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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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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쇠뇌, 철갑탄과의 비교3. 특징4. 조선의 군사기밀5. 성능6. 타국의 애기살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화살의 한 종류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짧다. 한자어로 편전(片箭)이라고도 한다. 활, 덧살(통아:桶兒)과 한 세트이다. 덧살(통아)을 덧붙여 그것을 가이드레일로 삼아 발사하거나 쇠뇌로 발사하는 화살이다.[1]

발사 후에는 덧살은 사수의 손에 남아 덜렁거리고 화살만 날아간다. 그래서 멀리서 봤을 때 화살이 제대로 발사되어 시위를 떠났는지, 아니면 사수의 실수로 떨어진 건지 알아채기가 매우 힘들다.[2]

특수한 사격방식 때문에 높은 숙련도와 함께 사격시 극도의 주의를 요하는 화살이기도 하다. 숙련된 사람이 아닐 경우 아무데로나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다. 임란 당시 한 의병장이 쓴 <고대일록>을 보면 편전을 연습하다가 손이 꿰뚫리는 심각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3]
나는 집에 있으면서 편전(片箭)을 쏘고자 후원에서 습사하다가 실수로 왼손이 맞았다. 화살이 합곡[4]에서 엄지를 관통하여 왼손이 못쓰게 될 형편이니, 걱정이 어떠하겠는가. 심하다! 이것도 왜적으로 인해 입은 피해이다.
고대일록 1592년 12월 25일 신해일
편전은 다만 우리나라에만 있다.[5] 그래서 중국의 창이나 일본의 총과 함께 천하무적이 되었다. 상고하건대, 금(金)의 중경유수(中京留守) 강신(强伸)이 원병(元兵)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다 떨어졌을 때 엽전(葉箭)으로 화살촉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원병의 화살 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서 통편(筒鞭)을 가지고 쏘았으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이다.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盎葉記)2

한국에서는 위와 같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앙엽기의 내용이 잘못 번역되어 마치 고려 시대 대몽항쟁 중 김강신이라는 장수가 보통 화살을 네 개로 쪼개 사용한 것이 편전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6] 그러나 후술 할 내용에서도 언급되지만 편전의 개념은 이 일화에서 처음 제시된 것이 아니며 또 태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고구려 후기 이전부터 한국에 편전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중경은 개경의 다른 이름인데, 중경유수라는 관직은 고려 충렬왕대 이후에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김강신이라는 인물은 고려 당시의 기록이나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조차 그 이름이 언급이 없다. 애초에 화살을 네개로 쪼개 편전을 쏜 장수의 일화는 바로 중국 이십사사 가운데 하나인 금사에 나오며, 이에 따르면 이 일화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밀리던 금나라가 새로 낙양을 중경으로 삼았을 때 낙양을 방어한 중국 금나라의 장수 강신(强伸)의 일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덕무가 '금의 중경유수 강신(金中京留守强伸)'이라고 쓴 것을 한국의 현대 번역자가 '중경유수 김강신(中京留守金强伸)'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편전의 개념은 비단 중국이나 한국만 나온 개념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온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쇠뇌의 개념을 떠올릴수 있다면 편전의 개념을 떠올리는 것도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각설하고, 앙엽기의 기록을 통해 애기살의 길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보통 현대의 화살은 70~8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를 개인에 따라 잘라 맞추어 쓴다. 국궁의 특성상 귀 뒤까지 만작하므로 10여센티를 더해 최대 90센티미터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네개로 쪼갰다면 약 15~20센티미터 정도의 길이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애기살을 정말 잘 쐈다고 전해진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성 위에 농성 중이던 적군 70명을 애기살로 모두 머리를 맞혀 죽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7]

2. 쇠뇌, 철갑탄과의 비교

짧은 화살을 가이드레일에 놓아 발사한다는 메커니즘 자체는 쇠뇌와 유사하지만 그 교리는 다르다. 쇠뇌는 인간이 정상적으로는 활을 당겨 화살을 발사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의 활시위를 사용하기 위해서 개발된 것이고, 애기살은 보다 가벼운 화살을 이용해서 보다 더 멀리 날리기 위한 것이다.

