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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8:40:35

이시다 미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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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행
사법 담당 행정 담당 토목 담당 재정 담당 종교 담당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츠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 마에다 겐이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5px-Ishida_Mitsunari.jpg
출생 1560년 1월 22일
사망 1600년 11월 6일 (향년 41세)
신장 156cm[1]
자녀 3남 3녀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소속 서군
주요 참전 행주대첩, 세키가하라 전투
파일:대일대만대길.svg
대일대만대길
大一大万大吉
[2]
파일:external/www.city.nagahama.shiga.jp/137-6.jpg
또 다른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히데요시와의 만남2.2. 오시 성 전투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2.3.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패2.4. 이에야스에 맞서다2.5. 세키가하라 전투2.6. 최후
3. 평가4. 자손5. 기타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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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기 영지이자 측실 요도도노의 고향인 오우미 지방하급 무사 출신이다. 그 영리한 재능으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히데요시 사후 유력 다이묘 간 내분이 발생하자 미츠나리는 반(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 세력은 싸웠으나, 세력 열세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배반이 겹쳐 패했고, 결국 히데요시 사후 2년 뒤 1600년에 41세 나이로 사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연 에도 막부시기에는 평가절하당하고 악역 취급을 받았으나, 현대에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있다.

직책은 지부쇼유(治部少輔)[3]로, 이시다 지부쇼유 미츠나리, 줄여서 이시다 지부라고도 한다. 그래서 《간양록》 같은 조선 측 사료에서는 석전치부소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곤 한다.[4] 아명은 사키치(佐吉).

그 밖에 가몬(家紋)은 大一大万大吉(대일대만대길, だいいち・だいまん・だいきち)을 사용했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고, 그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한다면 세상엔 복이 오니라".[5]

2. 생애

2.1. 히데요시와의 만남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첫 만남은 이렇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오미국(近江国)[6]의 이시다촌이라는 마을에서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자랐다.[7] 이시다 미츠나리는 집에서 가까운 관음사라는 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8] 교통의 요지였던 키타오미는 상업이 발달한 곳이어서 주판 등 산술 교육을 이때 받았다고 추측한다.

한편 하시바 히데요시는 1574년 주군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아자이 나가마사의 영지였던 오미국을 물려받고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축성을 허락받아 인생 처음으로 성주가 되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주까지 오른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는 가신이라고 부를만한 인재들이 부족했다. 히데요시가 오미국의 영주가 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매사냥을 하던 히데요시가 이시다 미츠나리가 있던 관음사로 찾아와서 를 청했는데, 이때 차 대접을 한 사람이 이시다 미츠나리(당시 아명 사키치)였다.

처음에는 큰 잔에 먹기 좋게 미지근하고 연한 차를 내왔다가 차를 단숨에 마신 히데요시는 한 잔을 더 청했고 이번에는 처음 잔보다 조금 뜨겁고 진한 차를 절반만 채워서 내왔다. 히데요시가 한 잔을 더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제대로 뜨겁고 진한 차를 작은 잔에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히데요시가 목이 마를 것이라 여겨 첫 잔은 한 번에 마시기 좋게 미지근하게 타온 것. 이를 대접받은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영특하다고 여겨 감탄하고 그날 코쇼[9]로 거둬들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이것이 유명한 세 잔의 차라는 훈훈한 일화인데,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의 세 잔의 차 이벤트 당시에도 이 일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이시다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인간이고 히데요시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뒷이야기는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로 그는 삼헌차의 사나이라고 불리지만, 그가 뛰어난 행정 능력에 비해서 군략이 없음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적어도 18세 때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기록은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Statues_of_Hideyoshi_and_Mitsunari.jpg
시가현 나가하마역 앞에 있는 미츠나리와 히데요시의 첫 만남을 묘사한 동상이다.

2.2. 오시 성 전투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군재는 형편없었는데 호조씨 공략에서 잘 드러난다. 호조씨 공략 당시 미츠나리는 간토 평야 북부의 오시 성(忍城) 공략을 맡았는데 오시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1542 ~ 1596)는 오다와라 수비를 위해 성을 비웠기 때문에 아들 나리타 나가치카, 딸인 카이히메(甲斐姫)가 겨우 병력 500여 명으로 지키고 있었다.[10] 미츠나리는 오타니 요시츠구, 나츠카 마사이에와 함께 20,000여 명으로 몇 차례 공격을 가하나, 군관민이 일치단결한 오시 성의 저항에 패퇴하였다.[11] 그래서 생각한 계책이 히데요시가 빗츄 다카마츠성(備中高松城)을 공략했을 때 쓴 수공이었다. 그러나 정작 수공을 벌였는데 이 역류해 미츠나리 군을 덮쳤고 물이 빠지고 난 뒤에는 전장이 진흙탕이 돼버려 오히려 공격이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미츠나리는 소환되었고 오시 성은 오다와라 성이 함락된 이후 항복하였다.[12][13]

오시 성 전투는 미츠나리가 총대장으로 참가한 최초의 전투임에도 보기 좋게 실패하여 이후로 미츠나리는 전투에는 젬병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 의하면 오시 성의 수공은 미츠나리의 판단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14]이 설득력을 얻었다. 현재 오시 성은 사라지고 없지만[15] 현재 지형과 당시 지도를 보아도 수공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지형이다. 오시 성 주변 지형은 평지인 데다 주변에 자연 제방으로 사용할 만한 구릉 등 지형이 없으며 오시 성은 저습지로 둘러싸였고, 미츠나리가 제방을 쌓은 장소에 비해 다소 고지대에 있는 등 도저히 수공을 펼칠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16]

