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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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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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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
玉浦海戰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f0ad73> 시기 1592년 (선조 25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장소
조선 경상도 거제현 옥포
(현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
원인 일본의 조선 침략 및 경상 우수영 함락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공세)
도요토미 정권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파일:조선 어기.svg 원균
파일:조선 어기.svg 정운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무의공)
파일:조선 어기.svg 어영담
파일:조선 어기.svg 이영남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도도 다카토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호리노우치 우지요시
병력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전선 50여 척
피해 부상자: 1명 전선 26척 침몰
사상자 불명
결과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영향 조선 수군 남해안 제해권 장악 개시
1. 개요2. 전개
2.1. 임진왜란의 발발2.2. 원균의 합류2.3. 완벽한 승리
3. 결과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거이 움직여라
옥포 해전 시작 전, 이순신의 훈유
임진왜란 개전 초기였던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5월 7일 낮 12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거제도 옥포[1] 앞 바다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함대를 크게 무찌르고 승리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전선 26척이 침몰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최초 승리[2]이기에 더욱 각별한 해전이다.

2. 전개

2.1. 임진왜란의 발발

선조 25년이었던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일본군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척의 전선들과 18,700명의 병력[3][4]이 부산포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산진 전투동래성 전투를 거치며 박홍의 경상 좌수영은 이틀만에 궤멸당한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에 경상도 일대는 패닉에 빠져 수령방백들이 임지를 버리고 달아났고, 일본군은 일사천리로 한양을 향해 북진한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전라 좌수영의 병력을 총 동원해 당포 앞바다로 나와서 싸워야 한다."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 해역으로 출전하는데 고민하였고 고심 끝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에게 5월 1일에 전라 좌수영으로 모이자고 한다.[5] 그러나 약속의 5월 1일이 되었음에도 이억기의 전라 우수군이 도착하지 않자 이순신은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전라 좌수영이 보유한 판옥선은 불과 24척에 불과했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대로 출전해야 하나, 이억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6] 물론 이억기가 졸렬하여 늦게 온 것이 아니다. 상비군을 두지 않았던 조선에서 전투병력 외에도 노잡이와 수리공 목공 등의 인력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행정능력으로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전라우수군은 여수에서 고흥반도까지의 좁은 해역만 집중적으로 관할하는 좌수군과 달리 장흥에서 군산까지 좌수군보다 몇배나 넓은 광활한 영역을 담당했다.[7]
조금 뒤에 녹도 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통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ㅡ《난중일기》 임진년 5월 3일

5월 3일(양력 6월 12일), 녹도 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찾아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안된다."라며 설득, 이순신은 전라 좌수군만으로 첫 출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4일(양력 6월 13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나 포작선 46척은 어선에 불과한 비전투선이었고 옥포 해전 이후 먼 훗날 명량해전에서 동원될 때까지 단 한차례도 동원되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이순신과 전라 좌수군은 함대 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이때 조선 수군의 첫 번째 사망자가 나온다. 전투가 무서워 탈영한 황옥천이라는 병사를 잡아 목을 베어 효수한 것. 이때 거북선은 출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야 완성되었기에 훈련 상태나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이 부족하여 일부러 제외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2.2. 원균의 합류

이순신의 전라 좌수군은 남해도의 평산포, 상주포, 미조항, 고성 소비포를 차례로 지나 5월 5일 당포에[8] 도착했으나 약속했던 원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9] 이에 이순신은 원균에게 빨리 나오라고 했으며 이에 원균은 그제서야 1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뭉그적거리며 합류했다. 그후 기효근 등 경상 우수군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본대에 합류했다.

2.3. 완벽한 승리

연합함대는 당포에서 한산도 북쪽을 지나고 거제도 남단을 돌아 송미포(다대포)에서 숙영한다. 이후 도슬포(도장포), 지시포(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양암(양지암)을 경유하는 거제 바깥 항로를 통해 옥포로 진출했다. #

5월 7일 새벽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로 신기전을 발사했다. 그 신호를 본 이순신은 "망령[10]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겁게 침착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라는 명령을 내린 후 조선 수군을 옥포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 재빨리 이를 동서로 포위한 후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 6척의 판옥선이 선봉에 서면서 적선을 향해 달려가며 포격을 가했고 이후 전 조선 수군이 정박 중인 일본군 함선과 일본군 진영에 포격을 가해 적선 26척 격침이라는 전과를 올리며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함께 전투에 참여한 원균의 경상 우수군도 격침한 26척의 배중 5척의 배를 분쇄하는 전과를 세웠다.[11]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3. 결과

이 싸움의 결과 조선군의 전투로 인한 피해는 부상자 1명에 불과[12]하여, 피해라고 하기도 무안할 지경이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에게 손도 못 대보고 완전히 박살났던 셈이다.

