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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1:15:00

원균옹호론

원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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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 공신 선무공신
인물 관련 원균옹호론 · 원흉
관련 전투 1차 출정(기문포 해전) · 2차 출정(가덕도 해전) · 3·4차 출정(칠천량 해전)
가족관계 동생 원연 · 동생 원전 · 아들 원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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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예시.[1]

1. 개요2. 설명3. 원균 명장설?4. 원균 맹장설?5.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6. 원균 옹호론의 사례(선양사업 포함)
6.1. 지역 사례(평택시)6.2. 인터넷 사례6.3. TV 프로그램 사례6.4. 대중 역사서 사례
6.4.1. 이덕일의 서적6.4.2. 기타 서적
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원균이 명장이거나 맹장이었다며 옹호하는 억지 주장.

2. 설명

원균은 원래부터 능력이 부족하고 성질이 포악해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사실 당대에도 정치논리에 의해 원균을 고평가하던 여론이 일부 있었으나,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그마저도 전부 사라지면서 희대의 졸장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군사정권이 이순신 장군을 성역화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오히려 원균을 옹호하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이 이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믿을 만한 논리로 받아들이면서, 이 황당한 헛소리가 힘을 얻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집권 후 민족주의국가주의같은 집단주의적 이념을 중시하며 상무정신과 화랑도#, 의병과 국난극복, 삼별초의 항쟁,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애국선열과 호국영웅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으며,박정희 정권의 '호국 영웅 만들기'. 민족중흥의 기치아래 이순신 장군을 ‘국민멘토’로 삼고 멸사봉공, 선공후사, 살신성인 등 이순신 정신을 ‘국가지도 이념’으로 정하였다. 박정희는 1962년 3월 1일 아산 현충사 일대의 성역화를 지시하여, 1967년에 현충사의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5년 남해 충렬사 경내 이순신 가묘 옆에 기념식수를 했고,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지인 이락사 경내에 친필현판을 걸었다. 1975년에는 통영 한산도 이순신 진영의 제승당 정화사업을 실시하였고, 특히 1968년 4월 27일 서울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1 #2

이러한 이순신 성역화에 대해서는, 박정희 개인의 존경심이나, 군사정권의 정당화, 이순신의 대리 우상화로 박정희 자신과의 동일시하려는 목적 등을 원인이라 보는데, 이런 박정희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에서 이순신이 지나치게 영웅화되었고, 원균은 폄훼당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등장한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 이정일이[2]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통해 원균의 복권을 최초로 시도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에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이, 박정희가 이순신을 대대적으로 띄운다는 이유만으로, 이순신에 대항하여 원균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386운동권 출신을 많이 기용한 노무현 정부때는 심지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정책뉴스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과장시켰다' 라며 원균옹호론을 주장하는 글을 등재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운동권들에 의해 원균옹호론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든 운동권들이 원균을 옹호한 것은 아니며, 현재 원균 옹호를 하는 사람중 하나인 원유철은 원균의 백부인 원수량의 후손으로 원균과 같은 원주 원씨라서 옹호하는 경우이다. 원균의 직계후손이라고 인터넷에 알려져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직계냐 방계냐의 문제를 떠나 만약 그가 김씨나 이씨였더라도 그렇게 원균을 옹호했을까?[3]

원균옹호론은 1978년 이정일의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시작으로 1983년 이재범의 《원균정론》[4]에서 소개되고, 소설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5]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 및 이를 2004년에 드라마로 만든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어지며 원균 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1999년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 1권에서 원균 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 다만 이건 1999년 당시의 일이며, 그 이후 다른 책에서 원균을 옹호한 적은 없다. 1970~80년대의 원균 재평가 기류는 단순히 학문 연구가 발달하는 과도기에 나온 서적이며, 이덕일 단독 저서가 아니라 이희근과의 공저이기 때문에 원균옹호론은 이희근이 저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은 이후 출판된 이덕일의 한국 고대사 서적에 다시 나오지만, 이 책에 나온 원균옹호론은 다시 다룬 적이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보다는 선조를 재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가 무능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많다.

원균 옹호론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문 기록인 《원균행장기》를 내세우며,[6]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무시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악명 높은 환빠들과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 완전히 똑같다. (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7]

이러한 책이나 당시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균정론》 :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묶어서 만든 책이다. 하지만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이 많다. 일례로, "이순신이 원균 몰래 장계를 올렸다" 면서 실록 기사를 내놓는데, "이전 한산도 해전(옥포의 오기)의 장계와 같습니다" 라면서,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위의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이다. 그 밖에도, 경상 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이해 부족 :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에게 미움을 받은 장수(이순신,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쓴 기록이다. 1970년대 사학계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기 때문에, 선조의 평가가 담긴 선조실록을 다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원균 옹호론은 선조와 이순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에도 수정실록을 참조해서 이순신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없었다. 학자들은 처음부터 실록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진 임진왜란 기록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과 의병장들처럼 능력자들을 숙청했던 이유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선조수정실록은 몇몇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기록일 뿐이고, 원균의 평가는 선조실록의 원본을 보더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원균 칭찬에만 도취하는 이론: 당시의 과도기적인 연구에는 이미 해답이 내려졌다. (원균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이순신의 제거에 사용된 간신배가 맞다). 하지만 원균 옹호자들은 선조 - 원균 - 이순신을 재평가하려고 했던 1980년대의 연구 중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들만 인터넷과 책에다 무작정 퍼나르고 있다. 원균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전한 연구를 무시하거나, 원균에 대한 사학계의 결론마저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받아들이는 건 오직 원균의 칭찬 뿐이다.

