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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0:02:42

환도(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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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에서 설명하는 환도에 대한 설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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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ds/200804/13/57/f0006957_480109ef21a45.jpg
環刀 / Hwando, Ringed Blade, Korean Arming Sword

1. 개요2. 역사3. 형태
3.1. 길이3.2. 도신3.3. 슴베3.4. 날밑3.5. 잠금장치3.6. 칼자루
4. 휴대 방법5. 제작법6. 각종 오해
6.1. 접쇠6.2. 사철6.3. 칼날 무늬(하몬)6.4. 한손검?6.5. 전근대 한국에서 칼의 입지
7. 정리 및 요약8. 구매 및 유통9. 기타
9.1. 각종 유물들9.2. 일본도와의 비교
9.2.1. 외형9.2.2. 성능9.2.3. 역사상의 평가9.2.4. 일본도의 영향?
9.3. 일본에서의 오해
10. 매체에서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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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반도에서 고리를 사용하여 패용(佩用)하였던 도검무기. 한민족환두대도 다음으로 오랫동안 사용한 군도이다.

환도(環刀)의 '환'은 고리를 의미한다. 융원필비에서는 환도에 대해 "이 칼을 환(環)이라고 부르는데 칼집이 있고 고리를 달았으며 고리을 달아 패용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환도에 대한 기록은 1277년부터 나타나는데 융원필비는 1813년의 기록이기 때문에 이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긴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융원필비 편찬 시점에는 환도의 환이 칼집의 패용 고리 장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 듯하다.

환도가 군용 도검으로 정착하면서 조선 시대에는 거의 보통 명사화되어 전투용 장검이면 그냥 환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본도를 그냥 환도나 왜환도라고 부르기도 했고[2], 심지어 19세기에 이양선이 찾아와서 문정을 했을 때 남긴 기록에서도 행어, 세이버, 커틀러스 같은 서양식 외날검 또한 환도라고 적었다. 양날검도 환도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운검, 패도, 패검 등 다양한 명칭이 나오지만 이름이 다를 뿐 모두 환도의 일종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예도, 쌍수도, 왜검 등은 검법의 명칭이며 실제로는 대부분 환도를 사용하여 수련했다.

2. 역사

한반도에서 주력으로 사용하던 환두대도는 시간이 흐르며 작은 날밑을 갖추거나, 손잡이의 환두가 사라지는 등 환도와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됐지만, 칼날은 여전히 곧게 뻗은 직도였다. 몽고습래회사에서 묘사된 고려군의 칼이나 처인성에서 발견된 고려 칼 역시 모두 칼날이 곧게 뻗은 직도로 곡률이 있는 환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기록에서 '환도(環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273년, 고려 시대 충렬왕 때이다.[3] 이를 고려하면 고려원나라와 접하면서 당시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곡도 양식의 영향을 받아 칼날의 휨 등이 추가되어 환도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4] 따라서 고려 말부터는 곡도인 환도가 주력 도검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환도의 비중 자체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점차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조선이 처한 환경에서 기인한다. 일단 조선 초에는 여진족을 상대로 기병 중심의 전술을 애용했는데, 장부상의 편제만 따지면 기병과 보병이 거의 1:1이었으며, 기병이 더 많았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는 장부상의 얘기이고, 이후 말의 공급이 어려워지며 기병의 수가 점차 감소하긴 했지만[5], 조선이 기병 중심의 전술을 운용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태평성대가 지속되어 비교적 소규모의 왜구와 여진족의 약탈에 대한 대응이나 토벌 정도가 주된 전장이었다.[6] 따라서 기병과 궁시, 발전된 화기 등으로 적을 제압하는 게 가능해지며 전장에서 자연스레 칼을 사용한 백병전의 비중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7]

이에 따라 검 자체의 규격도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문종 시기에 북방에서 활약한 이징옥은 "환도는 짧고 곧아야 급할 때 쓰기 편하다."라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징옥의 의견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환도의 길이를 논할 때 보병용은 칼날 55.63cm, 기병용은 칼날 49.60cm을 기준으로 삼았다.[8] 해당 길이는 건물의 높이를 재던 영조척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당시 일반적으로 무기의 길이를 잴 때 사용하던 주척 기준으론 보병용 35.638cm, 기병용 32.96cm로 훨씬 짧아진다. 다만 이 기록에 한해선 영조척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때 보병용은 양손 파지 역시 염두에 뒀는데 칼날 길이가 35cm인 것은 합리적으로 이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칼날의 너비는 7푼으로 삼았는데, 주척 기준으로 삼으면 너비가 겨우 1.4cm로 지나치게 좁아지기에, 영조척이 더 자연스럽긴 하다.[9]

다만 어느 쪽이든 이 규정은 이후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이후 중종 23년(1528) 실록에서 지방에서 공납한 환도의 길이가 너무 길어 차고 다니기 불편하니 이를 조정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래성 출토 환도들은 55cm 전후, 혹은 65cm 전후에서 70cm의 칼날 길이를 가지고 있다.[10] 어떤 기준이든 문종 시기에 논한 길이보다 확실히 길다. 물론 16세기 중반 명종 때 조선 사신이 차고 있던 칼이 너무 짧아 중국인의 비웃음을 샀다는 기록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칼이 짧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전보다 짧은 칼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동시에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 되며 군대의 훈련도에 문제가 생기며 군사들의 평균적인 창검술 숙련도 역시 하락했다. 실록을 보면 조선 초에는 창이나 검 관련 기록이 꽤 나오지만 중기 근처로 가면 창검술을 익히지 않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궁술 훈련 역시 이전보다 문제가 있었는지, 쓸만한 궁병이 부족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고려하면 오랜 태평성대로 군대가 전반적으로 약화되는 와중에 그나마 가장 중시하고 자주 평가했던 궁병 정도가 유지되었다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11] 당연히 무기의 관리와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궁시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과적으로 환도의 평균 길이는 이전보다 짧아졌고[12], 병사들의 창검술 훈련 역시 잘 이루어지지 않아 근접전에 취약해졌다. 또 병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무기의 상태도 영 좋지 못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에 반해 일본에선 오랜 기간 전쟁이 반복되며 칼들의 길이가 꽤 길었고, 더 나아가 오오다치 같은 중후장대한 검도 사용했다.[13] 무엇보다 태평성대를 거쳐 제대로 훈련되지 못하던 조선군과 달리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투 경험과 개인 역량 역시 비교적 뛰어났으며, 거기에 비교적 큰 칼과 조총도 사용했으니 조선군이 사기가 중시되는 백병전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에 귀순한 왜인(항왜)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전습하니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7월
또한 위의 기록처럼 검술의 전승도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조선 전국에서 검술이 없어졌던 건 아니다. 조선세법이 명나라로 건너간 시기 역시 이때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며, 선조 31년(1598)에 명나라에게 '우리나라의 칼 쓰는 법(我國用劍技)'을 보여줬다는 기록도 있다.[14] 1594년에는 선조가 쌍검의 도입을 명하면서 선조 본인이 평양에서는 쌍검이 전습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15] 무엇보다 왜란 초기에도 도검으로 활약한 사례들이 꽤 있다. 조선에서 용맹으로 유명했던 황진[16]이나 이종인 등 여러 무관이나 군졸들에게서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있고, 심지어 문관 출신이던 권율이나 송상현 등도 검술을 익혔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있다.[17] 문제는 이런 일부를 제외하곤 검술에 있어 초보자 수준인 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투가 검술 하나로 이루어지진 않지만, 여기에 전투 경험과 훈련도 등에도 차이가 있는 상황이었으니 근접전에서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왜란 이후에는 다시 근접전을 가다듬었다. 실제로 무예도보통지에는 조선의 검술과 함께 중국, 일본의 검술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임란 이후 외국의 검술들을 들여, 우리나라의 무기, 편제, 상황에 맞게 상당 부분 재구성 및 재편한 것들이다. 이 시기에는 군영 환도의 크기 역시 전장 90cm 정도의 비교적 일정한 길이가 유지됐다.[18] 이후 도검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사라지는 구한말에는 그 길이가 축소, 의장화되었다.[19]

다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도검을 주무기로 삼은 병과들도 있긴 했다. 무예청[20] 무사들 중에는 보직에 따라 칼만 패용하던 경우가 있었고[21], 세자익위사 무사들 중 사어(司禦)들 또한 검을 지니고 호종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조선군 내에서도 정예인 편이었고, 호위가 주 업무였기에 좀 특별한 병과들이긴 하다.

3. 형태

파일:external/blog.gorekun.com/1207348566.jpg
부위별 명칭
파일:세종실록 오례 환도.jpg
파일:USJiL2A.jpg
세종 실록 오례의 환도 무예도보통지의 환도
각각 조선 초기 세종 실록과 조선 후기 무예도보통지의 환도 그림이다. 대략적인 모습은 위 두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환도는 관청에서 지급하는 군수품 성격도 강한 편인 만큼 실제로 저런 종류를 병사들에게 지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환도의 양식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저런 외날검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의 설명을 보면 당시의 환도는 칼머리에 두석 장식을 둘렀고, 칼자루에는 구멍을 뚫어 랜야드 역할을 하는 끈인 홍조수아(紅條穗兒)를 드리우고 있다. 칼집은 어피로 감싸고 운검은 주홍색으로, 환도는 검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검은 장식에 백은을, 환도는 황동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세종 당시의 군례에서 차용된 양식일 뿐, 환도의 양식 자체는 더 다양했다.

가령 수원화성 박물관에 소장된 대모보검의 경우, 일반적인 환도는 칼집과 자루의 몸체를 그냥 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어피나 삼베 등으로 감싸 옻칠하여 마감하는 방식이지만 대모보검은 통째로 바다거북 껍질을 이용해 제작해서 칼집 속 칼날이 비쳐보이며, 그 외에도 장식에 , , 과 같은 각종 귀중한 재료들이 들어간, 예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물론 의장용이긴 하겠으나 그 양식을 하나로 한정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다만 군영이나 관제가 아닌, 단순 호신용이나 민간에서 간소하게 만들어진 칼들은 패용 장식이 없는 경우가 있으며, 심지어 날밑(코등이)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다.

3.1. 길이

어떻게 보면 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환도를 설명할 때 규격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긴 어렵다. 다만 환도라는 단어는 당시에 사용하던 장검, 대도의 통칭으로 쓰일 때도 있었고, 크기에 따른 명칭 구분도 애매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선 도검의 표준이자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군용 환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선군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궁병의 비중이 높았는데, 이는 갑사 같은 직업 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1~2자루에 화살 20여 대에 갑옷과 환도까지 착용해야 하는 중무장이었으며, 이런 무장 상태로 300보를 달리는 것이 갑사 취재 과목 중 하나였다. 또한 무관이나 군관들 역시 활을 선호했다. 그런 만큼 조선에선 활을 다루는 데 방해되지 않으면서 휴대가 편하도록 짧고 가벼운 검을 선호했다.

