甫) |
아버지 | 원소(袁紹) |
생몰연도 | ?년 ~ 207년 |
고향 |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
사망지 |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삼남[2]으로 자는 현보(顯甫)다.원소가 원상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다. 원소의 병사(病死)로 인해 원상은 내부적으로 수많은 도전을 받았고, 이는 원소 사후 원소 세력이 조조에게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 정사 삼국지
2.1. 전반기
2.1.1. 원소의 총아
원상의 생년이 언제 쯤인지는 불명이나 토탈 워: 삼국이 발매된 후 한 한국인 플레이어가 레딧에 올린 글이 있다.레딧 출처, 한글 요약 번역 이 글에 따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원상은 원희와 원담과 달리 자사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 <무제기>에 기재된 《위서》에서 190년 무렵의 원소에게 장성한 아들 둘이 있다는 언급이 있는데 정황상 원담과 원희로 보인다. 즉, 원상은 이 무렵에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176년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원소의 6년상을 고려했을 때, 190년대 후반에 나이가 맞지 않아 자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190년에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원상의 나이를 끼워맞추려면 6년상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나마 개연성이 있다. 즉, 182년(?)에 6년상이 끝났다는 전제하에 원상은 적어도 183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 《위지》 <원소전>에 기재된 《한진춘추》에 심배가 원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췌되어 있는데 여기서 심배는 원상을 적사(適嗣), 즉 적법한 후계자로 언급하는데 이게 원소가 사망한 202년 시점에 적어도 15, 16살의 성인 나이가 되었다는 전제로 작용한다면 역산해서 원상의 생년은 187년 전후로 정도로 좁혀진다.
- 따라서 원상의 생년은 187년 정도가 적절하다.
심배와 유표 등이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용되는 고사의 맥락상 원상은 '어린 군주'의 위치로 비유된다. 그가 원소 사후 후계자로서 세력을 물려받고 형인 원담과 대립할때 원소 생전의 핵심 측근이자 원상을 옹립한 실세였던 심배는 원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계우가 숙아를 죽이고 주공단이 관숙과 채숙을 멸한 고사를 인용하며 당시의 정세를 비유하는데, 심배가 거론한 계우와 주공단은 선대 왕이 어린 아들을 남긴 채 병사하자 섭정을 맡아 정국 안정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며, 숙아와 관숙과 채숙은 어린 임금을 얕보고 반기를 들었다가 계우와 문공에게 숙청당한 왕족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심배가 원담과 자신과 원상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으며, 유표는 원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원상의 핵심 측근에 대해 간신 비무기로 비유하는데 이는 비무기가 초나라 평왕과 태자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어린아이였던 소왕을 내세워 권세를 유지하려다 실각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심배를 저격하는 발언이지만 여기서도 원상이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아이라는 인식은 심배의 인식과 동일하게 드러난다.
원상은 원소의 막내아들로 아들들 중 가장 총애를 받았으며 전론에 따르면 원소의 후처 유부인 소생의 자식이다. 《후한서》에 인용되어 남아 있는 심배의 글에 따르면 효심이 대단하며 타고난 성품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岐嶷)고 하는데 이 기록을 원상이 적어도 6, 7세 가량의 유년기부터 심배와 면식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면 원상은 원소가 기주를 장악한 이후 시점에도 아직 한참 어린 나이였다고 볼 수 있다.
원소가 낙양을 떠난 이후 기주를 장악하는 초기 시점까지 원소의 처지는 상당히 곤궁했고 원소의 처자식도 192년에는 원소를 떠나 연주자사 유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공손찬에게 인질로 붙잡힐 위험에 처하거나 193년에 업성이 합락되면서 흑산적에게 일시적으로 인질로 붙잡히는 등 상당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심배의 말대로 6, 7세 무렵부터 신동이라 이름이 났다면 그는 아마 이 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의젓한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무제기>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서》에 따르면 원담과 원희는 190년 즈음에 이미 장성하여 원소를 곁에서 수행하고 있었기에 원상은 다른 형제들과 적어도 10살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을 것이다.
2.1.2. 원담 폐출
조비가 저술한 전론에 따르면 원상은 원소의 막내아들이자 후처였던 유부인의 소생으로, 미모가 빼어나 자태와 얼굴 생김새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유부인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항상 원상의 재능을 칭찬했고 당시 유부인이 원소에게 크게 총애를 받고 있었던 데다, 원소 또한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장차 원상으로 후사를 이으려는 뜻을 품었다고 한다.이에 따라 원소는 원담을 형[3]의 양자로 보내 자신의 후계자 서열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청주자사로 삼아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시켰다.
한편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곽도와 신평은 원담이 생전 원소에게서 폐출된 것은 모두 심배의 이간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했고, 원담 또한 이를 듣고 그럴듯하게 여겼다고 한다.
원담에게 보냈던 편지에 쓰여진 유표의 인식대로라면 원상의 측근이자 핵심 실세였던 심배는 홀로 남겨진 고아를 충심으로 보필하던 계우나 주공단 같은 인물이 아니라, 생전 원소와 원담의 관계를 이간질하며 부추겨 원담을 내쫓은 뒤 어린 원상을 내세워 권세를 차지하려는 비무기 같은 소인배에 지나지 않으며 원담은 이러한 음모 속에 희생당한 측면이 있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이 편지가 쓰여진 목적부터가 원담을 달래기 위한 의도였고 원담의 폐출은 생전의 원소가 직접 판단하고 실행한 결과임에도 유표는 그러한 원소의 의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원소의 위대한 업적만을 예찬하며 이루지 못하고 남겨진 사명을 짊어진 아들로서 원담의 위치를 상기시키고, 폐출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심배 등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전론의 기록과 곽도와 유표 등의 주장에서 교차검증되는 바에 따르면 원담의 폐출에는 원소의 최측근이었던 심배와 봉기가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음이 거의 확실해 보이며, 원상의 친어머니이자 유표에게까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을 정도로 원담과의 사이가 극악이었던 유부인 또한 원담보다 원상이 낫다는 원소의 생각을 부추기며 원담 폐출에 일조했을 것이다. 심배, 봉기의 개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욱전의 기록에 따르면 심배와 봉기는 주인의 의중에 절대적으로 충성한다고 평가되던 원소의 최측근들이었고, 구주춘추의 평가와 비판의 예시들을 본다면 원담은 군사적으로는 유능했지만 사람됨이 기분파적이고 생각이 깊지 않아 정치가로서 부적절한 처신들이 유난스럽게 두드러지는 인물이었으며, 평소부터 심배와 봉기가 원담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전론의 기록을 감안했을때 원담에게 미움을 사고 있던 심배와 봉기는 적어도 후계 구도에서 원상을 세우기 위해 원담을 배제하겠다는 원소의 의중을 파악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영합하며 원담에 대한 원소의 개인적 판단을 확신으로 굳히기에 적절한 근거들을 제공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195년 즈음의 일이었으며 원담이 폐출되고 청주자사가 된 것은 훗날 원담이 청주를 기반삼아 원소 사후의 후계계승에 불복함으로서 원씨의 몰락을 불러온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원소가 이토록 원상을 총애한 이유에 대해 조비는 유부인의 부추김과 원상의 미모에 홀렸기 때문이라 분석했으며 삼국지의 저자 진수를 포함한 후대의 역사가들도 이 틀을 그대로 따랐으나 미모에 대한 편애만으로 후계구도를 뒤엎었다는 서술이 원체 터무니없는 터라 현대에는 원상의 어머니가 황성인 유씨 혈통이라는 점과 원소의 정치적 야심을 근거로 원상의 외가 쪽 권세가 만만찮았을 것이라 추측하거나, 원소가 청렴하고 겸손한 군자를 연기하는 이미지 정치로 명성을 얻은 반면 원소의 아들들은 술을 좋아하고 방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4], 특히 원담은 군사적 유능함을 입증하긴 했지만 행정의 무능과 함께 원소보다는 거의 원술을 연상케 하는 무뢰배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미 장성한 나이였던 원담, 원희의 정치적 결점들을 조명하는 진단들이 나타나기도 했다.[5]
미모로 원소를 홀렸다는 조비 등의 평가와 달리 심배는 원상의 검소하고 사려깊고 솔선수범하는 측면을 칭송했는데, 이 또한 일방적 찬양에 가깝지만 조비와 심배의 평을 적절히 감안하고, 원소 사후 조조와의 대결에서 원상이 보여줬던 어느 정도의 역량으로 미루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일정 수준의 역량과 자질을 가진 원상을 원소가 총애했고, 후계자로서 부적절한 특성을 보인 원담, 이렇다 할 자질을 보이지 못한 원희보다 원상을 좀 더 적합한 후계자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2.1.3. 관도대전
이후로도 청주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던 원담과 달리 원상은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진수의 《삼국지》와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200년 1월 유비가 서주를 차지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가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들의 병 때문이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이때 전풍은 고작 젖먹이의 병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쳐 애석하다면서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땅을 두들기며 탄식했고, 원소는 이 말을 전해듣고 전풍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원소의 아들은 3명이라는 서술이 있고 원담과 원희는 모두 이미 장성해서 외지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아픈 아들은 보통 원상으로 해석되나, 이때 전풍이 원소의 아들을 영유아 수준의 어린아이로 표현하고 있어서 원상이 아닌 다른 아들의 존재가 추측되기도 하며 삼국지연의에서부터 이때 아픈 아들이 원소가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인 오남이라고 서술됐다가 나중에 원소의 가족관계가 다시 언급되면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인 삼남 원상을 가장 총애한다고 서술되는 설정오류가 있어서 소설과 창작물마다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으로 각색된다.
일단 사서상의 서술은 원소의 아들이 셋이고 원소가 막내아들인 원상을 총애했다고 일관되게 서술되며, 당시 원상의 나이는 미성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황이 교차검증되기 때문에 당시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고령의 노인으로 묘사되는 전풍의 시점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나이였던 원상을 향해 애새끼 등의 표현과 유사한 비하적 뉘앙스를 깔고 지른 발언일 수 있다.
다만 《삼국지》 <우금전>에서는 우금이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유비를 치러 가는 사이 연진 사수를 명령받았고, 배후를 노린 원소에 맞서 영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는 서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원소가 배후를 치지 않았다는 통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이 기록을 소수 분견대를 통한 원소의 견제 시도로 선해하여 받아들이더라도, 소극적 태도로 유비의 패망을 방관하던 원소가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자 마자 한황실 재건을 명분삼아 대대적으로 남하하며 관도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원소의 관도대전 승리를 전제한다면 원소에게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었고, 유비가 원소의 대등한 동맹자로서 가지는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몸만 간신히 살아남아 원소에게 명분을 바치는 상황을 원소가 의도했다는 해석 또한 충분히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아들의 병 때문에 원소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위진시대의 조위정통론적 통설에서는, '아픈 아들'로 인한 원소의 불개입이 조조vs원소의 대립에서 조조의 승리에 발판이 되는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나타난 원소와 전풍의 언쟁은 전풍과 원소의 불화가 심화되는 계기였으며, 이미 싸우기도 전부터 원소의 패망을 암시하는 해석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6] 이 사건이 원소의 일대기에 있어서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이미 같은 사서 안에서도 해당 기사를 반박하는 기록과 정황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원소가 아들의 병으로 인해 출병하지 않았다는 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나, 적어도 위진시대의 주류적 관점에선, 원소가 천하대세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자진해 포기하고, 장자방 같은 명참모 전풍과 심각하게 틀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원상을 유난히 총애했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오록》에서는 원상의 동생으로 원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아들의 병이 사실이었다면 원매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하나, 오록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에서는 원소의 아들들이 원담, 원희, 원상 셋뿐이었다고 일관되게 서술되고 있으며, 《오록》과 함께 원매의 존재가 언급되는 둘밖에 없는 기록인 《조만전》에서는 원매가 원상의 형의 아들. 즉 조카라고 적고 있어서 오록의 기록과 상충되고, 오록이나 조만전의 저자들 역시 원매에 대해, "불분명하다." 고 서술할 정도로 원매의 실존 여부가 3세기 중국인들에게조차 불명확하게 받아들여졌기에, 원소가 아들의 병 때문에 출병하지 못했다는 설의 진위 여부 그 자체부터가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면 설득력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관도대전 시점에서도 원상은 여전히 13, 14세 정도의 나이였으므로 장성한 형들과 달리 눈에 띌만한 행보는 없었을 것이다.
2.1.4. 후계자 계승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 병이 들었고, 202년 6월, 유언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병사한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시계열상 이때 처음으로 원상이 등장하며, 범엽의 《후한서》에서도 원담 폐출 기사에서 배경설명으로 지나가듯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면 이때가 최초의 행적이다. 삼국지 원소전의 서술에 따르면 원상은 어리고 미모가 빼어나 원소가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죽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원담을 후계자로 지지했으나 평소 원담과 대립관계였던 심배와 봉기가 원담의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해 원소의 유명을 사칭해 원상을 옹립했다고 하며, 진수와 범엽이 당시 상황에 대해 참고한 원사료였을 《전론》에서는 이때 심배와 봉기가 유부인과 짜고 원소의 유명을 날조했고, 본심은 원담의 집권 방해에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유부인을 앞세워 유명의 진위여부를 보증하며 원상의 옹립을 정당화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한편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는 심배가 원담에게 쓴 편지가 직접적인 당대 사료로 인용되어 전해지는데, 여기서 심배는 '생전 원소에 의해 원담이 폐출되어 원소의 조카가 되고, 원상은 적사(=대를 잇는 아들)로서 족보에 적힌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적자가 후사를 잇는 것을 원망한다며 원담을 비난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원소가 생전에 원담을 폐출시켰음은 물론 원상을 적사로 세웠다는 심배의 주장은 심배가 원담에게 보낸 공식 서한에서 발췌된 것인데, 원담이 폐출됐다는 주장은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이 되고, 원상의 적사 임명 역시 심배가 사건의 전말을 아는 직접적인 당사자인 원담에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원소는 원상을 후사로 세울 뜻이 명백했다는 기록자들의 인식이 여러 차례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사망 시점에서는 후사문제에 대한 원소의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담을 지지했다고 서술되는 모순된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원상의 나이가 어리다는 서술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원소의 유명이 조작되어 원상이 옹립되었다는 사실들을 종합해 판단하면 원소는 생전에 원상을 법적 상속인 위치에 해당하는 적사로 지명하면서 분명하게 후계자로 의도하고 있었으나, 원상이 원소의 적사라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업현후를 제외한 원소의 모든 공식적 직위들은 양도나 세습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원소는 이에 대한 어떠한 안배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던 데다 원상이 나이가 어려 자체적으로 내세울 만한 입지나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어린 원상을 대신해 장성한 원씨의 일원이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청주자사인 원담을 원소의 후임자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원씨 내부에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심배와 봉기는 원소의 최측근이자 원소 부재 시 근거지인 기주의 행정권과 군권을 총괄하던 실력자들이었고, 하북 원씨의 막부정은 체제 정당성을 원소 개인의 정치적 권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7] 때문에 심배 봉기와 같은 실력자들이 원소의 유언을 명분 삼고, 유명의 진위여부를 원소의 처 유씨가 보증하면서 원담 지지여론을 누르고 원상의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이로서 원상은 대장군, 업후, 기주목, 유주,병주,청주 도독과 지절,부월,궁시,호분 등의 특진을 포함한 원소의 모든 공식적 직책의 승계를 주장했다.
《전론》에서는 이 무렵에 일어난 사건으로 유부인의 성품이 잔혹하고 투기심이 심해 원소의 시신을 염하기도 전에 원소가 총애하던 첩 5명을 다 죽여버렸고, 그녀들이 지하에서 원소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여겨, 그녀들의 얼굴에 검은 칠을 하여 그 형상을 훼손했으며 원상 역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들의 일가족을 모두 죽였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나, 이 설은 후술하겠지만 다분히 의심스럽다.
2.2. 조원전쟁
뒤늦게 기주에 도착한 원담은 이미 원상이 원소의 뒤를 이어 집권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수 없었으며 이끌고 온 군대를 여양에 주둔시켰다. 심배의 편지에 따르면 원담은 원소의 장례식에서 부여받은 복장과 장소에서도 원상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대우를 받았는데, 이는 원상이 원소의 적통을 이어받은 계승자이며 원담은 원소의 집안 사람일 뿐 상주가 아니라는 상징적인 의미였다.원담은 굴욕을 당하게 되자 여양에 주둔하며 거기장군을 자칭했는데 이는 원소가 처음 거병하며 자칭한 거기장군의 지위를 따라서 자칭함으로서 승계에 불복하고 원소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상당히 험악해진 분위기에서 원상은 봉기를 중재역으로 원담에게 파견했지만 마침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왔고, 원담이 급히 원상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심배 등이 이에 대해 거듭 논의하면서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으며 분노한 원담은 봉기를 죽인다.