분리철갑탄의 송탄통과는 달리 덧살은 그냥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다. 오히려 덧살은 총열이나 포신에 더 가깝다.

하지만 기본적인 원리 자체는 쇠뇌와 동일하다가 보아도 무방하며 실제로 한 양덕이 한국의 통아를 좀 더 안전하고 쉽게 쏘기 위해 만들어 낸 '슈퍼 통아'라는 물건을 보면 한눈에도 국궁쇠뇌의 중간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건 아래 영상을 참고.
[8]

3. 특징

애기살은 3장의 화살깃 중 하나의 깃이 통아의 안쪽 벽에 눌리도록 장전한다. 통아에 넣는 화살깃이 일반 유엽전 사법과 마찬가지로 2개가 붙은 쪽인지 아니면 1개가 붙는 쪽인지는 단체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아직도 통일이 되지 않았다. 또한, 화살깃에는 꿩의 깃털을 많이 쓴다고 한다. 꿩의 깃털이 탄력이 있어 통아에 눌렸던 화살깃이 날아가면서 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조선의 군사기밀

왜적들은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 일본의 조총이 천하제일이라고 항상 말했다.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지봉유설(1614년)

조선시대에는 무과 초시 과목 중 하나로 군사기밀로 다루어졌다. 왜관에 있던 일본인이 통아에 일반화살을 안에 넣고 따라하는 걸 보고 기밀관리가 해이해졌다고 우려하는 기록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심지어는 북방 국경에서도 함부로 편전을 쏘지 말라고 가르쳤다. 여진족에 의한 기밀 유출을 우려해서였다. 이후 조총의 등장과 조선의 멸망, 궁도의 쇠퇴 등 시대의 풍파에 의해 사법이 실전되었다. 문서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조선에서 기밀로 다룬 것이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 궁도인들이 다시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특정 단체에서만 편전습사를 하고 있는 까닭에 전 궁도인들이 애기살 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선 쓰지 않는 화살이라 적이 주워도 쓰지 못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한다. 통아가 없으면 못 쏜다. 통아가 있어도 오발사고가 많이 나는 화살이라[9] 이미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쏘기 힘들다.

5. 성능

50파운드 국궁 사격 시의 장전-편전 비교
편전이 날아가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 모습

보통의 화살보다 가볍고, 에너지 보존법칙 덕에 화살이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가며 화살 몸체의 요동으로 인한 에너지 손실도 적은데다 탄도의 직진성이 더 높다. 속도가 빠르고 길이가 짧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보통 화살에 비해 날아오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도 화살이 짧기 때문에 적진에 떨어져도 주워서 쓰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민승기가 2004년에 출판한 <조선의 무기와 갑옷>에서 편전이 가벼운 무게 때문에 일반 화살보다 관통력이 뒤떨어진다고 서술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는다.[10] 하지만 1619년 심하 전투 당시 조선군으로 참전한 이민환이 후금군에게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면서 한 경험을 기록한 <건주견문록>을 보면, 후금군은 편전이 먼 거리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기에 이를 가장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11] 임란 당시 조정 관료였던 정탁은 <약포선생문집>에서 "활과 조총의 위력을 비교하면 활은 조총의 절반에 미칠 뿐이지만, 편전을 쏘면 그 위력이 조총에 비견할 만하다."라고 하여 편전이 일반 화살보다 위력이 좋다는 투로 서술하였다. 실제로 편전과 거의 유사한 무기[12]를 쓴 서남아시아권과 인도에서 받침대를 통해 쏘는 짧은 화살의 관통력을 여러 차례 칭찬하였고 이쪽의 실존 유물을 보면 일반 화살보다 몇 배나 짧은 화살(편전)이 무게는 일반 화살의 4분의 3까지 이른다. 가볍다고 무조건 관통력을 낮게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실례로 스펀지에서 애기살의 관통력을 실험한 결과, 얇은 쇠 쟁반 정도는 뚫고 그 뒤에 세워놓은 마네킹을 관통하여 박혔을 뿐 아니라, 차 유리를 뚫고 건너편 문에 박히는 결과를 보여줬다. 본래 일반 화살로 실험했을 당시 속도와 정확성 면에서 현대식 양궁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성능을 보여줬는데, 화살을 편전으로 바꾸니 양궁(리커브 보우)보다도 빠른 탄속을 보여줬다. 화살과 발사 방식을 바꾼 것만으로 이 정도로 속도가 향상됨이 밝혀졌으므로 옛 기록의 신빙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글 링크