다만 그렇다고 한손검 위주였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의 환도를 보면 한손검 말고도 날 길이 65cm에서 70cm 초반 정도에 자루 길이 10cm 후반 정도의 칼들도 꽤 출토됐다. 이는 양손검 기준으론 짧은 편이지만, 충분히 양손으로도 쓸 수 있는 규격이다. 비단 환도만이 아니라 한손검 이미지가 강한 삼국시대의 환두대도조차 전장 8, 90cm 전후에서 1m 정도 되는 장검들이 많이 발견되며, 처인성 출토 고려 도검 역시 날 길이가 약 70cm, 칼자루가 약 15cm에서 20cm 정도로 추정된다.영상[22] 전장 80~90cm에서 1m 전후의 한손반검은 조선은 물론 한반도에서 역사적으로 자주 사용되던 규격이었다.[23]

이는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1451년에 짧고 곧은 칼이 급할 때 쓰기 좋다는 이징옥의 의견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무반들을 모아서 환도의 규격을 논한 적이 있다. 이때 보병용 칼자루의 길이는 기병용보다 더 길게 잡았는데[24], 이는 도보 상태에선 양손 검술을 쓸 수 있도록 신경 쓴 것으로 보인다. 칼의 규격을 짧게 정하자는 논의임에도 이렇게 양손 검술이 가능하도록 칼자루 길이는 따로 신경 쓴 것을 보면[25], 당시 조선에서 양손 검술이 중요하게 인식됐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 익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술인 조선세법 역시 양손 검술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원래는 적당히 짧고 가볍긴 하되, 양손 검술도 구사할 수 있는 길이의 '외수쌍수 겸용 칼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한손반검 규격의 칼이 사용된 것은 위로는 장수, 군관, 기병 같은 정예 인력부터, 아래로는 일반 병졸들까지 궁병의 비중이 높았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궁병의 비중이 높은 만큼 반대로 전문적인 근접 병종이 적으니. 궁병들에게도 백병전의 부담이 비교적 컸을 가능성이 있다. 또 산악지대와 산성이 많던 한반도의 특성상 일종의 유격전, 난전 같은 환경이 발생하기 쉽다는 점 역시 근접전을 고려하게 만들며, 이는 보병이 아닌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26][27] 그런데 궁병은 백병전이 일어나면 오직 칼 한 자루에만 의지해야 하니 칼의 길이가 너무 짧으면 근접전에 상당히 취약해진다. 따라서 활 운용에 방해되지 않도록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되, 백병전도 어느 정도 고려하여 양손 검술도 구사할 수 있는 외수쌍수 겸용 칼을 많이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28]

즉 조선은 산성을 낀 전투 등 산지에서의 전투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궁병과 기병[29] 중심으로 발달하여 짧고 가벼운 칼을 선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양손 검술은 구사 가능한 정도의 길이는 유지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비슷했던 만큼, 한반도의 다른 시대의 도검 유물들도 조선 시대와 비슷한 규격의 칼들이 많이 출토되는 편이다.[30]

조선에서 사용된 한손검의 날 길이는 대략 50~60c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쌍검에 사용하는 칼의 날 길이가 52~53cm, 자루가 11~12cm 정돈데[31], 쌍검용 칼을 따로 만들지 않고 환도 중 가장 짧은 것을 택해 사용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래성 출토 유물 중 짧은 칼은 날 길이가 55cm 전후로 형성되어 있다.

한손검의 경우 오히려 창병이나 팽배수 같은 근접 병종이 더 선호했을 수도 있다. 일단 창병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대략 1m 후반에서 2m 중후반 사이의 창을 주로 사용했는데[32], 이는 단병접전에서 개인 무장으로 충분히 사용 가능한 길이였다. 따라서 창병은 검의 필요성이 궁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종 대에 함길도에서 실전을 바탕으로 진법이 정비된 적이 있는데, 이때 하나의 오(伍)[33]를 구성하는 병종 중 창병의 경우 칼을 차지 않아도 되었다.[34] 팽배수의 경우 애초에 방패병인 만큼 한손검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35]

다만 장수나 군관 같은 경우는 일반 병사들보다 한손반검의 비중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관은 여러 무기를 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대부분 익혔으며 활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백병전을 담당하는 칼 역시 활과 함께 대표적인 개인 무장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으며[36], 때로는 직접 칼을 뽑고 나서야 하기도 했다.[37] 실제로 장수나 군관 등에게 검술이 요구되거나 이들의 무예나 무기로 칼과 검술이 나름 중요한 위치로 언급되는 기록들도 의외로 꽤 존재한다.[38][39] 이처럼 전술적으로 칼이 꽤 중요했으며 무엇보다 검술을 따로 익힌다고까지 표현된 무관들이 한손반검을 제쳐두고 백병전에서 불리한 한손검을 선호했으리라 보긴 어렵다. 그리고 무관들을 모아서 진행한 1451년의 환도 규격 논의에서 양손 검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칼자루 길이를 신경 쓴 것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도 개인이나 시대상에 따른 차이는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40]

어쨌든 역사 항목에서 서술된 대로 오랜 태평성대나 조선 전기 특유의 전투 환경 등 여러 이유로 왜란 직전에 이르러 짧은 칼이 이전보다 많아진 것 자체는 사실로 추정된다. 이는 창검술 훈련의 약화와 더불어 조선군의 약점 중 하나로 작용했고, 왜란 이후에는 다시 일정 길이가 유지, 권장되었다.[41] 조선 후기 무예도보통지 예도에 규정된 환도 규격은 날 길이 약 69cm, 자루 약 21cm에 무게는 960g 정도다.[42]

정리하자면 전통적으로 기병과 궁병의 비율이 높았던 한반도 국가에선 차기 편하고, 활쏘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길이가 길지 않고 가벼운 칼이 선호되었으며, 이는 조선의 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렇다고 한손검이 주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한손검도 사용했지만, 외수쌍수 겸용이 가능한 칼[43] 역시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이런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며, 어느 시대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길이의 칼이 사용되었다는 점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날 길이 80cm 정도의 환도들도 존재했으며, 민간에서 호신용으로 쓰였던 창포검 같은 칼도 날 길이가 80cm 내외로 긴 경우가 꽤 있다.

3.2. 도신

도신의 전체적인 형태는 휨이 있는 외날검이다. 부분 열처리를 했기 때문에 칼날에 옅은 무늬가 존재했다. 곡률의 경우 다양했는데, 휨이 큰 칼도, 직도에 가까운 수준으로 곧게 뻗은 칼도 있었다.[44][45] 전반적으로 일본도와 비슷하지만, 일본도와 달리 칼끝에 요코테[46]라는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아 칼끝이 비교적 모호한 경우가 많다.[47]

파일:조선시대 도검 단면.png
단면의 경우, 그 형태에 따라 삼각도, 일면평조형도, 오각도, 육각도가 존재했다. 다만 삼각도는 내구도 문제로 인해 의장용이나 개인 호신용 등 일부에나 쓰였고,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환도는 육각도 내지는 오각도의 형태였다.[48] 일면평조형은 유물 자체가 아주 적으며, 그 장단점 등 정보 역시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도를 얻으면 칼등과 옆의 경사면(시노기)을 갈아내서 옆면이 평평하고 칼날 부분에만 각이 진 구조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49] 하지만 이런 서술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환도 유물을 보면 일본도의 시노기와 같이 명확히 각진 칼배를 지닌 오각도와 육각도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동래성 출토 환도의 단면 역시 오각형와 육각형이었으며, 심지어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도검 역시 각진 칼배를 지녔다.

그리고 성호사설에선 일본도는 약한 쇠가 왼쪽, 강한 쇠가 오른쪽에 있고, 칼날도 왼쪽을 비스듬하게 갈아낸, 일면평조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일본도는 쇠를 양옆으로 접합시킨 게 아니며, 일면평조형도 일본에 있긴 했지만[50] 주류 방식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냈다는 언급만 보면 배형도가 연상되지만, 이 역시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환도에선 배형도라고 부르는 형태는 확인되질 않는다. 성호사설의 기록 자체는 나름 흥미롭지만, 기본적으로 문인인 만큼 도검에 대한 전문성은 약간 떨어졌을 가능성도 감안하고 봐야 한다.[51] 혹은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무척 특수한 경우였을 것이다.

3.3. 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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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혈(流蘇穴)은 유소(술 장식)를 드리울 수 있도록 속이 비어 있는 금속제 파이프를 통해 고정한 것이다. 유소를 드리우는 만큼, 보통 손잡이의 중간이나 끝 부분 근처에 있었다.

목정혈(目釘穴)은 나무못을 통해 고정한 방식으로, 일본의 '메쿠기'와 유사한 방식이다. 일본은 습기가 많은 환경 때문에 손잡이를 분해해서 슴베를 꺼낼 수 있도록 '메쿠기' 라는 대나무 못을 1개 사용해 고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환도는 목정혈을 사용할 때 손잡이가 분해되지 않도록 황동 파이프(유소)를 병용하여 2개소에서 고정하는 등 복합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동시에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리벳 고정처럼 구리 같은 금속제 핀, 못을 통해 고정하기도 했다.[52] 특히 실전용이 확실한 동래성 출토 조선 전기 환도들을 보면 금속 못이 같이 출토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영빈이씨 패월도라고 알려진 장검은 같은 양식으로 2자루가 존재했는데, 각각 유소+나무못, 유소+금속못을 사용한 이중고정 방식을 차용했다.

그리고 위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서양 검과 비슷하게 슴베를 손잡이 뒤쪽 끝까지 길게 뺀 뒤 두드려 마감하여 칼날이 손잡이에서 빠져버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도 있다.

이처럼 환도의 고정 방식은 다양했는데, 메쿠기를 사용해 쉽게 분해 가능한 일본도와 달리 한번 고정하면 쉽게 분해할 수 없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상품으로 팔려 주인 취향에 따라 맞춤 재조립되는 일본도와 관제 군수품으로서 성격이 강한 환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문화 특성에 따른 것으로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환도는 어지간하면 전투 중 칼자루에서 칼날이 빠질 리는 없으니 실용성 측면에선 장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이는 환도의 특징이라기보단 메쿠기를 주로 사용하는 일본이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서양 등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과 비슷하게 분해가 되지 않도록 고정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3.4. 날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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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밑은 칼날과 칼자루 사이에 끼우는 테 부위를 말한다. 날밑에 화려한 장식을 적용한 것들 역시 발견되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닌 만큼 군용 환도 등에선 단순하면서도 튼튼한 구조의 실용적인 형태가 많았다.

물론 장식성이 강한 형태도 있었다. 위의 사진처럼 문양을 새긴 정도부터 상감을 했거나 꽃의 형태를 한 경우도 있는 등 꽤 다양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주칠완자문환도의 날밑은 곡률이 있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간혹 재료로 옥을 사용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물론 이는 의장용이었을 것이며 대개 어도(왕의 검)나 운검 같은 종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날밑을 흔히 '코등이'라고도 자주 부른다.[53] 또 '방패'나 '심'이라고도 하며[54] 현대에는 잘 쓰이지 않는 옛말에는 '양마', '양마쇠'라는 이름도 있었다.