결정적으로 당시 쌓은 제방의 총 길이는 무려 28 km로, 아무리 다죠다이진(太政大臣)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지휘권을 일임받았다지만 일개 봉행(奉行)이 독단으로 실행할 만한 작전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0만 명을 네댓새 만에 모집해서 이 제방을 만들었다. 엄청 높은 일당을 주고 인력을 모집했는데 소문을 듣고 먼 지방이나 심지어는 오시 성 안에서 농성 중이었던 백성들까지 이 돈에 혹해서 공사에 참여해서 도왔다고 한다.[17]

2.3.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패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과 선발대로서 참전했는데 주로 전투 지원 위주의 임무를 맡다가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평양성 전투) 벽제관에 숨어 있다가 명나라 군대를 요격했다.(벽제관 전투) 당시 명나라 군대는 패잔병을 뒤쫓느라 여념이 없어서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반격을 당했다. 명나라 군대를 요격한 이후에는 행주산성으로 향했고, 거기서 행주 대첩으로 처절하게 당하고 왔다.[18]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는 병력의 수적 우세를 믿고 무작정 공격했는데, 이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측에서 권율지휘관행주산성은 한강을 뒤에 둬서 배수진의 상태였는데, 문제는 진입로가 좁아서 대군이 한 번에 다 들어가지 못하여 이시다가 믿고 있던 수적 우세라는 장점을 살릴 수가 없었다.[19] 그러나 상대를 얕본 나머지, 지형에 맞는 전술을 내지 않고 결국 일본군은 보병 돌격, 그것도 3열 횡대의 보병 돌격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상대가 조직적 무장을 갖추지 못한 의병[20]이라면 모르겠으나, 엄연히 전장에 적응한 조선의 정규군이었으니 권율에게는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된 셈이다.[21]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총알받이가 되었다. 권율은 오직 그 비좁은 입구에만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굉장히 편하게 전투를 했지만, 일본군들은 횡대로 줄을 선 상황이라 이건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돼서 앞으로도 못 나가고 뒤에 줄 선 아군 병력 때문에 뒤로 빠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병력을 이런 식으로 굴리니 패배는 당연했다.

그래도 아군의 1할에 불과한 소수의 조선군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조선군이 아무리 순간적인 화력이 우세해도 조만간 바닥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조총 외에는 냉병기밖에 없던 전국시대 일본과 달리 신기전, 비격진천뢰, 각종 총통 등 온갖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일본군은 계속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22]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선군 진지에 불을 지르기 위해 불화살로 대응해보기도 하지만 조선군 진지 바로 뒤가 한강이었다. 조선군은 목책에 물을 뿌려 불화살 공격도 무력화시켰다.

물론 이시다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라서 행주산성의 조선군들은 전투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화력이 고갈되어갔고, 이 때문에 진형의 일부가 돌파되기도 했다. 그러나 권율이 직접 도망병의 목을 치며 독려를 해서 버티는 와중에 경기수사 이빈의 지원 부대가 화살을 잔뜩 갖고 도착하여 조선군의 기세가 살아나고, 그 뒤를 이어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운선 수십 척이 나타나 일본군 진지 뒤로 상륙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걸 보고 안 그래도 행주산성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던 일본군들은 결국 일제 퇴각을 감행했다.[23] 이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승자총통에 맞아 땅바닥을 뒹굴며 사경을 헤멜 정도가 되었는데 왜병들이 들쳐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나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역시 모두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24]

결국 3만 명을 이끌고 2천 명을 상대하면서 행주산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한 채 경이적인 피해를 입었다. 변명이 가능한 호조씨 오시 성 공략과는 달리 이것은 빼도박도 못할 참패였다. 게다가 조선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체 숫자가 처음에는 16만이었지만 다수의 병력이 손실되어 1593년에는 이미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 상태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원정군 잔여병력 8만 중에 3만명이 그전까지는 쉽사리 박살내던 조선군 2천에게 패퇴한 것이다. 이쯤 되면 집안이 가이에키(개역, 改易)되고 이시다 미츠나리 본인이 참수형효수당해도 할 말이 없는 실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행주대첩에 참여해 똑같은 패배를 당한 다른 무장들의 면면을 보면 군사적으로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책임은 병력을 축차투입한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있다 할 수 있는데, 이 인물 역시 벽제관에서는 명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바 있다. 즉, 이시다 미츠나리가 무능했다기보다는 대다수 일본군 무장들이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해 단기전으로 승부하려 했으나, '조선군의 우주방어에 완전히 막혔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이시다에게 관대한 관점은 어디까지 현대적인 시각에서 전후사정을 다 따졌을 때 가능한 것이고, 당장 윗선이 그런 관점을 가져주기엔 결과적으로 행주산성의 대패는 확실히 심각했고 그의 군재에 의문을 주기엔 충분했다. 때문에 그는 더이상 지휘관으로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정유재란 때는 주로 외교행정 쪽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하여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2.4. 이에야스에 맞서다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미츠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 이에야스를 제거하고자 한다.[25] 이 당시에는 이에야스와 동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생존해 있어서,[26] 무게추는 문치파[27]인 미츠나리 쪽이 유리했으나, 마에다 토시이에가 1599년 3월에 사망하면서 반전되었다.