결국, 원균 옹호론은 한국 역사 재해석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폴로 계획 음모론에 필적할 만큼 근거 없는 의견이다.

처음에는 선조를 재평가했던 이론에서 원균이 포함되자, 원균 옹호자들이 원균의 간신배적인 행보를 부정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통에, 반감을 느낀 역사학자들은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에 보고된 기록에는 이순신과의 연합 작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전공이 없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이순신 버스나 얻어탔을 뿐이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상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자 분기탱천한 김경진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 옹호론을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 옹호론을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재미교포 작가 백지원이 쓴 사이비 서적왕을 참하라!》, 《조일전쟁》 등 원균 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8]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 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보러가기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초적인 지휘관 동료로서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라서 유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우혁에 의하면 마지막에 싸움터로 향했으므로 군인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들, 학문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명성에 편승하려한 점에 대한 반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조선, 이순신,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국까 컨셉을 잡으려고 원균을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원균 옹호론을 보면 이러한 심리가 꼭 하나씩 섞여있다. 궁예, 광해군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절대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권력 숭배자이자, 권력층과의 유착이 깊었던 간신배이다. 또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기에, 부하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방패막이로 써먹고 도망치기만 했다. 당대의 같은 친척들도 원균을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선조였다.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선조를 재평가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원균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는 원균행장기와 선조의 변명을 짜집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많았고[9],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0][11]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처럼 우리 편임이 명확하지 않은 장수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정치 군인, 권력자에게 이쁨받은 꼴통, 혈연만 끝내줬던 간신.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 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똥별도 별은 별이라고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제독으로 설명하면서 원균은 조선 수군을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비꼬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균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포장하기 위해, 전쟁 후에도 멀쩡히 살아서 천수를 누린 아들 원사웅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왜곡이라기보다는 진짜로 몰라서 그렇게 알고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 역사 문헌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대중들한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개된 시점은 아무리 빨라야 1990년대 말엽이고, 그 이전까지는 일반인들이 조선 시대 역사 기록에 대해서는 근거나 출처도 알 수 없는 야사나 민간 전승들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3. 원균 명장설?

원균을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원균 명장론이다.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승자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원균의 후손인 원주 원씨들이며, 근거는 주로 숙종때 대사헌을 지낸 김간의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다.

그러나,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문중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참 후에 지어낸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행장기를 사료로 삼는 원균빠들을 놀리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항우를 한참 능가하는 판타지스러운 장수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 유학에서 배척하는 괴력난신(즉 괴담 따위)부터 뜬소문에 야사 할 것 없이 일단 자기가 보고 들은 거면 일단 기록하고 봤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곤 했다. (국가 공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외에도 개인이 직접 적은 용재총화, 어우야담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길만한 지식인들은 하나가이 원균의 탐욕스러움, 권력 숭배주의(간신배), 권력자들의 감투 놀음이 나라를 망쳤다며 한탄했다. 선조만이 "원균을 그런 식으로 헐뜯지 말라"고 했으나 당대 지식인들에게 원균이란 인물은 간신이자 소인배였던 것이다. 원균 명장론은 제대로 사료에 대한 교차검증만 해봐도 불가능한 이론이다.[12]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이 아니다. 아군 학살과 도망의 명수라고 보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원균은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져서 '적의 손에 넘겨줄 바에야 없애버리는게 낫겠다.' 라는 심정도 아니고, 아예 싸우지도 않고 70척의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후에도 130척의 대함대를 버리고 자멸로 몰아넣었다. 원균이 불태우고 포기했던 배는 대부분이 판옥선이며 함포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전선은 갑판 위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게 전부인 사실상 수송선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려운 정도의 전력차였다. 굳이 충무공 정도의 전략 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멀리에서 대포만 쏴대면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13] 그냥 겁먹고 도망친 것이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원균은 싸워볼 생각도 안하고 75척 ~ 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놨다. 정발이 목숨 걸고 시간을 끌면서 침공 사실을 급보로 보냈을 때 그 정보를 받은 자는 바로 원균이며, 성의 군민이 전멸하는 대가를 치른 피묻은 급보를 받고도 싸우지도 않고 함대를 자기 손으로 불태우고 자취를 감췄는데, 이런 경우는 세계 어느 국가를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휘하에 있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수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라고 항명했으나 원균은 임무를 내팽겨지고 적전도망을 저지르고는, 이순신에게 묻어서 그의 공을 뺏으면서 그를 모함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막강한 조선 함대를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이에 대해서 원균 옹호론자들은 '권율의 부당한 처벌'[14] 탓이라고 하지만 권율이 원균에게 이런 망신을 준 이유는 단순히 싸우러 나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원균은 권율을 통해서 '이순신이 칠천량으로 싸우러 나가지 않는다'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가 바로 이순신의 파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도통제사 자리를 빼앗고 난 원균은 그냥 관사에 틀어박혀서 음주가무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군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원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명예 왜군 장수라고 하지메 사토루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서 까기도 한다. 조선 수군에게 박살나기 일쑤였던 일본 수군은 원균이 출정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규모를 알아본 후, "드디어 우리가 죽는가 보다."라며 하나같이 유서를 쓰고 "어차피 죽을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공포의 조선 수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전락해있었고 일본측은 그런 조선 수군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혈연을 이용하여 권력층에 아부하는 능력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군인으로서는 폐급, 간신배로서는 만렙이라고 할 수 있다.