3.5. 잠금장치

환도의 특징적인 양식 중 하나로 잠금장치를 뽑을 수 있다. 일반적인 타 문화권의 도검들과 달리 환도는 잠금장치가 따로 있었으며 격렬한 활동을 해도 칼이 알아서 튀어나올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작에 추가적인 공정과 비용이 필요해지며, 당연히 파손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 최소한의 잠금 역할을 할 수 있는 동호인[55]이 환도에 없는 것도 아닌 만큼, 사실 환도 역시 잠금장치가 없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잠금장치도 그냥 환도의 여러 양식 중 하나였다고 보면 된다.

3.6. 칼자루

칼자루에는 가오리나 상어 가죽 같은 어피를 싸기도 했으며, 가죽끈 같은 끈을 감기도 했고, 그냥 칼자루에 옻칠 정도로 마무리하기도 했다.[56] 끈을 감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무예도보통지>에서는 한쪽 방향으로 엇갈려 감기가 나오며, <융원필비>에서는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일본식 끈감기와 유사한 방법이 나오고, 실제 유물 중에서도 일본식 끈감기가 적용된 게 종종 발견된다.[57]

일반 호신용 환도는 그냥 나무에 옻칠 정도로 마무리할 때도 많았으며 가죽끈 같은 것을 감는 경우에는 심플하게 일자로 감아 마무리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고 한다.[58] 물론 이런 식으로 끈을 감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이고 오래된 방식이다. 삼국시대의 의장용 환두대도 유물은 아예 금실, 은실을 칭칭 감은 경우도 볼 수 있다.

술의 경우 있는 경우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그 특성상 화려한 술이 달린 건 아무래도 의장용, 예장용의 측면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칼자루의 길이는 1451년 문종 대에 환도의 길이를 정하는 논의 중 마병은 한 뼘 세 손가락, 보병은 두 뼘이 제시된 적이 있다. 무예도보통지 제작 시점에선 자루 길이 1척, 약 21cm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유물들을 보면 아예 10cm 전후의 한손검 칼자루도 있고, 10cm 중후반에서 20cm 전후의 한손반검 정도 규격도 있는 등 다양했다. 간혹 칼이 -큰 경우 일본도처럼 20cm 중반대 정도 되는 유물들도 있다.

검도의 파지법에 익숙하다면 20cm 전후의 칼자루가 꽤 짧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평범하게 양손을 붙여 잡아 휘두르면 된다.[59]

4. 휴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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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의 패용 방식은 크게 띠돈 패용과 뒤꽂이, 어깨에 둘러메기, 마지막으로 고리매기 방식 등이 있었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칼자루가 등 뒤를 향하게 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방식은 기병을 중심으로 운용했던 국가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칼자루가 앞을 향하게 패용하면 을 타고 빠르게 달릴 때 뒤의 칼집이 말을 때려 움직임을 방해하여 고안된 방식이라고 한다. 거기에 활을 쏠 때도 칼자루가 방해하지 않아 더 편하다는 이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패용은 몽골과 명나라, 청나라[60][61], 총을 쓰는 근대 시기 유럽과 일본 군도 패용법 등에서도 나타나는 꽤 보편적인 패검 방식이지만 미디어 매체에서의 묘사가 적다 보니 비교적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칼자루가 뒤를 향하는 방식은 칼자루 방향을 돌리기 쉬운 띠돈을 사용한 패용에서 주로 나타나는 방식인데, 한국에서 띠돈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원간섭기 때는 몽골 역시 칼자루를 앞으로 향하게 차는 것이 주류였으며 몽고습래회사의 고려군으로 추정되는 병사들 역시 칼자루가 앞을 향하게 차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이나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조선 초기 환도 회화에서도 칼집 고리만 있을 뿐 띠돈이 묘사되지 않으며, 16~17세기 왕릉들의 무인석에도 칼집을 고리매기로 찬 모습들이 조각되어 있다.[62] 이를 고려하면 조선 중기까지는 고리매기 방식으로 칼자루가 앞을 향하게 차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띠돈이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환도는 류성룡의 환도다. 이를 감안하면, 조선 중기 무렵부터 명나라 혹은 여진족 등의 영향을 받아 띠돈과 칼자루가 뒤를 향하게 차는 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띠돈이 정착된 조선 후기에는 칼자루가 뒤를 향하게 차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회화에선 칼자루가 뒤를 향하도록 차고 있는 모습이 주로 그려져 있다. 전통무예연구가 최형국[63] 박사는 칼자루를 뒤로 가게 하는 편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더 편하기 때문에[64] 일상에서도 칼자루가 뒤를 향하게 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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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의 형정도첩 中 구한말 프랑스인 장 앙리 쥐베르의 그림
물론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띠돈 도입 이후에도 무조건 칼자루를 뒤로 가게 찼던 것은 아니다. 조선 중기 이후 칼자루를 뒤로 향해두는 게 가장 일반적이긴 했지만, 딱히 규정은 없었으며 그냥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패용 방법일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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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환도의 패용 방법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띠돈 매기 방식이다. 띠돈 패용은 칼자루 방향을 돌리기 용이했으며, 이로 인해 칼자루가 뒤를 향하게 차는 방식에서 주로 채용되었다. 따라서 칼자루를 등 뒤로 돌려 두면 편한 기병과 궁병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식으로 보인다. 물론 이와 상관없이 평소에도 띠돈을 통해 패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띠돈 자체는 중국이나 몽골, 여진족 등에도 있었지만 조선의 띠돈은 이들과 그 구조가 약간 다르다. 자세한 것은 띠돈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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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뽑을 때는 복잡할 거 없이 그냥 왼손으로 칼자루가 겨드랑이 사이를 거쳐 앞을 향하게 회전시키고 오른손으로 뽑으면 된다. 위의 gif 파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띠돈은 쉽게 칼자루의 방향을 돌릴 수 있고, 뭣하면 그냥 그대로 엉덩이 근처에서 뽑는 것도 가능은 하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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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 中 홍경래진도 中
두 번째 방법으로 조선 후기에 포수, 창수 등 활을 사용하지 않는 보병들이 자주 사용한 방식인 뒤꽂이가 있다. 따로 띠돈을 사용하지 않고 허리띠에 끼워 넣어 차는 방법이다. 칼집 중간의 끈목 안쪽으로 전대를 통과시켜 찬 것으로 추정된다. 칼은 옆구리와 등 사이 언저리의 허리춤에 위치했다. 1점 고정 방식[66]이라 격렬하게 움직이면 칼집이 요동친다는 단점이 있었던 띠돈 패용과 달리[67], 뒤꽂이는 칼이 몸에 비교적 타이트하게 고정되어 몸을 움직일 때 흔들림이 적었다. 다만 말을 타거나 활을 쓸 때는 오히려 불편했다.[68] 따라서 조총병처럼 활을 사용하지 않는 보병들 사이에서 뒤꽂이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총이나 창을 쓸 때의 편의성을 고려해 칼자루가 뒤를 향하도록 차는 게 자리 잡은 듯하다.

뒤꽂이 방식으로 칼을 찼을 때의 발도 역시 단순하게 칼집을 잡고 칼자루를 앞으로 당겨서 칼을 뽑으면 된다. 신체에 비교적 타이트하게 패용되어 있다곤 하지만 손으로 잡으면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 영상의 1분 19초부터 뒤꽂이 스타일의 발도를 볼 수 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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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칼을 등 뒤에 둘러메서 차는 둘러메기 방식도 있었는데, 이는 일부 의장에서만 사용된 방식이다. 주로 행사 등에서 왕 곁에 서서 호위하는 별운검의 그림에서 나타난다. 여기에 사용하는 환도, 혹은 운검의 경우 등에 둘러메기 좋게 칼집 고리의 간격이 일반적인 환도보다 넓었는데, 아예 고리가 3개 달려있던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만 조선 전기 기록에서 나타나는 운검은 평범한 환도와 사실상 다를 바 없는 형태였음을 고려하면, 운검이 사용하는 칼과 그 패용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 환도는 아니지만, 똑같은 고리매기 방식으로 패용하고 있다.[70]
마지막으로 고리매기가 있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띠돈 대신 칼집에 달린 2개의 고리를 가죽끈 등으로 허리띠에 연결해 패용하는 2점 고정 방식이다. 환두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상술했듯 조선 초~중기 무렵까진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띠돈이 주류로 자리 잡은 조선 후기에도 고리매기로 패용한 경우가 없진 않았다.[71] 또 고리매기는 2점 고정인 만큼 칼자루가 뒤를 향하게 차면 발도가 어렵기 때문에 평범하게 칼자루가 앞을 향하도록 찼을 것이다.[72]

그리고 칼집에 고리 장식을 하나만 달아서 패용하는 1점 고정 방식의 고리매기도 있었다. 이 방법 역시 보편적이고, 오래된 방법이긴 하나, 움직임에 따른 흔들림이나 불편함이 비교적 클 수밖에 없다. 장도의 패용 방법도 이런 방식임을 감안하면, 짧고 가벼운 칼 정도에나 일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예 패용 장식이 없을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손에 들고 다니거나, 대충 허리띠에 꽂거나, 봇짐 등에 넣고 다니는 등 자기 나름대로 여러 방식을 사용해 운반했을 것이다. 물론 패용 장식이 없는 것은 대체로 민수용 환도일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구한말 조선 군인들의 사진을 보면 겨드랑이에 닿을 정도로 높이에서 칼을 차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이는 19세기 조선에서 허리띠를 가슴선까지 올려서 매는 것이 유행하며 자연스레 칼의 높이도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상태에선 칼을 뽑고 다루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이러한 높은 패용 위치는 무기로서의 칼의 실용성이 사라져 가는 구한말의 환경에서 탄생한 일종의 의장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칼이 의장화 되면서 길이가 짧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물론 구한말이라고 꼭 높은 위치에서 칼을 찼던 것은 아니다. 무기로서의 사용을 고려했을 때는 이전처럼 허리 근처에서 칼을 찼던 것으로 보인다. 병인양요에 동행했던 장 앙리 쥐베르의 그림에서 묘사된 조선 군인들을 보면 허리띠의 위치가 비교적 낮으며 허리 근처에서 칼을 차고 있다. 본 항목의 상단에서도 쥐베르의 그림 중 한 장을 확인할 수 있다.[73]