이때를 틈 타 가토 기요마사 등이 모의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이를 감지하고 탈출,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혼비백산한 미츠나리가 혈혈단신 이에야스의 집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 쓰인 자료에 의한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으로 거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파격적인 행동이기도 했다.[28]

이에야스로서는 눈엣가시인 미츠나리가 제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나, 당장 미츠나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큰 이익[29]을 위하여 미츠나리와 무단파 인물들과의 화해를 중재한 뒤,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하게 된다. 실제 그를 배웅한 인물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서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으로 도망, 무단파 무장들과 대치하던 와중에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에야스의 도움을 받아서 무단파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대가로 무단파의 요구인 오봉행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토시이에의 사망에 이어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도요토미 세력의 유력인물인 미츠나리도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에야스는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미츠나리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통하여 우에스기 카게카츠과 밀약, 우에스기가에서 군사를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모리 데루모토를 맹주로 앉히고 이에야스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2.5.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 미츠나리는 은밀히 친교를 맺고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 사타케 요시노부등과 내통하여 세키가하라의 결전을 구상하였다. 이는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도발하여 동쪽으로 끌어내면 우에스기 집안[30]이 아이즈에서 동군을 맡아 수비하고, 그 틈에 미츠나리는 서쪽의 군세를 모아 이에야스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사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점을 방증했을 뿐이다.

자세한 전술은 동군 방향으로 산 꼭대기에서 학익진을 펼쳐 공략한다는 점인데 문제는 학익진의 한쪽 날개가 바로 다름 아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였다는 점이다. 코바야카와는 그의 34만 석 영지를 미츠나리의 간언으로 히데요시가 1/3인 12만 석으로 줄여버렸다는 악연이 있었는데, 결국 서군에게 전투가 기울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 측으로 넘어갔다.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용인술의 실패였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서군 측에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상태라서, 비록 그의 군대가 수가 많고(1만 5천)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주력으로 사용하긴 무리가 많았다.[31] 결국 이 우려대로 히데아키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섰다.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대는 그 학익진에 갇히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학익진 안에는 칠본창의 군대만 주둔했을 뿐이었고, 그 상태에서 학익진을 펼침은 《손자병법》의 <병세편>(兵勢篇)에 위배되었다. 그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쓴 건 《손자병법》의 <군형편>(軍形篇)과 완벽하게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일단 어쨌거나 진형 자체는 서군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포진이 일단 제대로 돌아갔더라면 사실 동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당시 포진도만 본 프로이센 군사고문 클레멘스 메켈 소령이 서군이 이길 수밖에 없는 포진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실려있기도 하다.[32] 당장 진짜 이에야스의 본대 격인 히데타다의 4만여 군사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을 공략하느라고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전투 전에 이에야스는 서군 측 다이묘 상당수를 포섭한 후였다.

군략이 모자라면 권모술수라도 부렸어야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접촉한 것과 같은 정치공작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 서군 쪽 가문들에게도 동군 쪽 가문들에게도 자신의 명분을 들고 포섭하면서 지휘력을 인정받았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다. 결국 모리 가문 같은 아군까지도 '미츠나리가 우리를 이용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고 의심해서 도쿠가와파인 킷카와의 진언 때문에 전투를 방기했다. 결국 서군의 상당수가 서군을 배반하는 결과로 나타난다.[33]

자연 이런 상황을 서군이라고 모를 리 없었고,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내놓은 비책은 인망은커녕 널리 원수를 지고 혐오를 받는 이시다 미츠나리 대신 명문가로서 명망이 높은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바지사장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비록 이시다 미츠나리가 전적으로 서군의 거병을 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군의 총사령관은 명목상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으며, 모리를 무시하고 사령관처럼 행동한 것을 이유로 모리는 싸움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하고, 모리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해서 안 된다."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싸움을 방기했다.[34]

아니나 다를까, 이에야스는 나오에 카네츠구의 도전장을 받고 심히 분노했다고는 하나, 이시다의 움직임과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쳐들어오자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츠를 막게 한 것 외에는 먼저 군사를 움직임이 없이 사태를 관망하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학익진을 전개할 것을 미리 간파하고 자신의 본진을 뒤로 빼며 7본창의 부대를 들어가게 하여 서군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만약 서군이 잘 결집되어 학익진을 잘 실행시켰다면 7본창 부대는 깨지고 이에야스도 거기에 휩쓸려 깨졌을 테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정치공작을 해 놓은 상태라 마음놓고 학익진에 들어갔다.

군사 회의에서 무시했다는 이유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삐진 데다[35] 쵸소카베 가문은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맹주 격인 모리 가문은 아예 가문 내 여론이 완전히 둘로 갈라진 상태인 데다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는 그냥 오사카 성에 처박혔다. 그의 사촌이자 양자인 모리 히데모토가 대신 모리군을 이끌었는데 선봉장 킷카와 히로이에가 그 유명한 도시락 먹어야 해서 전투 못 하겠다는 드립을 치며 길을 막았다. 덕분에 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진을 친 안코쿠지 에케이, 타치바나 무네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군은 전투 내내 구경만 해야 했다.

