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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0:25:31

사인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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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사인검

1. 개요2. 해설
2.1. 김유신의 보검설?
3. 구조
3.1. 사인도가
4. 상위 호환: 사진검
4.1. 유사품: 칠성검
5. 일화6. 대중매체 속의 사인검7. 관련 문서

1. 개요

사인검()은 조선 시대 조종조(태조 재위시기)부터 왕실에서 제작하여, 조선왕조 내내 궁중과 민간에서 만들었던 벽사용 도검으로, 순양의 기운이 깃들어 사귀를 베고 재앙을 물리친다는 칼이다. 인년 인월 인일 인시[1]에 만들어졌기에 사인검이라 불린다. 당연하지만 칼을 2시간만에 만드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조부터 마무리 손질까지 전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공정만 인시에 하고 나머지 작업은 그 전후에 해서 만든다. 실전용 무기가 아닌 주술적 도구인데, 칼날이나 자루에 사인검 또는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이라는 두 종류 이름을 새겼다.

일반적으로 양날직검의 형식이 많지만 외날곡도의 형태, 즉 사인참사도(四寅斬邪刀)도 존재한다.링크1 링크2(전쟁기념관 소장)

2. 해설

조선의 대표적인 주술적 도구인 인검(寅劍)은 태조 7년(1398) 무인년에 처음 사인검(四寅劍)이 제작[2]된 이래 조선왕조 내내 전승되어 만들어진 주술적 목적의 벽사용 칼이다. 우리 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사인검이란 이름은 물론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드는 칼'이라거나 '재앙을 물리친다.' 같은 내용까지 알 정도로 세간에 인식된 칼이다.

그러나 유명도만큼 본의가 왜곡된 부분이 많아 잘못 알려진 속설과 억측이 난무한다. 민간의 문집 등에 남은 옛 기록에서 인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검 관련 기사가 6편 9절 분량이 기록되었는데 《실록》의 인검은 사인검, 삼인검의 두 가지 칼만을 의미한다.[3]

2020년 현재 공식적으로 소재가 파악된 + 조선 시기 만들어진 인검은 30여 점 정도로 대부분 국공립박물관에 소장되었고, 소재가 파악된 개인과 문중이 소장한 유물까지 포함한다면 확인된 유물은 약 50여 점 남짓이다. 하지만 제작법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12년마다 제작되고 있다. 사인검은 만들어진 검 자체이기도 하지만, 검의 분류/양식의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2010년 경인년 2월 21일(음력 정월寅月 8일壬寅日),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 소장이 사인검 57자루를 제작했다. #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현대에 만든 것이어도 장인들이 공들여 만든 예술품이라서 매우 고가이다. 이상선 소장은 2022년에도 사인검 40자루를 제작했다.

명확한 근거와 문헌·유물에 따라 고증한 결과는 기존 속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 인검의 인(호랑이)은 “무(武)나 무인(武人)”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인검을 만드는 이유는 결코 호랑이의 용맹함이나 ‘무(武)’의 기운 때문이 아니다. 음양상 문은 양(陽), 무는 음(陰)에 해당되므로 만약 음인 무의 기운을 얻으려 한다면, 순양인 사인의 시기는 절대로 해당될 수 없다. 인은 오행의 오신수(五神獸)에 적용하여 분류할 때 군신간의 도리인 “義”를 뜻하며, 많은 인검이 공신의 하사용으로 쓰인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2) 사인검은 인년이 돌아오는 매 12년마다 만드는 것이 원칙이나 상황에 따라 제작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흉년, 재정부족 등의 국가 상황을 들어 반대하면 제작을 중단하거나 만들지 않았다. 이는 괴력난신을 배척한 유가의 사상에 기인한 대소신료들의 반대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3) 경인년(흰 호랑이해) 등의 특정인년에 만드는 사인검이 특별히 귀하다는 것은 근거없는 속설일 뿐이다.
《실록》에는 특별한 인년을 선호한 근거와 기록이 없으며 선조들의 문집에도 없다. 동양철학과 역술계통에서는 경인년을 길한 해가 아닌 사나운 기운이 발동하는 해로 여긴다. 흰 호랑이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백호에 대한 현대 한국인들의 감성적 호감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이러한 풍조는 도검제작자들의 상술과 이를 그대로 인용한 언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인검은 재앙을 막고 사귀를 베는 벽사용 칼로서 주술적인 의기에 속한다.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용 칼이 결코 아니며 왕의 칼, 또는 호신용 칼도 아니다. 공신과 신하들에게 하사용으로도 사용되기도 했고 왕실과 궁의 안녕을 위해 보관하기도 했다. 조선전기의 사인검은 의기로서는 물론 호신에 가능할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졌고, 후기로 가면서는 대형화되어 의기로 전용됨에 따라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로 변형되는 경우도 있었다.