원상은 군사를 나눠 원담에게 원군을 보내 주고는 싶었지만 원담이 군대를 빼앗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나서 원담을 구원했으며 심배는 업에 남아 후방 사무를 총괄한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서술은 이렇게 나타나나, 한진춘추에 인용된 심배가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봉기가 원소의 의지를 마음대로 곡해하여 친족간의 불화를 조장했다며 봉기를 악창과 종양에 비유해 비난하고, 원담이 의분을 떨쳐 간신 봉기를 죽이고 원상과 화해하며 조조와 맞서싸웠다고 봉기를 죽인 것을 칭찬하고 있으며, 원상도 원담의 뜻을 받들어 봉기 일족에게 궁형을 가했다는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을 통한 당시 상황의 재구성을 무척 혼란스럽게 한다. 범엽의 후한서에서도 심배의 편지를 인용하고는 있으나 해당 사건의 전말을 알기 어려워 비문에 가깝다고 여겼는지 봉기에 대한 비난을 지워버렸고, 빠뜨리기 어려운 큰 틀은 곽도에 대한 비난과 합쳤다.
원상은 원소 자신이 분명하게 의도했던 후계자이긴 했으나 대장군으로 하북을 장악하고 있던 원소가 중원과 조정을 장악한 조조와 전쟁을 벌이다 크게 패한 뒤 갑작스럽게 병사하는 시점에서야 역사 무대에 이름을 올렸고, '나이가 어리고 미모가 빼어난' 점이 유일한 특이사항으로 기록될 정도로 원소의 사망 시점 당시 원소의 개인적 총애를 제외하면 어떠한 돋보이는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원상의 실질적인 승계에는 이미 죽은 원소의 의지보다는 원소의 최측근이었던 심배 등의 추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으며 이들은 원담이 집권할 경우 정치적 보복을 받을 것이 분명하게 여겨질 정도로 원담과 매우 사이가 나빴다.
봉기의 죽음으로 원상의 유일한 후견인 포지션이 된 심배 역시 원담과 대단히 사이가 나쁜 인물이었고 원상의 어머니인 유부인도 원담과 사이가 나빴으며, 원담 또한 거기장군을 칭하는 등 순순히 숙일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공표했기 때문에 심배 등이 거듭 논의하며 증원을 반대했다는 기록과 원상이 군사를 나눠 원담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원담이 지휘권을 가로챌 가능성을 두려워해 직접 원담을 구원하며 심배를 업에 남겼다는 점에서 볼때 심배는 직접적으로는 원담이 칼을 돌릴 우려를 이유로 들어 증원을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심배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기왕이면 원담이 대신 봉기를 처리하고, 조조가 원담을 대신 처리해줬으면 좋겠다는 속내로도 읽힐 수가 있는 부분이었고 일단 원상이 몸소 친정에 나서면서 원상과 원담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으나 갈등의 요소는 여전히 도처에 깔려 있었다.
2.2.1. 여양전투
상황은 매우 불명확하지만 봉기의 죽음을 기점으로 원담과 원상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져 조조와 맞선 공동전선을 펼친 것으로 보이며, 202년 9월부터 후한서의 표현에 따르면 대전(大戰)이라고 서술될 정도로 여양에서 조조와 원상의 치열한 격전이 펼쳐졌다. 비록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했지만 원씨 측의 상황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원담이 여양성 서쪽으로 나가 성을 짓고 주둔하면서 원상과 같은 곳에 지휘부를 두지 않았다고 하며 이 성은 훗날 원담성이라고 불렸다. 원상은 서전에서 패하자 방어만 굳게 하면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시에 마등 등 서량의 군벌들과 연합하고 흉노의 선우 호주천을 사주해 조조 영역권의 서쪽 지역인 하동을 공격하게 했으며 상장 곽원을 하동으로 파견하고 외사촌인 병주자사 고간이 이를 지원했다.[8]원상이 조조 본대의 발을 묶는 사이 조조의 측면을 우회공격한 이 전략은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마등의 배신으로 도하작전 중 기습을 받은 곽원이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실패로 끝났는데, 마등이 조조에게로 돌아선 이유는 원씨가 흔들리고 있어 원상이 이기더라도 마등 본인은 조조의 보복을 피하기 어려워 보이니 차라리 조조의 위기를 구해주며 조조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9]
원상의 곽원을 통한 우회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여양에서의 본대간 대결도 6개월 째가 된 이듬해 3월에 조조의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지면서 원상은 여양을 포기하고 업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업까지 진군했으나 원상은 요격에 나서 조조를 격파하고 조조는 허도로 퇴각한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의 여러 기전에서는 조조가 승리만을 거듭하다 갑자기 허도로 돌아갔다고 기술함으로서 조조의 패배를 감추고 있지만, 곽가전에서는 연전연승하다가 갑자기 남쪽으로 유표를 치는 척 해 원씨 형제를 안심시키며 내분을 노리면 간단히 취할 수 있으니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철수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인데,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회군한 직후 그동안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죄를 물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관직을 박탈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포고령을 내렸고, 장료전에서 원상이 굳게 지켰기 때문에 업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록은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다.
아예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원상이 역격해 조조가 격파되고 허도로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전쟁이 조조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후출사표에서도 '여양에서 쫒겼다'라고 조조가 패배해서 쫒기면서 후퇴했다고 써 조조의 대표적인 패전으로 여양전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이 최종적으로 조조의 패배로 끝났고, 이 패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곡필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그러니까 곽가의 저 발언은 무슨 신기묘산의 책략이 아니라 조조가 원상에게 크게 패한 후 '쟤들이 서로 싸울때까지 후일을 기약하시죠' 수준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맨 위에서 나오듯이 원상의 생년이 187년이라고 가정했을시 원상은 겨우 15~16세 정도의 나이에 조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준 셈인데 당대 최고의 군략가인 조조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흑역사였을 것이다. 여양전투는 관도의 패배로 사기가 저하된 원씨 진영이 실로 오랜만에 원상의 주도하에 제대로 거둔 군사적인 승리였고 이로 인해 하북 내에서 미약했던 원상의 정통성과 정치적 파워도 한층 더욱더 상승했다고 엿볼 수 있다.[10]
2.2.2. 내전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원상에게 격파당한 조조가 황하를 건너 철수하자 원담은 이전 여양의 싸움에서 자신이 고전한 원인을 휘하 병사들의 갑옷이 낡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변호하는 한편 조조군의 사기가 낮으니 추격해 황하를 건너는 사이 급습하여 궤멸시키자고 제안하지만 원상은 의심하며 이를 거절했으며 업에 계속 머물고 있던 원담에 대한 병력 증원과 무기의 지원을 중단한다.원상은 모처럼 승전을 거둬놓고도 전과 확대에 소극적이었으며 이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청주로 돌아가라는 종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조의 본대가 큰 피해없이 퇴각을 마치고 후위대가 여양에 남아 원씨를 감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원담이 불만을 표했던 무구의 교체까지 거부하며 원담의 청주행을 종용하는 것은 원담의 도움을 빙자한 오지랖이 필요하지 않으니 더 이상 날쳐대지 말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얼른 돌아가서 얌전히 명령이나 기다리라는 오만불손한 태도로 인식될 여지 또한 충분히 있었으며 원담은 크게 분노한다.
이때 곽도, 신평은 원소가 생전 원담을 폐출시킨 것이 모두 심배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며 원상의 배후에 있던 심배를 비난했고, 원담은 이를 명분삼아 업성의 외문에서 원상을 습격하나 패배해 근거지인 평원으로 달아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203년 4월?)
《삼국지》 <왕수전>에 따르면 원담이 패배하고 업에서 쫓겨나자 원담의 근거지였던 평원국에서 부하장수 유순이 반기를 들었다. 이 반란에 청주 내 여러 군현이 이에 호응했는데 이 반란자들이 조조와 허도 조정에 줄을 댔다는 기록은 전무한데다 거창한 반란의 규모와 달리 이들은 이후 기록 속에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아마 친 원상파 봉기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원담은 청주를 벗어나 기주 동북면의 남피로 달아나는 등 청주 내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원담은 청주별가 왕수의 구원으로 위기를 넘기고 지지세력을 재차 결집시킬 수 있었으며 청주와 인접한 기주 동쪽 경계의 군현들을 약탈한다.
원담이 원상에게 패한 뒤 휘하세력들의 이탈과 친 원상파 봉기라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동안 원상의 행보는 심배의 편지에서 확인되는데 그는 원담의 위기를 틈탄 공세를 펼치기는 커녕 세력을 정비한 원담이 공세를 개시해 드넓은 기주를 가로질러 업성이 속해 있는 위군의 경계까지 접근해 오는 순간까지 군사적 결단을 관망했으며, 원담이 위군에 진입하자 그제서야 친히 군을 이끌고 응전하여 위군 동부의 관도현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원상은 서전에서 패해 달아났고 원담에게 추격을 늦추는 자비를 요구하는 등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원담이 추격해 오자 험지에 포진하며 복병을 숨겨 원담의 주력군을 일시에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11] 원담은 다시 근거지인 평원군으로 달아났으며 원상이 군사를 일으켜 평원을 공격하자 궁지에 몰린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며 조조를 끌여들이게 된다.
당시 유표를 치기 위해 형주와의 접경지역인 서평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는 원담의 투항을 받아들여 재차 북상을 시작하는데 곽가전에서는 조조가 연전연승하던 중에 유표를 치는 척 해서 원씨 형제를 안심시켜 내전을 유도한 뒤 개입할 계획을 세워 철수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유표를 치기 위해 서평에 주둔하다가 원담이 투항해오자 이를 받아들여 원상을 쳤다는 서술 뿐이며, 심지어 신비전과 순유전에서는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입을 반대했고 조조 역시 원씨들끼리 서로 싸워 피폐해지게 만들겠다면서 시큰둥하다가 순유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꿔 개입을 결정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유표를 치는 것은 원씨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곽가전의 서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애초에 연전연승했다는 곽가전의 서술부터가 이미 거짓이라는 게 명백하기 때문에 유표를 치는 척 해 원씨의 내분을 노린 것이었다는 곽가전의 서술 역시 조조의 퇴각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된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 원씨들이 서로 싸워 피폐해지도록 만들려 했다는 서술에 따르면 오히려 조조 측은 원씨의 내전이 시작되면 장기화될 것이라 예측하고 그 사이에 사이 남쪽의 유표를 정리하려 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실제로 원담이 이미 한 차례 패해 업성에서 쫓겨나고도 청주의 자원을 동원해 업성이 속해 있는 위군 영내까지 재차 침입했고, 관도에서 참패하기 이전까지는 오히려 원상 측이 수세에 몰려 있었다는 점에서, 또 정통성과 카리스마에 약점이 뚜렷했던 원담이 원상을 끌어내리고 후계자를 자처할 경우 또 다른 내부적 도전을 받으며 혼란이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관도현에서의 싸움으로 원담이 치명적 타격을 입으면서 기존의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수세에 몰리는 상황은 원소의 정통 후계자인 원상이 도전자를 축출해 권위를 확고히 세우며 원소의 카리스마를 대체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원씨의 내전이 장기화될 것이란 예상 자체가 틀어진 상황에 가까우며,[12] 통일된 원씨는 천하의 근심이 될 것이니 지금 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개입을 주장하는 순유의 발언 역시 이런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조조를 설득하는 내용이기에 원상이 불리한 구도에서 역전을 성공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조조의 경계심을 증폭시키며 조조가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원담의 투항을 받아들인 조조가 황하를 건너 여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상은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온다.
유표가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무렵 원상의 행보가 잠시 언급되는데 편지에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 원상은 처음에는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보고를 전해듣자 이를 오보로 여기고 강력하게 부정하며 재차 확인했으나 여러 방면으로 정보가 거듭 들어오면서 원담의 투항이 명백한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자신과 원담의 관계를 알백과 실침의 고사[13]에 비유했다고 한다.
2.2.3. 업성 공방전
<무제기>에 따르면 203년 10월. 여양에 도착한 조조는 자신의 11남 조정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켜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원담과 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조조까지 재차 북상하여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원상의 부하였던 여광, 여상은 원상에게 반기를 들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고, 조조는 이들을 열후로 삼는다.한편 심배는 원담에게 서한을 보낸다. 이 글은 삼국지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와 후한서 원소전에 제각기 인용되어 전해지고 그 내용이 일부 상이한데, 심배 시점에서 원소 사후의 정치상황을 서술, 논평하며 원소의 정당한 상속권이 오로지 원상에게 있음을 강변하고, 원담을 향해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제거해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화해할 것을 권하며, 그렇게 못 하겠다면 기주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원담의 해악을 쳐 없애겠다는 최종 경고의 내용이 담긴 것은 동일하며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 준비를 더욱 굳게 했다.
어환의 《전략》에 따르면 원담은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서로가 누차 교전한데다 곽도에게 협박당했기에 화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전략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이 시점에서 원담은 실권을 거의 잃고 있었고, 스스로도 내심 후회하기는 했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록상 별다른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으나 조조가 여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정황상 이듬해 정월까지 원상과 조조의 대치 국면이 이어진 듯 하다.
한편 원상은 교위 유견, 황하, 전대 등을 유표에게 파견하여 수 차례에 걸쳐 친서를 전달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유표의 답서만이 전해지는데 이 답서는 후한서 원소전과 위씨춘추, 전후한문 등에 인용되었고 역시 기록에 따라 일부 내용이 상이하지만 대체로 원상의 승계를 인정하면서도 친족간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은 오랑캐도 비웃을 일이니 화해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고, 동맹이라 한들 원상을 돕기 어렵다며 단지 원담에게 따로 친서를 보내 화해를 중재해주겠다는 내용이다. 당시 정황과 답서의 내용으로 볼때 원상은 유표가 조조의 배후를 쳐서 개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유표는 원담 사이에서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이를 완곡히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14]
원상은 원담과 유표를 향한 외교적 시도들이 소득 없는 결과로 돌아오자 심배가 서한에서 공언했던 대로 원담을 치기 위한 친정을 준비했으나, 원담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여양에서 대치하며 언제 업을 노리고 북상해올지 모르는 조조의 움직임에 충분히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204년 1월. 조조는 다시 황하를 건너 돌아갔고, 수로공사를 벌여 수운을 통한 군량 수송로를 확보하는 등 장기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를 기점으로 행동에 나서는 원상 측의 포진과 배치는 무제기와 원소전, 견초전,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의 영호소전 등을 통해 확인되는데, 원상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평원으로 원담을 치러 향했고, 이부와 진림 등도 이때 원상을 따라 본대에 같이 종군했음이 확인된다. 업의 수비는 심배와 소유에게 맡겼고, 견초를 고간이 있는 상당에 파견하고, 윤해는 병주와 기주의 경계지역인 모성에 주둔했고, 가문이 원소를 의탁해 업성에 살던 병주 호족 출신의 영호소 또한 이때 모성에 배치되었다. 저곡은 모성의 배후 도시인 한단에 주둔하고 있었다.