동군에서 서로 선봉을 서겠다고 다투는 사이에 어영부영 전투가 개시되고,[36] 오전은 서군 측에서 선봉인 우키타 군이 매우 분전하였지만[37] 시마즈 군의 엄호를 받지 못해 결국 중과부적으로 퇴각했다.

서군 쪽에서는 시마 사콘이 기마 돌격을 하며 동군의 구로다 나가마사의 부대를 마구 짓밟았는데, 시마 사콘이 저격을 당하는 바람에 일시후퇴했다. 동군 쪽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이자 당시 일본 최고의 맹장인 혼다 타다카츠가 기마 돌격을 하며 서군의 우키타 히데이에 군을 마구 짓밟았는데, 그만 혼다 타다카츠의 말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어 혼다 타다카츠는 낙마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다시 말을 빌려 타고서 분전하였다.

미츠나리는 밀려드는 동군들에 맞서 방어전을 비교적 잘 수행했다. 이것도 미츠나리 본인의 기량이 아니라 가신들의 노력 덕택이었다. 시마 사콘의 저격으로 1진이 무너지고, 동군의 대부분이 미츠나리만 베면 끝난다고 생각해서(공훈도 노리고) 쇄도했던 시점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나카 요시마사는 역궤멸을 당했을 지경. 지휘를 하던 도쿠가와가 불안해서 전장의 앞쪽으로 나아가 시야를 막는 장수가 있으면 칼을 휘두를 정도로 초조해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역공의 주력이 되어야 할 코바야카와나 모리가 배신하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낮에는 고니시 군이 싸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퇴각, 오타니 요시츠구가 매우 분전하며 동군 군단들을 모두 끌어들였지만 결국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시작으로 그동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서군의 군소 무장들, 와키자카 야스하루,[38] 쿠치키 모토츠나 등이 차례차례 배신하는 통에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그러나 오타니 요시츠구의 군사적 식견이 대단했던 것은, 이 와중에도 병력 단 몇백 명, 아마도 대략 600명쯤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5,000명이 주둔한 산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코바야카와 군이 내려오자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여 유아사 고스케에게 목을 숨길 것을 지시하고 할복하였다.

오후에는 이시다 군 직속 부대만 남아, 시마 사콘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다가 전사[39], 가모 요리사토의 부대도 전멸했다. 여담으로 이때 미츠나리의 가신인 오바타 노부요가 포로로 잡혔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츠나리의 위치를 추궁했으나 주군을 배신할 수 없다며 대답을 거부한다. 그런 그의 충성에 탄복한 이에야스가 풀어주나 그 직후, 할복했다고 한다.

2.6. 최후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미츠나리는 재기하고자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다나카 요시마사에게 붙잡혀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끌려왔다.[40]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의 비참한 모습을 로쿠조가와라[41]의 성문 앞에 세워두고 모두가 구경하게 했다고 한다. 처형이 결정된 다른 제장들이 그냥 갇혀있기만 했던 반면, 미츠나리에 대해서는 동군 지휘관들의 사적인 원한도 컸는지[42] 지나가며 모두 비웃고 욕을 하고 을 뱉거나 심지어는 육모방망이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지만 미츠나리는 끝까지 의연했다고 한다. 그 뒤 사형이 결정되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목이 말라 간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으나 "물은 없지만, 홍시는 있다. 대신 이걸 먹어라."라며 때마침 가을이라 잘 익은 홍시를 건네자 몸에 해롭다며 먹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간수가 "곧 죽을 놈이 몸을 아껴서 뭐하겠소?"라며 비웃자, 미츠나리는 "큰 뜻을 품은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43]라고 한 뒤 처형되었다.[44]

3. 평가

강한 충성심을 가졌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도요토미 가문 최후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을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성격 탓에 적을 양산하였고 결국 주가(主家)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상대방은 일부러 미츠나리의 취향을 맞추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도리어 호통이나 면박을 듣기도 했으며 이런 미츠나리의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인망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인망도 인망이지만 당시 근신 중이라 자신이 직접 거병하지 못해 모리 테루모토에게 도움받아야만 했다.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미츠나리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귀한 출신이 아닌데다가 단기간에 많은 다이묘를 휘하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어야 할 것은 각 다이묘들을 효율 있게 통제할 방편과 함께 가신들의 분열을 막고 통합을 꾀하는 한편 도요토미 가문을 향한 확고한 충성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미츠나리는 행정 재능은 좋았고 직속 부하에게는 충성을 받았지만 융통성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나머지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에서 실패하여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으로 향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가라샤를 자살하게 한 일이나 원래라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지켜줄 소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의 갈등이 있다. 가라샤의 일로 대다이묘였던 호소카와는 이를 갈며 동군에 참여했고 임진왜란 시기부터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해 유력한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죄다 동군에 붙은 점은 미츠나리 본인의 부덕과 인망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주 뼈아프다. 막상 시마즈 요시히로가 돕겠다고 나서도 병력이 1,500명 밖에 안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박대하여 사사건건 부딪혔고 히데요시 생전부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박대했는데도 히데아키가 서군 입장에서 미츠나리를 계속 따르리라고 판단한 것도 패착이었다.