5. 제작법

이은철 도검장[74] 신인영 장인[75]
홍석현 도검장[76] 김봉경 도검장
도명도검 이상선 도검장

조선에서는 철광석과 사철 둘 다 재료로 사용했다. 재료가 되는 철강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먼저 용광로에 철과 숯을 함께 넣어 가열해 철의 산소를 환원시키고[77] 탄소 함량이 낮은 괴련철을 얻는다.[78] 이후 정련 과정을 거쳐 불순물을 걸러내고 철을 가열해 접쇠와 단조 작업을 한다. 이때 목탄으로 태운 가열로를 사용하는데 이때 탄소 성분이 철에 침투되어 침탄이 이루어진다.[79] 또 단조를 반복하면서 불순물 제거와 동시에 탄소가 빠져나가는 탈탄도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철을 숯으로 가열하고 단조하는 과정을 철을 접으며 반복함으로써 불순물을 덜어내고, 침탄을 통해 적절한 탄소량을 가진 강철을 얻어낸다.[80] 이런 종류의 방법을 흔히 직접제련법, 혹은 저온고체환원법이라고 하는데 딱히 한국만이 아니라 고중세 강철 제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었다.[81]

이렇게 만들어낸 강재[82]]를 망치로 두드려 펴는 단조 작업을 통해서 칼의 형태를 잡은 뒤, 까끌질과 거친 숫돌질로 칼날의 기본 형태를 잡은 후 다시 숫돌로 갈아 날을 세웠다. 물론 담금질도 했는데, 흔히 부분 열처리나 차등 열처리로 불리는 것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83]

19세기 후반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기술을 이어온 안성대장간의 5대째 장인이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60호 야장 보유자인 신인영 장인도 접쇠를 활용하여 장검을 만든다.[84] 그 과정을 보면 탄소 농도가 비교적 높은 철과 낮은 철을 겹쳐주면서 접쇠를 하는 과정을 반복해 필요한 강도의 철을 완성한다.[85] 그리고 이를 장검의 형태로 단조 후 황토물에 칼날 부분을 중심으로 담금질을 하여 칼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국가무형문화재 한상봉 낙죽장도 장인 역시 접쇠를 반복하여 칼을 만들어낸다. 낙죽장도, 죽장도는 일반 장도처럼 작은 단검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꽤 긴 규격의 칼을 만들기도 했다.[86]

칼의 열처리 방법 자체도 다양한 방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장인들의 도검 제작 영상 등을 보면 이은철 장인은 칼날을 제외한 부분에 여러 재료를 섞은 진흙을 발라 담금질을 하고, 신인영 장인은 황토물에 칼날 부분을 담그며, 한상봉 장인은 물에 날 부분만 빠르게 여러 번 담갔다 건져내기를 반복 후 칼 전체를 담근다.[87] 장검을 만들진 않지만 국가무형문화재인 광양 장도장도 특이한 담금질 방법을 보여준다.[88]

일부 환도에 쓰이는 철은 뽕쇠(고탄소강) 판을 ㄷ자형으로 구부러진 시우쇠(저탄소강)로 감싸 서로를 맞물려서 단접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이 방법은 환도가 아니라 조선시대 호신용 소형칼인 장도 만드는 법 중 하나인데, '조선의 무기와 갑옷'의 저자 민승기 씨가 저서에서 환도 제작에 비슷한 방법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개인 견해를 밝혔다. 이는 뽕쇠를 시우쇠로 완전히 감싸는 것이 아니라 칼날 부분만을 남겨놓고 감싸서 뽕쇠의 칼날이 1/3정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칼집은 2개의 나뭇조각에 각각 칼날 모양을 파고, 이 두 조각을 찹쌀풀을 이용하여 붙여 만든다. 그리고 아교 등 풀을 발라 어피나 저피로 감싸거나, 갈대줄기를 감거나, 한지, 삼베 등을 싸고 흑칠이나 주칠 등 옻칠로 마무리를 했다. 군용이나 관제 유물들에게선 이러한 양식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저피+옻칠, 갈대줄기+어피+흑칠, 한지+어피+주칠 등 조합이 다양했다. 이로 인해 어피 등으로 감싸도 외부에선 그 내구제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89] 이러한 복합 구조로 인해 일정 수준의 내구성이 확보되는 만큼 조선의 칼집은 나무의 두께를 비교적 얇게 만들 수 있어 상대적으로 가벼웠다고 한다. 물론 간소하게 만들 경우 그냥 나무에 옻칠 정도로 마감한 경우도 있었다.

칼자루는 칼집과 동일한 목재로 만들고 옻칠을 했으며, 사어피(沙魚皮, 상어가죽 혹은 가오리가죽)로 감싸거나 가죽끈으로 감기도 했다. 또 칼자루에 홍조수아를 드리우기도 하는데 홍조수아는 붉은색의 유소(流蘇), 술을 길게 드리워 칼을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장식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칼을 놓치지 않도록 끈을 손목에 묶고 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에 군인들이 환도를 패용하고 있는 그림들을 보면 칼자루에 술을 달고 있는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의장용 환도에 화려한 술이 달린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의장용에서 더 인기 있던 양식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시대나 상황에 따라 그 유행이 달랐을 수도 있다.

6. 각종 오해

6.1. 접쇠

많은 사람들이 환도는 철을 꺾어 접는 접쇠를 하지 않고 오직 단조만 하여 철의 모양을 잡아 칼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들은 애초에 강철을 만들 때 접쇠 공정을 거쳤다. 물론 도검 제련에선 뛰어난 품질의 단일 강재를 가지고 단조를 통해 모양만 잡아 통열처리를 하는 방법이 좋긴 하다. 지금의 현대 강재를 사용한 도검 제작도 이런 방식이 주로 이루어진다.[90]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얼마든지 고품질 강재를 만들 수 있는 현대의 이야기며 과거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제련 과정에서 단조와 함께 많든 적든 접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탄소량을 조절하고 철광석이나 사철 등의 불순물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접쇠는 딱히 일본만의 특별한 기술도, 일본이라서 쓰는 안 좋은 기술도 아니고 전근대의 제철 환경에서 보편적인 철 제련 방식 중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고중세의 철제 유물들을 보면 접쇠가 사용된 철제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고, 한국 고중세의 제철을 연구한 논문 등지에서도 칼이나 강재를 복원할 때 대부분 접쇠 과정을 거친다. 조선 후기, 구한말부터 이어온 대장간의 장인인 신인영 야장도 접쇠 과정을 사용한다. 참고로 연철과 강철을 접합한다는 개념 역시 고대부터 있던 것이다.

그리고 간혹 일본에선 도검 제작에 불순물이 많은 사철을 썼기 때문에 접쇠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불순물도 많고 칼 내부에 빈 공간인 기공[91]이 생기기도 해서 일본도의 내구성이 낮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접쇠는 전근대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후술하겠지만 사철은 불순물이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는 없었으며 여러 나라가 사용한 재료였다.

일본도 중에서 평균 질이 낮다고 평가받은 것은 에도 시대 이후에 생산된 일본도인 '신도(新刀)'를 말하는데 이는 이유가 있다. 원래는 일본에서도 전국 시대까지는 저온에서 괴련철을 생산하여 침탄시키는 보편적인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92] 그러나 에도 시대부터 과거와 달리 크기가 큰 고온의 화로를 사용하여 철을 대량 생산했는데, 이로 인해 괴련철을 생산하는 방법(케라오로시)을 사용해도 탄소 함량이 상당히 높은 철들이 생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 철들이 전문적으로 생산되어 도공들에게 공급되었다. 따라서 높은 탄소 함유량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공정이 도입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접쇠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허나 그 높은 탄소량을 많은 접쇠로 잡는다는 게 쉽지 않은 데다가, 전쟁이 없어져 실용 무기의 측면보다 예술품으로서의 측면이 강해지면서 일본도의 질적인 저하가 일어났다. 물론 신도 중에도 좋은 칼들이 제법 있었지만, 평균 성능이 떨어진 것이다.

6.2. 사철

환도의 제작에는 철광석과 함께 토철, 사철 역시 재료로 사용했다. 흔히 사철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사철로 만든 칼은 내구도가 약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편견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고중세의 제철은 장인의 실력 등을 비롯해 변수들이 많았고 기술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다.[93] 단순히 사철을 사용했다는 것 하나로 칼 하나의 내구도가 정해질 정도로 전통 제철에서 결정적인 차이로 작용하리라 보긴 힘들며, 사철로 만든 검이 명검이 될 수도, 철광석으로 만든 검이 잡검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한반도 남부의 제철에는 토철, 사철 역시 많이 사용됐는데, 그럼에도 전근대 한국에선 이 남부의 철들이 질 좋은 철로 여겨졌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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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조선에서도 사철을 제련에 사용했다는 이은철 장인의 조사 기록이다.[95] 이은철 장인 말대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사철 광산이 전체 철광산 36개소 중 21개소로 오히려 과반보다 많았고[96][97], 사철 채집에 수군까지 동원되었으며 각 기록에서 꾸준히 사철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 현대에도 사철을 이용한 전통 사철제련법을 통해 도검제작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통도검제작소의 홍석현 환도장도 사철을 이용해 환도를 복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98] 또한 조선 시대의 제련을 유물을 통해 구현한 여러 연구 논문들에서도 사철을 사용한 경우를 꽤 찾아볼 수 있다.

6.3. 칼날 무늬(하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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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환도에는 일본도와 달리 하몬(はもん/刃文)이 없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환도에도 하몬과 같은 칼날 무늬가 존재한다. 이러한 칼날 무늬는 칼을 담금질할 때 부분 열처리 방식을 사용하면 나타나는 것인데, 환도 역시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과 달리 이러한 칼날 무늬를 미적 요소로 중시하진 않았다. 따라서 일본처럼 하몬의 모양을 특정 형태로 연출하거나 하몬을 강조하는 연마를 따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본도의 것과 비교하면 무늬가 비교적 불규칙적이고 선명도가 떨어져 약간 희미하다.[99] 칼날의 무늬를 딱히 특별한 요소로 중시한 것은 아닌 만큼, 명칭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100] 다만 현존 환도 유물들은 녹이 슬었다던가, 손상이 있다던가 등 보관 상태의 영향으로 무늬가 선명하게 보이는 경우는 그렇게까지 흔하진 않다.[101]

한국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도검에 부분 열처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칼날 무늬가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삼국시대에 사용하던 환두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4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를 보면 펄라이트, 칼날 부위의 마르텐사이트 등 부분 열처리의 흔적이 발견된다.[102] 그만큼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단 칼뿐만 아니라 창이나 도끼 같은 다른 철제 무기에도 사용된 방식이기도 했다.

참고로 한국을 비롯한 일반적인 국가들은 열처리로 인해 생기는 칼날 무늬의 디자인을 따로 신경 쓰지 않았던 만큼, 그 형태가 불규칙적이며 너비도 제각각이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스구하(直刃)처럼 칼날을 따라 직선을 그리는 심플한 형태의 무늬가 일반적이었다.[103] 칼날을 따라 직선으로 열처리를 하면 나타나는 기본적인 형태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스구하를 하몬 중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형태로 취급하며, '상고도(上古刀)'에서도 스구하가 나타난다. 위에 예시로 쓰인 환도의 칼날 무늬 역시 불규칙한 굴곡이 있긴 하나 전반적으로 칼날을 따라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4. 한손검?