견초와 같은 원상의 휘하 장교단이 병주로 파견됐고, 원상은 병주와 인접한 경계지역에도 별도의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업성에 살던 병주 출신자의 파견 배치 또한 확인된다는 점에서 원상의 포진은 병주군과의 원활한 작전연계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의도가 뚜렷했고, 본대가 원담을 치기 위해 동정에 나서는 사이 변고가 생길 경우 조조가 업성의 수비력에 붙잡힌 사이 기주 북부의 주둔군이 고간이 이끄는 병주군과 합류해 기각지세의 형태로 조조를 압박하는 것이 원상 측의 기본적인 작계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작계가 어떤 논의를 거쳐 수립되고 인사의 배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인지는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없으나, 심배가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을 것임은 분명하고 원상과 함께 종군한 주요 막료로 확인되는 진림, 음기와 이부 등도 제각기 의견을 보탰을 가능성이 크며, 이후 업성 포위 당시 업성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 태산태수 응소도 이 구상에 관여했을 여지가 있고[15] 원상은 이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형태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204년 2월. 원상이 원담을 치러 평원으로 가자 조조는 황하를 건너 북상해 기주를 공격한다. 이때 업에서는 소유가 조조에게 내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심배에게 발각되어 업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패하여 조조에게 달아난다. 한편 조조는 황하를 건너고 여양을 거쳐 불과 업에서 50리 떨어진 원수(=洹水.황하의 지류)까지 순조롭게 진군해 소유와 합류하고 곧바로 업을 포위했는데, 심배가 비록 주요인사의 내응을 적발하는데 성공했으나 신속한 제압에 실패하고 업성 내에서 소유의 군사들과 시가전까지 벌이게 되는 등 시간을 지체하게 되어 요격 기회를 놓치고 대응이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업을 포위하고 4월까지 토산과 땅굴을 만들며 업을 공격했으나 공성에 실패하며 병력만 잃고 소득이 없자 조홍에게 포위망을 맡긴 채 주변지역 공략에 나서 모성에 주둔하던 윤해를 격파해 고간이 다스리고 있던 병주와의 연결을 끊었고, 한단에서 저곡을 격파했으며 역양령 한범과 섭장 양기의 항복을 받는다. 차근차근 업성의 목이 죄어지는 상황에서도 수비전략의 핵심적 축을 맡아야 할 고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 형세를 관망하듯 보이는 고간의 소극적인 면모는 기록상의 부실도 원인이겠지만 이후 고간의 행적에서도 드러나듯 조조와 원상의 대립을 틈타 자립할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5월. 업으로 되돌아온 조조는 전략을 수정해 토산과 땅굴을 허물고 장수(=章水. 황하의 지류)의 물길을 바꾸는 공사를 벌이는데 심배는 조조가 물길을 파는 속도를 얕보고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았지만 조조는 해가 지자 전력을 동원한 철야작업으로 너비와 깊이가 2장(약 5m)에 이르는 참호를 40리(약 16km)에 걸쳐 단 한나절만에 파버리며 업을 수몰시켰고, 수공으로 성내의 식량이 썩은 상황에서 8월까지 포위가 지속되자 아사자가 속출해 급기야 성내 인원의 절반이 굶어죽는 등 업의 상황은 막장이 된다.
한편 평원에서 원담과 대결하고 있던 원상은 업의 급보를 듣자 황급히 귀환하여 7월에 업에 당도한다. 일찍이 조조는 원상의 귀환 소식을 듣자 원상이 큰 길로 회군해 온다면 마땅히 피해야겠지만, 서산으로 향했다면 포로로 잡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고, 원상이 서산으로 행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미 기주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기뻐한다.
서산에서 한단을 경유해 주전장인 위군에 당도한 원상은 업에서 17리 떨어진 부수에 도착해 영채를 세워 이부를 통해 자신의 귀환 사실을 알렸다. 이부는 조조군 장교로 위장한 채 포위를 뚫고 업성에 잠입해 횃불과 봉화를 통해 서로 연락했으며 이부가 재차 포위를 속이고 무사히 귀환하자 원상은 조조의 포위망을 야습했고, 심배 또한 군사를 내보내 호응했지만 이 양면 야습작전은 심배, 원상이 나란히 조조에게 나란히 격파되며 참패하고 만다.
조조는 패주한 원상을 추격해 포위했는데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원상은 진림과 예주자사를 지낸 음기를 사절로 보내 강화를 시도하지만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급하게 포위한다. 이에 원상은 밤중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업성 남부의 기산(祁山)에 주둔했고[16], 추격해오는 조조와 회전을 벌이기 직전 부하장수 마연과 장의가 배반하여 조조에게 호응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단기로 달아나게 된다.
조조는 원상군의 치중을 모두 노획했으며 원상의 의복과 원소에게서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대장군,강향후의 인수와 절월 등 개인 소지품까지 모두 거두어 이를 업성의 병사들에게 보이는 등 원상의 죽음을 암시하는 선전공세로 업성 수비군의 사기를 꺾었다. 얼마나 동요가 심했는지 진수는 아예 '업성이 무너졌다.' 는 표현을 쓰고 있다.
심배는 오래된 전투로 조조군 역시 지쳐 있고, 유주의 원희가 구원군을 보내올 것이라고 성내의 사기를 독려하며 버텨 보려 했고, 포위망을 가까이 시찰하던 조조를 저격해 쇠뇌를 몇 발 맞추는 부상을 입히기도 했지만 8월에 성문교위를 맡고 있던 심배의 조카 심영이 항복하여 성문을 열고 조조군을 들이면서 업성은 함락되었고, 이때 심배는 맞서 싸우다 패하고 사로잡히자 조조의 투항 권유를 거절하고 조조와 배신자들을 비난하며 원상이 달아난 북쪽을 향해 앉은 채로 참수되었다.
모든 상황이 원상이 최초에 판단하고 의도했을 작계대로 순순히 돌아갔다면 심배가 만전상태로 업을 수비하며 고간이 이끄는 병주군이 기주 북서부에 주둔하던 윤해, 저곡 등과 합류해 기각지세를 통해 조조를 압박하는 사이 원담을 응징하고 돌아온 원상 본대가 합류해 조조를 일시에 몰아치는 형국을 그려볼 수 있겠지만, 원상의 본대 규모가 1만 수준이었다면 항전하는 원담을 응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이기에 실제 역사에서 원상의 방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원상의 평원 공격 또한 난이도가 높은 도전이었다.
심배는 원담에게 보낸 신서의 말미에서 원담이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기주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원담의 해악을 쳐 없엘 것이라고 비장하게 선언했지만, 무제기에서 업의 급보를 듣고 회군을 결정하던 시점에서 원상 본대의 숫자를 1만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원상 본대 외에 업성과 기주 북부의 분군 존재를 감안한다 해도 기주군의 절대적인 병력 자체가 너무 적었고, 관도대전의 패배와 원소의 사망 이후 계속된 전쟁과 내부의 정세 혼란으로 원씨의 세력이 확 쪼그라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헌 등의 반란 기록을 볼때 원담이 패한 이후 원담이 다스리던 청주 전역에선 원상에 호응해 봉기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었고, 원상은 여기에 더해 원희의 조력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담의 상황은 원상보다도 더 좋지 않았고, 업성을 장악한 조조가 호적을 살펴보고 기주에서 30만을 징병할 수 있겠다며 기뻐한 것처럼 기주 자체는 여전히 체급이 큰 주였기 때문에 원상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대장군부의 계승자로서 단일 대오를 세우며 기주를 중심으로 다시 원씨의 세력들을 재정비한다면 천하의 향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으며, 원상 같이 자신의 위치를 오로지 선대의 개인적 지명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후계자로서 이러한 행보는 원담과의 화해가 거부당한 시점에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업성 함락의 분기점으로 작용했던 원상의 회군 시점에서 조조가 원상이 큰 길로 바로 향한다면 피해야겠지만 돌아서 서산으로 향한다면 이미 기주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자신한 이유에 대해 사서 내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평원에서 회군하던 원상 본대의 병사수가 1만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조조의 군사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업을 포위하고 있던 수공을 위해 너비와 깊이가 2장(약 5m)에 이르는 참호를 40리(약 16km)에 걸쳐 단 한나절만에 팔 정도의 여력이 있던 것으로 볼때 절대적인 규모 자체가 원상에 비해 확연한 우위였을 것이며, 서산에 도착한 원상이 업으로 향하며 경유한 한단은 저곡이 주둔하던 곳이었고, 서황전에서는 앞서 조조에게 투항했던 역양현령 한범이 다시 원씨 측으로 배반하면서 성을 지키며 항전했기에 조조가 서황에게 토벌을 병했으나 서황이 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 성패에 대해 진술하자 한범이 후회하며 다시 투항했기에 서황은 조조에게 항복을 대범하게 받아주어 하북의 항전 의지를 꺾어야 한다며 한범을 변호했고 조조가 이를 옳게 여겼다는 기록을 전한다.
역양은 한단과 인접한 현으로 저곡이 격파되면서 조조에게 항복한 상태였기에 원상은 저곡이 있던 한단을 경유하면서 역양의 재투항을 받아냈을 것이며, 원상이 행군했던 서산은 병주와의 경계지인데다 윤해가 주둔하던 모성과도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서산에서 모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섭현은 모성의 윤해가 격파당하면서 현장 양기가 조조에게 투항한 상태였고, 고간은 저곡과 윤해가 조조에게 격파당할 때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 원상이 서산에 당도하는 순간까지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17] 고간의 대장군부 이탈 혹은 독자노선화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며 원상은 늦어도 서산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일이 단단히 꼬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토록 서산에서 한단을 거쳐 업으로 회군하는 원상의 회군로 설정은 병주 접경지역에 주둔하다 조조에게 격파당한 잔병들을 수습하며 고간의 원군에 의존하려는 의도 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려운데, 고간의 소극적 태도를 조조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면 조조는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집결시킨 한타 싸움으로 업을 구원하려는 원상의 의도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임을 예측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평원에서 업으로 바로 향하는 대로는 위군 남부를 거쳐 업으로 도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피해야 할 것이라고 조조가 정말로 두려워한 것은 원상이 업성을 포기할 각오로 위군 남부에 도달해 황하를 거쳐 길게 늘어져 있던 후방을 견제하면서 적지에 고립되는 상황이었으나, 원상은 부질없는 고간의 구원에 매달렸으며 결국 불충분한 전력 보강이 대규모 야습에 양동작전까지 시도하는 올인성 전술로 이어지면서 원상의 패배를 결정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상이 업에서 조조에게 패한 이후 벌인 항복협상이 결렬되었던 것은 그 결과를 제외한 기록이 전무해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원담과 고간이 조조에게 일시적으로 투항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원상의 위치를 유추 가능한데, 원소가 이끄는 대장군부의 수하이기 이전에 이미 조정의 정식 임명을 받은 관리였던 원담과 고간은 투항 당시 조조가 이끌고 있던 조정과 적대한 것에 대해 원소의 대장군부에 책임을 돌리는 형태로 조정 질서에 복귀하며 현상유지를 보장받았을 것이나, 원소의 개인적 지명 외에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할 수단이 전무했던 원상은 원소의 반역행위에 대해 원소의 적자로서 스스로 자복하며 모든 위치를 내려놓고 혐의를 소명하는 무조건 항복의 형태가 아닌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었고, 조조가 원상의 정치적 위치를 인정하는 것은 원상과에 승부에서 크게 패하거나 혹은 외부 정세의 변화로 승부를 가리기 어려워 조조 본인이 아쉬울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원상이 두려워해 진림과 음기를 보내 투항을 구걸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는 구절 외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나, 항복협상이 결렬됐다는 점과 이후의 행보에서 볼때 원상은 적어도 이러한 방식의 항복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했고, 조조의 입장에서도 원상의 위치를 협상의 주체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이것이 항복협상이 아닌 사실상의 강화협상임을 의미하기에 조조 또한 원상의 제안을 항복의사가 진지하지 않거나 숙고할 가치가 없는 기만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이나, 일단 원상이 진림과 음기를 사절단으로 파견해 항복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볼때 그는 패배 이후 가신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채 여론에 떠밀려 협상장을 열었을 것이다.
협상 결렬 이후 혈로를 뚫고 남구에 주둔하며 조조의 후방을 압박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재차 추격해오는 조조와의 교전을 회피하지 않다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이탈해 조조에게 붙어버린 마연,장의의 배반으로 크게 패하고 원상 자신도 인수와 의복 등을 포함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상징물을 전부 잃은 채 몸만 건져 단기로 중산으로 달아나는 점을 볼때 업성에서의 1차 패배 당시 원상군은 아직 전력을 보전하고는 있었지만 비관론을 막지 못하면서 내부 의견이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원상 또한 1차 패배 이후 지도력과 카리스마의 한계로 가신단 통제에 실패한 채[18]내부 여론 속에 관망하는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대세가 결정났다고 파악한 장수들의 사기 저하를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조조와의 회전이 시작되는 순간 휘하 부대가 이탈해 아군을 공격하는 최악의 형태로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2.2.4. 거듭되는 도주
업이 함락되기 직전, 조조에 패배하여 군대가 와해된 원상은 단기로 기주 북부의 중산으로 달아나 세력을 수습했다. 병주의 고간은 업성의 위기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 시점까지는 아직 원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은 상황이라, 원상에게서 파견되어 있던 견초는 고간에게 원상을 맞아들이라 권한다. 물론 고간은 이미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그대로 원상의 부하들을 내쫓았고,[19] 업성의 함락 소식을 접하자 조조에게 투항한다.원상이 회군하여 조조와 싸우는 동안 원담은 반격에 나서 감릉,안평,발해,하간 등 기주 동부지역을 점령했고, 원상이 있는 중산까지 공격하면서 크게 패한 원상은 유주에 있던 둘째 형 원희에게 달아났으며,원상이 그나마 수습한 무리들은 이때 원담이 모두 거둬들였고,[20] 원희는 중산과 인접해 있던 탁군 고안현에서 원상을 맞아들인다.
원희가 주둔하던 고안이 기주 북부의 하간, 중산과 인접한 유주의 접경지대였다는 점에서, 원상의 중산 주둔은 산세의 지리적 이점에 의지해 원담, 조조를 방어하며 유주의 지원을 기대 반격을 꾀하는 판도로 볼 수 있고, 원희의 고안 주둔 역시 원담의 반격을 견제하는 포진이라 해석될 수 있지만, 원담이 기주 동부 전역을 석권하고 탁군과 인접한 발해와 하간, 중산까지 치고들어가는 동안 사서상 드러나는 원희의 행적이 전무한데다, 스스로 원상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던 원담, 고간과 달리 이쪽은 심지어 정말로 원상을 지지하며 수장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트롤러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4년 11월, 조조는 원담이 무단으로 기주의 절반을 차지한 것을 비난하며 정략결혼을 파기하고 원담과 전쟁을 벌인다. 유방전에 의하면 이 당시의 탁군태수는 유주 어양군 사람 왕송으로 그는 "대세가 조조에게 있으니 지금 먼저 항복하면 상을 받겠지만, 나중에 항복하면 처형당할 뿐."이라는 유방의 조언에 따라 조조가 원담과 싸우던 무렵에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원상과 원희가 주둔하던 고안현이 탁군의 남서부 방면 속현이었음을 감안하면 탁군태수의 이탈은 심각한 위협이었을 것이며, 조조는 남피에서 저항하던 원담을 공격하면서 별도로 장합을 보내 탁군 남동부의 옹노현을 공격한다.[21]
205년 1월, 원담이 조조에게 패사하고 남피가 함락되자, 원희의 부하인 장남, 초촉 등은 원상과 원희를 공격했고 원상은 원희와 함께 만리장성 이북 오환족의 영역으로 달아났으며 원상과 원희를 몰아낸 초촉은 유주자사를 자칭하며 수만명의 군사로 원상을 배반하고 조조에게 투항하도록 유주 각 군현의 태수, 현령들을 협박하여 조조에게 유주를 바친다. 원담의 패배로 조조의 기주 장악이 확실시되자 유주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왕송의 배반을 시작으로 조조에 대한 투항이 가속화되며 급속도로 유주의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2.3. 반 조조 운동가
원상의 행적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실린 원소의 전기에 원담과 함께 부록격으로 붙어 있으나 원상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나고 원담이 참수된 이후로 원소전의 기록은 극히 간략해지기 때문에 이 시기 원상의 행보는 무제기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행적들을 통해 재구성되는데 무제기에는 업이 함락되자 조조가 원소의 일족을 보호하고 잡다한 비단과 솜, 양식을 공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조조는 업의 원씨 일족을 보호한 것과 대조적으로 원담의 처자식들은 모조리 죽였는데 이러한 행보는 원소에 대한 조조의 개인적 감정에 따른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업이 함락되고 원담이 패사하고 고간이 항복하며 원희가 영지에서 쫓겨난 시점에서 조조의 절대우위는 명백해진 상태였고 원상이 여전히 살아 있었기에 업성의 원씨 일족은 인질로서의 가치 또한 고려되었을 것이다.그러나 한 때 업성에서 궁지에 몰리자 조조와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던 원상은 북방으로 달아난 이후로는 오히려 대화의 여지조차 없는 노골적인 반조조 정치가의 행보를 보이며 조조와 대립각을 세운다.
그는 비록 만리장성 이북의 땅으로 달아났으나 대장군부의 정치적 위치를 지지하던 오환족의 실력자 답돈과 손잡고 조조에게 불만을 가진 하북의 여론과 원소의 후광을 이용해 상당한 세를 결집시켰으며 대대적인 반조조 봉기를 선동하며 적극적인 공세전략에 나서 유주에 대한 조조의 통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물론 원상의 한계 또한 뚜렷했다. 그는 원담, 원희, 고간 등과 달리 한나라 중앙정부의 어떠한 인가조차 받지 못한 채 단지 반조조의 기치를 내걸던 대장군부와 원소 개인의 후광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입장이었으며, 나이 또한 어렸던 데다 그의 상대는 당대 제일의 군략가인 조조였기에 그가 유주에서 게릴라 활동으로 조조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수준을 넘어 유주 전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기주와 청주까지 연이어 세력을 회복하며 조조와의 패권다툼에서 승리하고 한말 정치의 대권주자로 떠오를 가능성은 엄밀히 말하면 매우 희박했으나 적어도 이 무렵에는 상당한 기세를 타며 나름의 규모와 단결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조조도 마냥 방심하다가는 호되게 얻어맞을 수 있었다. 건안의 정치 질서에 어떤 변수와 불안정성을 가져올 지 모른다는 점에서 원상은 조조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대단히 거슬리는 존재였다.
