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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0:16:00

정암진 전투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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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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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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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군 좌독기_White.svg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주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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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해유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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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진 전투
鼎巖津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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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곽재우의 정암진 전투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 정암진 전투 기록화
시기 1592년 (선조 25년) 7월 3일 (음력 5월 24일)
장소

조선 경상도 의령 남강 정암진
원인 일본군 6군의 전라도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일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곽재우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안코쿠지 에케이 (6군)
참전자

파일:조선 어기.svg 윤탁
파일:조선 어기.svg 박사제
파일:조선 어기.svg 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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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svg 주몽룡
참전자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참전자 불명
병력 조선군: 50여 명 일본군: 2,000여 명 (선봉)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일본 6군 선봉의 패주로 전라도 침공 포기
1. 개요2. 전투 전야3. 전투4. 결과 및 영향5. 여담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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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재우가 일으킨 의병 50여 명이 일본군 6군의 선봉대를 정암진에서 매복해있다가 기습하여 일본군 6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한 전투이다.

2. 전투 전야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당시 주요 곡창지대인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일명 하삼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지역을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었고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키 위하여 6군을 의령으로 이동시킨다. 그러자 앞서 의령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6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강 정암진 부근의 갈대밭에 의병 50여 명을 매복시켰다.

3. 전투

음력 5월 24일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 惠瓊)[1]는 2,000여 명의 선봉대를 정암진 인근으로 보내어 도하 지점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곽재우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늪지대로 옮겨 세워두도록 하였고 이를 몰랐던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푯말을 따라 진격하였으나 결국 늪지대에 빠지게 되어 미리 매복하던 곽재우의 의병에게[2] 일제히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4. 결과 및 영향

결과는 그야말로 대승. 곽재우군은 불과 50여 명에 불과한 의병으로 2,000명이 넘는 일본군 선봉을 패주시켰으며, 일본군 6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였다. 이 전투 이후 곽재우의병은 불과 50여 명에서 오운과 박사제의 병력 등이 합세하여 3,000명이 넘는 군세를 갖추게 되었다.

5. 여담

6. 대중매체

천강 홍의 장군 곽재우. 전란이 터진후 단 열흘만에 의령땅에서 거병한 최초의 의병장이다. 그는 전투때마다 붉은 옷을 입고 분전하였으므로 세인들은 그를 홍의 장군이라 불렀다. 정암진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곽재우는 화려한 기만술을 펼쳤으니 그는 부하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 독전케한 것이 그것이였다. 이는 아군의 수가 적군의 수에 비해 현저히 많게 보여 적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함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암진전투에서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의 정예 정규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니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히데요시의 전라도 공략전의 그 예기를 꺾은 전투였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1] 안국사라는 절의 혜경이라는 법명의 중이다. 즉 안국사 주지스님인데 일본 전국시대에 큰 절의 주지는 거의 다이묘나 마찬가지였던 위치였다. 나중에 에케이는 도요토미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참수당한다.[2] 이 때 곽재우는 자신이 입던 홍의가 눈에 잘 띈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이 뽑은 10명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서 일본군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고 한다.[3] 현존하는 정암과 그 옆의 정암루라는 누정이 서 있는 작은 언덕은 안산의 동쪽으로 작게 뻗어 있었던 정암진 암벽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4] 사실 조정조차도 왜군의 규모를 잘해야 1~2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지역민이 보기에 그 정도 군세로 수군과 해안가 방어선을 모조리 뚫고 남강까지 건너온다는 시나리오를 납득하기도 어렵고 그 남강을 건너서도 50리가 떨어져 있는 삼가 지역에서 유생까지 끌어다가 축성한다고 난리치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5] 배우가 상당히 젊게 나오는데 실제로 안코쿠지의 이때 나이는 이순신보다 많다.[6] 아래의 해설은 김종성 성우의 나레이션이다.[7] 백병전을 제외한 전투의 모든 면은 묘사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수준이며 쓸데없는 효과음은 이입을 방해한다[8] 의병의 수가 너무 낳아 보이는 것도 이상하다. 이 전투는 위에서 언급했듯 소수의 의병이 다수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