5) 인검은 출정하는 장수에게 주는 부월과 같은 칼이 아니다.
인검은 기본적으로 전투용 칼이 아닌 주술적 의기이다. 인검 유물 중에는 실전을 겸할 수 있는 규격의 칼도 있으므로, 장수에게 하사한 칼 중 인검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유물들도 남아있으나, 출정 장수를 위해 인검을 별도로 제작하지는 않았다.

6) 사인검은 인년에 만드는 것이 원칙이고, 삼인검은 인년이 아닌 해에도 만들었다.
연산군 7년, 즉, 인년이 아닌 신유년에 삼인검을 만들다가 대신들이 반대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인년이라 할지라도 필요에 따라 사인검이 아닌 삼인검을 만들기도 했다.

7) 인검은 주조(鑄造)로 만든 칼이 아니라 단조(鍛造-타조打造)로 만드는 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현대화 번역 작업에서 특정한 글자들을 관행적으로 번역하여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특히 도검 관련 용어들의 해석이 그러한데, 그 중에서 인검 관련 기사에 표기된 “鑄” 자가 대표적인 오역에 해당된다. “주”는 청동기 시절 도검제작 시 사용된 용어로서 그 당시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기가 주종을 이루는 한 대 이후 당 왕조부터는 “주검(鑄劍-거푸집에 쇳물부어 칼을 만들다)”의 의미는 단순히 '칼을 만든다.'는 의미로 정착했다. 즉, 청동기 당시의 본의가 사라지고 제작만을 의미하는 관용어로서 수용(- 현대에도 중국의 수많은 도검제작사의 회사명이 “○○주검”인 것이 그 결과이며, 조선에서도 19세기의 학자 이규경이 저술한 《五洲衍文長箋散稿》의 〈주검변증설鑄劍辨證說〉편을 보면 그 의미가 “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며, 결코 “주조로 만든 칼”에 대한 설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도검관련문헌에서 도검을 제작할 때 사용된 글자 “주(鑄)”의 의미는 “만들다(단조=타조)인 것이다. 즉, 조선의 인검은 주조로 만든 칼이 아닌 단조로 쇠를 두드려 만든 칼이었고, 만약 주조하여 만들었다면 표면이 경화되어 검신에 입사를 시문하는 작업자체가 용이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8) 사인의 시점에는 철괴를 타조(打造)하여 대략적인 칼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인시(寅時 새벽3~5시)동안 도공이 쇳덩이에 열을 가하고 두드려 대략적인 칼날 윤곽을 잡는 것이다. 우리가 유물에서 보는 완성된 인검 칼날의 정교한 형태는 그 이 후에 별도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지며, 칼날의 최종완성 전에 입사와 열처리 등을 마무리하여 3~4개월간에 걸쳐 완성된다. 결코 현대의 도검제작자들처럼 미리 만들어둔 완성된 칼날을 화로에 올려 열처리 하는 시간이 아니며, 이런 식으로 제작한 현대의 사인검에는 벽사의 힘이 깃들 수 없다.

9) 사인검의 힘은 순양의 시기에 타조하여 칼에 순양의 기운을 깃들이게 함으로 얻는다.
인시에 철정을 두드려 칼날형태를 다듬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특정한 의식을 거친 준비된 도공이 “해당 시간”에 달궈진 쇠에 타조해야 하며, 이를 통해 순양의 기운을 깃들게 한다. 인년-인월-인일-인시의 취합은 사주팔자가 양의 기운으로만 이루어진 '양팔통(陽八通)'이 되어 순양의 시점이 이루어지며 이때 쇠를 두드림으로써 기운을 담게 되는 것이다.