4. 원균 맹장설?

원균 명장설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용맹한 장수였다는 절충안이 나왔다. 고정욱의 소설 원균에서 이런 관점이 다뤄진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 맹장설에 포함된다. 사실 아예 뜬금없이 나온 주장은 아니고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 기사에서 류성룡이 원균을 두고 그는 용맹하긴 하나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선조에게 아뢴 말에 근거를 둔 것인데, 류성룡의 누구의 친구였지를 생각하면 원균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꽤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원균맹장론자들이 드는 근거다.

그러나,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 전문이라는 말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다룬다는 서술이 있으며, 전형적인 맹장에 어울리는 인간 흉기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여진족과 매우 잘 싸운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즉, '일신의 용맹은 우수하나 지휘관으로서 미숙해 잘못된 선택으로 결국 큰 전투에서 대패한 맹장' 이미지로는 신립이 훨씬 적절하다. 하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15] 원균이 선조의 빽을 믿고 출세욕 때문에 고위직만 받고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이 경우는 안방준이 지은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안중홍에게 "적? 그까짓 거 무기로 때려잡다보면 이기는 거잖소?"[16]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당연하게도 원균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연히 허풍에 가깝다.

난중잡록 중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용도 한 말의 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으며 80넘은 나이에도 건장함을 과시한 염파나 하루에 1만 칼로리 이상을 먹는 마이클 펠프스 같은 여러 운동선수들의 식단과 비교당하며 그의 건장함을 나타내는 내용처럼 꾸며지지만, 원균의 경우는 그 다음 내용이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다."다. 즉, 앞뒤 잘라먹고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단 이건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원균이 비만이었단 기록이 맹장설과 모순되는 건 아니기 때문. 원균의 실제 무덤으로 추정되는 통영시 엉규이 무덤에 얽힌 일화 중에, 새마을 운동 때 이 무덤자리에서 도로확장을 하던 중 나온 뼈가 매우 장대했기 때문에 당시 통영 시민들이 '이 뼈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필시 장군의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고 하는데,[17] 이 일화를 토대로 추정해 보건데 원균은 단순히 살만 뒤룩뒤룩 찐 물렁살은 아니고 상당한 근육질 체형 위에 살이 붙은 스모선수 같은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궁수가 대부분이던 조선시대 무관들은 죄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시대 군궁과 장력이 비슷한 영국 장궁을 쓰던 영국 궁수의 유골을 보면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의 엉규이 무덤 일화에서 언급되는 '장대한 뼈'도 이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원균맹장론과 별개로 원균의 무력이 아예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원균은 무과시험을 첫번째에선 부정입학으로 한번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그 다음 시험에서도 한번에 붙어서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첫번째야 당연히 부정입학이니 한번에 붙었다 쳐도 두번째 무과시험은 어떻게 한번에 붙은 것일까? 부정입학으로 떨어진 전적이 있는 응시생은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독관들이 부정입학 감시를 더 빡쎄게 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원균은 의외로 자기 가문의 빽 없이도 충분히 무과를 합격할 수 있는 기량 자체는 갖고 있었던 거 아닐까 싶다.[18] 당시 무과 과목들은 죄다 활을 쏘는 종목들이라 말을 타야 하는 기사를 제외하면 딱히 몸집이 육중하다고 불리한 과목은 없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1957년 5월 8일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원균이 한 부녀자를 강간하려다 놓친 적이 있어서 이 기록 때문에 원균은 여자와의 격투에서도 못 이기는 ㅂ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위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원균은 그냥 비만해서 육탄전은 형편없지만 활솜씨는 무과에 한번에 붙을 급의 실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궁수 자체가 육중한 무장을 하고 굼뜨게 움직이는 병과다 보니 원균처럼 몸이 비대하고 둔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비유한 스모 선수의 경우, 의외로 스모 선수들도 분명 근육질인데도 격투기에서의 전적은 형편없다는 것은 생각해 보자. 실제로 엎어지면 일어나는 동안 얼굴에 발차기나 주먹이 날아와서 여러번 KO 당한 기록이 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신립, 황진, 정기룡, 한명련, 유경천[19], 정충신, 정운 등 온갖 별의별 희한한 무대포 인간흉기들이 난립하던 시절인데, 원균은 하필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장수라서 상대적으로 더더욱 무력이 초라해 보이는 감도 있다. 사실 일본의 잡병 취급인 아시가루조차 일당백의 프로 용병들이었으며 심지어 '명회'라는 이름의 한 조선 농민은 편곤 하나 들고 혼자서 왜군 400명을 쳐죽였다는 괴담같은 얘기도 있고, 단순 지략가로만 알려진 이순신과 문약한 이미지가 강한 김명원은 의외로 둘다 당대의 명궁으로 유명했으며, 하다못해 까이는 이일조차 혼자서 왜군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다.[20] 말 그대로 당시 조선의 파워인플레 땜에 원균이 저평가받는 것 뿐이지 실제 원균의 무력은 최소한 1인분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일은 신립과 여진족을 토벌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원균의 행보는 맹장과는 1억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로 들면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판옥선을 자침한 사건의 경우, 물론 원균의 판단이 마냥 틀린 건 아니었지만 맹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란 문제가 있다. 애초에 맹장이 무엇인가? 앞뒤 생각 다 집어치우고 일단 돌격!하고 보는 게 맹장이 아닌가?[21] 예로 들어 맹장의 대명사인 신립이나 척준경의 경우, 이들이 원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무 고민없이 판옥선 끌고 왜선들에게 그대로 돌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신중하게 우선 판옥선을 자침시킨 다음 병력을 데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즉 원균은 맹장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신립이나 정기룡이 진짜 맹장이고 원균은 맹장은커녕 제 목숨만 챙기려던 똥별일 뿐이다. 당장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얼마나 거대한 용맹을 보여줬는지 선조 임금이 직접 곤룡포를 벗어다가 신립의 몸을 감싸며 치하한 일화까지 있으며 정기룡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조운이었다. 다만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조총 대 기병의 싸움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스러운 전투결과일 뿐이지 신립의 용맹이 약한 것은 아니다.[22] 되려 녹둔도에서 종군하던 시절 이일의 후퇴명령을 무시하고 남아서 싸워 이긴 이순신과 이경록이 되려 원균보다 더 맹장같다. 