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왼쪽)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
1539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 양력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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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승려이자 다이묘. 안국사(安国寺)란, 에케이가 주지로 있었던 절로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안국사의 혜경 스님'이다.2. 상세
승려의 신분으로 모리가의 외교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을 담당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다이묘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에게 대항한 서군으로 참전했다고 무조건 참수한 게 아니라 중요 임무를 맡은 3명의 다이묘들만 참수했는데, 그 중 한명이 안코쿠지 에케이였던걸 보면 어지간히 밉보인 모양.[1] 물론 후술되어있듯 안코쿠지 에케이가 모리 데루모토를 꼬드겨 서군의 총사령관에 앉히는 등 적극적으로 반 도쿠가와 행보를 보인 점도 있으나, 사실 거대세력의 당주인 데루모토까지 처형하거나 개역시키면 그 여파가 만만치 않으니 명분과 실리상 안코쿠지 에케이만 족쳤다고 볼 여지도 있겠다.아키(安藝) 다케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되나, 1541년에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으로 아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안코쿠지(安国寺)[2]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후에 교토의 도후쿠지(東福寺)에 들어가 지쿠운케이신(竺雲恵心, 1522 ~ 1579)의 제자가 되고, 후에 안코쿠지를 시작으로 수 개 사찰의 주지를 맡으면서 막강한 위치를 얻게 된다. 여기에 모토나리가 스승인 케이신을 통하여 불문에 귀의하게 되면서 생긴 인연으로, 젊어서부터 모리 가문의 외교승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오토모(大友)가와의 휴전교섭이나, 1582년 혼노지의 변 발발 당시 츄고쿠 지방을 공격하고 있었던 히데요시와의 휴전교섭 등에서 외교수완을 발휘하게 되는데, 모리 가문이 멸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도 인질(코바야카와 히데카네,[3] 킷카와 히로이에[4])을 내놓음으로서 멸망을 면하는 등, 외교담당으로서의 수완은 상당했다. 이때에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그의 측근을 겸임하게 된다.
시코쿠 정벌과 큐슈 정벌을 통하여 8만 3,000석의 다이묘로 격상되게 되고,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활약하였다.
무장으로서도 오다와라 정벌이나 지방반란진압 등에 참가하였고, 임진왜란때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 장수로서 조선을 침략한다. 이 때는 어린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다거나, 일본풍 머리 모양을 시키는 등 주로 문화적 침략을 담당하였으나, 전투에도 참전한 바 있어 경상우도를 넘어 전라도쪽으로 진출하려다가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의 매복에 패했고 경상우도 진출이 막힌 뒤로는 충청도 금산에서 남하해서 전라도로 진입을 시도 웅치 전투를 벌여 정담을 패사시키기도 했고, 금산성을 탈환하려는 조선군과 1, 2차 금산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인 킷카와 히로이에와 대립하여, 주군인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투 당일, 반대파인 킷카와 히로이에의 방해로 모리군은 제대로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되고, 이는 서군 패배의 한 원인으로 이어진다. 결국 동군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에게 붙잡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서군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참수당했다.
'사세구'는
청풍불명월 명월불청풍(清風払明月 明月払清風, せいふう めいげつを はらい めいげつ せいふうを はらう).
(맑은 바람은 밝은 달을 몰아내고, 밝은 달은 맑은 바람을 몰아내누나)
(맑은 바람은 밝은 달을 몰아내고, 밝은 달은 맑은 바람을 몰아내누나)
3. 여담
1573년에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몰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상(浮上)을 예언하였을 정도로, 인물평에 있어서도 괜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를 중용했지만 죽을 때 '저 자는 나 밖에 다룰 수 없다'면서 죽이라고 유언했다. 조카 데루모토는 그를 써먹기는커녕 오히려 휘둘릴 거라 생각한 모양.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모리 가문이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주축이 되고 말았고, 서군이 패하면서 모리 가문은 대거 토지를 몰수당한 것도 모자라 안코쿠지 에케이도 서군의 중추였다는 이유로 바로 처형당했다.
안코쿠지는 철폐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서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있는 어촌 마을 토모노우라에 존재하고 있다.