환도는 짧고 가벼운 한손검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하지만 실제로 환도는 다양한 길이가 존재했다. 심지어 환도의 길이가 비교적 짧아졌다고 추정되는 조선 중기의 유물 중에도 두 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규격을 꽤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양손검 기준으로 봤을 때 평균적인 환도는 꽤 짧고 가벼운 편이고 한손검 규격의 환도도 분명 있지만, 환도가 한손검이라는 것은 어폐가 있다.

당장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검술들의 경우 왼손으로 방패를 들어야 하는 등패와 양손에 각각 칼을 쥐는 쌍검을 제외하면 모든 검술들이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쥐는 양손검술이며 환도의 권장된 규격 역시 양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규격이다.[104]

6.5. 전근대 한국에서 칼의 입지

엄밀히 말하면 이는 환도 자체에 대한 오해는 아니지만, 환도가 짧은 한손검이었다는 오해와 묶여서 언급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설명하고자 한다. 흔히 조선은 활은 중시했지만 칼이나 검술은 천시했다거나, 무예를 천시했기 때문에 칼이나 검술은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식의 편견이 꽤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조선을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이 활을 가장 중시했고 본인들의 장기로 여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딱히 칼이나 검술을 천시한 것은 아니다. 여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칼은 창, 활과 함께 중요한 무기였다. 오히려 칼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성이나 호신용, 보조 무기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고려하면 한국에서 칼은 활 다음으로, 경우에 따라선 종종 활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나름 강조된 무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단 군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한국은 궁병의 비중이 컸는데, 이들도 필요하다면 근접전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활쏘기와 함께 근접전을 대비해 칼을 차고 칼쓰기 역시 익히는 게 기본이었다. 궁병에게 있어서 활과 칼은 상호보완적인 무기다. 주 무장인 활의 숙달과 훈련을 더 우선시하긴 했겠지만, 딱히 검술을 천시한 건 아니고 검술도 근접전을 위해 당연히 익혔다. 물론 전장에서 칼이 주 무장은 아니었지만[105], 이는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일본조차 오오타치 같은 일부 대형 도검을 제외하곤 칼은 보조 무장이었으며 주 무장은 보통 창이나 폴암 종류, 혹은 활이었다. 칼은 어느 나라든 전장에선 높은 범용성과 휴대성, 편의성을 기반으로 한 보조 무장 내지는 근접전 대비 무기였다.[106] 한국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뿐이다.

무과에 검술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검술을 등한시해서 무과에 검술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검술의 중요성이 상기된 왜란 이후에도 무과에 검술이 채택되진 않았기 때문이다.[107] 추측하자면, 무과에 검술이 없던 이유는 검술이 ‘시험’ 종목으로 삼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직관적으로 쉽게 측정 가능한 활쏘기와 달리 검술은 대련이나 투로 같은 연무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목검을 통한 대련은 부상, 심지어 사망의 가능성이 있고[108], 평가에 주관 등이 개입될 여지도 더 크다. 애초에 그 많은 응시자[109]들을 대련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다.[110] 투로 역시 평가에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적지 않다. 게다가 꼭 검술이 아니어도 궁술을 통해 응시자의 완력을 시험할 수 있으며 마상 궁술이나 마상 창술 등 고난이도 동작으로 응시자의 무예 실력과 훈련 정도를 가늠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무과에 검술이 없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점이 아니다. 비슷하게 도보 창술 역시 무과에는 없었다.

사실 무과가 처음 만들어진 당나라의 무과도 궁술 위주였으니, 관성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칼과 관련된 시험이 아예 없다고 말하긴 어려운데, 무과에는 격구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세종이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격구 자체가 기마 검술을 포함한 기마 무술 전반에 필요한 능력을 스포츠로 훈련하는 체계였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무과에 없는 도보 검술이나 창술 등도 평소에 따로 훈련했으며 시험을 보기도 했다.[111]

다만 검술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던 시기가 있던 것 자체는 사실인데 조선 중기에는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에서 창검술 훈련도 관련 문제가 크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 역시 일부러 검술을 등한시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00년을 넘는 오랜 태평성대나 조선 전기의 전투 환경 등을 이유로 군사의 훈련도와 백병전 비중이 줄면서 자연스레 검술 역시 약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검술뿐만 아니라 창술 등 무예 전반의 상황이 좋지 못했으며, 심지어 활을 제대로 다루는 궁수들 역시 이전보다 부족하다는 얘기도 있었다.[112] 즉, 검과 검술을 의도적으로 천시했다기보단, 전반적인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는 와중에 활은 어느 정도 유지된 것에 가깝다.[113] 물론 이는 특별한 상황이며, 이때도 FM으로 창검술을 익힐 사람은 익혔다.

다만 일반 병사들의 평균적인 단병접전 능력을 따지면 조선 병사들이 타국보다 상대적으로 약간 떨어질 여지가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조선은 궁병의 비중이 높았는데, 궁병이 창검술 훈련에 투자하는 시간은 전문 근접 병종보단 상대적으로 적었을 테니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114] 실제로 조선 초기에 단병접전을 선호한 왜구들의 창검술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경계한 기록이 있다.

물론 이것과 검술을 천시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 조선보다 궁병이 적은 나라들이 활쏘기를 천시한 것은 아니며, 유목민 국가들보다 기병의 숫자가 적은 나라들이 기마술을 천시한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 병졸들의 평균을 비교한 것이다. 당연히 병사들의 수준이 높아질수록[115] 훈련 시간이나 경험 등이 늘어나는 만큼 별 차이가 없었거나, 적어도 일본군이 상대라도 칼을 뽑고 선봉에서 싸우기에는 충분한 수준은 되었다.[116][117]

그리고 전투에는 여러 변수와 수단이 있었으며, 사실 전쟁에서 일반 병졸들에게 요구하는 무예의 수준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진 않았다. 따라서 왜란 직전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또 그렇게 차이가 크진 않았다. 실제로 고려 시대의 기록을 보면 왜구를 상대로 고려 측이 칼을 들고 백병전을 건 경우도 꽤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왜인들이 칼을 잘 다루긴 하지만 우리도 칼을 들면 대적할 수 있는데, 겁을 먹고 와해되어 큰 피해를 봤다는 얘기도 나온다. 요컨대 평균 단병접전 역량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긴 했어도, 필요하다면 칼로 맞대응하거나 상황에 따라 백병전을 수행할 정도는 됐다는 것이다.[118] 단순 창검술 말고도 전술과 환경, 전투 경험 및 전반적인 훈련도, 사기의 영향 등도 컸다고 볼 수 있다.[119][120]

또 칼이나 검술의 입지가 그렇게 낮지 않았단 것을 알 수 있는 기록들 역시 상당히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일단 9세기에 신라 최치원이 지은 ‘양위표’라는 글에는 아예 신라의 풍속이 허리에 칼을 차는 것을 숭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나라 시인 이섭(李涉)이 지은 “여제발신라검가(與弟渤新羅劍歌)“라는 시가 있다. 이섭이 동생 이발(李渤)에게 신라에서 얻은 칼을 선물로 주며 쓴 시인데,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얻은 신라의 칼을 신검(神劍)이라고 묘사하며, ”칼을 잘 아는 사람은 동해에서 온 것인 줄 아는데“라는 구절도 있다. 즉, 당나라에서도 칼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신라 칼이 높이 평가받고 유명했다는 것이다. 이섭의 시가 신라 내부에서의 칼의 입지를 묘사한 것은 아니나, 당나라에서도 신라의 칼이 높이 평가받을 정도라면 본국인 신라에서도 칼의 입지가 낮지 않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신라 최고의 영웅인 김유신 역시 신검(神劍) 설화나 검술을 수련해 국선(혹은 화랑)이 되었다는 등 검과 관련된 기록이 많으며, 연개소문도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5자루의 칼을 찼다는 기록이 있다. 또 권력자의 부장품으로도 칼이 선호되는 등 칼이 군사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무기로 취급됐음을 알 수 있다.[121]

고려 시대 같은 경우는 기록이 비교적 적긴 하다. 다만 이때도 칼의 입지가 낮진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들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요전쟁 이후 현종양규를 치하할 때 그의 용맹을 칼과 활에 빗대며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6균의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으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3세기 중반 고려 김준 열전에선 유종식이라는 인물이 별장 김인문의 집에 찾아가 벽에 걸려 있는 활과 칼을 보고는 대장부의 물건이라고 말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122] 물론 장수들이 칼을 통해 전공을 세웠다거나, 칼을 선물했다는 등의 기록들은 꽤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조선에서도 이러한 기록들을 상당히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세조가 문관인 한명회 등에게 환도를 하사하면서 “칼은 남아의 보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18세기 인물인 윤기의 무명자집을 보면 스스로를 두고 “활시위 하나도 잡아당기지 못할 만큼 힘이 약하고 큰 검에는 마음을 둔 적이 없으니, 천품이 졸렬하다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윤기는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활과 칼을 무엇도 다루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여긴 것이다.[123] 조선 시대의 기록을 보면 이런 식으로 칼과 활이 묶여서 중요한 것처럼 언급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외에도 당시 지어진 시를 보면 본인의 칼을 어루만진다거나, 칼을 간다는 등 본인이 소지한 칼을 언급하는 시구들도 자주 볼 수 있다.[124]

많은 나라가 그렇듯 한국에서도 칼은 권위나 힘, 벽사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기도 했으며, 장수나 대장부의 기개, 위엄 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한국의 기저 신앙이자 토착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속에서도 칼은 가장 중시되는 무구(巫具)이며 신들의 권위와 신성성을 신칼, 신장칼, 장군칼, 칠성칼 등 각종 칼로 표현된다. 실제로 장군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그린 무속의 탱화를 보면 신들이 칼을 소지하거나, 허리에 활, 화살을 차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각종 민담 등에서도 칼은 생각보다 꽤 자주 나오는 요소기도 했다.[125]

간혹 한국은 명궁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검술 관련 기록은 적으니 검술의 입지가 낮았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해석에 가깝다. 물론 이런 기록들이 활을 중시했음을 알려주는 건 맞지만, 이것과 검술을 천시 혹은 등한시했냐는 별개의 문제다.

당연하지만 활쏘기와 관련된 기록만 있다고 그 장수들이 진짜 활만 쓸 줄 알았던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순 있으나, 기본적으로 무장들은 궁술과 창검술을 다 익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개인의 검술 실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칼로 뛰어난 전공을 세운 사례가 기록된 경우는 의외로 상당히 많다.[126] 무예와 관련된 기록은 아예 활쏘기밖에 없는 인물이 칼을 사용해 뛰어난 전공을 세운 사례들도 꽤 있다.[127] 아무래도 궁술의 중요성이 컸던 만큼 어느 인물의 무예 실력에 대해 논할 때도 궁술이 대표 격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128]

이는 여담에 가깝지만 사실 한국사에서 누구의 무예가 어느 정도였는가, 어떤 무기를 잘 다뤘는가를 판가름하는 것 자체가 원래 어렵기도 하다. 활쏘기 이전에 개인의 무예 관련 기록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129] 이런 부분에 관해선 그냥 무장이면 전반적인 무예가 일정 수준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되[130], 무예와 관련된 기록[131]이 있다면 확실히 무예가 뛰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식으로 가볍게 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를 정리하자면 조선을 비롯한 한반도 국가에서 칼은 그렇게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활을 더 중시했고, 본인들의 장기로 여긴 것은 사실이긴 하나, 오히려 그런 만큼 보조 무장인 칼 역시 군사적으로 꽤 중요한 위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한국은 칼을 천시했다, 등한시했다는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혹자는 조선에서의 무예 수련=역적으로 봤으며, 민간 등의 검술 훈련을 제재했기 때문에 칼의 길이가 짧았고 검술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등의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조선은 유교를 중시해 무를 천시했다는 등의 막연한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에 가깝다.