적어도 이순신은 도망은 안쳤기 때문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무관 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23] 훈련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으며 되려 일각에서는 원균이 승마에 능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수군으로 배치됐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고 실제로도 원균이 무과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승마 관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육지로 도망은 갔는데 뭐하러 말 놔두고 뜀박질로 도주했는가도 설명이 된다.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 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 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권력은 맛보고 싶고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은 안되는 인물이 원균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글공부나 열심히 해서 문관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원균의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다.[24] 결국 원균은 관직부터도 가문과 인맥을 이용해 올랐고 그렇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전투지휘관이 되길 고집했다. 거기에 탐욕이 지나칠 정도라서 부하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아 지휘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았다.

5.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6. 원균 옹호론의 사례(선양사업 포함)

6.1. 지역 사례(평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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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원균 제사

6.2. 인터넷 사례

6.3. TV 프로그램 사례

6.4. 대중 역사서 사례

위의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현대 시장에서 원균이 뜨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특히, 군인이면 보편적으로 강하고 좋은 존재라고 묘사되어야 팔린다는 자본주의적, 마초적인 측면에서 원균 캐릭터는 재창조되었다. 어찌보면 수동적인 이순신에 대응하는 화끈한 군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원균에게 투영되었고, 여기에 자본시장에서의 특정한 이익분야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 물론 현실의 원균에겐 그런 것 없었다.[41]

6.4.1. 이덕일의 서적

그의 여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문서로.
『선조실록』 37년(1604년) 6월 25일자는 세간의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준다.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 기록인데 무신으로는 이순신 · 권율 ·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었다. 현재의 일반적 통념에 역적인 인물인 원균이 400년 전인 당시에는 당당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모함했다는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이 기록은 원균도 조조처럼 한 영웅을 위한 후세의 희생양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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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197쪽}}}
그런데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것이 신하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무한 원균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마저도 원균은 본래 선무공신 2등이었는데,[42] 선조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사신은 논한다. ……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36년(1603년) 6월 26일
]
이런 점에서 볼 때 원균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불패의 신화를 지닌 용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겁장(怯將)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세운 공으로 부령부사에 특진되었으며, 병사 이일과 시전부락을 격파한 공으로 선조 25년(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0쪽}}}
원균은 1564년 무과에서 부정 시험 의혹[43]으로 낙방했다가 15년 뒤인 1579년에 합격한 반면, 이순신은 1572년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했다가 고작 4년 뒤인 1576년에 합격했다. 따라서 원균 보다도 이순신이 선배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에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이후 이순신은 부당한 이유로 픔계가 낮아진 적은 있어도 결코 합당한 이유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전라 좌수사에서 잘린 이유가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무슨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앞서 수령이 되어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4년(1591년) 2월 4일
]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전라좌수사 임명이 어지간히 깐깐했음을 알 수 있는데,[*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선조실록』 24년(1591년) 2월 8일
]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승진이 빠르다는 것 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24년(1591년) 2월 16일
]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44]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으로 만든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 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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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1쪽 ~ 202쪽}}}
그렇다면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과 북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에서는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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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1년(1598년) 4월 2일}}}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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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선, 『달천몽유록』}}}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지거리야!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이 경우에는 '선조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45]
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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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3쪽 ~ 206쪽}}}
기껏 중립적인 을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도 맞는 게 없이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고, 아니 어찌 보면 무타구치 렌야와의 비교마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실례이자 원균 본인에 대한 미화일 만큼 심각하다. 이런 사람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반자이 어택을 조장하는 것이다. 5개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면 다음과 같다.