다만 2명의 부상자가 더 있었는데, 이는 원균이 전공을 탐내 전라 좌수군이 사로잡은 왜선을 빼앗으려고 활을 쏴서 생긴 것이었다.[13] 결국 옥포 해전에서 조선 해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장수는 원균이 됐다.[14]

옥포 해전은 임진왜란에서 가장 중요했던 제해권 장악의 시작이었으며 전략 무기였던 함선의 다수 격침이란 피해를 안겨줬다. 군함의 격침은 단순히 병기의 손실을 넘어 사기 저하와 다수의 인적 손실은 물론 군함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소모 등 다방면에서 복합적인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 특히 일본군의 구성은 천하인 히데요시의 호령으로 모인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영지 병력을 데리고 참전한 케이스였고 도도 다카토라는 옥포 해전 이후 다시 전선을 만들고 영내에서 병력을 보충해야 했기에 육상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칠천량 해전 시점까지 해전에서 이탈하게 된다.

또한 이는 제해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전 이래 계속 패배만 했던 조선 육군에게 해전에서 처음 승리를 했다는 고무감을 심어 줌으로써 조선군이 재정비해 반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전쟁에서는 기세가 매우 중요하기에, 해당 시기 적들이 파죽지세로 도성을 향해 오는데다 임금은 파천한다고 도성을 버리니 도저히 싸울 엄두도 나지 않거니와 싸울 의미조차도 찾지 못해 조선군들이 우왕좌왕하며 도망가거나 심지어 투항하는 일 또한 빈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승전은 관군들이 결집하고 의병 활동이 시작하게 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된다.

이순신은 옥포 해전에 이어 합포(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적선 5척, 다음 날 적진포(경남 고성군 동해면 적포만)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리며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 페이스를 올리게 되며,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다만 수군만의 힘으로 승리한 상황이어서 적 세력 깊숙히 있는 승전 포구들의 점유를 유지하지는 못하였고, 일단 언제든 마주치기만 하면 혼내줄 수 있다는 점을 시위한 정도로 마치고 전라 좌수영 본영으로 복귀하여 다음 출전을 준비하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1592년 5월 옥포
바다에서 적(敵)을 맞다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승리를 향해
불멸의 이순신 옥포 해전 예고1, KBS
임진년 5월 옥포 앞바다
세상을 버티기 위하여
불패의 신화
그 첫번째 승리를 향해
돌아보지 마라
싸워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 옥포 해전 예고2, KBS

61회 ~ 62회에서 나왔다. 도도 다카토라 휘하 일본군 함대가 조선군의 총통에 완전히 박살이 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6개월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음에도[15] 고증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원균의 함대가 선체를 더 두껍게 보강하여 왜선에 돌격해서 부딪치는 충파 전술을 활용했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원균 함대를 호위하던 이순신 휘하 병사들 가운데 일본군의 총탄에 맞은 자가 십여 명이나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나마 작중 한정으로는 원균과 이순신 사이의 갈등을 다시금 강조하는 동시에 정운이 아직까지 이순신보다 원균에게 심정적으로 가깝다는 것[16]을 보여주는 훌륭한 장치였지만, 사극인 이상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점은 변호가 불가하다.[17] 하지만 내레이션을 통하여 개전 이후 조선군의 첫 승전이라는 점은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신나게 발리던 도도는 '여기서 적장(이순신)을 없애지 못하면 자신들은 고전을 면치 못할 거다'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군 함선 하나에 직접 불화살을 쏴 불태우면서 화공을 하라 하는 팀킬도 저지르지만, 당연히 화공은 실패하고 만다.

또한 귀선(거북선)이 출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을 약간 더했다. 이순신이 귀선을 출전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자 무의공 이순신을 비롯한 부하들은 그토록 노력을 기울여서 만든 귀선을 왜 출전시키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한다. 첫 출전이니만큼 장졸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으니 이때 신무기인 귀선을 투입해야 그 위력에 기대를 걸고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순신과 권준은 귀선은 판옥선에 비해 시야확보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 아직 충분치 않은 귀선의 운용 경험 및 훈련 상태를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 자칫 귀선이 패퇴한다면 사기 면에서 귀선을 투입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반박하며 이후 귀선이 완전히 준비가 된 뒤에 출전시키겠다고 결론을 내린다.

4.2. 드라마 징비록

징비록(드라마)에서 19화에 등장했다. 불멸의 이순신과는 달리 기록대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무한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묘사되었다. 평양성에 몽진해 있던 선조가 받은 이순신의 승전 상소를 재현하는 형식처럼 나온다. 출전한 이순신 함대가 도도 다카토라의 본진이 있는 옥포를 포위한 후, 넓게 펼쳐 공격한다고 작전을 지시한다. 조선 수군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도는 즉시 병사들에게 승선 명령을 내리고 함대를 끌고 나가려지만 이미 독안에 든 쥐였다. 이에 도도는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적선이 진격을 하자 이순신은 저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일자진을 편다.[18]

그리고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포격을 명하고 이에 일본군 함대는 쑥대밭이 된다. 결과는 부상자 하나 없는 압승이었다.[19] 전투 직후 벙벙하게 있다가 결과를 부관에게 보고받는 도도의 절규가 꽤나 볼만하다. 도도는 이순신의 이름을 확인한 후, 이 치욕을 씻겠다고 다짐한다. 한편 승리를 확인한 이순신은 대승이라 말하는 송희립에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네. 적들의 끝은 더 참혹할 것이야."라고 말한다. 도도의 대장선이 빠져나간 것을 정운이 추격하려 하자 도도의 이름을 확인하며 "그 자는 살아남은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야."라고 하며 앞으로도 승리를 이어나갈 것을 다짐한다.