당장 조선 후기의 예도는 고후점, 고만흥 부자를 통해 전승되다가 군영에 보급되었고, 김체건 역시 사적으로 아들 김광택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이들은 군영 관련 인물들이긴 했지만[132], 적어도 부자간의 사적인 무술 전승이 자유롭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은 민간의 도검 소지를 금지하지 않았고, 민간에서의 환도 소지나 환도를 사용한 범죄에 대한 기록 역시 의외로 많다[133]. 조선이 도적 한 명 없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민간에서의 호신용 도검 소지와 검술을 제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조선 시대에 대중적으로 성행한 활쏘기만 해도 엄연히 무(武)로 취급되었고[134], 아예 사람도 죽어 나가는 석전도 했는데 검술만 제재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리고 문관이면서 칼이나 검술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 사람들 역시 꽤 찾아볼 수 있다.[135] 심지어 세종 24년 실록에는 바닷가 지역 고을에 사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대오를 지어 창, 칼, 활 등의 무기를 훈련 시키고, 농사를 짓기 위해 오갈 때 그 무기를 가지고 다니도록 하여 만일의 일을 방비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양란 같은 전쟁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왜란 때는 확실히 창검술 등의 미비함이 약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여러 번 설명됐듯이 당시 조선의 환경에서 비롯된 결과지, 의도적인 무예 천시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병자호란 역시 왜란과 이괄의 난의 여파, 당시 지도부의 역량 등이 문제시되는 경우는 있어도[136], 단순히 무예를 전쟁 패배의 이유로 꼽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느 쪽이든 의도적으로 무예를 천시해서 생긴 일이라고 보긴 무리가 있다.

또 무관보다 문관의 지위가 높던 게 사실이긴 하지만, 동시에 조선은 고려 시대에는 없던 무과를 도입한 나라기도 하다. 양반들 역시 적지 않게 무과에 응시했으며[137], 수는 적어도 무관 출신 정승 역시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무관들에 대한 대우와 지위는 오히려 이전보다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문관의 지위가 더 높았고, 유학이 그것에 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행정이나 정치적 측면에서 평화기에는 문관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138] 사실 학자층이나 학문이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은 전근대에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139] 그리고 그 유학자 계층들도 전쟁 때는 의병을 일으키는 핵심이기도 했으며, 애초에 문관의 지위가 높다는 것과 의도적으로 무술의 단련을 억제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기도 하다.

무(武)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게, 있어야 할 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맨손 무예로는 수박이나 택견, 씨름 등이 군대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었으며, 가장 중요했던 활쏘기가 대중적으로 향유되기도 했다. 나머지 무기술들도 군대 등에서 교습 되었다. 물론 중국, 일본이나 유럽처럼 유파나 길드 같은 무술 단체가 활성화되진 않았고, 무예서 같은 기록도 적으니 이런 무와 관련된 문화적 측면에선 상대적으로 발달 정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차라리 조선의 치안이 비교적 좋았던 것이나 상업의 비중 차이 등 사회적 측면에서의 영향이 크면 컸지, 의도적으로 무를 천시한 결과라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해서 군사적 입장에서도 딱히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140]

여기에 전통 무술 왜곡이 횡행한 것에 대한 반동인지, 조선에는 택견, 씨름, 국궁, 무예도보통지 기반 군영 무술 이외에는 무술이 없었다는 식의 극단적인 인식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조선팔도에 위의 무술들 외에는 아예 무술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이야기다.[141] 물론 명확한 기록이 없는 이상 대부분 가능성이나 추측 선에서의 이야기 정도가 되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현재도 김명근 선생의 까기처럼 구한말까지 전해졌던 무술이 보존되거나, 혹은 그러한 무술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나름 있긴 하다.[142] 위에서 언급했던 무예청은 1910년 이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며, 군영의 제독검도 1880년까지 수련된 기록이 있다. 전역했다고 바로 사망하진 않았을 테니, 최소 1900년대 초반까지는 조선 검술이 남아있었다는 가정 역시 가능하다. 참고[143]

또 조선도 결국 전근대 국가인지라 남자, 대장부의 상징이 무예나 완력으로 대표되고,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것이 명예롭게 여겨진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유자광이나 한명회 등 여러 조선의 인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기록[144]들을 찾아볼 수 있고, 정담(鄭湛)이라는 무관은 평소에 “대장부는 마땅히 활쏘기와 말타기로 이름을 떨치고 공업(功業)을 이루어야지 어찌 문자에 얽매여 백수(白首)의 노서생(老書生)이 된단 말인가.”라 말하기도 했다. 상술했듯 세조가 한명회에게 환도를 하사하면서 칼이 남아의 보물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고, 무명자집을 쓴 윤기는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활이나 칼을 다루지 못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한 일도 있다. 기본적으로 무예보다 학문을 더 위로 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행위나 무예를 익히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7. 정리 및 요약

환도의 특징이나 정체성 같은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도 하다. 규격의 측면에서 환도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궁병, 기병 등의 보조무기로서의 편의성을 중시하여 짧고 가볍게 만들되, 백병전 능력도 고려하여 양손 검술을 사용할 수 있는 규격은 유지한 외수쌍수 겸용 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환도의 가장 대표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며, 한손검이나 더욱 긴 칼 역시 존재했다.
혈조(Fuller)는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다만 혈조가 있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애초에 혈조의 기능은 장식 혹은 길이 대비 무게를 줄이기 위한 목적 정도로 추정될 뿐이라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147] 일본도도 혈조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칼자루의 길이는 10cm 초반의 한손검 정도 길이와 10cm 후반에서 20cm 초반 정도의 한손반검 정도의 길이가 많았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제시한 환도 규격의 경우 칼자루 길이가 21cm 정도다. 물론 칼이 길 경우 일본도처럼 긴 20cm 중반대의 칼자루 역시 소수 있었다.

8. 구매 및 유통

한국에서는 상업적으로 주문을 받고 환도를 제작하는 곳으로 경기도 광주의 '대한도검', 이상선 도검장이 운영하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고려왕검연구소', 인천의 '명품도검', '나라도검' 등이 있고, 홍석현 도검장의 '전통도검연구제작소', 대구의 '도명도검', 예전에 '대한도검'을 운영한 김봉겸 도검장이 운영하는 안동의 '이함도검'이 있다.[148]

그 외에 부천시의 '도검미술'과 '원도검' 등에서도 주문제작을 받는다. 다만, 현재 '원도검'은 국내 주문제작을 받지 않고 있는 상태다. 그 밖에도 국내 도검제작 및 유통사에서도 기성품으로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경복궁이나 수원화성 의장대에 환도를 납품하는 업체로는 '화랑도검'이 유명하다.[149]

대체로 환도의 경우 검집이나 손잡이에 쓰이는 '어피'나 '장식'이 일본도보다 훨씬 많이 쓰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조일본도[150]보다 가격이 전체적으로 비싼 편이다.

9. 기타

9.1. 각종 유물들

참고로 현재 온전히 남아있는 환도 유물 중에는 실전을 고려하지 않은 의장용, 장식용 환도들이 많은 편이다.[151] 이런 칼들은 술이나 재료, 장식 등이 매우 화려한 편이며, 딱히 실전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만큼 칼 자체도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단면이 삼각형이거나, 도신이 아주 얇은 경우도 있으며, 길이 자체도 상당히 짧은 경우가 많은 편이다. 조선 환도는 대부분 짧다는 인식이 강한 것도 이 의장용, 장식용 환도들의 영향이 강하다.[152] 특히 구한말에는 환도의 군사적 역할이 크게 줄어들며 길이가 줄고 예장화되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 역시 짧은 유물이 많아진 것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 군용이나 관제 환도와 달리, 민간에서 호신용으로 간소하게 만든 칼은 구색만 대충 갖춘 느낌으로 완성도가 낮은 칼도 있었다. 예를 들어 띠돈 같은 패용 장식은커녕 코등이도 없이 옺칠도 안 한 나무 칼집, 칼자루로 적당히 만든 칼도 확인 가능하다. 물론 이와 별개로 창포검, 죽장도 같은 소드스틱 계열의 칼이나 시라사야와 유사한 외형의 칼도 있었으며, 삼국시대의 칼처럼 날밑만 없는 칼 유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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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환도. 부분 열처리로 인해 만들어진 칼날 무늬가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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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환도 유물 중 일부. 얼마 안 되는 조선 전기 환도 유물들로 다양한 크기와 형태가 공존하고 있다. 총 16점의 환도가 출토되었는데 칼날 길이가 짧은 것도 있고, 길게는 70cm 초반대도 있으나, 크게 칼날 길이 55cm 전후와 65cm 전후로 나뉜다고 한다. 곡률 역시 거의 직도에 가까운 것부터 휨이 상당히 큰 것까지 다양하며 도신의 단면은 오각형과 육각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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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유물. 총 길이 87.9cm, 날 길이 69.1cm, 나머지 길이 18.8cm로 칼자루 구성의 일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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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유물. 날밑 등 심의 일부가 결손되어 있다. 총 길이 80.9cm, 날 길이 65.1cm, 나머지 길이 15.8cm다. 다만 날밑과 칼자루의 앞매기, 뒷매기 등이 유실된 것을 감안하면, 원래 칼자루 길이는 바로 위의 환도처럼 약 17~18cm 전후 정도였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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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유물. 총 길이 84.3cm, 너비 2.9cm에 자루의 길이는 적혀 있지 않지만, 비율을 고려하면 17cm 전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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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유물. 총 길이 54.2cm, 너비 2.5cm이며 칼집 고리가 잔존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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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유물. 총 길이 51.4cm에 너비 2.3c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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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심플한 양식의 환도로 등 쪽으로 약간 휘긴 했으나 거의 직도에 가깝다. 칼집과 칼자루는 어피로 감쌌으며, 슴베와 칼자루가 두 개의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칼날에는 "광사두우(光射斗牛)"가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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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립박물관의 환도로 길이 84c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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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임금의 호위무사인 운검이 소지한 환도인 운검(雲劒).[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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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후기 관료인 병와 이형상의 유품들 중 일부. 중간에 곡도(曲刀, 장도(長刀)라고도 한다.)는 임란 이후 조선시대 도검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칼의 크기는 길이 67.8㎝, 폭 3㎝, 자루길이 12.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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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이 생전에 사용한 환도인 추련도.# 미터법 기준으로 전체 길이는 101.4cm, 폭 6cm, 칼날 길이 86.7cm이다.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검 양식을 뒤섞은 고전적인 스타일이다. 중국에서도 같은 양식이 있어서 원나라-명나라-조선-청나라까지 무려 4개의 나라에서 곡도, 박도, 직도가 뒤섞인 유물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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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조 시대 환도 유물인 흑칠황동만자문환도. 전체 길이 96cm, 칼날 길이 69.5cm, 자루 길이 약 26cm로 도신에 비해 자루가 꽤 길다.[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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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환도인 패월도[155]는 전체 길이 105cm, 칼날 길이 80cm, 자루 길이 약 25cm의 양손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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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조선 후기 환도 유물, 전체 길이 111.1cm, 자루 길이 25.4cm, 칼날 길이 약 85cm의 쌍수도를 개량한 것[156]