2.3.1. 오환 망명
한 제국은 한에 투항한 오환을 북방의 변경 각지에 흩뿌려 놓았다. 오환족은 지파별로 나뉘어 분열된 채 오환교위의 통제를 받았지만, 영제 말기에 제국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우북평,요서,요동속국의 3군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던 오환족 족장들은 제각기 왕을 자칭했고, 가장 세력이 큰 요서오환부의 구력거를 중심으로 집단행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면서 삼군오환의 난[22]을 일으켜 하북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난은 공손찬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유우의 유화책으로 삼군오환은 장거, 장순을 축출한 채 왕 자리를 인정받으며 자율적 질서를 유지했고, 유우 사후의 삼군오환은 혼란을 틈타 오환교위 형거를 죽이고 혈통만 한족일 뿐 사실상 오환족이었던 염유를 오환교위로 내세워 유명무실한 통제를 받았다.유우의 죽음을 전후해서 구력거 또한 죽었고 구력거의 조카인 답돈이 그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답돈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기존의 삼군오환 세력은 물론, 규모는 가장 컸지만 삼군오환과 따로 놀던 상곡오환부까지 포함해 수백 단위로 일컬어지는 오환족 정치체들을 자신이 주도하는 연맹 아래 통합시키는 성과를 이끌어냈으며, 원소와 공손찬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원소에게 합류하며 공손찬의 멸망에 큰 공을 세운다. 원소는 황제의 명령을 사칭해 답돈을 오환선우로 삼아 그를 오환 전체의 지배자로 인정했으며[23], 동시에 원씨 일족의 여자를 자신의 양녀 자격으로 시집보내며 답돈을 사위로 삼았다.[24]
이후 좌선우,우선우였던 요동오환부의 소복연과 상곡오환부의 난루가 구력거의 아들 누반을 오환선우로 추대하자 답돈은 누반에게 선우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왕으로 강등되었으나, 본인의 주도면밀함과 원소의 후원 덕분인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은 답돈이 차지했다.
답돈이 선우 자리에서 내려간 이후로도 삼국지 본전의 기록에서는 조조 측 시점에서 답돈을 선우라고 칭하는 표현들이 나타나는데, 본디 원소가 답돈의 선우 자리를 중개하면서 조정에서는 답돈이 오환선우로 인식되고 있었으나, 이후에 나타난 오환족 내부 정치상황의 변화는 당시 조조와 조정의 입장에서는 자세히 알 방도가 없었고[25], 답돈은 왕으로 강등된 이후로도 여전히 오환족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실세였기에 이러한 인식은 딱히 정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상이 답돈에게 망명한 것은 이런 연고에서 비롯되었는데, 답돈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재기를 꾀하여 유주에서 쫓겨난지 3개월 만인 205년 4월, 원상,오환 연합군은 어양군 일대를 침입해 조조가 파견한 선우보를 공격했으며 조조에 대한 반란을 사주해 유주자사와 탁군태수를 죽였다.[26] 4개월 뒤인 8월에 조조가 직접 나서 반란의 중심인물인 고안의 곽노, 조독을 참수하고 선우보를 구원하러 광평으로 향하자 그대로 만리장성을 넘어 달아났다.
2.3.2. 답돈과 결탁하다
물론 모든 오환족 세력이 원상과 답돈처럼 대장군부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일부는 이탈하기도 했다. 오환교위 염유는 한족 출신이긴 했지만 본디 삼군오환 세력의 부역자이자 어린시절부터 오환족 마을에서 자라 오환족 내부에서도 같은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경계인적 정체성이 두드려진 세력가로서 내전으로 인한 한나라의 혼란이 본격화되자 기존의 정식 오환교위 형거를 죽이며 오환교위를 자칭한 인물이었고, 원소의 묵인과 후원으로 오환교위의 위치를 인정받으며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부역했지만 원소가 조정과 틀어지게 되는 관도대전 시점부터는 조조에게 따로 사절을 보내 오환교위직을 재차 인정받는 등 조정에 줄을 대며 조씨와 원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원담이 남피에서 조조에게 패사하며 대세가 넘어가는 것이 확실시되자 곧바로 자신의 부중을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했으며 조조의 삼군오환 원정에도 앞장서서 참여했다. 조조와 원담의 남피전투 당시 원담에게 기병 5천을 원군으로 보내려던 요동오환부의 소복연은 본디 원소 휘하에서 오환돌기를 지휘하다 업성 공방전 이후 조조에게 투항했던 견초의 설득에 결정을 물리고 조조가 이끄는 조정을 인정했던 적이 있었다. 이후 소복연과 요동오환부는 입장을 번복해 대장군부 지지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나, 오락가락하는 소복연의 행보와 염유계의 이탈, 답돈 본인부터가 선대 족장이던 구력거의 적자이자 사촌동생이었던 누반에게 선우 자리를 물려준 채 오환족 내부에서 형식상 왕으로 강등된 위치였다는 점은 답돈이 실력자라고는 하나 연맹을 안정적으로 이끌던 위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답돈이 한나라 정계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소의 중개가 필요했을 뿐이라면 답돈은 원씨 형제의 머리를 베어 조조에게 바치며 염유처럼 조조라는 새로운 스폰서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조씨와 원씨의 승패가 명백해지며 대세가 드러나는 시점에서 원상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원상과 연대해 병력을 전개하는 것으로 대장군부 지지 의사를 밝히며 조조와 오환족의 대립각을 세웠다는 점에서 비범했는데, 사서상 드러나는 답돈의 의도와 목적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는 일단 원소의 사위이기까지 했던 만큼 원씨와 같이 엮여있던 것이 워낙 많았고, 대장군부와 사공부의 대립이라는 한 제국의 정치판 속에서 황제에 사대해야 할 오환선우라는 위치로 조조를 비난하는 원상의 입장에 편승했다는 것을 볼때 전쟁이 오환족의 조력을 통한 원씨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답돈이 분열된 오환족의 통합을 이뤄낸 성공적인 소수민족 지도자이자 원상과의 관계를 통해 한나라 정계까지 아우르는 거물이 될 것임은 뒤따라올 당연한 기대값에 가까웠고, 오환을 칠 것을 유세하는 곽가 또한 답돈이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품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답돈은 비굴하게 항복하며 조조에게 영합하기보다는 삼군오환 세력의 대장군부 잔류를 주도하고 원씨 측의 조원전쟁 승리를 이끔으로서 기존에 자신이 가지던 오환족 정치 내에서의 불안정한 위치를 해소함과 동시에 과거 공손찬을 격파하고 백만 위에 웅거하는 오환선우로서 군림하던 리즈시절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영광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10월에 업으로 귀환한 조조는 대대적으로 오환을 칠 것을 준비했으나, 조조가 오환을 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고간은 이를 기회로 여겨 이듬해인 206년 1월에 반란을 일으킨다. 고간은 반중앙 정서를 선동해 조조의 영역권이었던 사예주 북부와 서부를 장악하고 유표와 연계하며 조조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고, 조조는 고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적지않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배신으로 원상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간이었지만, 고간이 조조까지 배신하고 뒷통수를 치면서 조조의 시선이 고간에게 집중된 것은 결과적으로 원상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고, 206년 내내 원상은 여러차례 유주를 격파하고 10만호의 유주 백성들을 붙잡아 오환으로 돌아갔다.[27]
한편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이 답돈에게로 망명하자 이를 따라 오환으로 달아난 기주, 유주의 백성들이 10만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상의 오환 망명 이후 도합 20만 호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가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게 된 것인데, 1호당 5인으로 쳐도 총 100만에 이르는 등 규모가 워낙 큰지라 10만 호가 이주한 같은 사건을 두고 사가의 역사관 차이로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원상이 약탈했다고 쓰고, 범엽이 쓴 후한서에서는 자발적으로 원상을 따라갔다고 적은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사를 같은 사건에 대한 사관의 차이로 해석하든, 별개의 사건으로 해석하든 원상이 요서오환으로 망명한 이후 매우 많은 규모의 인구가 이 지역으로 유입된 것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으며, 황하 이북과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최상위 정치체였던 원씨의 공백을 대체하는 형태로 조조가 하북 지역을 장악하긴 했지만 조조에 대한 하북 내의 여론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고, 원씨와 고리관계로 이어져 있는 하북의 수많은 현지 세력가들은 원상의 잠재적 우군으로 보였으며,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원상에게 적극적으로 내응하며 조조가 임명한 지방관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런 성과에 상당히 고무되었는지 원상은 이를 기반 삼아 조조를 물리치고 다시 중국의 패권을 잡을 뜻을 품었다고 한다.
2.3.3. 백랑산 전투
이듬해인 207년, 조조는 대대적인 북벌에 나서 원상과 삼군오환을 치는 것에 대해 공론화한다. 당시 오환 원정에 대한 여론은 무척 나빴는데, 조정 내의 거물급 비조조계 인사였던 공융은 조조의 오환 원정 시도를 성공하지도 못할 얼빠진 행동으로 비웃었으며, 조조 진영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원상은 도망친 포로에 불과하며 오환족들은 야만족이라 통제가 될 리가 없으니 원상은 그들을 잘 부릴 수 없다며 애써 위험성을 축소했으나 여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남쪽의 강적인 유표의 세력권은 황제가 있는 허도의 지근거리에 맞닿아 있었고, 비록 유표 세력 내부는 친조조파와 반조조파로 여론이 갈라져 있었지만 유표 본인은 조조와 허도 조정에 명백히 비우호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며, 유표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해 조조를 칠 능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이들은 원상을 치는 사이에 유표가 유비를 앞세워 후방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허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외국의 망명객 신세에 불과한 원상보다는 당장 허도를 직접적으로 타격해 불바다로 만들 능력이 충분한 유표를 먼저 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곽가만은 하북 내에서 자신들의 여론이 좋지 않고, 삼군오환의 수장 답돈은 야심가이며 원상 역시 원소의 후광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며, 원상을 내버려둔 채 남쪽으로 유표를 치러 나서면 오환이 일사불란하게 침입하고 원씨의 옛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내응해 유주는 물론 하북 4주 전역의 판도가 다시 원씨 쪽으로 뒤집힐 것이나, 유표는 의심이 많아 유비를 견제하며 배후를 치지 않을 것이라 유세하며, 오환 원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두둔했고, 곽가의 지원사격에 힘입은 조조는 오환 원정을 결행한다.
조조는 보급을 위해 내륙의 강을 바다와 잇는 대규모의 수로공사를 벌이며 이를 오랑캐를 평정한다는 뜻의 평로거라 명명했고, 5월에 우북평군의 무종에 도착했으나, 기세좋게 원정에 나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요서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으로 향하는 주 행군로가 장마로 진창이 되어 행군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28] 요서오환의 근거지는 중국 만리장성 이북에 있었고 조조는 발해만과 요동만을 잇는 회랑지역을 진군로로 택했으나 홍수 때문에 해안가 길이 끊긴 것이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조조 본대는 2개월 동안 무종에서 발이 묶인 채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안으로 찾은 내륙의 도로들도 원상, 오환군이 유리한 포진을 선점하며 방어태세를 굳히는 데 성공하면서 돌파가 불가능해졌고, 침수된 지대 역시 배를 띄우기엔 너무 얕았다고 하기 때문에 하염없이 대기하기에는 조조가 원정 이전부터 공들였던 수운을 통한 군량보급 또한 그리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때 조조 진영에 합류한 무종의 현지 세력가 전주는 2백년 이상 사용이 끊겨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던 노룡 계곡의 고도를 언급하며 길잡이를 자처했다. 노룡새는 지금은 만리장성을 쌓아 놓은 곳인데 이곳은 당시 존재가 잊혀진 길이었다. 이 도박을 받아들인 조조는 진군로를 크게 우회하여 노룡새로 향하면서 주둔지 근방에 지금은 돌아가나 다시 찾아오겠다는 삐라를 남겨 철수하는 것으로 위장했으며, 노룡새의 존재를 몰랐던 원상과 답돈은 조조가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는 몇 차례의 척후를 보고받자 승리를 자축하며 경계 태세를 풀었다.
노룡새의 도로는 수백년간 존재가 잊혀 있었기에 당연 보수공사 따위도 없었고 심지어 중간에 길이 끊겨 아예 행군이 불가능했으나, 조조는 전주가 지휘하는 선발대의 안내에 따라[29]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 가며 강행군한 끝에 마침내 요서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에 도달한다.(207년 8월) 본영에서 불과 1백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척후를 들은 원상과 답돈은 경악하여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응전했으나, 지휘관으로 답돈과 조조가 포함되어 있는 양 군의 선발대가 서로 예상치 못하게 백랑산에서 조우한 전초전에서 답돈이 전사하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상치 못한 조조군의 등장과 삼군오환의 실질적 리더였던 답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혼란에 빠진 오환군은 범성으로 패주했으나 조조군의 추격과 일방적인 살육을 당해 들판 전체가 시체로 뒤덮였으며, 오환족과 한족을 포함해 20만이 포로로 잡히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원상은 탈출에 성공해 기병 수천기를 이끌고 요동으로 망명했고, 누반, 속복환, 오연 등 삼군오환의 지도부들 역시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향했다.
한편 유표는 조조가 원상과 싸우는 동안 허도를 치자는 유비의 진언[30]을 거절하며 끝내 개입에 나서지 않았으나 조조의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매우 후회했으며, 조조는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중에 현지에서 영입된 토착 세력가 전주의 존재를 배제할 경우 이미 패배가 확정적이었던 상황이었고, 전주의 안내에 따른 행군 과정도 중간에 길이 끊겨 산을 뚫고 계곡을 메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물을 찾지 못해 말 피로 연명하며 전멸의 위기를 겪는 등 조조 자신에게도 몹시 고통스럽고 험난한 도박에 가까웠다는 것에서 뭔가 느낀 것이 있었는지 원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옳은 진언을 했다며 상을 내린다.
조조가 통과한 노룡새가 얼마나 험하냐면 1500년 이후인 조선시대 중국을 방문한 조선사신들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다음은 계산기정[31]이라는 책에서 묘사하는 노룡새의 묘사와 그에 관한 한시다.
노룡새(盧龍塞)
쌍망보(雙望堡)부터는 들판의 빛이 다시 활짝 트이고 북쪽으로 바라보면 먼 산이 옹기종기 빼어나 아름답다. 십팔리보(十八里堡)까지 가면, 그곳이 옛 노룡새이다. 옛날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군(烏桓軍)을 정벌하느라고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그때 마침 비가 와 물길이 막히고 뚫리지 않아서 조조는 그 일을 근심하고 전주에게 물었다. 전주가 말하기를, '전의 우북평(右北平)의 관아가 평강(平剛)에 있어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 있고 유성(柳城)으로 통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샛길이 있습니다.' 했다. 드디어 조조는 군대를 돌려 노룡의 입구로부터 험준한 백단산(白檀山)을 넘어 공허한 곳으로 나가는데, 조조는 전주를 길잡이로 삼고 서무산(徐无山)으로 해서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까지가 200여 리가 되었다. 적은 그제서야 놀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무종(無終)은 곧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이다. 어떤 사람은 '조조가 노룡새에 도달해서 산을 좇아 길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산이 터지고 벼랑이 끊긴 곳이 있어 길이 그 사이로 나 있다.' 한다.
쌍망보(雙望堡)부터는 들판의 빛이 다시 활짝 트이고 북쪽으로 바라보면 먼 산이 옹기종기 빼어나 아름답다. 십팔리보(十八里堡)까지 가면, 그곳이 옛 노룡새이다. 옛날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군(烏桓軍)을 정벌하느라고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그때 마침 비가 와 물길이 막히고 뚫리지 않아서 조조는 그 일을 근심하고 전주에게 물었다. 전주가 말하기를, '전의 우북평(右北平)의 관아가 평강(平剛)에 있어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 있고 유성(柳城)으로 통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샛길이 있습니다.' 했다. 드디어 조조는 군대를 돌려 노룡의 입구로부터 험준한 백단산(白檀山)을 넘어 공허한 곳으로 나가는데, 조조는 전주를 길잡이로 삼고 서무산(徐无山)으로 해서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까지가 200여 리가 되었다. 적은 그제서야 놀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무종(無終)은 곧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이다. 어떤 사람은 '조조가 노룡새에 도달해서 산을 좇아 길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산이 터지고 벼랑이 끊긴 곳이 있어 길이 그 사이로 나 있다.' 한다.