10) 사인검은 천간지지와 오행의 총합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순양검이다.
원래 순양검은 “요귀를 베고, 마를 물리치며(斬妖除魔), 간사함을 제거하고 악을 없애는(除奸鋤惡)” 능력을 담고 있다. 《실록》에 기록된 사인검, 삼인검관련기록인 ①재앙을 물리치는 도구(연산군7년), ②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중종37년), ③사귀를 물리칠 수 있다(숙종12년)는 내용처럼, 인검을 만든 목적과 용도가 순양검의 그것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11) 인검 칼날에 새겨진 글은 도교의 주문과 같은 형식이다.
검결의 시작이 “건강정(乾降精-천신이여 강림하라), 곤원령(坤援靈-지신이여 일어나라)”으로 시작하는 것에서 그 연원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시적 표현으로 의역하면 “하늘의 정기를 강림하고 땅의 신령을 일으켜라”라고 기술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검결의 해석이 3자씩이 아닌 대구를 이룬 6자씩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해석들은 한자의 문리와 문장의 대구의 원칙을 간과한 자기류의 해석이 대부분이다.

12) 인검을 만든 목적은 무엇인가?
참요제마(斬妖除魔), 제간서악(除奸鋤惡)할 수 있는 벽사(辟邪)의 순양검인 사인검을 만들고, 오행의 용호(龍虎)와 오륜(五倫)를 적용하여 인(仁-군왕의 덕목을 의미)의 속성을 가진 또 하나의 순양검인 조선의 사진검(四辰劍)과 함께 “仁義로서 나라의 통치를 이루게 하는(成爲仁義之綱紀)” 순양검의 궁극적인 덕목을 부여한 것이다. 즉, 왕실의 안녕과 군신간의 도리를 이루어 국태민안을 기리는 주술적·의기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칼이다. 사인검은 “義(군신간의 도리)”의 기운을 담은 순양검이다.

13) 인검은 한번 제작할 때 다수로 만들며, 연산군 시절엔 2백 자루를 만든 적도 있다.
이를 통해 2016년 현재에도 여전히 세간에서 떠도는 “60년 만에 한 자루”라는 식의 말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최고의 도공만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현대인의 감성적 바람에서 비롯된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군기감의 도공들은 물론, 적정한 자격과 일정 수준의 실력을 갖춘 민간의 刀工들까지 소집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14) 인검은 통상 3개월 이상 4개월 전후가 소요되어 제작되었다.
중종37년 기사에 수록된 시점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장인이 평생 한 자루 밖에 못 만드는 칼이 결코 아니며, 인년 등 시기적 조건이 갖춘 해의 특정 시기에 시작하여 수개월 정도를 소요하여 만들어지는 칼인 것이다.

15) 인검제작은 국가사업 수준의 일이었고 소요물량은 재정의 큰 부분에 해당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제 도검도 통상 송아지 한 마리(지금의 송아지 가치와는 달리 농가의 큰 재산에 속하는 가치였다)에 해당하는 가격에 달하는 비싼 기물이었다. 하물며 인검처럼 금은, 비철, 어피, 정교한 장식, 화려한 수술들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든 궁중의 칼은 민간의 칼과 비할 수 없이 비싼 기물이었다. 인검을 제작하기 위해 인년의 전년부터 민간을 동원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재료와 재원을 마련하고, 군사와 야장을 포함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궁궐의 사인검 역사에 수개월 이상 동원되었다는 기록에서도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16) 사인검은 인월에 속한 2~3일의 인일 중 가용한 하루를 임의로 택하여 제작했다.
인의 기운이 강한 상인일(첫 번째 인일)에 만들었을 것이란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실록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억측이다. 연산군이 인검을 만들도록 명한 날자는 이미 상인일이 지난 시점이다. 즉, 인일이면 되는 것이고 상인일, 하인일처럼 특정 인일을 선호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인검 제작시점이 특정 인년을 선호하지 않고 12년 마다 돌아오는 인년이면 되었던 실록의 기록과 비교해도 일치한다. 즉, 세간에서 주장하는 “인의 기운을 강하게 띤 춘양(春陽)의 시기인 상인일에 만들었기에 춘양의 기운을 지녔을 것이다”라는 말은 실록의 기록을 면밀히 살피지 못하고 주장하는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17) 인검이란 명칭의 칼은 조선에만 있는 존재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검, 사인검, 삼인검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등장하지 않는 칼의 명칭이며 이는 진검, 사진검, 삼진검도 마찬가지이다. 단, 개념적인 부분에서 인검과 연계성을 가진 칼은 중국에도 존재하나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아울러 중국에도 순양검이 존재하지만, 인검(또는 진검)처럼 순양의 힘이 깃드는 구체적인 철학적 원리와 근거가 제시가 된 예는 부재하며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민족의 특별한 칼이다.