9.2. 일본도와의 비교

9.2.1.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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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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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굳이 구별법에 대한 항목을 따로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둘을 구분하는 게 쉽진 않다. 심지어 당대 조선인, 일본인들도 서로의 칼을 보고 자신들의 칼과 비슷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157] 둘 다 같은 환두대도 계열의 외날검을 사용하다가 둥근 날밑(코등이)가 추가되고, 퍼멀의 고리 장식이 없어지며, 칼날에 휨이 생기는 등 일종의 수렴진화를 거쳐 비슷한 구조와 실루엣을 지닌 동양식 외날곡도의 형태였으니 비슷해도 이상하진 않다. 거기에 환도는 지리상 주변국의 외장 양식을 도입한 형태 역시 종종 있었으니, 이 점도 혼란을 더한다.[158][159]

물론 비슷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수렴진화일 뿐이다. 환도는 고려 시대의 유물이 너무 적어 확언하긴 어렵지만, 고려도경의 묘사나 몽고습래회사, 처인성 유물 등을 고려하면 고려 중기까진 이전의 목병도[160], 심부대도[161]에서 유래한 날밑이 달린 직도를 사용하다가 곡도를 사용하는 몽골의 영향을 받아 환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도의 경우 환두대도를 바탕으로 당대도의 영향을 받고, 또 에미시의 곡도인 궐수도의 영향을 받아 9세기 정도에 타치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62]

그리고 비슷한 칼이긴 해도 주로 사용된 외장 양식은 달랐으며 도신의 형태도 약간은 차이가 있는 등 어느 정도의 차이점들은 있었다. 또 조선 후기에 일본식 외장이 일부 도입되긴 했어도, 그게 주류는 아니었으며, 그런 검들도 대체로 기존의 환도 양식에 일본도 양식이 융합된 형태였다.[163]

다만 기본적인 실루엣과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도검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일반인들이 환도와 일본도를 한눈에 구분하는 게 쉽지는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나마 외적으로 눈에 잘 띄는 부분들에 대해 간단하게 비교하고자 한다.

먼저 날밑, 쯔바의 경우, 일본도 중 카타나 계열에는 코가이와 코즈카라는 일상 용품을 꽂기 위한 구멍이 쯔바 좌우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환도의 날밑은 보통 구멍이 없는 심플한 형태거나, 비녀장이 존재하는 일부 환도의 경우 비녀장이 통과하기 위한 작은 구멍만 하나 있는 정도다. 다만 조선 후기에는 장식성으로 코가이, 코즈카 구멍을 모방한 환도 날밑도 꽤 생겼는데, 이 경우 실제로 코가이, 코즈카가 달려있진 않아 이를 통해 구분 가능하다. 다만 일본도 역시 좌우의 구멍이 없거나 막혀있는 등 다른 경우가 있다.

칼자루에 다는 술 장식은 환도와 일본도의 차이 중 하나인데, 전통적인 일본도의 칼자루에는 술 장식이 없다. 물론 일본에도 도소(刀緒)라는 술 장식이 있긴 했는데, 이건 전통 일본도가 아니라 신군도라는 서양의 세이버를 참고한 근대의 도검에 있던 것이다.[164] 다만 술이 없다고 환도 아닌 것은 아니며, 술을 달지 않은 환도 역시 보편적이었다.

칼자루의 마감 방식은 둘 다 다양했는데, 일본도는 어피를 감은 후 내부의 어피가 마름모꼴로 연속되게 드러나도록 칼자루 끈을 감는 특유의 방식이 특히 유명하다.[165] 환도의 경우 주로 사용된 방식은 그냥 목제 손잡이에 옻칠로 마무리하거나, 손잡이에 일자로 끈을 감는 정도라고 한다. 물론 외에도 어피를 감는 등 여러 방법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일본도식 마름모꼴 끈 감기가 종종 사용된다. 그리고 환도는 칼자루의 실루엣이 직선형인 경우가 많지만 일본도는 칼자루의 가운데가 약간 오목한 형태인 경우가 많다.[166]

도신의 곡률의 경우 딱히 비교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일본도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휨이 유행했으며, 곡률이 5cm나 되는 것부터 2, 3mm 정도의 직도에 가까운 칼도 있었다. 환도 역시 직도에 가까운 것부터 크게 휘어진 것까지 다양한 곡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둘을 곡률을 통해 구분하긴 어렵다.

칼날 무늬, 하몬은 약간 애매하다. 상술했듯이 한국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칼에 부분 열처리를 했기 때문에 하몬 같은 칼날 무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에선 하몬을 중시하여 하몬의 모양을 의도적으로 특정한 형태로 만들고, 하몬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연마를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본도의 하몬이 선명도가 더 높고, 하몬의 형태가 다양하며, 자세하게 분류되어 있다.[167] 그러나 일본도 역시 하몬이 연하거나 심플하게 직선을 그리는 경우가 있었다.

가장 쉬우면서 직관적인 구분법은 칼끝 근처의 세로 경계선인 요코테의 유무다. 요코테는 환도 등 한국의 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환도 유물 중에 요코테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일본도의 도신을 재활용한 것일 확률이 높다.[168][169] 쇼부즈쿠리'라고 요코테가 없는 일본도도 있긴 한데 절대다수는 요코테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요코테를 통해 구분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170]

물론 위에서 확인했듯이 요코테 말고도 주로 사용된 외장이나 기타 여러 장식, 문양 등에도 차이가 있었다. 다만 동시에 어느 쪽에서도 다양한 양식이 사용됐고, 공통된 양식들도 있었기 때문에, 칼을 자세하게 모르면 외장만으로 구분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칼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도 쉽고 빠르게, 높은 타율로 구별 가능한 차이점이 요코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명, 청대에 사용된 왜도나 장도, 묘도라고 부르는 중국식 일본도 역시 요코테가 없었다. 따라서 오히려 일본도보다 중국의 검과 구분하기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외장에선 차이가 있는데, 중국의 왜도는 칼집 너비가 자루보다 확실히 넓은 경우가 많았고, 칼집의 단면도 타원형보단 직사각형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또 칼집의 끝 부분이 비교적 크게 휘어진 경우가 많았다. 자루 끝의 퍼멀도 물고기 꼬리처럼 퍼지는 디자인이 일반적이었다.예시1, 예시2, 예시3, 예시4[171] 그리고 원래 중국식 일본도는 오오타치에서 영향받아 만들어진 대검에서 시작된 만큼, 일반적인 환도나 우치가타나와 비교하면 큰 칼들이 많았다. 다만 위의 예시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길이로 제작됐고, 애초에 일본도나 환도와 딱히 구분되지 않는 외장들 역시 존재했다. 중국식 일본도 역시 주로 이런 경향성이 있었다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전근대 동북아의 외날검을 한눈에 구분하는 게 쉽진 않다. 기본적으로 유사한 동양식 외날검의 범주에 있었고, 공통적으로 사용된 외장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된 양식 자체는 나라마다 나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확실한 고증과 차별을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면 굳이 명확한 차별점이나 고유성을 찾아 칼같이 구분하려고 하기보단 "환도는 이런 형태가 주로 쓰였다", "이 양식은 왜란 이후 일본에서 유래한 양식이다" 같은 식으로 가볍게 알고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9.2.2. 성능

사실 환도와 일본도를 성능으로 비교하긴 어렵다. 둘 다 전근대의 보편적인 제작 기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용도나 형상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 환도의 평균 길이가 비교적 짧아진 것이나[172], 에도 시대 일본도의 평균 성능이 전보다 떨어졌다고 평가받는 등 시대에 따른 변화도 있었다.

그나마 평균적으로 선호한 규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평균 규격 차이에 따른 상대적인 비교 정도는 가능하다. 다만 짧은 한손검과 오오다치처럼 그 목적과 용도가 명확하게 다른 칼들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항목에선 흔히 환도나 일본도라고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날 길이 60cm에서 80cm 정도의 허리에 차는 도검[173]들을 기준으로 비교하고자 한다.

일단 평균적으로 일본도가 환도보다 약간 더 길거나 묵직한 편이다. 정촌 우치가타나의 경우 무게가 보통 1kg에서 1.5kg 사이 정도였다. 비슷한 길이인 무예도보통지의 환도는 960g이 기준이었다.[174] 또 타치 같은 경우는 길이가 길었다.

먼저 환도의 경우 칼날 길이는 60cm 중후반에서 70cm 초반, 칼자루 길이는 10cm 중후반에서 20cm 초반 정도가 일반적이었다.[175] 도신의 두께는 손잡이에 가까운 뿌리 부분의 두께가 약 6~7mm 정도로 외날검 기준 평범했으며 도신의 측면 너비는 다양했다. 다만 일본도에 비하면 측면 너비가 약간 좁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176] 후술하겠지만 두께 역시 일본도가 더 두껍다. 그리고 뒷매기가 롱소드의 퍼멀처럼 크진 않더라도 우치가타나와 비교하면 나름대로 질량이 있는 편이었다. 여기에 도신도 비교적 가벼웠던 만큼 무게중심이 손잡이에 가까워 조작성, 편의성이 좋아 비교적 가볍고 섬세하게 휘두를 수 있었다.

일본도는 대표적으로 우치가타나와 타치가 있는데, 먼저 우치가타나의 경우 길이 자체는 사실 환도와 그렇게 차이가 있진 않았다.[177][178] 다만 도신의 두께가 더 두꺼웠으며, 두께의 줄어드는 정도 역시 적었다.[179] 때문에 도신 길이에 비해서 무게가 꽤 나갔다. 거기에 손잡이 끝의 카시라(퍼멀)가 작고 가벼워, 무게중심이 칼날 쪽에 쏠려 있었다. 따라서 칼의 조작성을 높이기 위해 우치가타나는 칼자루 길이가 25cm에서 30cm 정도로 상당히 긴 편이었다.[180]

타치는 칼날 길이가 평균 약 70cm 중반에서 80cm 전후로 우치가타나보다 더 길었다. 다만 길이가 같을 때 기준으론 타치 쪽이 약간 더 가벼웠다고 한다. 칼끝으로 갈수록 도신의 측면 너비가 비교적 크게 좁아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181] 이에 더해 타치는 보통 퍼멀 부분에 비교적 질량이 있는 가부토가네를 사용했던 만큼, 우치가타나보다 무게중심이 손잡이에 가까웠다. 무게중심이 손잡이에 가까웠던 만큼, 칼자루 길이가 20cm 초중반 정도로 약간 더 짧았고[182], 구조상 한손으로 다루기에 편한 경우가 많았다. 또 곡률이 큰 경우가 많았던 만큼 타치는 상대적으로 기병도 역할에 더 적합했다.