새벽에 유관의 달을 밟고 / 曉踏楡關月
저녁에 노룡새의 눈 뚫었네 / 夕穿龍塞雪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來荒漠地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煙久阻絶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沙朔氣流
백룡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堆天險設
노회(老獪)한 아만(阿瞞, 조조의 아명)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瞞東出征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桓擣巢穴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旬雨不止
잔 길은 곡절 많았다 / 小徑多曲折
요행히 군막에 객이 있어서 / 幸得帷中客
군사 돌려 이길 계획 결정되었다 / 回軍勝籌決
철마로 멀리 달려오니 / 鐵馬長驅來
팔락팔락 바람 깃발 잡아제친다 / 獵獵風旌掣
들판이 열리니 강물에 다리 둥그렇고 / 拓野河橋圓
길을 쪼아내어 산 구름 이그러졌네 / 鑿路山雲缺
백단산에 군사의 방비가 없어 / 白檀兵无備
격전(激戰)을 칼날에 피 없이 끊었다 / 鏖戰刃不血
북방 길 드디어 뚫려 / 北方道遂通
만 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 / 萬里膏吾轍
먼 길 와서 무엇을 하려는지 / 遠道來何爲
날 저문 오랑캐 땅엔 바람이 맵다 / 日暯胡風烈
저녁에 노룡새의 눈 뚫었네 / 夕穿龍塞雪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來荒漠地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煙久阻絶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沙朔氣流
백룡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堆天險設
노회(老獪)한 아만(阿瞞, 조조의 아명)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瞞東出征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桓擣巢穴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旬雨不止
잔 길은 곡절 많았다 / 小徑多曲折
요행히 군막에 객이 있어서 / 幸得帷中客
군사 돌려 이길 계획 결정되었다 / 回軍勝籌決
철마로 멀리 달려오니 / 鐵馬長驅來
팔락팔락 바람 깃발 잡아제친다 / 獵獵風旌掣
들판이 열리니 강물에 다리 둥그렇고 / 拓野河橋圓
길을 쪼아내어 산 구름 이그러졌네 / 鑿路山雲缺
백단산에 군사의 방비가 없어 / 白檀兵无備
격전(激戰)을 칼날에 피 없이 끊었다 / 鏖戰刃不血
북방 길 드디어 뚫려 / 北方道遂通
만 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 / 萬里膏吾轍
먼 길 와서 무엇을 하려는지 / 遠道來何爲
날 저문 오랑캐 땅엔 바람이 맵다 / 日暯胡風烈
2.3.4. 요동 망명과 최후
조조 진영은 예상 밖의 대성공에 고무되었고, 혹자는 이 참에 요동까지 정벌해 원상을 사로잡고 화근을 끊을 것을 제안했으나 조조는 공손강이 평소 원상을 두려워했으므로 요동을 공격하면 원상과 힘을 합치겠지만, 느슨하게 내버려두면 서로가 도모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회군한다.당시 요동 공손씨 정권은 요동 안에서 사실상 국왕이나 다름없이 행세하며 조조가 이끄는 중앙정부와 대립하고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던 직함은 일개 요동 태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북 4주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허도 괴뢰정권에 대항하는 대장군부의 수장 원소의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원상의 존재는 요동 공손씨 정권이 중국 내의 패권 다툼에 참가할 생각이라면 이용 가치가 있었겠으나, 자치를 인정받는 선에서 조정 질서에 순응하고자 한다면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고, 실제로 선대였던 공손도가 원상과 조조의 전쟁에 난입해 패권 경쟁에 참여할 뜻을 내비치던 것과 달리 공손강은 자치권에 대한 인식만큼은 확고했으나 공손도만한 야심은 없던 인물이었다.
조조는 요동을 치지는 않았지만, 공손강의 반응을 지켜보듯 이듬해인 208년 1월에서야 업에 도착할 정도로 아주 느리게 철수했으며 이를 본 공손강은 지금 원상을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조정과 화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삼국지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어환의 전략과 후한서 원소전에 따르면 원상은 사람됨에 용력이 있어 공손강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제거할 뜻을 품었기 때문에 공손강과 대면하는 회담 자리에서 그를 죽여 요동을 장악한다면 오히려 이전보다 광활해질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원희에게 한다.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원상은 원소의 후계자로서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국적인 유명인이었고, 여전히 수천의 기병이라는 정예 전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공손강이 원상을 꺼린 것이기도 하지만. 조조와 공손강의 밀당이 이어지고 있던 상황에 먼저 선수를 쳐서 공손강을 죽인 뒤 치소를 장악하고 요동 지배를 선포한다면 공손씨의 철권 통치에 눌려 있던 호족들 중 일부의 협조를 기대할 수는 있었을 것이며, 이 시점까지도 원상을 따랐던 군사들이 문자 그대로 원씨에 모든 명운을 걸었을 정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숫적 열세를 감안하더라도 지휘부가 몰살된 채 분열된 공손씨 잔당들과의 군사적 승부에서 우위를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해 볼 만한 도박이긴 했다.
하지만 요동에 도착한 원상이 첫 회견 자리에서 그대로 공손강을 살해할 생각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손강 역시 결단에 주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공손강은 마굿간에 다수의 정예병들을 숨겨두었고 신호를 하면 나타나 원상 일행을 치도록 계획했으며 후한서에 따르면 원상 일행이 공손강을 만나 회담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원희가 불안감을 느끼며 두려워해 들어가지 않으려 했으나 원상은 이를 못마땅해하며 원희를 강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원상 일행이 들어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공손강은 소리쳐서 복병을 불러들였으며 이때 원상은 죽지는 않았지만 생포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전략에 의하면 생포된 원상은 결박되어 꿇어앉혀졌고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날씨가 무척 춥자 앉을 자리를 구했는데 이에 원희가 "우리 머리가 만릿길을 떠나는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느냐"며 원상을 나무랐다고 한다. 원상은 곧 죽는다는 상황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앉을 자리를 구해 빈축을 샀다는 이야기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상의 기량이 용렬함을 알 수 있는 일화로 이를 소개하고 있다.
다만 후한서의 묘사는 비슷한 내용임에도 묘하게 다른데, 원상이 사로잡히고 날씨가 무척 추웠다는 뉘앙스는 같으나 발언이 조금 더 자세히 나온다.
未死之間(죽지 않은 동안), 寒不可忍(추위를 견딜 수 없으니), 何相席與(자리를 마련해줌이 어떨지).
'죽지 않은 동안'이란 말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얘기이니 이 일화는 원상이 최후의 허세를 부리며 의연함을 과시하고 공손강을 비꼬는 내용이 된다. 만리길 드립도 원희가 아니라 공손강이 원상의 처지를 비웃고자 친 걸로 나온다.2.3.5. 사후
삼군오환의 선우들 중 일부는 원상과 동행했다가 원상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따로 주둔하다가 원상을 처치한 공손강이 재차 군대를 내어 격파하고 참수한 것으로 보인다. 공손강은 이들의 머리 또한 원상, 원희의 머리와 같이 조조에게 보냈다.조조의 협천자 이후 조정 안에서 원소가 차지하던 위치는 조정의 최고대신이자 황제로부터 하북 4주 안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위임받은 대장군부의 수장이었고, 이러한 정치적 권위를 바탕삼아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 허도의 조정을 권신 조조에게 장악된 괴뢰정권으로 규정하며 한나라 재건의 사명을 띈 대장군부의 체제적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조조 역시 자신을 황제를 받드는 조정의 영수로서, 황하 이북의 불법적 군벌집단 원씨 토벌을 통한 후한 재건의 기치를 세웠으므로 원담과 고간이 일시적으로 조조에게 항복했고, 한때 원상이 조조에게 강화를 청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원씨와 조씨의 막부정은 한 쪽이 다른 쪽을 거꾸러뜨리지 않은 채로 양립이 불가능했다.
요동에서 원상 형제의 머리가 도착하자 조조는 이를 효수하고 삼군에 영을 내려 곡을 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수한다는 엄명을 내린다. 물론 조조는 정적이기 이전에 친구로서의 개인적 감정으로 원소의 묘에 참배해 눈물을 흘렸으나 원소는 조조의 하북 평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고 이미 하북 내부에서 신성화되어 원씨 막부의 이념적 표상으로나 남아있는 권력이었고[32] 왕수의 요청에 대범하게 원담의 장례식을 거행했으나, 원담은 엄밀히는 원씨 막부의 직계라고 보긴 어려운 방계세력인데다 원씨를 내부에서 뒤흔들며 조조의 기주 침공에 호응했으니 사실 조조로서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상은 원소의 적통을 이어받은 후계자였고 바로 얼마 전까지 반조조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예전에 원상을 섬겼던 견초가 원상의 효시된 머리를 보고 통곡하며 그 앞에 제사용품을 차려와 장례를 주관했으며 전주가 제문을 읽는 등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엄명에도 원상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백랑산전투의 설계자이자 최대 공로자였던 전주가 원상의 장례에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는 상황은 조조로서는 무척 불쾌한 일이었으나, 조조는 하북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이를 불문에 부치고 장례식을 주관한 견초를 의리 있다며 무재로 천거했으며, 전주는 제후로 삼아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려 했으나, 전주는 노룡의 길을 안내한 것을 원씨와 조씨 간 체제 정당성 차원의 문제가 아닌 과거 삼군오환의 난으로 자신의 고향인 우북평군이 파괴된 것에 대한 개인적 원한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며, 노룡의 길을 팔아 사익까지 추구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 분봉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샀다.
전주의 경우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서 조정의 공식적 책봉을 다섯 차례나 거절하며 조조의 체면을 팍삭 깎아내렸기에 조조는 전주가 작은 절개를 앞세워 대의를 더럽힌다며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처형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조비와 순욱, 종요는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대로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자며 변호했기에 조조는 전주의 처벌을 그만두었다.
전주의 이런 외골수적인 행동은 명예와 절의를 숭상하던 고대 중국인의 관점으로도 유난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받아들여졌는지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본인이 원상 패망의 최대 공로자인 주제에 저럴 거면 애초부터 조조를 도와 원상을 핍박하질 말아야 했다면서 전주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조조의 편을 든 공손강은 좌장군, 양평후의 지위를 받으며 바라던 대로 요동의 자치를 인정받았고, 조비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는 이미 죽었지만 대사마로 추증되는 등 우대받았으나,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원상의 사후 30년이 지난 237년에 위왕조에 반기를 든다. 이때 관구검이 요동을 치러 오자 우북평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오환도독 호유가 5천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공손연 토벌에 합류하는데, 이들은 본디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들어온 잔당들로 언급된다. 원상 사후 공손씨의 토벌을 피해 살아남은 잔당들이 이때까지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3. 삼국지연의
어린 나이에 주변의 추대로 세워진 소년 군주라기보단 오만하고 야심과 행동력이 넘치는 청년처럼 묘사되며 원소 생전의 관도대전와 창정전투에서부터 이미 일군을 이끌던 지휘관으로 등장하고 후계를 차지하기 위한 파벌 형성에도 주도적이다. 원소가 죽고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는 과정이 2화로 압축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상황들이 생략되었으며, 원상의 인물상은 전론에서 묘사된 패륜아적 인물상에 적잖이 영향을 받았는지 각색이 일관되게 악의적이고 소인배스러움이 강조되는 등 원담의 막장성이 다소 희석되는 대신 원상은 원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밀리지 않는 막장 패륜아로 묘사되나, 조비가 원상의 외모에 대해 여성성을 강조하며 경국지색처럼 묘사하던 것은 좀 깬다고 여겨졌는지 '태어날 때부터 준걸답고 훌륭한 외모(生得形貌俊伟)'라 원소가 가장 총애하며 곁에 두었다고 하며, 외모만큼이나 무용이 강조되면서 삼국지연의 기준으로는 무용이 뛰어나고 잘생긴 외모의 오만하고 젊은 무사라는 이미지가 있다.의대조 모의를 벌인 유비가 서주에서 차주를 죽이고 조조와 맞서며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삼국지연의 23회에서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원군 요청을 거절하는데. 이때 병에 걸린 아들은 원소의 다섯 아들 중 유난히 총애하는 막내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31회의 창정전투 시점에서는 원소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인 원상을 가장 총애했다고 가족관계가 서술되면서 아들이 다섯이라는 23회의 서술과 앞뒤가 달라지는 명백한 설정오류가 되기 때문에 23회에 언급되는 원소의 막내아들이 삼남인 원상으로 수정된 판본도 있으나, 소설상의 원상은 이미 장성하여 일군을 이끌던 지휘관이라는 캐릭터도 있는 만큼 평역본이나 창작물 상에서는 아픈 아들이 원상이 아니었다는 쪽을 긍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이럴 경우 창정전투 시점에서 '장성한' 아들은 셋뿐이었다는 설명이 덧붙거나, 아픈 아들은 원상이 아니라 4남이었던 원매였다거나, 아픈 아들인 5남은 어린 나이에 죽어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던가 하는 썰들이 따라붙기도 한다.
관도대전(30회) 당시 오소가 털리고 장합, 고람이 항복해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원소 본대의 전력을 줄이기 위한 업과 여양을 공격하는 척 양공을 펼치자 여기에 낚인 원소가 원상에게 별군을 이끌고 업을 지키게 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관도전 이후 재기를 노린 원소를 따르며(31회) 창정전투 초반에 사환을 일기토로 죽이는 등 활약하지만 원소가 십면매복게에 걸리며 창정전투에서 참패해서 별 의미가 없었다. 창정전투 직전 유부인이 원소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권하며 원소의 아들들이 거론되는데 이때 원상은 유부인 소생으로 외모가 빼어나 원소에게 총애받는다고 언급되며, 원소는 원담이 난폭하고 성질이 급해 사람 죽이기 좋아하며, 원희가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반면, 원상은 영웅다운 기상이 있으며 어질고 선비를 아껴서 후사를 잇기 적합하다고 띄워주는 대사를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데 이후 32회에서는 조조가 하북으로 침공해오자 중병에 걸린 원소를 대신해 총대장으로 나서지만 사환을 잡은 자신의 무예를 과신해 형제들의 합류를 기다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설치다가 장료에게 패하여 군사의 태반을 잃었고, 이 때문에 열 받은 원소는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게 원소가 죽자 심배, 봉기와 짜고 자리를 계승하는데[33] 유부인이 원소의 애첩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할 때 애첩의 가족들까지 체포하여 살해했으며, 기주에 도착한 원담과 대립하던 중 조조가 북상해오자 조조의 손을 빌려 원담을 도모하려다 애꿎은 봉기만 죽게 만드는 등 욕심 많고 잔인하며 무책임한 면모가 강조된다.
봉기를 죽인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하려는 정황을 세작을 통해 파악한 원상이 직접 도착하면서 원담은 일단 항복할 생각을 그만두고 같이 연합해서 여양에서 싸운다. 여양 전투는 곽원을 통한 하동 공격과 후반의 반격은 짤리고 원상이 연패만을 거듭하다 곽가의 조언에 따라 조조가 철수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조조가 철수하자 원담이 승리를 자축하며 원상을 연회에 초대해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함정일 것이라는 심배의 조언에 원상은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원담에게 선공을 걸고 형제간에 일기토까지 벌이며 승리해 원담을 격파하는 것으로 나와서 내전의 전개 과정도 원상이 선공을 건 것으로 사실관계가 뒤바뀌고 형제 간의 일기토가 성사되는 등 막장성이 극적으로 강조된다.
원담이 패하고 청주로 달아났을때는 역사대로 딱히 이를 추격하지는 않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나, 원담과의 두 번째 승부는 원담이 다시 기주로 쳐들어오면서 장수 잠벽을 내보내자 친히 나서려다 여광이 굳이 수고로이 창칼을 잡으실 필요 없다며 자청해오자 여광을 내보내 잠벽을 죽이며 원담을 대파해 승세를 타고 평원까지 포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심배의 편지와 헌제춘추 등에서 나타나는 내전의 전개와는 완전히 다른 창작이며 원담을 격파한 뒤 심배의 진언에 따라 평원을 포위한다는 결과만 같다.
궁지에 몰린 원담과 조조가 연합했을때 심배가 서신을 보내며 원담과 화해를 시도한 일은 짤린 채 단지 유표가 편지를 보내 형제의 싸움을 말렸지만 둘 다 듣지 않았다고 언급된다. 이후 심배에게 업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원담을 치러 가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같으며 이때 원상이 평원으로 가고 윤해와 저곡이 모성과 한단에 주둔한 것은 원담을 치는 동안 상당을 통해 군량을 운반하며 병주와 연계해 조조로부터 업을 수비하려는 의도이자 심배가 주도한 계책으로 묘사되면서도 정작 윤해와 저곡이 격파되는 순간 상당에서 군을 이끌고 업을 성원해야 할 고간의 행보는 언급이 없고 원상이 향한 서산의 위치에 대한 배경설명도 없이 맥락없는 심배의 분투만이 강조되고 있어서 원상이 서산으로 행군한 의도를 소설 속에서는 제대로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며 단지 원상이 양동으로 조조를 포위하려다 동선을 읽힌 정도로 묘사된다.