여담이지만 역대 조선 임금들의 행보에는 정치력을 가미한 행동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선조의 원균사랑 역시 자신의 죄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후대에 이르러서 숙종장희빈을 간택하고 인현왕후를 버린 것은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장희빈을 선택한 것이고 나중에 그 장희빈을 버린 것 역시 송시열의 포지션에 남인들이 들어갔고 그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숙빈 최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나 숙종이나 자기 제위를 지키기 위해 부린 권모술수로서 각각 원균과 장희빈을 선택했을 뿐 원균이 선조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능력자도 아니며 장희빈이 숙종을 바지사장 삼은 것 역시 아니다. 원균이나 장희빈이나 각각 선조와 숙종의 장기말일 뿐이다.

6.4.2. 기타 서적

7. 기타

사실 원균 정도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들중에선 멀쩡한 축에 속한다. 최소한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이 있는 거제를 지키기라도 했으니까. 당장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 전투에서 도망을 쳐 무려 임진강까지 갔다가 한응인에게 참수당했다. 심지어 안동부사 정희적은 무려 함경도 길주까지 도망갔다. 거기다 이 두 졸장들은 안동성 전투때 함께 진을 쳤다가 일본군을 보고 사이좋게 도망갔다. 경주성 전투에서는 경주 판관 박의장과 기장군수 이수일은 항복을 권유하러 온 일본군 병사 1명을 보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추태를 부렸다. 경상도 방어선 항목을 보면 경상도 방면의 수령방백들은 도망치느라 바빴다. 그외에도 허구헌날 조정 신하들에게 찍혀서 제발 이놈 좀 파직시켜달라는 상소가 쏟아짐에도 선조의 비호로 자리를 지켰던 전라도병사 최원이나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팀킬을 저지른 용궁현감 우복룡등 원균 이하의 장수들이 널렸다. 그중 제일 막장은 지금의 수방사 사령관 격인 유도대장 변언수로 한양을 지키라고 그 자리에 앉혔더니 일본군에 항복하려다가 붙잡혀 참수당했다.