좋고 싫음을 표가 나도록 확실히 하는 성격은 적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반대로 미츠나리의 솔직한 성품에 끌린 인물도 많았으며 미츠나리는 자신의 편에 선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잘 대했기에 수하 가신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친 것도 특징이다. 최초의 영지 500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영지를 주고서 영입한 와타나베 신노죠는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줄 테니 자신의 가신이 되라 하자 "10만 석을 주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후에 4만 석 영주가 되었을 때는 절반인 2만 석을 주고서 시마 사콘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어떻게 사콘 정도나 되는 인물을 영입할 수 있었는가', '주군과 가신의 봉록이 같은 예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랐는데도 나중에 따로 사콘을 불러 "미츠나리를 잘 부탁하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츠나리 휘하로 참가하였던 무장들의 대다수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가하였는데 오오타니 요시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등의 인물들은 인정과 우정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에 서려고 서군에 가담했다.

단, 사나다 마사유키는 일단 자신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고 도쿠가와와는 센고쿠 시절부터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더욱이 우에스기와 도쿠가와의 충돌로 도쿠가와가 우에스기에 집중하는 동안 서군이 간토 6주를 재빠르게 쳤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가족 회의서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를 도쿠가와 측으로 보냈다.

전장에서 살아남고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은 남자들조차 도요토미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미츠나리의 유지를 성실히 지켜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 가담했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특히 오타니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에게 도쿠가와와 등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미츠나리의 의지가 단호하였기에 오타니 요시츠구도 같이 서군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오타니 요시츠구는 일생의 친구로서 미츠나리를 이롭게 하려고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색다른 성격에 색다르게 살아간 남자이며 싫어한 자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받았고 좋아한 자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사랑받았던 남자였다. 실제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수많은 다이묘가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려고 모든 걸 버렸을 만큼 도요토미 가문에 심정적으로 극히 충성하던 사람이 많고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좋게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약 미츠나리가 적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고 적당히 융통성을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일본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오시 성 전투의 전후 사정을 다룬 분석이 진행되면서 오시 성 졸전의 책임이 미츠나리가 아닌 히데요시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져 미츠나리가 재평가되었고 그 덕분에 '졸장'이라는 기존 평가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군재는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전쟁사로서의 일본 전국시대를 인지하는 정도가 낮아서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인 미츠나리의 낮은 지휘력을 잘 모른다는 것. 오시 성 전투 - 행주 대첩 - 세키가하라 전투 등 대규모 전투 3번에서 미츠나리는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은 결과가 불만족스러운 전술을 고집하고 아군의 전력을 불리한 상황에 억지로 쏟아붓거나[45] 전력상 유리한 전투에서 엄청난 배신자와 이탈자를 내는 등 아군을 전혀 통솔하지 못했으며 이런 거듭된 졸전에서 볼 때 미츠나리의 군재는 명백하게 평균 이하로 볼 수 있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세가 매우 높아 서군에서는 다이묘들이 갈팡질팡한 게 있어서 지휘하기 많이 어려웠으며 실제로 고쿠다카 최강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으니 전국 다이묘 중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하는 다이묘였다. 어찌어찌해서 쪽수만 간신히 맞춘 것만으로도 미츠나리로서는 대성공인 셈. 물론 행주산성에서의 참패에는 미츠나리의 지휘에도 문제가 있었으니만큼 군재가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웬만한 일본 사극에도 나오지 않는 흑역사라 그런지 최근의 재평가 과정에서는 은근슬쩍 빠져있기는 하다.

당대의 형국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표면상으로는 266만 석이라고는 하나, 그의 영향력에 들어간 고쿠다카는 이보다 많았으며[46]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만 보더라도[47][48]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맞붙기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였다.

4. 자손

슬하에 3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이시다 시게이에(石田重家)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원래 오오타니 군에 지원하려 했으나 도요토미 측에서 이시다한테 인질을 요구해 전쟁 동안 오사카 성에 유처되었다. 세키가하라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쿄토 쥬쇼인이라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절에서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 중 제자인 소신니(祖心尼, 본명은 오나)에게 조카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을 사위로 소개해줬다. 104세로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했다.

차남인 이시다 시게나리(石田重成)는 어린 시절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일했다. 세키가하라가에서 서군이 패했을때 츠가루 다메노부(津軽信建)가 보호해주었다.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가의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는데 이 반란으로 아버지 이시카와 다카노부를 잃은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오다와라 합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히데요시는 동북쪽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라고 명령, 다메노부와 노부나오 두사람은 모두 참전하였다. 이 때 노부나오가 다메노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츠나리가 중재하여 다메노부는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일로 미츠나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합전 때 서군에 속했던 아들 츠가루 노부다케에게 미츠나리의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미츠나리 일족은 히로사키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다 시게나리는 스기야마 하치베에(杉山八兵衛)로 개명했고 여동생 다츠히메가 츠가루 다메노부의 며느리가 되어 그연으로 히로사키번의 중신이 되었다. 현재 스기야마 당주는 15대로 현재까지 이어져있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인 시라카와 토루(白川亨)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 주로 연구한 역사학자로 미츠나리와 코다이인(네네)은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시라카와는 "미츠나리와 네네는 친밀한 사이였고, 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로서 정치에 개입한 요도도노와 그의 측근을 싫어했다"는 내용이 담긴 연구서{《이시다 미츠나리와 그 일족》(石田三成とその一族)}를 발표하기도 했다.