18) 관제인검은 조선시대의 철학과 공예의 정수를 총합한 기물이다.
인검은 검신에 입사된 북두칠성과 이십팔수 천문도에 담겨진 북두의 구궁과 오행의 사신수, 27자 검결이 수행하는 천신과 지신의 강림과 신력(神力)을 이용한 벽사와 수호 등이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를 위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벽사를 위한 불가의 길상문양, 검두, 검패(코등이)의 연화문이나 애자(睚眥-용의 일곱 번째 자식)문양, 검신에 입사된 천지간 신력을 얻고자 했던 기원이 새겨진 주문, 불가의 범어와 실담어(梵語의 고체)로 새겨진 벽사의 경문을 새겨 천지간의 운행과 만물의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하는 등,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요소들을 조화시켰다.

결론적으로 인검은 순양의 기운으로 벽사의 의미를 깃들인, 조선을 대표하는 신령한 위력의 칼로서 군신간의 의리를 묵시적으로 상징함과 동시에 나라 다스림의 궁극적 귀결인 국태민안과 태평성대의 구가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칼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심오한 고대의 과학과 철학의 이치 하에 의도적으로 구성된 현묘한 우주관의 반영이다. 이 요소들을 한데 모아 상생(相生)과 조화를 이루고 총제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한 인검은 우주와 천지만물에 대한 선조님들의 철학과 세계관을 확고히 대변해주는 결정체인 것이다.
위의 글은 2016년 1월 문화재청 사보 "월간문화재"에 수록된 순양의 기운을 벼려 삿됨을 베다를 항목별로 정리하여 재인용하였다.

아래에서 인용한, 세간에 흔히 퍼진 오류와 속설에 대해서는 정정하지 않았다.

사인검이 만들어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투용 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상 때문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대다수 칼이 관제도검으로 제조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초창기부터 핸드캐논, 천자총통, 국궁처럼 사격을 통제하는 기술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칼은 일종의 호신용 무기로서 쇠퇴해버렸고, 칼을 제조하는 기술은 발전할지언정, 크기를 줄이고 경량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4]

결국, 조선시대의 도검은 소형화 기술, 국가의 권위, 왕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왕이 신하와 인척들에게 국가를 다스라는 사람으로써 정신을 일깨우고, 상무정신을 기억하고자 발달한 예식용 도검문화가 사인검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인식은 임진왜란정묘호란이 지나간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나 의미가 있는 서술임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 조선은 중세말부터 근대초까지의 기간이 군사적 전성기였던 국가이며, 조선군의 전성기라 할만한 시절들은 전투용 도검이 확실히 필요한 시대상이었는데 조선의 검은 환도에서 알 수 있듯 그 길이가 짧아 호신용에서 벗어나지 못해 왜군과의 격전에서 곤혹을 치르며 뒤늦게 길이를 늘리는 개량을 시행한 적이 있다. 사인검은 이런 조선 초기인 14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물건이라 전투용 칼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의 도검제작업체에 의해 사인검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본래 만들어야 할 시간에 안 만들고 그냥 아무때에 만들어서 파는 경우도 있는데, 대조영도검에서는 사인검을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맞춰서 만든 게 맞냐는 질문에 사인검을 그 시간에 만들어 줄 수 없고 의미만 담은 것이라고 했다. # 물론 본래 시간대로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맞춰서도 여전히 만들어진다. 이렇게 정석대로 만들어진 사인검들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내놓자마자 팔리는 수준으로 조기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아직까지도 사인검에 대해 인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5]

2.1. 김유신의 보검설?