이 관통력 문제 때문에 한 밀리터리 사이트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던 사례가 있다. 실제론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엔 에너지가, 화살이 갑옷을 뚫는 순간엔 운동량(충격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화살의 무게를 줄인다고 크게 불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화살의 경우 화살의 질량을 m, 발사 시 화살의 속도를 v라 하자. 활이 가진 모든 탄성 퍼텐셜 에너지가 화살의 운동에너지로 전환되었다고 가정할 때,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1/2*mv^2이므로 질량이 반으로 줄어들면 속도가 √2(≒1.414...)배가 된다[13] 다만 초기 속도는 √2배가 되었지만, 항력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공기저항이 급속도로 커지게 되어 속도는 빨리 줄어든다. 따라서 그만큼의 거리까지는 못 날아가고, 일반 화살보다 좀 더 날아간다 보면 된다. 반면에 갑옷을 뚫을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것인 관통력은 충격량과 충돌시간이 중요하다. 충격량은 운동량의 변화량이므로 질량은 0.5배, 속도는 √2배라면 대략 일반 화살의 0.7배 정도의 위력이다. 하지만 이 0.7배의 운동량으로도 일반적인 화살보다 높은 관통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고속이기 때문이다. 이 윈리를 이용해 현대에 무기로 만든 것이 분리철갑탄, 날개안정분리철갑탄이다.

다만 실제 전장에서 사용할 경우, 바람에 의한 손실 같은 경우도 고려해야만 한다. 또한 저중량 고속도 발사체의 특성상 장거리를 날아가면 발사체의 에너지 손실률도 클 수밖에 없다.[14] majra나 솔레나리온 같이 편전과 유사한 화살들도 대개 원거리에서 적을 견제하는 것이 주요 용도로 쓰였고, 근거리에서 갑주를 관통하는 화살들은 일반 화살에 화살촉만 달리 한 것들이다. 실제 원균먼 거리에서는 편전, 중거리에서는 장전을 쏘아 왜군을 물리친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15] 편전류의 화살의 주 용도는 원거리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갑주 관통용으로 널리 쓰인 것은 아닐 수 있다.[16] 그러나 그 정도로 살상력이 부족해졌다면 이미 유효사거리를 벗어났고, 유효사거리는 편전이 다른 화살들보다 더 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논하는 의미가 없다.

상술하였듯 편전은 일반 화살보다 탄속이 빨랐는데, 이는 실전에 있어서 적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점이었다. 장전(長箭) 같은 경우엔 반응속도 좀 빠르다 하는 사람은 실제로 무협지마냥 칼로 쳐내거나 보고 피해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편전은 그 속도가 빨라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또한 속도도 속도이거니와 탄체의 크기가 작아 더욱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별시위(別侍衛) 강효복(姜孝福)이 아뢰기를,

"신이 연대(煙臺)에서 후망(候望)하였고, 금번에 또한 더불어 싸우면서 그 일을 목도(目睹)했습니다. 저쪽 사람은 1백여 명이 있었는데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 서로 반반(半半)이었고, 철갑(鐵甲)을 입은 자가 그 반(半)이었으며, 갑옷을 입은 자는 모두 쇠로 영수(領袖)를 만들었습니다. 또 그 얼굴을 가려 싸서, 드러나 있는 것은 두 눈뿐이었으며, 혹은 몽둥이를 잡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우리 쪽 사람이 처음에 장전(長箭)으로 쏘았더니, 저들 중 갑옷을 입은 자는 뛰면서 휘두르기도 하고, 혹은 〈그 화살을〉 주워서 도로 쏘았습니다. 그래서 편전(片箭)으로 쏘았더니 저 사람들이 피할 수가 없어서 두려워했습니다. 다만 변읍(邊邑)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편전(片箭)의 수효가 적은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유의(襦衣) 1령(領)과 별조궁(別造弓) 1장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편전(片箭)을 들여보내도록 하라." - 성종 22년(1491) 1월 24일
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 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 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히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 명종 10년(1555) 5월 30일

