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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9:00:14

방수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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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f2023>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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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 관음포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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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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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순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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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진
方守震| Bang Sujin
파일:사적112호아산이충무공묘좌측전경.jpg
방수진의 묘[1]
출생 1547년[2]
조선 충청도 온양시
(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사망 17세기
(향년 50대~60대 추정)[3]
조선 충청도 온양시
(現 대한민국 아산시)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학력 한문학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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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상주 방씨(온양 방씨)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최종
관등
정경부인
(貞敬夫人)
수진(守震)
이명 방씨, 태평, 연화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부: 방진 (方震, 1514 - ?)
모: 숙인(淑人) 남양 홍씨 (? - ?)
배우자 이순신 (李舜臣, 1545 - 1598)
자녀 적장남 이회 (李薈, 1567 - 1625)
적차남 이예[4](李䓲, 1571 - 17세기)
적삼남 이면 (李葂, 1577 - 1597)
적장녀 덕수 이씨 (? - ?)
서장남 이훈 (李薰, 1572 - 1627)
서차남 이신 (李藎, 1575 - 1627)
서장녀 덕수 이씨 (? - ?)
서차녀 덕수 이씨 (? - ?)[5]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3. 이름 논란4.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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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정경부인, 충무공 이순신의 아내. 보성군수를 역임한 무관 출신 방진의 딸로서, 황세득 장군의 사촌 처제이다.

실명이 밝혀지지 않아서 "태평", "연화" 등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8년 9월 7일 이름이 현충사에서 보존 중인 국보 76호 서간첩(書簡帖)에서 방수진(方守震)으로 밝혀졌다.#[6]

2. 생애

1547년 조선 충청도 온양[7]상주 방씨[8] 양반 집안에서 방진과 남양 홍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친 방진은 선조 대에 활을 잘 쏘는 장군으로 유명했다. 아래는 《이충무공전서》 <방부인전>에서 나온 기록이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영특한 딸이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
ㅡ 《이충무공전서》 <방부인전> #
1565년에 이순신과 혼인했는데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중 병에 걸려서 위독하자 이순신이 잠을 설치며 걱정하고 점을 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룡의 기록('서애집')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직무 때문에 집에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집안의 버팀목 역할을 잘 해낸 것.
사위를 박대한 것에 대해선 개인 감정이 아니라 사돈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사위인 홍비는 이순신의 친구이기도 한 홍가신의 아들인데, 홍비는 이순신의 딸과의 결혼이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재혼 역시 그다지 반기지 않는 풍습이 있어서 이에 따라 항의의 표시로 박대했다는 것.

1598년 남편 이순신이 사망하자 선조가 남편을 우의정으로 추증했으며,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1603년 장남 이회가 어머니의 병이 중하다고 언급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17세기 초까지 살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이름 논란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순신 부인의 이름을 방수진으로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방수진은 이순신 장군의 부인이 아니라 장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 장군 장인의 성함이 '방진(方震)'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를 방수진으로 적은 것은 보성 군수(郡守)를 지낸 것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 앞에 벼슬을 지칭하는 말(守)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게 많은 학자의 견해”라고 주장했다. 기사 따라서 이순신 부인의 이름을 방수진으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아직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4. 작품


[1] 남편 이순신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2] 상주 방씨 가계도 기준[3] 1603년 아들 이회가 어머니의 병이 중하다고 언급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17세기 초까지 살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4] 이울 혹은 이열로 불리기도 한다.[5] 서출자녀들은 전부 남편의 두번째부인 해주 오씨의 소생들이다.[6]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녀의 이름이 부모의 것과 같은 글자(震)를 사용한 것이니, 피휘 문화가 있었던 그 시대 관습상 의문점이 있다.[7]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이다.[8] 상주 방씨의 시조 방지(方智)는 당(唐)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가유현(嘉猷縣)에 정착하면서 상주를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6세손 방운(方雲)이 993년(고려 성종 12)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상주에서 온양으로 개관하였다. 후손들이 조선 중기까지 상주와 온양으로 본관을 혼용하다가 조선 후기 온양 방씨로 통일하였다.[9] 방영 당시에는 방연화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