8. 관련 문서



[1] 해당 장소는 여수시의 이순신광장이다.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2'라고 쓰여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휘하의 다른 장수들도 기리고 있는데, 그 사이에 원균이 끼어 있는 것이다. 여수시에 철거하라는 민원이 들어갔지만, 소위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납득하기 힘든 논리로 원균을 옹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해결은 요원한 일이다. https://youtu.be/Kn14iat5d-w[2] 현재 울산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3] 다만 원유철고려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장 활동을 한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당인 통일민주당 중앙청년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김영삼 따라서 보수정당으로 옮긴 것이다.#[4]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재출간됐다.[5] 마찬가지로 드라마가 방영되자 《원균》으로 재출간되었다.[6] 애초에 '행장' 이라는 것은 그 신뢰성이 입증이 안 된다. 왜냐면 행장은 그 사람에 극단적으로 우호적으로 서술되어서 하다못해 이런 행장 작성이 만연했던 조선시대에만 해도 허목이 살아서 공자, 주자가 아니면 죽어서도 공자, 주자가 아닌데 왜 살아서 공자, 주자가 아닌데 죽어서는 공자, 주자가 되는 것이냐고 디스했을 정도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면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행록을 참고하여 서술했는데 이 때 김부식은 본래 10권짜리였던 행록의 분량에서 말이 안 된다 싶은건 거르고 믿을만한걸 취해 총 3권 분량의 김유신 열전을 만들었다. 내용의 반 이상이나 날아간 것. 그런데도 김유신 열전은 신라본기의 기록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만큼 행록이라는게 믿을게 못되는 것이다.[7] 물론 이렇게 반박 가능하다. "옛날 그일을 너는 봐서 원균 옹호하냐? 어떻게 아냐", "원균보다 다른 의병장이나 관군들이 더 열심히 싸웠다"고 역관광시키면 된다.[8] 왕을 참하라나 조일 전쟁은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가치가 없는 사이비 서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백지원은 김운회와 같이 사이비 저술가로 악명이 높다.[9] 세도가들에게 붙어 이순신을 모함하고 중상모략한게 한두번이 아니다.[10] 선조가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원인이지만, 조정에서는 권력층과의 연줄이 애매한 이순신이나 의병장들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반면에, 원균은 각 분야의 실세들과 혈연이 깊었다. 위급시에 이런 판가름이 발생할만큼, 이순신과 원균은 근본적인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11]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원균은 이것도 실패한 편인데 일단 선조 개인의 호감은 샀을지언정 선조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판받았다. 당대의 기록이 전부 이순신에게만 우호적이고 원균에게 비판적인건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승자의 기록, 왜곡 이런게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의 행적 때문이다. 한두 기록이 그렇다면 해당 기록을 남긴 사람이 고의적으로 왜곡할 수 있지만 실상 원균행장록 같은 왜곡이 대단히 많은 종류의 기록 말고는 후대는 물론 당대 기록도 서로 일치하는건 승자의 기록이나 왜곡만으로 할 순 없다. 심지어 칠천량 해전 전만 해도 조정에서의 원균에 대한 평은 이순신만은 못할지언정 나름 잘 싸우는 명장쯤으로 평가받고 있었다.[12] 비슷하게 단종실록, 세조실록 등의 기록에 왜곡이 있음을 추정하는 것 등도 전부 기록이란 기록이 다 남아있어서 교차검증이나 기록 내부의 문제점 등을 짚으면 얼마든지 드러난다. 기록을 너무 많이 해서 왜곡된 기록도 많지만 반대로 기록을 너무 많이 하기에 교차검증용 자료도 많아 얼마든지 왜곡을 짚어낼 수 있는 것.[13] 일본은 배에 대포가 없거나 있어도 적었고 그나마도 쏴도 판옥선이 견딜만했다. 멀리서 대포만 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수준.[14] 심지어 KODEF에서 발간한 서적에서는 "해군 전략을 모르는 권율은 원균에게 무리한 출진을 독촉했다. 분을 못이긴 원균은..."이라는 서술까지 있다![15] 굳이 말하자면 모함을 잘 하는 듯하다. 선조라는 빽을 등에 엎고 일본군을 보고도 안싸우는 등 출세욕이 강했다. 이순신과의 불화로 경상우수사에서 쫒겨나듯이 물러나 육군직인 충청병사로 임명되었던 적이 있어서 그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16]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17] #[18] 사실 그의 가문인 원주 원씨 자체가 전통적으로 무반을 많이 배출한 가문인 만큼 이 가문 무반들의 피를 물려받은 원균이 활도 제대로 못 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일 것이다. 신립도 일신의 무예는 인간병기급이긴 했다. 원균이나 신립이나 다 필부지용이라 그렇지.[19] 북관대첩 문서 참고.[20] 탄금대 전투로 조선군이 박살나고 도주하는 와중에 일본군과 마주칠때마다 그들을 죽이고 도주했다.[21] 물론 맹장이라고 해서 꼭 무지성 돌격만 하는 것이 아닌 돌격할 때를 잘 알고 진짜 돌격할 때 무지막지하게 돌격하거나 그냥 안되면 되게 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하는 타입도 있다. 즉 맹장이라고 다 같은 맹장은 아니다.[22] 애초에 여기서 신립이 패배한게 자기랑 안 맞는 보직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최고 지휘관으로는 부적합하지만 그런 자리를 맡은데다 기병 전문이라 똑같이 기병전에 능숙한 여진족과는 잘 싸우지만 일본군과는 그 특기가 먹히지 않아서 패배했다는 것이다.[23] 다만 이순신이 임진왜란 1년 전 고속 진급을 할 때 반대론자의 주장 중에서 "이순신, 걔는 육지에서만 뛰었는데 바다에서도 잘 뛰겠나?" 임을 생각해보면 따로 두지는 않아도 일단 육군에 맡기면 육군에 수군에 맡기면 수군에 오래 맡기거나 그냥 평생 그렇게 굴린 듯하다. 