참고로 언제부턴가 사인검의 유래가 김유신과 연관되어 잘못 알려졌다. 일각에선『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유신의 탄생설화를 언급하면서 '김유신이 사용했던 칼'이라고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사실무근의 설이다.

『삼국사기』제41권 열전 제1에서는 김유신의 칼을 두고 단지 ‘보검’이라고만 칭할 뿐이다. 아울러 그가 기도를 통해 보검에 깃들게 한 하늘 별자리의 신령한 영기는 허(虛)와 각(角) 2수의 기운으로 현무와 청룡의 기운 중 일부이고, 인(寅)과 연관 지을 만한 백호의 기운이 아니다. 즉, 김유신의 칼은 인의 기운을 가진 사인검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이는 삼국사기의 관련기사만 확인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삼국유사』제1권 기이 제1의 기록에는 아예 산중수련이나 김유신이 소유한 칼의 명칭에 관한 기록이 없어 김유신과 사인검을 연결시킬 단서 자체가 없다. 다만, 김유신의 출생 시 칠성문이 그의 등에 있었다는 내용을 읽은 누군가가, 그것도 현대의 어느 시점에서 칠성문을 인검과 같은 벽사용 도검의 대표 격인 칠성검과 연결시켜 혼동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곡해한 결과 김유신 사인검설이 나왔고, 이러한 오류가 확대되어 현재의 김유신 사인검설이 되었다.

김유신의 칼과 관련된 구전 설화들에서도 신검(神劍)이나 보검 등으로 묘사되며 사인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김유신의 칼은 사인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보검'이나 '신검'일 뿐이므로 김유신의 사인검설은 반드시 정정되어야 할 오류이다.

3. 구조

호랑이(寅)의 기운을 네 겹으로 받아서, 특정한 시기에만 만든 검으로, 벽사(삿된 것을 쫓아냄)의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제조방법은 일반적인 도검처럼 단조로 제작되었다.

외형상으로는 무협에서 뺀질나게 등장하는 당나라 때부터 이어져 온 양날직검의 형태이고 검신에 별자리와 주문을 새기는 것은 전형적인 도교 양식이다.[6] 다만 중국 도교의 칠성검은 북두칠성 하나만 달랑 그려져 있는 게 대부분이다. 28수 별자리를 전부 넣은 검은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손잡이가 통으로 금속으로 되어 있는데다 순 연철 재질에 무게가 지나치게 가볍거나 무거워 실전용이 아닌 의례용으로 간주된다. 다만 몇몇 유물은 손잡이도 제대로 완성되어 있고 실전용 도검과 같은 스펙이어서 충분히 실전에서 쓸 수 있다.

사인검의 아이덴티티라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의식을 통해 만든다는 것, 그것도 왕실에서 주관하였다는 점에서 주술적인 의미가 깊다.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단순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을 금속에서 재현했다는 점에서도 예술적으로도 중요한 유물이다.

파일:attachment/f0043889_4aeebedb3dc80.jpg
파일:attachment/f0043889_4aeebef420513.jpg
칼날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의미하는 28수 별자리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에 신령한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서 한문으로 주문이 새겨넣는데, 검의 명칭을 포함하여 한자 총 29자를 전서체로 입사(入絲)하였다.
四寅斬邪劍
사인참사검

乾降精 坤援靈
건강정 곤원령
이 세상 천지 간에 정령이 충만하네

日月象 岡澶形
일월상 강전[단]
해와 달의 형상이며, 산과 물의 모습이네

撝雷電 運玄坐
휘뢰천 운현좌
천둥번개 몰아치며, 샛별 또한 움직이네

推山惡 玄斬貞
추산악 현참정
산과 같은 악을 물리치고, 베어내어 바르게 하리라
출처 KBS 진품명품 사인검 편

3.1. 사인도가

선조시기부터 광해군시기를 거쳐 인조시기에 이르기까지 관료로 지냈던 신흠계축옥사로 관직에서 물러나 김포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 아들인 신익성으로부터 사인검을 선물받자[8] 기쁨에 넘쳐서 '사인도가'라는 시를 지었다. 요약하면, "아 사인검 너무 좋아!"(...). 이미 당대에도 사인검이 웬만한 세력가들조차도 구경하기 힘든 성검으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인도가 (四寅刀歌)

林有魈兮山有夔 숲에는 이매(魑魅)가 있고 산에는 귀신이 있고

陸有虎兮水有螭 땅에는 호랑이가 있고 물에는 이무기가 있어

夜而行兮晝而伏 밤이면 돌아다니고 낮이면 숨어버리며

攬余裾兮嚙余足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내 발을 깨무네.