단점은 역시나 특유의 난해한 사용방식. 가뜩이나 활 자체가 손쉽게 익힐 수 있는 무기도 아닌데 통아에 작은 화살 사용하는 기술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정예 중 최정예나 감내할 수 있는 난이도가 된다. 또한 시위를 길게 당겨야 하는 일반적인 장궁으로도 쓰기 어려웠는데 살이 통과해야 하는 통아가 길수록 오발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은 전투력의 상당 부분이 활의 위력에 의존하여 궁병이 꽤 잘 양성되어 있었고, 사용하는 활도 작고 강력한 복합궁인 각궁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활용 가능할 정도로 다수의 애기살 숙련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기살은 단각궁에서 쏠 수 있지 장궁이나 강궁에는 맞지 않는다. 쏴봐야 빠르고 강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고 약하다.

국내의 모 유튜버가 실제로 편전을 복원해서 쏘아 봤더니,(편전의 위력 1 편전의 위력 2) 냄비헬멧과 기왓장을 모두 관통하는 위엄을 보여 네티즌들이 크게 놀란 일이 있었다. 또한 45보, 70보, 110보 거리에서의 동일 무게 및 화살촉을 사용해 판넬을 맞추는 방식으로 장전과 편전의 관통력을 비교했을 때, 장전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관통력이 약해지지만 편전은 45보에선 관통을 못 하다가 거리가 멀어지니 오히려 관통에 성공하는 결과를 내면서 상술된 거리에 따른 화살 운용이 일리가 있는 것이었음도 확인됐다.

6. 타국의 애기살

애기살과 같이 작은 화살을 가이드 레일을 사용해 날리는 궁술은 타국에도 존재했는데,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동로마 제국의 솔레나리온이다.#1 #2[17] 6세기 마우리키우스 황제 시기의 병법서인 마우리키우스의 스트라테기콘(Strategikon)에 실린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치명적이고 장거리 사격이 가능하므로 경보병에게는 활, 화살, 화살통, 그리고 나무 통아(solenaria)와 편전, 편전용의 작은 화살통으로 무장시킬 것을 권장한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 외에도 터키의 마즈라[18]나 인도 등지에서도 솔레나리온의 사용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 페르시아를 통해 서남아시아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효과도 비슷해서 먼 거리에서 빠른 화살을 날려 적을 교란시키는 용도였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대체적으로 몽골 침입 이후 부터 활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나라 때 중국에 존재한 통전(筒箭, 통사(筒射))가 애기살과 유사한 무기라는 관념이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다. 때문에 애기살과 유사한 무기가 고려 말 이전부터 동아시아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편전의 유래로 나온 금나라 장수 강신의 일화도 편전을 유용하게 쓴 사례이지 편전 자체의 시초는 아닌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스키타이를 계승한 훈족을 통해 서남아시아인도, 그리고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파르티안 사법등자가 전해질 때[19] 편전 또한 같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왜 등자[20]와 달리 편전에 대한 기록은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등자의 경우는 기마병을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쉽게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게 가능했으나 파르티안 사법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도 등장할 정도로 등자와 함께 동아시아 지역에 전해진지 오래되었지만 모든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과 수련의 어려움으로 인해 조선 시대는 물론 근현대에도 특정 계층/직업군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화가 되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편전 또한 (쇠뇌보다) 장전의 복잡함과 어려움[21], 그리고 숙련되지 못하면 사수가 손을 다칠 수 있다는 안전상의 문제로 인해 소수 계층에서만 수련을 해오다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잠시 대중화가 되었다가 다시 전쟁이 끝나면 똑같은 이유로 특정 계층만이 익히는 것이 반복되다보니 기록상 고려 때 처음으로 사용된 것처럼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3]

일본에서도 전국시대때 조선으로부터 전래되어 소수 사용되기는 했으나, 당시에 이미 철포가 전래되어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이 활용되지는 않았다고 한다.영상 애초에 장궁으로 분류되는 일본활로 편전과 같은 형태의 화살을 각궁처럼 매겨 쏠 수 있는지도 불투명하고.