이후 이부를 업성으로 보내 상황을 전달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노약자를 성 밖으로 투항시키며 생긴 틈을 타 이부가 조조를 기만하며 원상 본대로 복귀했지만 업성과 원상 본대가 연계한 야습작전이 실패하면서 밀려버린 것과 달리 업성 내의 노약자를 내보내 경계가 헤이해진 틈을 타서 습격하려는 이부의 계책이 조조에게 간파당하며 업성 수비군이 참패한 사이 조조가 원상이 있는 곳까지 치자 직접 나와 싸웠지만 무력하게 박살나는 것으로 각색되었고, 1차 패배 이후 서산으로 달아났다가 마연,장의의 투항으로 서산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남구로 달아났으며[34] 추격해오는 조조에게 항복을 청했다가 조조가 항복을 받아주는 척 하며 기습을 걸자 모든 것을 잃은 채 중산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묘사되며 항복협상 결렬 이후 남구에 주둔하다 마연,장의의 투항으로 무너졌던 선후관계가 바뀌고 업성 역시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면서 완전히 전장에서 이탈한 이후에야 수몰되며, 심배의 일생을 평한 한시에서도 용렬한 주군 만나 안타까운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되는 등 업성 공방전 당시의 행보 역시 충신 심배가 업성에서 장렬히 분전하는 동안 원상은 그저 뻘짓이나 하며 조조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던 한심한 주군이라는 욕받이 포지션이 강조되고 있다.
33회에서 원담이 남피에서 조조에게 패할 때는 뒤늦게나마 화해를 했는지 조조가 남피성을 막 점령했을때 초촉과 장남이 원군으로 뒤늦게 왔다가 원담이 이미 패한 것을 알자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열후에 봉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조조가 장합,고람,여광,여상,마연,장의,초촉,장남 등 항장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내 유주를 공격하게 하자 원상과 원희는 오환족에게 달아난다. 이는 조조가 원담을 치는 동안 장합을 주장으로 삼아 탁군 남부를 공격하게 했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수 있으나, 원상과 원희가 오환족에게 달아나기 전 초촉이 먼저 항복했는데, 원상이 달아난 이후 다시 초촉이 나와서 유주의 관리들에게 일제히 조조에게 항복하도록 맹세하게 하나 한형이 맹세를 거부하자 그냥 놔둔다. 결국 초촉이 두 번 항복하는 오류가 나와 모종강본에서는 유주의 관리들에게 항복을 강요한 사람을 오환촉(烏桓触)으로 바꾸게 되었다.
원상의 명령에 따라 상당군에 배치되어 있던 견초의 존재가 소설 속에서 잘려버리고 고간 역시 업성의 위기를 방관하며 원상을 배신한 행보가 생략되었기에 고간의 등장과 패망은 패배한 고간이 유표에게로 달아나다 상락도위 왕염에게 잡혀죽었다는 결과를 제외하면 완전한 창작으로 실제 역사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데, 소설상 고간은 업이 함락되고 원담에 의해 중산에서도 쫓겨나 유주로 달아난 원상이 병주에 있던 고간에게 호관에서 조조를 막으라고 지시하자 원상의 명령대로 충직하게 호관을 사수하다가 여광,여상 형제의 거짓투항에 속아 유인계에 걸리면서 호관을 잃게 된다.
조조가 고간을 격파한 뒤 오환을 칠 것을 의논하자 주위에서 반대했으나 곽가가 적극적으로 유세하며 찬동했던 것은 비슷하게 묘사되지만, 조조가 고간을 치고 병주를 장악하는 동안 유주에서 반조조 궐기를 유도하며 게릴라전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상황은 전부 짤린 채 곽가의 조언에 전주를 기용하고 유성에서 답돈이 장료에게 죽고 원상은 달아나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긴장감이 전혀 없고 조조가 달아나 숨은 잔당들을 일방적으로 추격해 학살하는 정도로 묘사된다.
최후 부분도 다른데 조조에게 연이어 털려서 결국 요동의 공손강을 만나러 갔지만 회견하는 장소에 앉을 자리가 없자 공손강에게 일단 자리부터 깔자고 먼저 요구하고 이에 공손강이 만리길 드립을 치며 복병을 불러들여서 그들에게 죽는다.
전주가 분봉을 거부한 일화도 묘사는 되지만 견초가 짤리면서 전주가 조문했던 원상의 장례식 일화 자체가 삭제되었으며, 전주가 분봉을 거부한 동기 역시 조조에게 합류하기 이전엔 원씨의 부하였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각색되면서 원씨가 강성할 때부터 일관되게 대장군부 부역을 거부했으며 오환족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조조에게 붙어 원씨 몰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전주가 정작 원씨가 망한 이후엔 조조 앞에서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원상을 옹호했다는 논쟁적인 아이러니가 사라져 버렸고, 조조도 전주를 의리 있다고 칭찬하며 굳이 더 권하지 않는 것으로 훈훈하게 끝나버려서 별 임팩트가 없다.
4. 평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원상은 대단히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 아래 조조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찌질하게 상속 싸움이나 하다가 망했다는 꼬리표가 붙어다니기에 전통적 평가는 매우 나쁘다. 그러나 원소의 급사로 후계구도가 꼬였을 뿐 원소가 의도한 후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원상이었고, 행적을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도 조조의 침입을 격퇴했고, 내전 당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 차례의 회전으로 원담에게 완승을 거둬 하북의 혼란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조조 측의 예측을 뒤엎으며 경계를 샀으며, 조조의 내전 개입으로 패주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성실성과 의지만큼은 두드러졌고, 오환 망명 시점에서의 수완이나 요동에서 마지막으로 판 뒤집기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판단력도 뛰어나고 결기와 강단이 있었다.하지만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붙여 정국을 유리하게 이끄는 정치적인 교묘함이나 전략적 시야가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조조를 격파한 이후 승세를 타고 입지를 확고히 하기는 커녕 패배한 원담이 청주로 달아나 내전이 시작된 시점에선 그 모자라다던 원담조차도 청주의 자원을 활용해 기민하게 반격에 나서고 있었는데도 그저 수세적인 태도로 본인 영역권이 공격받는 상황을 방관하는 등 명백히 단호하지도 못하고 일관적이지도 못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원담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서도 원담을 재빠르게 축출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진압에 시간을 끌다 끝내 조조의 개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10대 중후반 정도라는 진짜 햇병아리 수준의 어린 나이로 경험과 권위도 부족한데다, 권력을 얻게 된 과정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어머니인 유부인을 포함한 실력자들 몇몇의 합의에 따라 추대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결점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절한 안배로 이를 보완해줘야 했을 원소가 급사하였고, 원상의 위치를 대체하려는 권위 있는 이복형과 방계 일족들이 도전하고, 외부에서 밀려오는 초강적인 조조가 이들과 결탁하며 쳐들어오고, 대세가 결정됐다 판단한 유력자들이 조조에게 원상을 팔아넘기며 배신하는 상황은 본인의 힘만으로는 애초부터 극복이 불가능한 난국이었다. 때문에 원상의 몰락은 본인 스스로의 오판도 물론 있었지만 또한 이런 저런 일들이 꼬여버려서 나온 복잡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가후는 조조의 후계자 논란에 원본초와 유경승의 일을 잊었냐며 원가의 멸망원인으로 장자를 두고 원상을 세운 것을 거론했으며, 손권도 원소의 후사문제를 꼬집는 등 여기저기서 반면교사로 많이 인용되나 딱히 원상이 군주로써 불합격이었다는 뜻보다는 장남이 아닌 아들을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분란을 경계하는 의도에 가깝다. 물론 장자계승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원담을 내쳐서 후계구도가 심각하게 꼬여들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후계를 내세우면 장자인 원담에게 군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저수의 진언을 듣지 않은 독선적인 원소의 잘못이 크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일정의 능력은 있었지만 시류와 환경의 한계에 부딪혀 결국은 실패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35]
4.1. 고지식한 후계자
적대자와 추종자들의 편향된 증언들 외에 원상의 인물됨을 직접 묘사하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그의 행보와 판단을 통해 본 그는 매우 고지식하고 외골수적인 인물이었다.그는 원담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도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다 결국 조조의 개입을 허용하며 기주를 잃었다. 이는 내전기 군벌로서 부적합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원담과 심배 사이에서 조율을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원상이 최염을 투옥한 사례는 그가 조조의 불법성을 비난하고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대장군부의 정당한 토벌권 행사를 옹호한 원소의 후계자로서, 이러한 대의에 반하는 견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념을 보여준다.
조조와의 항복협상이 결렬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소와 대장군부의 권위에 의존한 원상은 원담이나 고간처럼 조조에게 투항해 자리를 유지하는 선택이 불가능했다. 설령 투항 의사가 진심이었더라도, 원상이 타진한 협상은 조조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조조와의 전쟁을 끝까지 이어간 원상의 모습은, 조조와 허도 조정 입장에서는 반성과 용서를 버리고 혼란을 불러오는 역적처럼 보였으나, 원상은 부당하게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권리로 여기며 행동했다. 원상은 원소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했으며, 그의 정치 행보는 후한인들의 윤리관에서 효와 충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원담과의 대결에서 보인 우유부단함도 인자함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그의 행보는 관의 부당한 핍박에 맞서 정의를 고수한다는 측면에서 존중과 공감을 얻기 쉬웠다.
현대적인 정당 정치인에 비유하자면, 그는 선거에 패하고 대선 후보였던 총재의 사망으로 무너져 가는 야당에서 당 총재의 지명으로 젊은 나이에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당내 불화를 불러왔지만, 강성 당원들의 결집을 이끌어내며 대중적인 확장성도 갖춘 정치인이었다.
원상은 아버지 원소처럼 겉모습에 본심을 숨긴 채 이득을 계산하며 상대를 농락하는 기만성과 노회함은 부족했지만, 고지식하고 완고한 면모를 통해 급진적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념형 지도자였다. 정치가로서 그의 기본적인 특성은 원소와 유사했다.
4.2. 전주가 원상을 위해 곡하다
원상은 비록 원소의 후계자로서 여러가지 한계를 내보이며 조조에게 패하고 기주를 잃고 달아났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인상적인 면모들을 보였고, 북방으로 달아난 이후 조조에 맞서던 게릴라 지도자로서의 활약은 무척 유능하기도 했는데 그는 조조의 부재나 실패를 틈타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규합할 만한 여력이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역량을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원상-오환 연합군이 조조의 발을 무종에 묶어둔 채 무의미한 소모를 강요하고 있던 시점에서 전쟁의 분기점이었던 전주의 합류와 헌책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후속처리를 어떻게 선방한들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조조 자신에게 뼈아픈 결과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곽가에게 있어서도 오환 원정은 그의 마지막 업적이자 커리어 하이로 평가되기는 커녕 주인의 의중에 영합하고 아부하며 무모한 원정을 추진하다 몰락했던 동향 선배 곽도의 전철을 밟은 불명예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한 원상의 몰락을 불러온 전주는 본디 유우의 측근이었으나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삼군오환의 난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고, 187년의 전범세력 삼군오환에 대한 철저한 단죄를 추구하던 그의 대 오환 정책관은 친 공손찬파에 가까웠다. 전주는 유우를 죽인 공손찬의 행위를 상종할 수 없는 야만으로 규탄하며 적대하고 복수를 선언한 채 수천의 군사를 거느린 서무산의 군벌로 할거하면서도 다른 유우계와는 달리 유우의 대 오환 정책기조를 이어받은 원소와 대장군부의 거듭된 초빙에 철저히 거리를 두는 부외자의 입장을 취했고 원소 사후 원상의 부름도 거절했는데, 조조는 원상의 몰락을 불러온 이 승리를 하늘이 내려준 기적으로 표현하고 질 싸움을 운좋게 이긴 것이라 공언하며 원정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한편으로는 표를 올려 전주를 극찬하고 모든 공적이 전주의 지도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겸허한 자세를 보인다. 이는 전주같은 하늘이 내린 인재가 원씨를 거부하고 자신을 택했으니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이라며 겸양을 통해 스스로를 높이려는 의도로 읽을 수도 있으나, 조조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해석함이 타당하다는 믿음이 절로 생길 정도로 어렵고 극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상이 사망한 이후 전주의 행보는 조조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어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감히 원상을 위해 곡을 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하겠다는 조조의 선언에도 전주는 원상이 자신을 천거했었다는 이유로 견초가 주관한 원상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이는 한대의 관습으로는 은혜를 베푼 거인에 대한 고리의 예로서 원상을 깍듯이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행동은 비록 전주 자신이 비록 원씨의 철저한 부외자로서 대장군부를 위해 일하지 않고 개인적 원한에 따라 조조에게 붙으며 결과적으로 원상의 몰락을 결정지었을 지언정 원상이 대장군, 업후로서 조정의 명망높은 대신이자 고귀한 제후임은 부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적 의미로까지 해석될 수 있었는데, 애초에 원상의 관직을 인정한 적조차 없거니와 원소가 받은 대장군 관직부터가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주장하던 허도 조정의 입장에서 이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간에 역적의 논리에 동조하는 불충 그 자체의 행위였다.
코미디나 다름없는 촌극에 난처해진 조조는 이 일을 모르는 척 함구하며 들은 바가 없다는 듯이 행동했고, 연의에서 관우에게 보였던 친절이 연상될 선물공세로 전주의 환심을 사서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으나 연의에 묘사된 관우의 일편단심마냥 전주는 이 선물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주위에 기부하며 조조의 개인적 은덕을 칭송하면서도 생각을 바꿀 뜻이 없었다.
그는 원상을 몰락시키고 조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자신의 행위를 단지 삼군오환에 대한 단죄라는 개인 원한에 따른 테러이자 유우를 위해 공손찬에게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기만하고 이를 도리어 개인적 복수에 악용한 범죄적 행위로서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이 조조를 도와 한나라를 구원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인정하지 않으며 논공행상에 따른 조정의 분봉조차 번번히 거부하면서 그러한 진정성을 증명하려 했기에 그때마다 조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구질구질할 정도의 오랜 회유와 압박에도 요지부동인 전주의 태도는 결국 조조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조조의 측근들 또한 전주를 작은 절개를 앞세워 대의를 더럽히는 오만하고 교활한 자로 비유하며 폭발하는 조조를 거들자 조조는 전주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지만 순욱과 종요가 나서 일이 커져 봤자 좋을 게 없으니 전주의 의사를 존중해 본인이 원하는대로 조용히 살다 죽게 내버려 두자며 조조를 만류했고 조비도 이를 지지했기에 전주는 무사할 수 있었다. 조조 본인부터가 원소의 묘에 참배해 눈물을 흘리면서 원소는 토벌대상인 대역적이라는 사공부의 대의에 따라 목숨걸고 싸우던 부하들을 전부 바보로 만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그가 나름의 분명한 논리에 따라 일관되게 행동하던 전주를 단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조조 자신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생각했을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기 위해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았을 조조는 전주를 죽이려던 생각을 그만두고 전주와 친했던 하후돈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설득해달라며 구차한 미련을 보였지만 거부하고 머리가 잘려 죽는 것이라면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전주의 답변을 전해듣고 탄식만을 반복했는데, 이때 조조가 느꼈을 감정은 깊은 패배감과 모멸감이라는 표현 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었을 것이며 조조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미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존재가 된 전주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싸움을 걸었다가 개처럼 비참하게 패배했다.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에서 전주의 고지식함이 상식 밖이라고 여겨졌는지 저럴 거였다면 조조를 도와 원상을 핍박하지 말아야 했으며 왕수가 원담에게 곡한 것과 겉모습은 비슷하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당대 사족들에게 원소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고 원상에 호응한 대규모 망명과 봉기는 실제로 일어났었으며 북방 원정의 과정에서 곽가가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유세했듯 세인들이 원소의 대장군부가(사공 조조를 규탄한 것에도) 나름의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고 여기며 그 후계자인 원상에게 동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대에 선명하게 실존하던 여론이자 조조가 대단히 경계했던 현상이었다.