3남인 이시다 사치키 또는 하치로는 세키가하라 합전 중 그를 보호해준 가신이 서군의 배신으로 죽고, 이에야스가 목숨을 살려줬다. 맏형처럼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장녀와 차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녀는 이사다 가신인 야마다 하야토노소(山田隼人正)에게 시집갔다. 야마다 하야토노소의 고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차아노 츠보네(茶阿局)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야마다 하야토노소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의 가신으로 사관하고, 여동생 다츠히메의 도움으로 에도에서 여생을 보냈다.

차녀는 가모 가신인 오카 시게마사(岡重政)에게 시집갔다. 시게마사가 이에야스의 3녀 후리히메(振姬)와의 갈등으로 할복 처분을 받은 뒤 차녀는 오카 가를 떠나고 오바마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둘의 유일한 자식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은 가모 가신인 마치노 유키카스(町野幸和)가 보호해주고 그와 소신니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키치에몬의 딸 오후리노 가타(お振の方, 미츠나리에게는 증손녀)는 카스가노츠보네의 조카[49]이기도 해서, 이 연줄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이 됐다. 불행이도 오후리는 이에미츠의 첫째 아이 치요히메(千代姫)를 낳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50] 그 뒤 치요히메는 고산케 오와리 번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토모(徳川光友)와 혼인했고 오와리 3대 번주가 된 장남 츠나노부(綱誠)와 미노 다카스 번 초대 번주인 차남 마츠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 등 두 아들을 낳았다. (미츠나리한테는 아니지만) 이에미츠의 혈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건 치요히메의 후손뿐이며, 츠나노부의 후손인 데이메이 황후를 거쳐 쇼와 덴노 이후의 일본 황실에도 이어져 있다.