현대에는 컴파운드 보우용으로 나오기도 한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일반적으로 국궁으로 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 쇠뇌 관련 병서 <노해>에 쇠뇌로 편전(애기살)을 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걸로 보아 쇠뇌로도 쏠 수 있다.[2] 당하는 입장에선 작은 크기 탓에 덧살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주워서 다시 쏠 수도 없고, 덧살을 노획해서 갖고 있어도 훈련을 받지 않아 사용법을 모르면 쏠 수 없었다. '분명 저 녀석이 실수해서 화살이 발사되지 않았는데 내 가슴팍에 꽂힌 이건 뭐지?' 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 화살이 짧을수록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 레일에서 탈선한 화살을 보지 못하고 발사해서 눈먼 화살이 되는 것. 이로 인해 화살의 길이가 계속 길어졌다. 초기와 후기의 편전의 길이를 비교해보면 심하게 차이가 난다. 근래에 복원한 애기살들 중에는 총의 약실과 총탄의 관계처럼 덧살과 애기살이 꼭 맞물리게 제작하여 오발 위험을 크게 줄인 물건도 있다.[4] 엄지손가락 밑동과 손바닥 사이의 살로 이루어진 부분[5] 후술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세계 여러곳에서 편전과 비슷한 무기가 존재했다. 그러나 저자인 이덕무가 살던 당시 기준 동아시아에 편전을 주무기로 쓴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기에 그리 표현한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 알았던게 아니라 당시 유럽, 중동 지역의 정세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6]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2004.[7] 원사나 중국 쪽 기록으로 교차검증을 했을 때도 이성계의 무예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단 1,000명으로 북원 나하추의 좌, 우, 중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나하추의 장수 5명을 한번에 처치한 기록이 있다.[8] 2분 11초부터[9] 딱 봐도 느낌이 오겠지만, 통아의 열린 면으로 편전 머리가 덜렁덜렁 튀어나오기 일쑤고, 이대로 쏘면 당연히 오발이 난다.[10] 다만 2019년에 나온 개정판에서는 편전의 위력 부분이 논란이 되어 수정을 하였다.[11] 이 부분은 이민환의 기록보다 약 120년 전인 성종 임금 무렵, 여진족과의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언급된다.[12] 아랍권에서는 majra라고 부른다.[13] 다만 탄성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애기살에 전달할 때 너무나 당연하게도 활몸과 시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살끼리의 무게만 비교해도 통아를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운동 에너지가 손실되는 만큼, 무게가 화살의 무게가 절반이라고 절대로 그 속도가 √2배가 될 수는 없다.[14] 포탄으로 바꿔서 얘기해보자면, 2차 대전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의 주포는 동급의 경쟁국 주포와 비교해서 경량의 포탄을 사용하였다. 이는 상당히 빠른 탄속으로 포탄을 쏠 수 있었지만, 경량탄이었기 때문에 공기저항과 바람의 흐름에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에 원거리로 멀리 갈수록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15]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원균도 알 정도로 조선군에게 기초적인 전술이었다는 것. 이 말을 들은 원균의 친척도 '대장인 니가 직접 활 쏘고 그래서야 되겠니?'라는 식으로 반응한 거 보면 대전략을 얘기해 보라니깐 엉뚱하게 전술 얘기를 한 게 문제지 저 교리 자체는 전혀 틀린 게 아니다.[16] 단 병인양요 당시 실록 기록으로 애기살이 선저를 반 이상 관통했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관통력도 상당해 보이기는 하다. 단 어느 정도 거리에서 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불명.[17] 출처 : #[18] 출처 : #[19] 참고논문 - 한국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Armed of cavalry and cavalry Tactics in Korea (이홍두, 2014), 전문보기[20] 등자 또한 최초유물은 4세기이나 실제로 정확하게 한반도에 전해진 시기를 기록만으로는 특정하지 못하고 있디[21] 당장 앞 항목에 링크된 영상만 봐도 컷편집이 됐음에도 전장식 라이플을 장전하는 수준으로 화살걸기에서 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냥용이나 일반 병사들이 전투용으로 쓰기는 부적절하고 전투 시작시 원거리에서 1~2회 정도 사용할 법한 무기였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22] 파르티안 사법 또한 조선 이전의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없으나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벽화를 통해 고구려 시대때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편전 또한 이덕무가 청장관전서 앙엽기에서 언급한 대몽항전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태종실록 026 13/07/28(을사)에서 (임금이) 중외(中外)에 편전(片箭)을 쏘는 것을 연습하라고 명하였다.