橫中途兮不可制 길에서 횡행하니 제어할 길이 없고

爲民害兮勢漸猘 백성에게 해가되니 그 기세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我有刀兮名四寅 나에게 칼이 있으니 그 이름을 사인(四寅)이라 하네.

讋地祇兮通天神 지신(地神)을 두렵게 만들고 천신(天神)과 통한다.

白銀粧兮沈香飾 백은(白銀)으로 단장하고 침향(沈香)으로 꾸몄으며

光潑潑兮霜花色 빛이 번쩍이며 뿜어지니 마치 서릿꽃과 같다.

防余身兮奚所懼 내 몸을 보호하니 어찌 두려워할 바가 있으리

邪自辟兮罔余迕 삿된 것은 저절로 피하니 나를 얽어매지 못하리.

精爲龍兮氣爲虹 정(精)은 용(龍)이 되고 기(氣)는 무지개가 되어

橫北斗兮亘紫宮 북두성(北斗星)을 가로질러 자미원(紫微垣)까지 퍼지네.

行與藏兮惟余同 길을 다닐 때 몸에 감추어 함께 하니 내 몸과 한 가지로 생각하네.

歲將暮兮倚空同 장차 늙어지면 함께 공동(空同)으로 돌아가리라.

4. 상위 호환: 사진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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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들이 사용하는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사진검(四辰劍)이 있다. 이것은 용의 해, 용의 월, 용의 날, 용의 시간에 만들어진다. 최고의 장인이 평생에 딱 한 자루 사진검을 만들고, 연달아서 만들어낸 칼들은 삼진검이 되어서 일부 왕족들에게 수여하였다. 정식명칭은 사진참사검(四辰斬邪劍), 또는 사진보검[9] 이다.

하지만 사진검을 많이 만들지 않았던 것은, 사인검보다도 격조가 매우매우 높아서 함부로 만들어봐야 기념할 만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주류에 가깝다. 특히 사인검은 임금이 신하들에게 선물할 하사품 중에서도 격조가 높은 물건이라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여러 자루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10]

하지만 군왕을 상징하는 사진검은 양산해야 할 필요성이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군왕을 상징하는 검을 여러 자루씩 찍어냄은 주술적으로도 오히려 나쁘다. 거기다 왕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검이라 사인검보다 저렴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상당한 비용이 들고 제조시기도 12년마다 한 번씩으로 한정되는데, 괴력난신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에서 많은 비용을 잡아먹는 데다 딱히 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사진검을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양산할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진검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원래부터 만들어진 수량이 적은데다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겪으면서 유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사진검은 공식적으로는 없다.[11] 삼진검은 딱 하나 경인미술관에 남아있어 사진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데 검신 장식은 검결이나 (검명 “삼진보검“을 제외하면 7개 글자, 총 11자이다) 별자리나 (북두칠성만 새겨져 있다) 사인검에 비해 오히려 검소하다. 또한 2023년 기준, 일반에는 더 이상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환도를 제작하는 개인 메이커들 중에는 단순히 사진검이라는 '컨셉'을 따와서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구체적인 유물이 많은 사인검에 비해서 사진검은 보존된 유물이 경인미술관에 단 한 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 유물의 형태를 참조하지 않고 제작자의 마음대로 화려하게 꾸미는 경우가 많다.(...)