물론 이순신은 중간에 발포에서 수군 만호를 지낸 적이 있어 완전한 무경험자는 아니긴 했는데 이 때 이순신이 공훈을 세운게 없어서 반대론자들이 경험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24] 그리고 원균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웬만하면 능력과 상관없이 무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경우엔 예외적으로 대대로 문인 집안에서 무인으로 나온 특이 케이스다.[25] 따라서 별다른 레퍼런스 없이 무턱대고 '강단사학'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재야 사학자들을 보면 각별히 주의하자. 제대로 배운 연구자는 절대로 그렇게 과격하고 자극적인 문언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 원균 옹호론이 등장한 것은 이런 격렬한 어그로를 끌어봐야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시절부터이기에 원균 옹호론이 주류적으로 퍼진 이유와는 연관성이 적다. 그런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이 전두환 때이다. 즉, 전두환 정권이 은밀하게 지원했다는 주장도 부정되기 힘들다.[26] 웃픈건 조선시대에 서얼은 적어도 대놓고 외면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서자는 적어도 확실하게 자식대우 받았고 얼자는 최소한 노비 대우는 하지 않았다.[27] 이런 의미에서 보면 원균옹호론은 절대로 순수한 목적에서 나왔다고 할 수가 없다.[28] 오로지 군재만으로 따져서 비슷한 경우는 삼국지에도 있는데 바로 하후돈이다. 하후돈은 애꾸눈이 된 과정부터 장대한 삽질이고 박망파에서는 유비한테 패하고 도무지 승리한 업적이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최측근에 직책이 대장군이라는 이유로 인해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관우와 쌍벽급의 무용을 가진 인물로까지 미화가 되었다. 물론, 하후돈은 군재만 떨어지는 것 뿐이지 다른 능력이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조조의 창업공신으로 고위직을 받을만한 큰 공을 세운 것은 맞기 때문에 원균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이다. 적어도 하후돈은 그 대우에 있어서 생전에도 사후에도 딴지걸어지지 않았고 사후에는 '충후'라는 매우 좋은 의미의 시호를 받았다. 반면 원균은 시호조차 없다. 똑같이 1등인 이순신은 충무, 권율은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도 말이다.[29]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맹장이 아니고 졸장이다. 진짜 맹장인 신립처럼 열심히라도 싸운 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직무유기를 걸핏하면 저지르는 인간이였다. 원균은 맹장은 고사하고 졸장이란 말도 아까운 찌질이다.[30] 실제로 이순신은 워낙 비현실적인 전공을 세웠기에 창작물에서 이런저런 너프를 겪는다. 예를 들어 명량 해전은 실제론 절망적인 전략차에도 불구하고 아군 전사자는 불과 10명이었고, 한산도 대첩은 전사자가 3명이었다. 물론 둘 다 왜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말도 안되는 교환비이며 만화로도 이렇게 그리면 욕먹는다. 그렇기에 영화 명량에서는 실제론 있지도 않았던 백병전이 그려지거나, 한산에서도 유인 과정에서 아군 배 3척이 피해를 입는 등 모습이 그려져 긴장감을 연출했다.[31] 신립 고증이 가장 잘 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멍청하고 비중도 없지만 최후에 간지폭풍의 모습을 보여주고 퇴장하여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도 포위당했음에도 화살 한발로 적장을 쏴죽이고 혼자서 수십명을 쳐죽이는 등 충분히 맹장 반열에는 들 수 있는 행적을 보였다. 사실 어떻게 봐도 무예와 용맹이 뛰어나단 것은 확실한 신립 대신 겁쟁이였던 원균만 자꾸 띄워지는 것은 신립과 이순신 사이의 별 인연이 없는 것도 크다. 주인공이 이순신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라이벌이 있어야 하는데, 라이벌이 찌질이라면 김이 새기 때문에 띄워지는 것이었다.[32] 첫 출전에서 이억기가 아직 전력을 다 모으지 못하자 정운이 나서서 기다리지 말고 그냥 일본군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이순신도 정운이 주장을 따랐고 옥포 해전에서는 아군이 나서서 싸우지 못하자 선봉장으로 나서 싸워 이겼으며 이후에도 선봉장으로 여러번 활약했다. '한 마디로 맨날 선봉장으로 나서서 맹렬하게 싸우는 장군' 컨솁을 잡는다면 원균보다야 이쪽이 적합하다.[33] 학창 시절 춘원의 글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34] 웃긴 건 그럼 이순신 휘하의 이들 중 얼마나 전사했냐면 전사자는 적었다. 단지 군법을 어겨 처형된 군졸 숫자만 많았을 뿐. 명량에서도 고증된 부분이다. 그나마 이순신 휘하의 이들 중 전사자가 많았던(이순신 본인도 전사했지만) 노량 해전조차 이순신 본인을 포함한 당시 조선 수군 전체가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일본에 복수하려 하다 보니 그렇게 전사자가 늘어난 것이며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역량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북한은 이미 수백만 인민을 개인 권력욕 때문에 증발시킨 전쟁을 일으켰으니 억지 궤변이다. 심지어 김일성은 남침으로 남한에게 선빵 쳐놓고 튀다가 자기 편한테 맞은 것까지 원균과 판박이다. 그나마 북한도 나중에는 이순신을 치켜세워주었다.[35] 이런 시각의 대표적인 예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 중 선조편. 이 책에서는 원균을 '리더의 명령에 충직한 장군'이자 실록에 의지해 원균을 살펴보겠다고 본문에서 언급하면서 '역사에서 가장 폄하된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36] 독재와 권위에 대한 반발로, 그때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반대쪽(원균)에 관한 연구였으나 결론적으로 원균의 한계만 더 명확하게 드러난 꼴이었다.