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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19 02:00:06

난파(후한)

欒巴
(? ~ 168)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숙원(叔元).

기주 위군 내황현 사람으로 도가 학문을 좋아했고 순제 때 환자로 액정에서 일해 황문령이 되었지만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으며, 수수하고 정직해 경전을 두루 공부하면서 다른 상시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낭중에 발탁되었다가 4차례 승진해 계양태수가 되었으며, 계양군이 남쪽에 치우쳐서 예법을 알지 못한다고 여겨 관리의 정혼, 결혼, 상례에 관한 예절을 정하고 학교를 세워 권장했다. 이를 평가해 석차를 정하고 그에 따라 승진시켰으며, 정사가 밝고 깨끗했으며 재직 7년에 병으로 사직했다.

형주자사 이고가 난파의 치적이 훌륭하다고 천거하자 조정의 징소로 의랑에 제수되었으며, 광록대부 대행으로 두교, 주거와 함께 각 주군을 순행하는 여덟 관리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서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뒤에 다시 승진해 예장태수가 되었으며, 예장군에는 산천에 귀신이 많다고 해서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면서 기도를 올렸다. 난파는 평소에 도술로 귀신을 부릴 줄 알았기에 기도나 치성을 드리는 사당을 모두 부숴버리고 무당들을 법으로 처리하자 미신은 점차 사라졌으며, 백성은 처음에 두려워했다가 결국 모두 안정되었다. 패국상이 되었고 재직 중에 치적이 좋아 조정에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마침 순제가 붕어해 헌릉을 축조하고 능 주위에 백성들의 분묘가 있어서 공사 담당자가 이를 없애야 한다고 하자 난파는 연이어 상서하며 이를 못하게 했는데, 양태후가 입조해 조서를 내려 난파를 책망했다. 난파는 하옥되었다가 금고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20여 년 후에 영제가 즉위하자 두무, 진번이 정사를 보필하자 난파는 의랑에 제수되었으며, 두무, 진번이 주살되자 난파는 당인이라는 이유로 영창태수로 좌천되었다. 난파는 그 동안의 치적이 나쁘다고 자책하면서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면서 두무, 진번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제는 화가 나서 조서로 질책하고 체포해 정위에게 압송하도록 하자 난파는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