3녀 이시다 다츠히메(辰姫)는 네네의 양녀가 되었고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츠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츠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정실이었지만 노부히라가 이에야스의 양녀를 정실로 들어 밀려나 33세 나이로 사망했다. 단 츠가루의 가독은 다츠히메의 아들인 노부요시가 물려받는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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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2] 이시다 가문은 미쓰나리를 제외하고 줄 화살(並び矢)이 가몬으로 지정되어있다. 최하단의 吉자와 万자의 위치가 서로 바뀌기도 한다. 나머지 설명은 개요 참고 바람.[3] 치부성(治部省)의 차관(次官)으로, 종5위하(從五位下) 관직이고 정원은 1명이다.[4] 미츠나리뿐 아니라, 옛 중국이나 조선 시대에는 특정인을 지칭하여 그 사람의 성과 관직명을 함께 적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예주자사 유비"를 "유예주"라고 적거나, "우의정 이항복"을 "이의정"이라고 적는 식이다. 보통 남의 휘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 보통은 직위를 붙이거나 자, 호, 건물명, 지역명 등을 붙여서 불렀다.[5] 삼총사의 총사대가 칼을 모으고 외치는 구호 "Tous pour un, un pour tous"(=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와 비슷한 의미다. 공교롭게도 북한주체사상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One for all, All for one(인민 대중 = 수령)" 불교화엄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6] 지금의 시가현 나가하마시[7] 무사 계급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아시가루로, 이 시절은 이미 조총의 발달로 전쟁에서는 총알받이가 되기 일쑤였는데, 봉록이라고 해도 얼마 안 돼서 전쟁이 있으면 약탈전리품이나 챙기는 신세였다.[8] 사찰은 교육 기관을 겸하고 있었다.[9] 시중을 드는 시동.[10] 원래 오시 성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의 수는 1,000명이었으나 오다와라 성 공방전에 성주 우지나가가 주군과 가신의 약조에 따라 절반인 500명을 데리고 출정했기 때문에 오시 성을 수비하던 병력은 500명이 전부였다. 일설에는 가신과 농민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있었다고 추정한다.[11] 미츠나리의 무능도 한 몫 했지만 오시 성은 다른 성들과는 달리 큰 호수와 늪지대 위에 마치 '떠있는 듯이' 성이 세워져 공세자 입장에서는 오사카 전투처럼 호수를 다 메우지 않는 이상 공격로가 각 성문으로 이어지는 둑길 몇 개 외에는 전무 하다시피해 작은 촌성임에도 의외로 철벽 같았다. 우에스기 겐신도 1574년에 오시 성을 포위했지만 조그만 성인데도 손가락만 빨다 철수했다고 한다.[12] 오시 성 전투는 <노보우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 되었으며 2012년 11월 일본에서 영화로 개봉되었고 <노부나가의 야망> PS판에 군웅패권 모드로도 존재한다.[13] 여담으로 영화는 2011년에 촬영이 완료되었고 9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장면을 수정했다고 한다.[14] 수공을 시작한 시기에 미츠나리와 히데요시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보면, 미츠나리는 수공에 반대했고 히데요시가 거듭 수공을 명령하였다. 히데요시가 저항하는 세력한테 자신의 힘과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더군다나 군사적 역량보다 행정업무에 더 밝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공을 시도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15] 에도 시대에는 10만 석짜리 번(藩)으로 승격되어서 경제가 크게 번성했지만 메이지 시대에 폐성(廢城)되어 현재는 혼마루와 정문 등만 남았고 혼마루에는 향토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16] 외부 링크에 있는 당시 평면도와 향토 박물관의 복원 모형만 보아도 육상전이 아니라 수상전을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일 정도였으며 오죽하면 당시 오시 성은 '(물위에) 떠 있는 성(浮き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17] 10만 명 X 5일 X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500억 원이다. 이 중 1/10만 사용했다고 해도 5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18] 공교롭게도 원균도 자침하거나 잃은 배 수가 170~200척인데 비해, 전과는 겨우 18척 격침 정도다. 즉 자신이 10척을 잃을 때 왜군의 1척을 부순 것이다.[19] 호리병 같은 지형으로 병목 현상이 심하다. 당연히 무지성 어택땅을 걸면 꼬라박는 족족 병력이 갈려나가고, 나갈 때도 빨리 못 나가서 병력이 갈려나가는 지옥 같은 지형이다.[20] 의병에 대한 오해가 무장이 빈약하다는 것인데, 개인의 경제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애초 조선군은 보인의 비용 지원이 있지만, 자신의 돈으로 무장하던 중세 당시 다른 지역의 군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조정의 지휘관에게 소집되면 관군이고, 지역 유지들에게 호응하면 의병이다. 개인의 무장보다는 무장을 유지할 보급이 관군에 소속된 것에 비해 어려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21] 거기다 정규군답게 여러 화약무기를 보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돌격시켰다는 점에서 미츠나리의 군사적인 능력이 의심되는 정황이다.[22] 거기다 일본 수군을 많이 격침시킨 이순신이 손수 천자총통을 권율에게 써보라고 선물해주었고 대변으로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준 것 덕분에 조선 육군도 상당히 강화되었다.[23] 또 다른 말로는 일본군이 이 조운선을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인 줄 착각했고 자신들의 후방에 내리려고 하자 지원병인 줄 알고 겁먹었다고 한다.[24]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여기에서 전사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향방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25] 반대로 이에야스 또한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쁜 무단파 인물들을 규합한다.[26] 히데요시 정권에서 이에야스의 무게는 압도적이었다. 고쿠다카 255만 석으로 휘하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고쿠다카 222만석을 보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보다도 영지가 넓었고 2, 3위인 고쿠다카 120.5만 석의 모리씨와 고쿠다카 120만 석의 우에스기씨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더군다나 군사력으로 따지면 더 심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력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다이묘들을 합친 것과 대등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된 이유라는 게 전투에서 패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어리석은 아들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으로 붙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통성을 잃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뿐이지 싸움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에다 토시이에가 도요토미 직계 영주들 쪽과 관계가 깊어 영향력 측면에서 이에야스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 물론 히데요시도 자기 가신들에게 영지를 뿌려서 히데요시와 가신들 전체의 합을 더하면 이에야스를 능가했기 때문에, 히데요시 생전에는 제아무리 이에야스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히데츠구 일도 있고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도 있어서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반면 이에야스는 관동 경영에 성공하고 관서의 구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 일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인 영향력을 휘둘렀다. 그나마 마에다 토시이에 생전에는 일단 이에야스를 견제하기가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그 마에다마저 사망한 뒤에는 히데요시가 남겨두었던 이에야스를 제어할 장치가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다. 사실 남겨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때문에 그 제어장치가 죄다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에서 자신의 영지까지 몇 겹의 방어선을 쳐두었지만, 그 방어선을 담당했던 자들이 대부분 히데츠구를 지지하던 세력들이라 히데츠구를 가혹하게 처형하자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붙었던 것이다.[27] 정확히 말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 파.[28] 일본의 역사학자 카사야 카즈히코는 2000년에 '도요토미 일곱 장수의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사건 - 역사인식 형성의 메카니즘과 그 함정'이란 칼럼에서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망간 것은 근거없는 속설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칼럼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저택이 아니라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농성했으나 이후 이에야스의 중개로 인해 부교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29] 도요토미 파의 분열과 자신의 인망 쌓기[30]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에스기씨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원래 영지인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 석의 영주로 전봉되었던 상황.