때문에 원상의 행보를 간신에 의해 더럽혀진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거물급 반조조 정치가이자 명예로운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바라보는 관점은 원상을 역적으로 규정하던 조조 측의 공식적인 부정평가와 함께 건안연간 당대에 상당기간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원상을 몰락시키고도 자신의 행위를 조원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영웅적 기여가 아니라 개인적 복수심에 매몰된 이기적인 테러행위로 평가절하하고 원상의 죽음이 무척 유감스럽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공적을 인정받길 목숨걸고 거부하던 전주의 완고한 행보는 삼군오환을 일생을 걸고 부정해야 할 숙명적 원수로 간주하면서도 원상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관념은 긍정하는 윤리적 딜레마에서 나타난 죄의식의 발로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씨와 철저히 선을 그었던 전주가 원상 개인에게 특이하다 못해 논란거리가 될 정도의 호의를 표한 것에 대해 조조는 그 연유조차 묻지 않은 채 모르는 척 했으며 전주도 따로 해명하는 말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속내를 알 도리는 없지만, 전주는 분봉 거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은 채 죽었다.[36] 훗날 황제가 된 조비는 자식없이 죽은 전주의 후사를 양자를 통해 잇게 하며 백랑산전투의 영웅으로 전주를 추서해 후손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분봉했는데 이는 전주가 생전에 분명하게 밝힌 뜻을 감안하면 고인능욕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후술된 조비의 저작 전론의 기록에서 조비가 원상을 작정하고 비난하는 점이나 당대 민간에 떠돌던 도삭군 신앙에 대한 전설 등에서 나타나듯 원상은 반조조 여론의 상징이자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적어도 당대에는 나름의 상당한 존재감이 있었으나 그 대척점에 있던 조조나 조조의 후계자 조비로서는 당연하게도 이러한 여론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볼 수 있다.
4.3. 당대의 평가
绍遇因运,得收英雄之谋,假士民之力,东苞巨海之实,西举全晋之地,南阻白渠黄河, 北有劲弓胡马,地方二千里,众数十万,可谓威矣。 当此之时,无敌于天下,视霸王易于覆手,而不能抑遏愚妻,显别嫡庶,婉恋私爱,宠子以貌;其后败绩丧师, 身以疾死,邪臣饰奸,二子相屠,坟土未干,而宗庙为墟,其误至矣。 袁紹妻劉氏甚妒忌。紹死,僵尸未殯,寵妾五人,妻盡殺之,以為死者有知,當復見紹于地下。 乃髡頭墨面,以毀其形,追妒亡魂,戮及死人,惡婦之為,一至是哉! 其少子尚,又為盡殺死者之家,嬪說惡母。蔑死先父,行暴逆,忘大義,滅其宜矣。 원소는 운수를 만난 것으로 말미암아 영웅의 모략을 거두어 사민의 힘을 빌렸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둘러싸고, 서쪽으로는 옛 진나라(晋)의 땅까지 이르며, 남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북으로는 강궁과 오랑캐의 정예기병을 독차지했다. 그 면적은 2천리에 달하고, 무리는 수십만이라,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어 원소는 패왕이 손바닥을 뒤집듯 반역을 엿보았으나, 어리석은 아내를 억누르지 못했고, 그 스스로도 적서의 도리를 버렸고, 예쁘고 귀엽게 생긴 모습을 사랑하는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미모로서 아들을 편애하였으니 훗날 패하여 군사를 잃고, 몸은 급사하고, 간신들이 간사한 짓을 하고, 두 아들이 서로 도살하고, 무덤에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종묘가 황폐해지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소의 오류가 초래한 것이다. 원소의 처 유씨는 투기가 극심하여 원소가 죽자 그 시신이 입관하기도 전에 원소의 총첩 5인을 모두 죽였고, 죽은 자에게도 지각이 있어 지하에서 원소를 다시 만날 것이라 여겼기에 머리카락을 밀고 얼굴에 먹을 칠하여 형상을 훼손했다. 죽은 이를 욕보이는 악녀의 행위는 투기에 빠져 정신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어린 아들 원상은 죽은 이들의 집안사람들을 모두 죽였으니, 사악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죽은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난폭함을 행하여 대의가 사라졌으니 (원씨가) 멸망한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론 |
진수는 원상이 오직 미모 하나만으로 원소의 총애를 받아 후계자가 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고, 범엽도 큰 틀에서는 별다른 비판없이 이 시각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이 확인되는 최초의 기사는 조비의 전론으로 조비는 진수와 달리 원소를 상당히 고평가하는 편이지만 위대했던 원소가 악녀 유부인의 부추김과 원상의 파멸적 미모에 홀리면서 장자를 폐하여 모든 재앙의 근원을 만들었다면서 포사, 서시, 달기와 같은 신화적 팜 파탈, 경국지색의 서사를 그대로 원상에게 대입하고 있다.
조비가 원상의 외모를 묘사하며 완(婉= 예쁠 완)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도 그러한데, 완은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와 일견 비슷해 보이나 적어도 남자 외모를 묘사하면서 쓸 법한 표현은 아니다. 미(美) 역시 그리 흔하게 쓰인 표현은 아니지만 당대 기록에서 손책 등 일부 인물들의 외모를 긍정적으로 수식하는 형태로 종종 사용된 적이 있으며, 가면을 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갑골문과 양(羊)과 대(大) 가 합쳐져 크다→ 아름답다의 해석으로 이어지는 한대의 설문해자에서 드러나듯 기본적으로는 크고 화려하다는 뜻이 아름다움으로 발전된 형태인 반면, 완(婉)은 글자 형태 자체부터 대놓고 여성형인 데다 '완곡어'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기본적으로 순함, 연약함, 말랑말랑함 등의 뜻이 있고, 최소한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런 뜻으로 사용되어 왔으며,[37] 이것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에서 예쁨이란 뜻으로 발전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자 외모를 묘사하며 미를 넘어 완의 단계까지 가면 아예 최소한의 남성성조차 부정해버리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이는 당대에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외모평이었다.[38]
전론은 원씨 멸망 이후 10년 남짓한 시점에 쓰인 책이며, 조비 역시 조조를 따라 원상과의 싸움에 직접 종군했던 인물이니만큼 엄연한 당대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며, 원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적어도 조조 진영 중심부의 인물들이나 혹은 군중에서 원상을 모욕할때 자주 쓰이던 말로서 일정 부분 통용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伏惟將軍至孝蒸蒸,發於岐嶷,友于之性,生於自然,章之以聰明,行之以敏達,覽古今之舉措,睹興敗之徵符,輕榮財於糞土,貴名(高)[位]於丘岳。何意奄然迷沈,墮賢哲之操,積怨肆忿,取破家之禍! 감히 생각컨데, 우리 장군(=원상)의 효성은 지극히 순수하며,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태생적으로 어진 성품을 타고났으며, 탁월한 문장으로서 총명함이 드러나고, 실천함에 있어서는 기민하며 사리에 통달하여 고금의 조치를 보면 성패의 징조를 미리 예견하며, 영화와 재물을 분토와 같이 경시하며 깨끗한 명예를 산과 같이 중시하시오. 장군은 어찌하여 갑자기 미혹에 홀려 현철의 마음가짐을 버리고, 원한을 쌓아 분풀이하며 집안을 무너뜨리는 재앙을 취하려 하는가! -후한서 원소전에 인용된 심배여원담서 |
하지만 심배의 서신에서 묘사된 모습은 조금 다르다. 원상을 옹립한 중심인물인 심배는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이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이라는 명성이 있었고, 유순한 성품에 검소하고 성실하며, 글재주가 탁월하고 사리에 밝고 통찰력도 뛰어나다고 극찬하면서 그토록 현명한 아우를 의심해 정신줄을 놓고 분노에 사로잡혀 조조와 붙어먹으며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려 하는 원담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조비의 글과 마찬가지로 심배의 서신 역시 엄연한 당대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나 심배는 후술하듯이 원소의 유명마저 조작하여 원상을 옹립했기 때문에 원상의 정통성에 의존하려 했던 심배 본인의 입지나 그가 독선적이고 내부분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서신이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보기엔 힘든 부분이 많다.
조비는 원소가 원담 같은 현명한 장자를 내치면서 대의를 잃은 원씨 일족이 멸망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며 원씨 몰락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충효와 명분이 강조되던 유교사회에선 뼈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이와 별개로 원씨를 무찌른 조조의 후계자이자 장유유서의 명분으로 동생들과의 정쟁 끝에 후계자로 등극한 조비로서는 장남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원상을 비판하여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며 심배 역시 스스로를 주공단과 계우에 비견하던 원상의 후견인으로서 원상을 찬양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할 동기가 명백했던 만큼 양극단에 위치해 있는 두 평가는 전혀 근거없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겠으나 서술주체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과장, 왜곡되어 있는 프로파간다의 성향이 아주 짙다.[39]
4.4. 유씨가 원소의 첩들을 살해한 이유
전론은 후한이 존속되고 있었던 시점에 쓰인 귀중한 1차사료이며, 원소의 죽음 직후 시점에 일어난 상황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서술 주체의 정치적 의도가 명백한 데다 같은 기록 안에서도 모순이 나타나기 때문에 미리 결론을 내놓고 짜맞췄다고 비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전론의 서술에 따르면 원소의 생물학적 사망과 거의 동시에 총첩 5인이 살해되었으며, 원소의 부고는 심배, 봉기, 유씨의 밀실 논의 끝에 발표되었고, 원상의 나이는 어렸고(때문에 배후의 인물들을 의심하기 쉬웠고), 유명의 진실성을 보증하던 유씨는 원상의 친어머니였고, 심배와 봉기는 평소부터 오랫동안 원담과 앙숙이었던 사이였다. |
전론의 기록을 신뢰할 경우 당시 원소를 정점으로 한 하북의 대장군부 체제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원소의 유명이 실은 존재하지 않았고 조작된 것일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이미 부고 발표 시점부터 파다했을 상황이었으나, 유명 조작이 드러날 경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얻을 원담조차도 유명의 조작여부에 대해 감히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고, 단지 원상 측의 실세인 심배가 생전 원소와 원담의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원소의 유명은 원상의 승계에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유명이 조작된 것이라는 정황이 너무나 명백한데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심지어 후계에 도전하던 원담조차도 감히 유명의 조작 여부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면 이는 구체적 물증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 생길 역풍, 궁극적으론 자신들이 체제 정당성의 상징으로 신격화하며 떠받들던 원소의 권위 자체가 훼손돼버리는 상황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이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성립되지 않는데, 전론의 서술에 따르면 원소 유명의 진위여부는 유씨 빼면 증언할 사람이 없었다. 이미 유씨가 원소의 죽음과 동시에 원소의 첩들과 그 일족들까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사실관계 서술에 대한 전론의 신뢰성을 긍정한다면, 투기심에 미친 악녀의 패악질과 악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어린아이의 패륜적 효도가 도리를 잃은 원씨 패망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한다는 조비의 프로파간다식 결론과는 별개로 당시 유명 조작의 진위여부를 은폐하기 위한 정치적 테러를 유씨가 '여인의 투기심' 을 핑계삼아 총대를 멨을 정도의 가능성이 성립된다.
4.5. 원담과의 관계
여양전투 당시 원담이 원상과 지휘부를 같이 두지 않으며 따로 나가서 성을 짓고 주둔했고 이 성은 훗날 원담성이라 불리며 한동안 유적으로 남았다는 기록이 있는데[40] 원상의 후견인이었던 심배,봉기와 유씨가 모두 원담과 사이가 나빴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원상은 원담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다만 원담이 평소 사이가 나빴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인물들은 심배, 봉기와 유부인이었고 심배, 봉기와 적대 계파였던 곽도, 신평 또한 원담에게 붙어 그의 도전을 부추기면서 원담, 원상의 대립은 진영전의 양상으로 흐르는데 원상이 원담에게 군대를 보내면 군사를 가로채며 칼을 돌릴 것이니 구원하지 말라는 심배의 조언을 절충해 직접 친정하며 원담을 구원하거나, 반기를 들었다 패하고 달아나 청주 내부의 저항을 겪고 있는 원담의 곤궁함을 이용하기는 커녕 지지세력을 규합해 재차 도전하는 원담이 위군의 경계에 진입하는 순간까지 관망하다 소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며 원담에게 자비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원담에게 대승리를 거둬 놓고서도 진압에 애매하게 시간을 끌다 조조의 개입을 허용해 놓고는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이를 강력히 부정하다가 끝내 알백과 실침의 고사를 인용하며 절절히 배신감을 표하는 모습이나 원담이 곽도에게 협박당하며 원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슬퍼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 등은 전통적인 삼국지 관에서 불화한 형제의 대표격으로 묘사되듯 원상과 원담이 원소 생전부터 끊임없이 대립하며 불화하던 원수 같은 관계였다는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한다.
물론 원상은 여양전투 당시 원담과 지휘부를 같은 곳에 두지 않을 정도로 불편한 관계였으며, 조조를 추격하자는 원담의 제안을 냉담하게 거절하며 원담의 독자행동을 제약해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적 원한을 샀고, 원담의 도전에 대응하는 우유부단한 태도와는 별개로 원담에게 군사적 대승을 거두고 평원을 포위하는 등 결국에는 언제나 심배 등이 주도하는 반원담 여론에 편승하는 이중적 면모가 있었으나 원상의 정치적 태생부터가 원담의 반대자들에게 추대된 인물이었다는 점과 원담이 내전을 시작한 명분 또한 원상이 아닌 원상의 후견인 심배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점, 유표가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담의 주변에 똥파리[41]들이 날아다니며 원상의 곁에는 비무기[42] 가 어슬렁거린다는 표현 등을 보면 원상은 기본적으로는 태생적인 배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원담과 대체적으로 불편한 관계였으나, 어린 나이에 과감히 친정에 나서며 갈등의 봉합을 시도하거나, 내전 과정에서 손속에 정을 베푼다거나 원담이 조조에게 붙었다는 사실을 혼자 부정하다 나중에 가서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등 원소의 아들이라는 자의식 속에 나름의 복잡한 동류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관점에 따라서는 효심과 형제애로도 볼 수 있었지만 현실 정치 속에서는 지극히 우유부단한 행보로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는 원상 자신의 몰락에 적지않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4.6. 다른 기록들
원소에게서 천거되었으나 원소의 반조조 정치에 비판적이었고, 원소 사후 원담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지지하지도 않으며 아예 원가에서 이탈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최염을 투옥했다가 진림의 설득을 듣고 풀어주는 최염전의 기록을 보면 원상은 자신이 원소와 대장군부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인식이 강했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의 사공부를 정통으로 보며 대장군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도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조와 중앙정부는 애초에 원상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원소의 대장군 작위 또한 무효임을 선언했으나, 원상은 대장군 원소가 사공 조조를 규탄했던 격조조서의 세계관 속에서 이러한 모순을 합리화했을 것이다.[43]업성의 원씨일족 전원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반조조 적대행위를 멈추지 않고 조조에 대한 공세를 펼친 것은 원소를 연상시키는 부전자전이라는 평가가 있다.
기록상 원소 대부터 중역에 있던 가신단이 아니라 원상이 발탁한 측근으로 확인되는 네임드로는 이부가 유일한데, 이 자는 업성 공방전 당시 조조를 두 번이나 속여넘긴 기념비적인 전적이 있고, 원상이 패했을때 중산까지 따라갔으나 원담이 중산을 치면서 붙잡혀 원담을 섬기다 원담의 패망 이후 조조에게 투항했다. 위략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대담하고 거침없으면서도 빈틈없이 깐깐한 성품으로 가규, 양패의 무리로 평가되었고, 조조에게도 능력 자체는 고평가받았으나 원상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좌천되고[44] 오랬동안 중용되지 못하다 노인이 되어서야 위왕조 아래서 출세하며 열전을 남겼는데, 이부의 기용을 통해 원상이 선호하는 인재상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이부의 인물상과 더불어 조조의 명령에 불복한 채 원상의 장례를 지냈던 견초와 전주 또한 엄격하고 외고집이면서도 강단있고 거침없기로는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었음을 볼때 원상은 대체로 자신과 주위에 깐깐하고 엄격한 인재상을 선호하며 또 그러한 유형의 인물들에게 존경을 받는 면모가 있었는데, 이는 예교 윤리에 입각한 초인적인 극기를 통해 후한 말 정치의 대권주자로 성장한 원소의 배경이나 원상이 그러한 원소에게 유난히 총애받던 아들임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전략과 후한서에 나타나는 최후의 일화는 그나마 원상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상 유일한 기록이고, 이 일화는 두 사서의 내용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전략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파악이 안 됐는지 뜬금없는 드립으로 보다못한 원희에게 한소리 듣던 얼빠진 인간상이고, 후한서를 따르면 이미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히 자리를 요구하며 공손강을 열받게 하는 상황이라, 일부러 의연함을 과시하며 공손강을 맥이는건지 종 잡기가 힘든 일화다.