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일렀다. (중략) 김여지 등이 《산당고색(山堂考索)》을 고찰하니, 곧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만든 통사(筒射)이었다. 라는 언급이 있는 것을 통해 이미 당나라(618~907) 초기부터 중국에서 사용했돈 통사(筒射)와 우리의 편전(片箭)이 유사한 무기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도 최소 고구려 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다른 이름으로 존재했으나 대중화되진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23] 전술한 내용에서 나오듯 애기살과 쇠뇌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기본적인 원리에서 교집합을 가지는 무기이다. 그런 이유로 청동기 시기부터 한반도에 쇠뇌가 존재했던만큼 고구려 초-중반 시기 정도까진 새로 유입된 애기살과 쇠뇌가 경쟁하였으나 아마도 훈련과 안전 문제 등에서 대량의 숙련된 병사를 양성하려면 (휴대성을 제외하고는) 쇠뇌가 더 안전하고 쉽기에 편전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사용하는 쪽으로 가고, 일반 군사들이 주력으로 사용한 것은 쇠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의견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다만 이 의견을 뒷받침 하려면 고구려 초-중기 시기에 '쇠뇌'의 사용과 보급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하나 그동안은 신라에서만 '노당'이란 이름으로 쇠뇌부대를 운용하고 쇠뇌를 사용했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하지만 점차 고구려에도 쇠뇌가 주력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는데, 중국의 정사 이십사사 중 하나로 524~581년에 편찬된 주서의 열전편-이역전-고구려편을 보면 '고구려가 보유한 병기를 설명(兵器有甲弩弓箭戟矟矛鋌)하면서 쇠뇌를 뜻하는 "노(弩)"'를 언급하고 있고, 덕흥리 고분(무덤주인의 출생시기를 330년 경으로 추정) 앞방 동벽에도 '막대에 달린 활을 든 기병의 그림'과 함께 '계헌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薊縣令捉軒弩)'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중세유럽에 존재했던 쇠뇌 기병이 이미 고구려 초-중기에 있었을 가능성이 언급될 정도로 고구려 초-중기 사회에 쇠뇌가 널리 보급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때문에 편전과 유사한 무기가 있었으나 석궁에 그 자리를 빼앗겨 역사속으로 사라진 서양의 케이스처럼 한반도에서 또한 고구려 시기에 이미 존재했으나 안전과 훈련 문제로 인해 '쇠뇌'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의견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다.[24] 근데 이게 아주 근거 없지 않은 게 전술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앙엽기"에 따르면 강신이 몽골을 막을때 화살이 부족하여 적의 화살을 4등분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편전의 길이는 초기에는 보통 살의 1/4 길이였다가 현재 전해져 오는 길이인 1/2정도의 길이로 변했다.[25] 조선시대 국궁은 유교의 육예 중 하나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비롯한 지배 계층들, 심지어 평민들조차도 즐겨 하던 무예였다.[26] 실제로 '20순(100발)중에 98발, 10순(50발)중에 49발을 과녁에 명중시켰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27] 이거 김성모가 만화 왕수에서 일부 써먹었다. 명중한건 자동차 윗부분이었다.[28] 고려시대 때 편전이 어떻게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편전은 중국 금나라 장수 강신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이미 있다. 기황후몽골-금 전쟁이 끝난 지 80여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무리한 설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