[37] 예를 들어 EPL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를 평가할 때 "형편없는 선수다"라고 하면 당연히 EPL 기준으로 형편없다고 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기준으론 매우 뛰어난 축구선수이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논리가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이다. 프로가 프로인 건 이유가 있고, 총사령관이 총사령관인 건 이유가 있다. 원균처럼 초엘리트 군인으로 막대한 책임을 짊어진 자의 능력을 평할 때 "일반군인치곤 무능한 건 아니다"란 건 전혀 의미가 없다.[38] 선조 역시 머저리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원균이 선조에게 사기를 친 셈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가 수전에 약한지라 조선수군이 부산포로 출진해 위용을 보여준다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미적거리거나 육군의 지원을 요청한 것에서 보듯이 자기도 수군의 힘만으로 점령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도 불가능하단 걸 담보로 삼군통제사 직위를 받아놓고 딴 소리를 하는 건 당연히 사기다. 괜히 권율이 대노해 삼군통제사를 곤장치는 초강수를 둔 게 아니다.[39] 위에서 계속 나오지만 원균과 달리 실제로 용맹이 뛰어난 맹장이었던 신립의 경우, 탄금대 전투에서 궤멸적인 전술적 역량과 조총에 대한 몰이해 등을 통해 조선의 정예군을 대패시킨 패장이다. 이 점에서 원균보다 죄가 적다고 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신립은 본인의 탐욕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의무로 싸움에 나섰고 결사항전하다 패했다.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임무가 주어진 군인'이라면 기병대장이 어울림에도 총사령관 역할을 맡아 실패한 신립 쪽이 그나마 더 맞는다.[40]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아예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조선시대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 후대에 와서 민족주의자들이 날조한 허구의 가공 인물이라는 황당한 글이 버젓이 베스트에 올라가기도 했다.[41] 이순신이 완벽주의자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하는 무인이었단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명량 해전' 정도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도록 판을 짜놓는데 능한 인물이었지 결코 요행을 바라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너무나 모범적이고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존경은 할 지언정 감정이입하기는 힘들다. 하다못해 술버릇이 고약하거나 포악한 면이 있던 것도 아닌 약점이 전무한 인물이니, 뭔가 단점이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원균의 캐릭터가 창조된 것이다.[42] 물론 신하들이 미쳐서 2등에 집어넣은 게 아니라 선조 눈치가 보여서 올려놓은 것이다. 원래는 선무공신은 고사하고 관작 추탈이 아니라, 처형도 마땅하다는 건 다 동의할 것이다. 아닐 게 아니라, 원균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 했다.[43] 조선시대에 웬 부정행위? 라고 할 수 있겠다만, 시험이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부정행위는 늘 있어왔다. 그 당시 과거시험에도 갖가지 부정 행위는 횡행했다.[44] 게다가 류성룡은 몰라도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는 말은 도저히 근거가 없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집에 이순신을 대장(大將)으로 천거했다고 나오긴 하는데, 이 대목의 시점으로 보아 여기서의 대장이란 삼도수군통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작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면 좋아할 일이기는 하다. 각종 의병장 관련 사건이나 무고 사건에서 피해자를 두둔하는 건 정탁이었다. 이는 이원익이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등용시켰다고 말했던 것(『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과 같은 맥락이다.[45] 이미 선조에게 밉보였다가 정권이 뒤바뀌는 일을 4번이나 보았다. 그나마 이때는 숙종식 환국이 아니었던지라 물러나도 재기할 기회는 있었지만 실각은 참으로 큰 타격이었다.[46] 물론 이건 아주 쉴드칠 구석이 없는 것만은 아닌데 이미 조정에서는 "적이 쳐들어오면 육지로 끌어들여 싸워라! 우린 수군은 약해도 육군은 강하니까!" 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일단 육지로 달아나려고 한 것 자체는 조정의 말을 잘 들은 거다. 게다가 조정에 거짓 보고까지 올렸으니 이쯤되면 막장이다.[47] 그나마도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을 미화했다는 게 졸다가 기습을 당한 것으로 처리했다. 근무를 태만히 해 자다가 봉변을 당한 게 미화일 정도로 이 인간이 칠천량 해전에서 한 짓은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48] 참고로 나중에 요시라는 조선 측에서 분풀이로 삼으려고 했는지 수교 조건으로 압송을 요청했고 결국 요시라는 처형당한다.[49] 그렇지만 저항을 한들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미지수다.[50] 다만 당시 동아시아는 일본 빼면 전부 문인 우대 국가였다.[51] 함선 숫자가 대등한 지휘관은 이순신(24척)과 이억기(25척) 함대였다. 원균은 연합 함대의 1/10 미만의 규모이며 그것도 전투마다 후방에만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호도한다. 그에 반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같은 만화이지만 이순신의 24척과 원균의 4척을 그려서 둘을 확실히 비교하고 있다.[52] 물론 이런 일은 없었다. 반대로 무서워서 도망치는 왜군을 무리하게 좇으라고 닥달하다가 조선군 12척이 떠내려 가는 비전투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