4.1. 유사품: 칠성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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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사였던 이억기 장군이 하사받은 칠성검. 출처: 육군박물관

칠성검은 본래 중국 도교에서 사용하던 의례용 칼로, 실제로 생물을 베는 용도가 아니라 악귀를 베어 죽이는 의미로 불교의 금강저처럼 사용하던 의례용 칼이나, 도교문화가 동북아로 전래되면서 중국 외 다른 나라들도 칠성검을 만들기도 하고 토착신앙의 무당들이 같은 용도로 사용하던 신칼을 칠성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외에 삼국지의 칠성보도처럼 호신용 칼에 칠성검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칠성검은 이름답게 칼날에 북두칠성과 보성 2개와 용을 새겼다. 종종 다른 건 빠져도 북두칠성은 반드시 새겨진다.[12] 도교에서는 보검(寶劍) 이나 법검(法劍)이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악귀를 죽이는 도교의 신 현천상제(현무)가 차고 다닌다고 한다.

5. 일화

6. 대중매체 속의 사인검

주술적인 면모 때문에 각종 매체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용의 힘이 깃든 사진검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유물이 적어서 덜 알려진 감도 있고, 왕을 상징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의미가 왜곡되기 쉽다는 단점도 있다. 게다가 아무나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라는 약점도 있다. 네 마리 용을 칼에 담은 먼치킨 아이템을 요괴나 시정잡배가 쓰면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주술적인 의미를 보면 사인검도 충분한 성검이라서, 사진검을 굳이 등장시킬 만한 이유가 없기도 하다.

6.1. 네이버 웹툰 신과함께

주호민의 <신과함께>에서는 사인검이 번개 속성의 마법검인 것으로 해석된다. 유성연 악귀를 잡을 때 강림도령이 상술한 "(전략) 번개가 몰아친다.' 주문을 외며 번개를 날린 적이 있고, 이승편에서 동현의 집을 파괴하려는 포크레인에게 벼락을 내릴 때도 이 사인검을 사용한다. 또한 작중에서 사인검의 공격은 번개가 됐든 물리공격이 됐든 영체에게는 아주 큰 타격을 입히는 모양. 저승편에선 사인검을 제대로 쓴 해원맥에 의해 유성연 악귀의 껍질이 허무하게 벗겨졌고, 이승편에서는 홍역귀를 쫓기 위해 해원맥이 측에게 사인검을 넘겨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측은 사인검의 손잡이를 잡는 것만으로 손에서 김을 내며 고통스러워한다. 저승차사들은 사인검을 어떻게 휴대할 수 있는지는 작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또 앞서 얘기한 포크레인 낙뢰 장면에서는 포크레인을 힘으로 막던 철융이(이미 장독을 너무 오래 비운 탓에 약해져 있기는 했었지만) 그대로 소멸되기까지 한다.

만들 때도 골 때렸지만, 쓸 때도 골 때린 병기로 나와서, 역시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중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으면 부엌칼보다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년에는 1년 내내, 인월에는 한 달 내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날짜에는 하루에 한번씩 오는 인시에 쓸 수밖에 없다. 인시가 새벽 3시에서 5시의 동트기 전이라서 일반인들은 써먹기 골룸하지만 어차피 밤에 다니는 저승 차사들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제약이라고 하겠다. 아니 저승사자들한테는 그 때가 밀린 일도 다 끝내고 돌아가야 할 시간일 테니 저승사자들 입장에선 이게 제한 취급도 안 될지도. 참고로 작중에서 이 조건을 언급하며 하나라도 맞춰서 사용했던 사례는 두 번인데, 모두 인일 조건을 충족했다.

웹툰에서 부엌칼의 모양을 한 것과는 다르게 영화판에서는 검은 검신의 제대로 된 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용시 28수의 별자리가 붉게 빛난다.

뮤지컬판의 묘사도 제대로 된 검에 더 가깝다. 여기에서는 강림도령이 간지나는 넘버[14]를 부르며 꺼내고, 사용도 제대로 하여 멋진 활약을 보인다.