최후 시점에 상당히 특이한 발언을 했고, 그 발언에 대한 해석이 갈렸는지 아니면 이 일화 자체가 처음부터 원상에 대한 당대인들의 상상력이 개입된 창작이었을지 진실이야 알 수 없으나 어떤 쪽으로 받아들이든 사람됨에 용력이 있고, 진작부터 먼저 선수를 쳐서 요동을 장악할 생각이었으며, 이를 기반삼아 조조와의 재대결을 염두에 뒀고, 공손씨와의 첫번째 회담에서 본인이 직접 공손강을 제압할 각오를 했으며, 사로잡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빈주의 예를 찾는다는 얼개는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심배나 조비 같은 추종자/적대자들의 과장된 프로파간다식 평가들과 별개로 원상이 원소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이 대단히 강하고 판단도 기민하고 호전적이며 몸을 사리지 않는 성향의 강골이지만 한편으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당돌하다는 당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일화로 해석될 수 있고, 의지가 대단히 강한 한편 고지식하고 외골수적인 면이 강했다는 점에서 원상이 기주를 두고 조조와 대결하던 과정에서 보인 대체적인 행보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최후 일화에 대한 평가는 현대에도 각양각색인데, 죽는 순간에서도 자리나 찾던 한심한 인물이라는 해석부터, 오히려 해당 발언이 시간끌지 말고 빨리 죽이라는 오기섞인 도발에 가깝다는 해석, 단지 하도 날이 추워 견디다 못해 자리를 요구했으나 그조차도 거부당한 채 죽는 원씨의 비참한 몰락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 이시다 미쓰나리의 최후 일화와 비견하는 해석, 의연한 듯 공손강에게 혓바닥을 놀리며 궤변으로 위기를 모면해보기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해석, 죽음에 직면해 떨고 있는 연약해보이는 모습을 추위 탓을 하며 감추기 위한 허세라는 해석, 이를 경국지색 기믹에 맞춰서 부정당하는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애처로운 어필이었다는 드립성 해석 등 다양한 평가가 나온 바 있다.조비를 비롯한 위나라 주류의 시각에서 파멸적 미모로 아버지를 홀린 취급을 받기도 했으나 원상의 최후에 대한 전략과 후한서의 기사에서는 서두부터 원상의 위인됨에 용력이 있다고 평가하며 이어지는 원희와의 대화에서도 호전적 성향의 발언들을 연이어 쏟아내는 데다 최후 발언 역시 호전적이고 시니컬한 뉘앙스의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대인들에게 원상이 남자답지 못하며 유약하고 수동적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호걸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를 뒷받침하듯 유표는 앉아서 지키기만 하는 도적에 불과하나 원상은 교활하다는 조조의 촌평이나 원상을 내버려둔 채 유표를 치면 하북 4주를 모두 잃으며 위태로운 상황이 될 것이라는 곽가의 유세 기록을 살펴보면 조조 진영 내부에서는 진지한 태도로 원상을 무시못할 적수로 여기던 인식 또한 존재했다.
한편 후한 말과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간 설화집인 수신기에서는 도삭군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슴을 닮았고, 눈처럼 새하얗고, 보들보들하고,매끈하고, 극도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원상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이 설화는 대체로 원씨에게 동정적인 편인데,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나 지괴소설류에 해당하는 민담으로서 후한말 일반 백성들의 인식이 아래로부터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있고, 사대부들의 공식적 기록들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당대인들에겐 원상의 외모가 미남이라기보다는 절색의 미소녀에 가까운 유난히 여성스러운 인상으로서 회자되었으며[45], 긍정적인 시각에선 이를 도삭군 전설의 묘사와 같이 신령함의 징표로 받아들였고,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조비의 인식처럼 경국지색, 파멸을 불러오는 요사스러운 미모 혹은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원상/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원칙적으로 업후를 제외한 원소의 모든 공식적 직위들은 양도나 세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원상이 승계했다고 주장했던 대장군, 기주목, 유주,병주,청주 도독 등 원소의 직위나 특권들은 자칭에 불과하다[2] 혹은 막내아들[3] 태복 원기로 동탁에게 낙양의 원씨 일족이 몰살당할때 죽어서 후사가 끊겼다.[4] 원담의 방탕함은 본전과 주석에 대놓고 언급되고 197년에 원소의 아들들이 칙사로 온 유송에게 술을 권하며 며칠동안 밤낮으로 술판을 벌인 데서 하삭음이란 고사가 생겼다고 하며 이를 비웃는 오언시도 남아있고 최염은 206년, 청춘의 방탕함을 즐기던 조비를 비판하며 마치 아버지 위세를 믿고 점점 사치스러워지던 원소의 아들들을 보는 것 같다는 언급을 한다.[5] 전론과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의 최측근이던 심배와 봉기는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행세하면서도 치부에 열심이던 위선적인 부정축재자의 면모가 있었고, 원담은 그 자신부터가 무뢰배적 면모를 보이면서도 심배와 봉기의 이런 성향을 대단히 역겨워했는데 심지어 이러한 태도조차도 원술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심배,봉기의 충성심에 의존하면서도 겉으로는 예교 윤리에 기반한 이념정치를 표방하던 원소의 입장에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가문에 망조를 불러올 불온하고 불길한 면모로 비칠 수 있었다.[6] 실제로 《삼국지》의 <원소전> 서사구조가 딱 이렇고, 《후한서》 역시 자료 취득의 시대적 한계로 통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 없이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7] 원소 사후에 나타나던 신격화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8] 유일하게 방덕전에서만 이때 곽원과 고간을 파견한 주체가 원상이 아닌 원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동 공략은 원씨 영역의 서부지역에서 전개된 작전이었고 원담은 여양성 서쪽에 원담성을 짓고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가 혼동되었을 수 있다.[9] 부간이 마등을 설득하던 말에 따르면 원씨는 위선적이고 음험해 정치적 신의가 없다는 인식도 배신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0] 조조는 양무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원소군에게 대패해 관도로 밀렸고 10월까지 극단적인 수세에 몰렸기에 첫 승리란 서술은 사실과 다르다.[11] 원담이 원상과의 대결에서 참패했음은 무제기와 헌제춘추 주석의 기록을 통해서도 교차검증되는데 헌제춘추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원담은 시체와 유혈이 들판을 뒤덮으며 피해 규모를 헤아리기도 불가능한 수준의 참패를 당했다.[12] 그러나 상식적으로 10대 후반인 어린 아이가 원소 대부터 중역으로 활동하며 무수한 군공을 세운 채 청주를 장악하고 있던 30대 이복형을 군사적으로 압도해버린다는 가정은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는 어렵고 합리적으로 내전이 장기화될 가정하에 후방의 유표를 정리한다는 조조의 전략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13] 요순 신화에 나타나는 형제로 서로 불화하여 날마다 무기를 잡고 싸웠기에 요임금은 이들을 아주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이는 가까운 관계임에도 결코 화합할 수도 마주할 수도 없는 사이를 상징한다.[14] 실제로 원담에게 원상의 우위를 인정하고 화해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는 한다.[15] 응소는 태산태수를 지내며 황건적을 격파하는 등 활약하기도 했지만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응소의 부임지를 지나다 도겸의 수하들에게 변을 당했기 때문에 조조의 원한을 두려워해 임지를 버린 채 원소에게 망명했는데, 원씨 휘하에서 응소는 한관의와 풍속통의를 쓰는 등 다방면의 저술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원소의 중개를 통해 조정에게 인정받았던 군모교위라는 직책은 본질적으로 원씨의 군사적 자문역에 가까웠다.[16] 북쪽으로 청수라는 강이 흐르며 서쪽과 남쪽으론 산지를 끼고 동쪽은 평야지대로 남동으로 여양에 달한다. 지형지물에 의지해 조조의 공세를 막아내며 황하를 거쳐 여양→업으로 이어지는 조조의 보급로를 압박하려는 포진인데, 원상이 서산 방면이 아니라 대로를 통해 곧장 업성 남부로 도달했다면 취했을 행동이며, 이는 조조가 최초부터 우려하던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크게 패하여 사기가 꺾인 상황에서는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지만.[17] 견초전에서 확인되듯 원상이 중산으로 피신하는 시점까지는 고간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다는 점에서 원상이 서산에 당도할 당시 표면적 관계나마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원조가 있었을 가능성 정도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방관적 태도가 뚜렷했다.[18] 원담의 숨통을 끊지 못한 이상 반격을 해올 것이 분명했고, 고간의 이탈까지 뚜렷해진 상황에서 이미 원상의 핵심 기반인 업성은 심각한 피해를 받은 데다 당장 업성을 포위하고 있던 조조군은 원상 본대보다 숫적 우위가 확연했으며 원상군은 초전의 패배로 기세마저 잃었기에 잘 풀려서 조조를 막아낸다 한들 뒷날이 암담했다.[19] 원래는 은밀히 죽이려고 했지만 견초가 이를 눈치채고 달아났으며 견초는 원상이 원담에 의해 중산에서도 쫓겨나 합류할 길이 없어지자 조조에 투항한다.[20] 중산으로 피신한 원상에게 합류했던 이부도 이때 원담의 밑으로 들어갔고, 원담이 패사하자 조조에게 항복하면서도 의연한 태도와 유능한 모습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며 원상에게 가세할지 모르는 잠재적인 반란분자로 찍혀서 조조, 조비 시대 내내 찬밥이었다.[21] 원소 신앙의 흔적인 도삭군 전설에서는 조조가 원담을 칠 무렵 장합을 따로 보내 도삭군의 사당을 파괴하게 했지만 도삭군이 신통력을 발휘해 구름과 안개를 부르자 장합과 그의 군사들이 길을 잃어 헤메게 되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도삭군의 신통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조조가 항장이었던 장합을 주장으로 분군하며 원담을 치던 본군과 별도로 원상을 겨냥한 공세를 펼쳤음은 장합전에서 교차검증되기 때문에 해당 설화를 장합이 탁군 남부를 공격한 사건에 대한 원씨 시점의 묘사로서 본다면 이때 원상과 원희는 관도의 참패를 결정지은 배신자가 선봉에 선 것을 보며 기분이야 통탄스러웠겠지만 이미 탁군태수가 이탈하는 등 내부 와해 기류가 워낙 뚜렷하던 상황이라 적극적 교전을 회피하며 전력을 보존하는데 급급했을 것이다.[22] 혹은 장거, 장순의 난.[23] 다만 견초전의 묘사에 따르면 원소는 황제의 명령을 사칭한 것이 아니라, 특진을 수여받은 대장군으로서 답돈의 오환선우 임명을 조정에 중개하며 이러한 행위가 조정으로부터도 인정받고 있었으나, 나중에 조조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 모든 행위가 책을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24] 이 외에도 좌, 우선우로 소복연과 난루가 임명되는 등 오환의 권력자들 다수가 원씨의 중개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정당화했다.[25] 이렇게 볼 경우 답돈의 후원자였던 원소가 의도적으로 선우가 바뀐 사실을 은폐하며 조정을 기만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26] 앞서 언급된 초촉, 왕송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확하나 개연성은 있다.[27] 명나라 때의 책인 백전기략에 의하면 이때 원상이 상곡군에 주둔하며 오환기병들을 이끌고 여러차례 유주를 공격해 조조에게 피해를 줬다고 한다.[28]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傍海道)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 조만전.[29] 조조가 전주를 찬미하며 올린 표의 내용에 따르면 전주가 500명을 인솔하며 산골짜기 가운데서 길을 인도했다고 하는데, 조조와 휘하 장교단 또한 본대와 떨어져 앞서나갔을 때는 선발대의 지휘를 맡은 전주의 지시를 존중했을 것이다.[30] 이 당시 유비가 이런점을 간파하고 이런 진언을 할 만도 한게 유비는 유주 출신이고 조조가 맞서고 있던 그 오환족과 싸우던 공손찬 휘하에 있었으며 스스로도 오환기병을 거느리고 싸운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지역 사정과 그로 인해 조조가 겪을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전주가 개입하지 않았거나 하다못해 유표가 유비의 말을 들었다면 중원의 세력구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었다.[31]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이해응(李海應)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燕京)에 갔을 때의 견문을 기록한 책. 필사본. 5권 5책. 1804년(순조 4) 편찬. 매일 겪은 일을 일기체로 기술하였고, 그 중에서도 그날의 중요한 일에는 시 한 수씩을 지어 모은 일종의 시사(詩史)다.[32]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명분론적 관점에서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비판을 받기도 했다.[33] 이 부분은 조작이라고 봐야 할지 애매한 감이 있다. 당시 원소의 병이 위중해서 이미 말을 할 수 없었지만 평소에 이미 원상을 후사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인 적도 있고, 원상이 자리를 계승할 수 있겠냐는 유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34] 서산은 업성과 멀고 병주 상당군에 붙어있는 지역이며 남구는 업성 남부에 있기에 업성에서 패한 원상이 조조의 추격을 피해 남구가 아닌 서산으로 퇴각했다가, 서산에서 고간이 있는 상당도 아니고 산세에 의지한 기주 북부의 거점인 중산도 아닌 업성 남쪽의 남구로 신출귀몰하는 퇴각은 불가능하며, 이런 묘사는 나관중과 모씨 부자가 하북 지리에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35] 사실 원소 항목에도 나오지만, 원소 세력이 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많아봐야 50대 초반을 넘기지 않던 원소가 급사하면서 생긴 일이다. 위에 나온 원상의 단점은 결국 그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있는 것인데, 원소가 동년배의 라이벌이었던 조조와 비슷한 수명만큼이라도 살았다면 나이/경험/실적 모두 보완이 가능하니, 아버지 원소같은 인물로 성장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실제로 원소는 6년상 공백이 있었기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최소 20대 중후반부터였다).[36] 전주가 딱히 원소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급진적으로 해석한다면 원상의 어머니인 유씨가 유우의 딸이고 원상은 유우의 외손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37] 여인은 듣기만 해도 완(婉)하다(婦聽而婉). - 《좌전·소공26년》(左傳·昭公二十六年) 완이란 순하는 것이다.(설문해자. 婉,順也)[38] 넓게 잡으면 여자옷을 입었다는 하안 정도가 비슷하다.[39] 조비가 후계자로 임명된 이유 중 하나가 조조의 수하들 중 다수가 원씨의 사례를 들어 조언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조비 입장에서는 '원씨는 장남을 후계자로 삼았어야 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비가 원담을 현명하다며 호평한 것과 달리 원담은 뛰어난 군재와 별개로 청주자사로 보인 모습을 보면 정치가로서는 폐급이었으며, 조비의 원상, 원담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정치적 이득에 따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담을 포장하고, (조식 정도의 위치인) 원상을 폄훼하는게 당연했다.[40] 곽연생의 술정기.[41] 곽도와 신평으로 인해 재앙이 일어났다고 거듭 언급하기 때문에 문맥상 명백하게 곽도, 신평을 뜻하는데, 유표가 심배와 봉기 또한 간신 비무기에 비유하며 디스한 것과 비교하면 곽도와 신평을 아예 인간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더러운 똥벌레들이라 비난한 것이다.[42]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간신으로 초나라 평왕의 장자 태자 건을 모함해 내쫓고 권세를 휘둘렀지만 초평왕이 죽고 어린아이였던 소왕이 즉위하자 실각하여 주살당하는데 문맥상 심배나 봉기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 편지가 쓰여진 시점에서 봉기는 죽었고 심배는 살아있었지만 원담과 불화했던 원상 주변의 핵심 중신들이 비무기로 상징된다면 유표가 보고 있던 심배와 봉기의 차이는 단지 비무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거나 혹은 살아서 소왕의 핵심 실세로 등극하는데 성공한 럭키 비무기거나의 차이일 것이다.[43] 진림의 설득에 태도를 바꾸거나 조조와의 협상단 대표로 진림이 언급되는 점에서 보이듯 원소와 함께 격조조서를 작성했던 그는 원상에게 일종의 이념적 은사이자 측근으로서 상당한 입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진림은 원상이 패하면서 조조에게 붙잡히게 되자 자신의 처지를 시위에 놓인 화살에 비유하며 자신의 모든 언행은 그저 원씨의 뜻에 따른 것이라 자복하는 비굴한 변절자의 모습을 보였고, 조조에게 사면받아 조조의 화살로서 등용된 이후로는 원소와 원상을 독사에 비유하며 비난했다.[44] 이부전에서 이부가 투항한 것은 본심이 아닌 임시방편이었다고 서술하는 점을 볼때 그의 사후에도 이러한 의혹은 기정 사실화된 채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45] 이런 인식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원상의 나이가 어렸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사망 시점에도 고작 20세 무렵에 불과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