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 때문에 후에 우에스기가는 또다시 요네자와로 전봉되었는데 고쿠다카는 30만 석으로 아주 왕창 깎여버렸다.[31] 사실 이는 애매했던 히데아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약간 떨어진 반대편 날개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이기는 편을 들고 싶었던 것이다.[32] 다만 그런 일화가 있었는지 여부 자체가 의심받는 신뢰성 낮은 언급이다.[33] 사실 권모술수를 부리고 싶어도 그럴 건수 자체가 없었다. 동군이야 칠본창 대부분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원한을 품었으니 당근을 내건 포섭 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당대 최강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업고 있었으니 명분 및 사기 면에서도 매우 높았을 것이다. 반면 서군의 장수들은 승리한다고 해도 뭔가 눈에 보이는 전리품도 없고 동군으로 갈아타더라도 손해볼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 굳이 열심히 맞서 싸우기보다는 관망하는 쪽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34] 여기서 "재상님의 빈 도시락(宰相殿の空弁当)"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히데모토의 관위를 중국식으로 표기하면 재상이기 때문인데, 어이없는 핑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35] 단, 시마즈 요시히로는 본래 동군에 가담하려 상경한 상황이라 전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런 이유도 서군의 조직력이 엉망인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됐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장한 야습을 시마 사콘이 우리 병력이 더 크다며 반대했는데 사실 이건 시마즈가 잘못된 아이디어를 낸 게 맞다.[36] 본래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으나 이이 나오마사가 멋대로 돌격하며 전투가 시작된다.[37] 미츠나리의 대포 5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38] 사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원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참전하려고 했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39]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다는 설도 있다.[40] 친구를 배신하다니!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시마사의 주군이자 자기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잔혹하게 처형했고 이때 다나카 요시마사도 함께 처형될 뻔했는데 이를 구해준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랬기에 다나카는 당연히 동군 소속이었고 동군 소속자로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여기서 이시다를 풀어줘도 은인을 배신하는것이니 어떤 선택이든 배신이라면 그래도 유리해 보이는 쪽과의 의리를 지키는게 생존에 유리하다 판단했을 것이다.[41] 이 장소는 현재의 교토 외곽인데 일본 전국에서 참수집행 장소로서 매우 유명했다.[42] 원래 미츠나리가 하던 일이 숨긴 고쿠다카를 찾아내거나 임진왜란 때 공을 부풀린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원한을 살 수 밖에 없었는 데다가 그나마 적당히 봐주고 했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미츠나리는 융통성 없게 이런 일을 아주 꼼꼼하게 실행했다. 거기다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고 매수하려던 이들에게 지나친 모욕을 주기까지 했다. 거기에 아무 잘못도 없는 가라샤를 죽게 만든 미츠나리에 행동에 남편인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물론이고 그의 동료 다이묘인 동군 다이묘들이 미츠나리에 대해 불같이 분노한 상황이었다.[43] 해석이 분분한 말이지만 "큰 뜻을 품었으면 최후에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된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44] 일본어 위키: 三成が処刑直前に喉が乾いたので警護の者に水を所望した際、「水は無いが、柿がある。代わりにそれを食せ」と言われたのに対し、三成は「柿は痰の毒であるのでいらない」と答えた。これを聞いた警護の者は「もうすぐに首を切られる者が、今から毒断ちをして何になる」と笑ったが、三成は「大志を持つ者は、最期の瞬間まで命を惜しむものだ」と言い、泰然としていたという[45] 오시 성에서는(히데요시의 지시였다는 변호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노동력을 들여 억지로 수공을 감행해 아군에 피해를 냈고 행주산성에서는 전술상으로 최악의 선택인 단순 축차 투입을 감행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46]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 명령을 받게 되면서 원래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우미를 내놨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미 이 땅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 땅은 간토에서 간사이로 처들어 올 이에야스를 견제 및 방어하기 위해 다수의 다이묘들을 박아놓은 것인데 이들은 히데츠구 사건을 계기로(도쿠가와의 옛 영지를 받은 이들은 대부분 히데츠구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등을 돌리고 이에야스에게 붙게 된다.[47]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쉽게 항복하려 들지 않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자신의 친모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으며 이미 시집가서 유부녀가 된 데다가 나이마저 40살을 훌쩍 넘긴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다시 시집보내는 짓을 했다.[48]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에야스는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 영지에 버티고 수도에 히데요시를 참내하러 갈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먼저 만나러 가는 쪽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 애시당초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니고 그와 손을 잡았던 오다 노부나가의 머저리 아들 노부카츠가 멋대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전쟁을 할 명분이 사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이었던 만큼 그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보다 격이 높았으니 자기가 찾아가기에는 자존심도 상했을 테고.[49] 카스가노츠보네와 소신니는 5촌이다.[50] 출산 후 몸이 안좋아졌다고 하는데 출산했을 당시 나이가 최소 13세(현대 일본으로 12세)였을 거라고 한다.[51] 해마다 바치는 공물[52] 세키가하라에서 자웅을 겨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그의 투구, 또 하나는 휘하의 맹장 혼다 타다카츠.[53] 호오를 가리는 게 심한 성격이었어도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으면 상대방에게 빡치지 않게 말하는 방법으로 달래서 타협점을 찾았겠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러기엔 너무 붙임성이 없어서, 뭐든지 다 대놓고 말했다. 그러니까 돌려 말하는 걸 못했다는 얘기다.[5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적은 자신을 압도하는 세력이 아무도 없게만 만들 뿐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적장들은 죄다 영지 삭감으로 처벌을 때웠으나,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단 3명만은 참수형에 처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지나친 탓(처벌을 결정하기 전에 소원을 묻는 질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참수하고 싶습니다라 말했다.)에 살려두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동군의 핵심 다이묘 중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가 극렬히 처형을 주장해서(애초에 가토 기요마사의 동군 가담 조건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형이었다. 이거 하나 뿐이고 가토 기요마사는 고쿠다카조차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를 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토 기요마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쿠다카를 몰수 후 가토 기요마사에게 하사하겠다고까지 했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테루모토로 하여금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과 맞붙게 해서 각각 참수했다. 물론 안코쿠지는 원래는 서군의 명목상 맹주인 모리 테루모토가 처형당해야 할 걸 대신 짬처리 당한 것이다.[55] 다녀온 일본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 사와야마 성터는 산길이나 다름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