6.2. 네이버 웹툰 오성X한음

말단관리인 오성과 한음이 선조의 밀명을 수행하는 동안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하사받았다. 밀명인만큼 숨기기 좋게 단검 2자루를 받아, 각자 하나씩 소지하고 있다. 대부분 이거만 보면 저자세를 취하지만 한 사람만은 이항복이 의심받을 만한 정황이 많았던지라 "그걸 이 칼 한 자루로 믿으라는 건가?"라며 오히려 옥에 가뒀다. 목을 안친게 다행

6.3. 디아블로 3

인검
파일:인검.png 1901.2-2274.3
초당 공격력
무기 공격력 (178–185)~(416–431)
초당 공격 횟수 1.40
태고에 시안사이의 왕들이 지니고 다니던 이 검은, 네 호랑이 혼령의 날래고 위험한 힘을 이용한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왕은 오직 이 검만으로, 불운한 희생자들에게서 악마를 천 마리나 "몰아냈다고" 합니다.
'인검'이란 이름으로 2.2 패치 부터 등장. 전설 도검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정예 괴물을 처치시 일정 시간 동안 쿨타임 감소 능력을 주는 독특한 고유 능력을 지니고 있다.

6.4. 네이버 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

화랑이 쓰는 신살구 열쇠검의 4번검이다. 부정한 것을 베는 것이 아닌 베인 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한다.

6.5. 전지적 독자 시점

'에피소드 15. 왕이 없는 세계'에서 김독자가 절대왕좌를 파괴할 때 쓰였다. 사인참사검이란 이름으로 나오며 S+급 아이템이지만 조건만 충족하면 성유물로 바뀌기도 한다. 김독자는 간평의의 특수옵션인 별의 메아리를 발동하여 북두칠성의 일곱 장군을 불러내 별자리의 연을 끊었다.

7. 관련 문서



[1] 인년은 서력으로 12로 나누어 나머지가 6인 해 (ex: 2022년), 인월은 음력 정월, 인시는 새벽 3~5시에 해당한다.[2] 중종 37년(1543) 4월 18일자 기사에서 중종이 이렇게 말한 기록이 있다. "사인검은 반드시 인년에 만드는 것인데... 이는 조종조의 예부터 있어온 일"[3] 세간의 속설에는 이인검, 일인검도 있을 것이라 주장하나 이인검, 일인검은 양기가 약해서 만들 필요가 없다. 한때 중앙박물관 소장 이인검 유물이 있었으나, 2002년도 유물조사 결과에 의해 입사된 전서체 '삼'자에서 획 하나의 금속이 탈락되었음이 밝혀져 삼인검으로 정정되었다.[4] 현대의 총에 장착하는 총검(Bayonet)을 생각해보자. 조선시대의 환도도 그런 의미였다.[5] 고려도검에선 날부분만 시간 맞춰서 만들고 나머지는 주문제작이라고 했고 해당 제품은 대조영도검의 그 제품보다 가격표에 0이 하나 더 붙어있다.[6] 검신에 별자리를 새기는 양식은 한반도에서도 상당히 오래되어 백제가 일본에 칠성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단] [8]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인 신익성이 구해준 것이다. 어떻게 신익성이 사인검을 구했을까 싶지만,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였기 때문에 관제 사인검을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조혁상(2014): 조선후기의 도검증여(刀劒贈與)에 대한 고찰 Study of a Korean Sword Gift in Late Joseon Dynasty. In: 한국문화연구 2, 7-40. 논문 다운로드 링크[9] 유일하게 현존하는 경인미술관 삼진검 검신에 삼진보검이라고 새겨져 있다.[10] 사인도가에 나오듯 임금으로부터 사인검을 하사받았다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었다. 보통 그 당시에 왕과 은연중에 대립하는 신하의 집안에서 줄초상이 나거나 자식이 병에 걸리는 등의 횡액이 들면 왕이 사인검을 하사하는 것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경우도 있었다.[11] 가끔 사진검으로 등장하는 검들은 왕실에서 정식으로 만든 사진검이 아니라 민간차원에서 주술적 의미를 담아 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사인검과 사진검을 제작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12] 이는 도교의 우주관에서 북두칠성이 천상을 관장하는 삼청(三淸)과 사어(四御)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히 도교신앙이 일부 변형된 칠성사상에서 북두칠성은 사인검에도 새겨진 하늘의 별자리 28수와 성좌 3백 개, 별 1460개를 관장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다.[13] 다만, 실제 사인검과는 차이가 있다. 28수 별자리와 한문 주문이 새겨지지 않았고, 지그재그 형태의 별자리만 새겨져 있다. 정확히는 이게 모티브이다.[14] 가사를 잘 들어보면 위에 나온 사인검에 새겨진 주문을 어레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