전반적인 CG나 연출 등이 빈약한 편이고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촬영분을 수정 및 합성하기도 했으나 징비록에서 새로 찍은 장면들이 대부분이며 전작과는 달리 그나마 포격전의 고증은 잘 된 편이다. 그리고 롱 테이크 형식과 슬로우 모션 등을 넣어 일본군을 학살하다시피 하는 모습은 통쾌감을 준다.

여담으로 탄금대 전투와 함께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풀버전으로 나온다.[20]

4.3.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의 역사 소설인 야마오카 소하치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이 전투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히데츠구가 오만도코로(히데요시의 어머니)에게 급히 찾아와 '거제도 동쪽 바다에서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전하고, 그럼에도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에 갈 생각이라는 말을 전하자 오만도코로가 크게 걱정하는 묘사가 나온다. 여기서 이순신의 이름도 언급되는데, 해전에 뛰어난 명장이라고 나온다.

5. 관련 문서



[1]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2] 육지에서 신각이 양주 해유령에서 매복 공격하여 70여 개의 수급을 얻은 승전이 있어 조선군 최초의 승전은 아니는 견해가 있으나,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이는 (음력 기준) 5월 16일의 전투로써 5월 7일에 치러진 옥포해전 보다는 명백히 나중에 일어난 전투이므로 잘못된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3] 흔한 오해와는 달리 임진왜란 때, 15만 명의 일본군이 한꺼번에 상륙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해외로 실어나를 만한 양의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배들이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기 중이었던 병력을 차례차례 실어날랐다.[4] 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으로 보고,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했다.[5] 당시에는 해당 관할 구역이 아닌 곳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반역으로 오해받을 행위여서, 이순신은 상부에 보고한 후 명확한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임진장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6] 그러나 나중에 이순신은 이때 고민한 것이 합쳐서 오해를 사 누명을 쓰게 된다.[7] 게다가 옥포는 전라 좌수영의 관할영역이 아니어서 병사들에게도 익숙지 않은 바다였다.[8] 현 지명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당포항.[9] 심지어 '역사저널 그날' 2014년 6월 22일자 방송에 따르면, 원균 부대의 합류도 이순신이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순신 휘하 장수들은 원균이 전라 좌수영의 공에 은근슬쩍 이름을 올리려는게 아니냐며 반대했는데, 이순신은 함께 적을 물리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다.[10] 정신이 흐려 말이나 행동이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 쉽게 말해 정줄 놓지 말라는 소리.[11] 정확히 말하면, 적선에 상륙한 후 탈취했다. 원균은 수급에 욕심이 많아 적들의 목을 베고자 이러한 방식의 전투를 선호했다. 이후 난중일기에서 수급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이순신에게 수급을 베도 되는거 아니냐고 따지는 장면도 나오고 심지어 조선 백성을 일본군으로 분장한 후 목을 베는 천하의 개쌍놈 짓을 자행한 것도 기록되어 있다.[12] 1명의 부상자는 이순신이 직접 올린 옥포파왜병장에 명확히 나온다.[13]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자는 원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아닌가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연명 장계를 올릴 경우 원균이 조선군 병졸을 해쳤다는 내용을 쓸 수 없을테니... 애초에 장계를 올릴 권한은 수사들이 동등하게 가지고 있었기에 단독 장계를 올리는 것이 잘못된게 아니다.[14]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 일이 묘사되었다.[15] 더 정확히 말하면 이 6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뱅크신을 확보한 다음 해전 장면마다 적절히 나누어 삽입했으므로, "옥포 해전만" 6개월 동안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해전 전체를 일괄적으로 6개월간 촬영한 뒤 옥포 해전에서는 (첫 해전이므로) 뱅크신 없이 순수 새 촬영본만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16] 이순신 휘하 함대 가운데 정운의 녹도군만이 원균을 따라 돌격했다.[17] 예를 들어 조선 수군은 부상자가 겨우 1명이었는데 드라마 상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부상자가 나오고 또 원균의 팀킬도 나와 수십 명은 다친 것처럼 보인다.[18] 이 때 한 말이 "가벼이 움직이지 말게.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움직여야 하네." 이는 실제로도 나왔다.[19] 실제로는 순천 대장선의 정병 이선지가 왼팔에 화살을 맞았었다. 다만 부상자가 단 1명 발생한 만큼 전투가 끝난 시점에는 부상자 발생 사실을 모르고 재정비 이후에야 발견했을 수도 있기에 딱히 틀린 연출은 아니다.[20] 탄금대 전투 부분의 경우에는 후반부가 좀 짤리기는 했지만 거의 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