4. 창작물에서
4.1. 게임
대지 |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도 등장. 내정쪽으로 쓸 만한 인재긴 한데 문제는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직업이 승려라 사관시킬 수가 없고, 마지막 시나리오에선 다이묘로 등장한다. 그나마도 세키가하라때 서군에 붙기 때문에 이벤트가 일어나면 바로 처형당한다.
지휘봉의 행방에서도 등장. 비주얼 신장 100cm, 비주얼 연령 53세, 취미는 수다, 좋아하는 것은 두부. 모리 군의 참전을 주장했으나 부전(不戰)을 주장하는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눌려 제대로 발언하지 못 했다. 히로이에가 죽은 뒤 히데모토를 보좌하나 종종 히데모토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는 한다.
'일련탁생(一蓮托生)'[5]이라는 말을 좋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가 이 말을 하자 넘어갔고 역시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 말을 하자 바로 넘어갔다. 승려이기 때문인지 미츠나리의 천안으로도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엔딩 이후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손을 잡고 오사카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귀무자 시리즈에도 등장. 첫 등장은 2로 약간 멍청해보이는 파워계 캐릭터이다.
귀무자 무뢰전이나 웹 게임인 귀무자 SOUL에서는 사실성을 좀 더 높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일단은 땡중으로 주색을 밝힌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픈 과거도 있는데, 분기에 따라선 쥬베이를 배신하고 싸우게 된다.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서도 등장. 초반엔 가문이 모리 가문에게 멸망한뒤 절에서 지내며 모리 가문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으나 모리가 강대해지자 포기한다. 우연찮게 주변을 지나가던 모리 타카모토와 친분을 가지게 되나[6] 이후 서로의 정체를 알고 갈등하게 된다. 이후 타카모토가 독살당하자 그의 곁에서 임종을 지킨다. 모토나리가 죽은 이후 테루모토가 아니라[7] 에케이가 그 능력치를 이어받기 때문에 모토나리를 엄청 키워놨다면 등장하자마자 미칠듯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 이후 스토리상에선 외교승으로 활동하여 주로 교섭 관련 임무를 맡게 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와는 반대로 쿠마가이 노부나오처럼[8] 모리에 대한 증오를 거두고 결국 모리 가문의 중요한 가신이 된다.
5. 대중매체
- 세키가하라(2017)(영화) - 하루마 시호(春海四方)가 연기했다.[9] 중이 전쟁을 아느냐는 말에 울분을 토하기도 하지만, 모리 가를 대신해 군사회의에 참가해 명목상이나마 모리 가의 총대장직을 얻어낸다. 패전한 이후 가마에 태워져 처형장으로 끌려간다.
- 한산: 용의 출현(영화) - 고한민. 웅치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아주 잠깐 등장한다. 흰색 승려 복장을 입고 있어서 캐치하기는 쉬운 편. 리덕스에서는 비중이 약간 늘어났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코바야카와에게 후퇴를 건의하는 장면이 추가되어 대사가 생겼고, 맨얼굴이 드러나지 않던 본편과 달리 이 장면에서 복면을 내리며 얼굴도 보여준다.
[1] 참고로 나머지 둘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점에서 최대의 흑막에 해당되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금지시킨 가톨릭을 믿고 배교도 거부한 고니시 유키나가.[2] 동아시아권에는 같은 한자로 표기된 절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 "안코쿠지(安国寺)"는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가시구에 있는 진언종 사찰을 말한다. 1945년에 핵폭격 때문에 본당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복구하여 195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3] 모리 모토나리의 막내아들.[4] 킷카와 모토하루의 아들.[5] 죽은 뒤 극락에서 같은 연꽃 위에 태어난다는 뜻으로 선악이나 결과를 불문하고 함께하는 것을 의미[6] 타카모토가 에케이가 관리한 정원을 좋아했다.[7] 테루모토는 아버지인 타카모토의 능력치 계승.[8] 첫 전투에서 노부나오의 아버지인 모토나오가 모토나리가 이끈 모리, 킷카와 연합군에게 패해서 죽었기에 원한을 갖게 되었다. 후에 오우치와의 전투에서 복병에 빠졌다가 모토나리에게 도움을 받고 난 것을 계기로 후에 모리 가문의 부하가 된다.[9] 동시기에 방영한 대하드라마 여자 성주 나오토라에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