다만 위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설명에 해당한다. 시대나 지역, 개인 등에 따른 차이도 있었고, 타치의 도신을 활용한 카타나도 있었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위력 면에서는 일본도 쪽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우치가타나는 구조상 날에 무게가 더 실리는 구조였기에 치고 벨 때나 밀고 버틸 때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타치는 상대적으로 길이가 더 길었다. 반대로 비교적 짧고 가벼웠던 환도는 활 등의 주무기를 함께 사용할 때의 편의성과 휴대성이 더 좋았다.[183] 그리고 상대적으로 짧고 가벼우며 무게중심이 손잡이에 가까웠던 만큼 칼을 비교적 가볍게 휘두를 수 있었다. 요컨대 칼의 조작성이 더 좋았고, 이는 검술 운용의 편의성이나 섬세함 측면에선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직접 붙으면 역시 길이가 길거나 무게가 나가는 쪽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물론 이러한 점들을 모든 환도와 일본도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긴 어렵다. 환도나 일본도나 다양한 크기의 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84] 어디까지나 평균 규격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일본은 위력 측면을, 한국은 편의성 측면을 고려하여 규격을 잡은 경향이 약간 더 드러난다는 것이다.[185]

9.2.3. 역사상의 평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일본도가 전근대 동북아시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란 점이다. 이런 기록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난다. 다만 상술했듯이 일본도와 환도는 둘 다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보편적인 재료와 제법을 사용했고, 형태조차 비슷하여 딱히 큰 차이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186] 따라서 재료나 제법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음에도 일본도가 고평가받았던 이유에 대해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는 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일단 일본도가 조선 시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일본 사절이 바친 왜검을 지방 관료가 원했다는 기록도 있고, 다음 항목에서 따로 후술할 '심을'과 '야마사기'의 사례도 있는 등 일본도와 관련된 기록들을 꽤 찾을 수 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따로 일본도를 수입하지는 않았으며, 평균적으로 좋은 칼 정도의 평가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의 성능과 군사적 사용에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15세기 말에 처음 나타난다.

1482년 성종 대의 실록을 보면 "두로가문(豆老可文)이라는 칼을 잘 만드는 왜인이 있으니 관직을 주고 저들이 왕래하게 해서 그 기술을 전습시키자"라는 의견과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공인(工人)들이 모자라지 않으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 대립한다.[187] 이후 시험해봐서 나쁠 것은 없다며 두로가문에게 칼을 만들게 했는데, 이를 마지막으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고려하면 굳이 관직을 주면서까지 전습시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지만[188], 어쨌든 당시에 일본도의 평가가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다만 동시에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공인이 모자라지 않다는 의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일본에 좋은 칼이 많긴 하지만 조선에도 실력 있는 장인들은 부족하지 않게 있으며, 이들이 만든 제대로 된 환도는 좋은 일본도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인식 역시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일본도를 좋게 평가한 이유도 일본에 좋은 장인들이 만든 칼이 많다는 식의 생각이 그 기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애초에 제법이나 재료 면에서 큰 차이가 없으니 비슷한 실력의 장인이 칼을 만들면 성능이 비슷한 게 당연하기도 하다.[189][190]

따라서 일본도의 높은 평가에 대한 이유는 제작 기술 자체보다는 도검과 관련된 조선과 일본의 문화, 환경이나 사회적 측면의 차이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당시 상황을 비교하자면, 중세 일본은 조선에 비해 전쟁이나 전투가 상당히 자주 일어났고 치안이 좋지 못했다. 무장한 농민들이 후퇴 중인 사무라이나 패잔병을 습격하여 약탈하기도 했을 정도다.[191] 따라서 일본은 실전을 염두에 두고 더 철저히 무기의 성능을 요구, 검증받았을 것이며, 호신과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당연하게도 도검의 수요 자체가 더 많았다. 당시 일본에선 농민들조차 나름대로 좋은 칼을 구비하고자 노력했다. 에도시대에 평민은 와키자시만 찰 수 있게 만든 법 자체가 당시에는 일반 농민들조차 전투용 도검 소지율이 높았음을 방증한다.

그에 반해 조선의 경우 민간에서 사용한 칼 유물들을 보면 날밑, 칼집 장식, 칼자루 장식 등 도장구가 없거나 만듦새 자체가 조악한, 완성도가 낮은 칼들이 꽤 보인다. 이는 당시 조선이 중세 기준으로 꽤 치안이 좋았던 것이 그 이유로 보인다. 치안이 좋으니 민간에서 호신용으로 칼을 산다고 해도 돈을 아끼고 최소한의 성능만 족한 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조선도 실력 있는 장인이 제대로 만든 환도는 일본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인식과 '일본도가 평균적으로 좋다'라는 인식이 공존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다. 물론 군인이나 무장 등이 사용한 환도는 구색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무기로서의 완성도는 충분했을 것이다.[192] 그리고 민간에서 제작된 도검 중에도 당연히 좋은 칼들은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 무장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던 중세 일본에 비하면 도검의 수요가 적었던 조선에 좋은 칼이 비교적 적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 탓인지 일본에선 도검을 선호하는 문화 자체도 다른 나라보다 비교적 더 강했다.[193] 그에 따라 사무라이들 중에는 아예 도검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자들도 있었다.[194]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도 일본의 재력 있는 자들은 좋은 칼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는 서술이 있다. 이 역시 좋은 칼과 장인의 숫자를 늘릴 수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당시 일본에선 오랜 전란 등으로 인해 위로는 사무라이부터 아래로는 민중까지 전쟁과 호신을 위한 도검의 수요와 소비가 주변국들보다 높았다. 이에 더해 나름대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도검 제작을 위해 돈을 들이는 경향도 있었다. 따라서 기술력의 차이는 딱히 없었다고 해도, 당시 환경상 자연스레 일본에 숙련된 도공들의 숫자와 많은 재화를 들여 만든 완성도 높은 칼의 숫자가 비교적 더 많았을 확률이 높다.[195]

이처럼 특정 국가의 칼이 동북아시아에서 높이 평가받았던 것은 일본도만이 아닌데, 신라의 검 역시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 당나라 시인인 이섭(李涉)이 쓴 여제발신라검가(與弟渤新羅劍歌)라는 시가 있는데, 여기서 신라에서 얻은 칼을 신검(神劍)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칼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칼이 동해(신라)에서 온 것임을 안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검이 유명했던 이유도 위에서 추측한 일본도가 유명해진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196]

다만 조선 후기에는 왜란의 영향으로 일본도나 그 검술이 막연하게 신격화되는 경향도 생겼다. 예를 들어 김광택전에선 일본에 신검술이 있어 나라의 기밀로 여겼다는 무협지 같은 내용이 있다. 물론 왜란 이전에도 왜구는 창검술에 능하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이는 조선군이 활쏘기 훈련을 많이 해서 활쏘기에 능한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일 뿐, 그 기술 자체를 특별시한 것은 아니었다.[197] 심지어 타국과 딱히 차이가 없는 일본에서 나는 철 자체도 좋게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이런 추세와는 다른 양상의 기록 역시 존재했다. 예를 들어 반대로 일본 사람이 조선 칼을 칭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인은 원중거가 차고 있는 칼을 살펴보고는 훌륭한 철(名鐵)이라고 감탄한다. 원중거가 신기해하며 거듭 물어보니 일본인은 "우리나라(일본)의 철은 부드러운 것을 강하게 만들고자 하므로 (제련이) 어렵지만, 그대 나라(조선)의 철은 강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하므로 쉽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화국지』권3 「인」 <병기> ; 박재금 ; <화국지(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소명출판, 2006) ; 조혁상, <조선후기 도검문학연구>(학자원, 2021), 41쪽
18세기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원중거가 쓴 <화국지>를 보면, 지나가던 일본인이 원중거가 찬 칼을 부탁하여 살펴보고는 훌륭한 철이라 감탄하며 조선의 철, 혹은 철을 다루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198] 화국지에서 원중거는 일본의 칼날 만드는 법이 정교하다며 높게 평가하기도 했는데, 정작 일본인은 원중거 본인이 차고 있던 칼을 직접 살펴보고는 오히려 조선 칼을 칭찬한 것이다. 또 이 기록만 본다면 당시 일본에서 조선 철이 좋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연히 이 기록 하나로 환도가 일본도보다 낫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동시에 무작정 일본도가 더 뛰어났다고 보긴 어렵다는 점을 당대 일본인의 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원중거의 인식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일본도가 막연하게 고평가되는 부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199]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는 "왜검도 검이고, 우리 검도 검이다.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검법의 묘를 다할 수 있게 한다면 번거롭게 선(筅), 창(槍)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검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칼에는 고하(高下)가 있으며, 기술에는 공졸(工拙)이 있다. 왜 가운데 부유한 사람은 높은 가격에도 (돈을) 아끼지 않고 칼을 만들고, 뛰어난 스승을 널리 초빙하여 배우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갖는 칼은 하등급의 칼에 불과하니, 칼을 잘 다루는 자가 앞에서 돌진하면 두려워할 만은 하지만 자못 한계가 있다. 중국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바라보다가 번번이 두려워하며 피한다. 획득한 이도(夷刀) 또한 고하를 구분하지 못하고 병사들에게 섞어서 주는 까닭에 기록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일본도를 고평가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란 이후에도 이런 식의 기록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요약하면 전근대 동양에서 일본도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왜란 이전에도 있던 인식이며, 당시 일본은 평균적으로 좋은 칼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다만 그 이유가 흔히 알려져 있던 것처럼 접쇠 등의 제작 기술이나 사철 같은 재료가 특별해서는 아니다.[200] 일본도의 평가가 좋고, 일본도 중에는 좋은 물건이 많았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는 중세 일본에서의 높은 도검 수요로 인한 숙련공 숫자 증가 등 사회, 문화적 배경의 영향이 강하다. 그리고 기술력, 제작방식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만큼,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일본도를 좋게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에서도 실력 있는 장인들은 있고, 제대로 만든 환도는 일본도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인식도 있었다.

이는 여담이지만 역사 배경 창작물에서 환도와 일본도에 대해 고증을 살려 표현한다면, 기본적으로 조선에서도 일본의 칼을 높이 평가하고 좋게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동시에 칼이나 무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자는 결국 장인의 실력이 중요하고 제대로 만들어진 환도와 일본도는 그 성능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일본도 내에서도 품질의 차이는 있다는 것 등은 알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게 그럴 듯하다.[201]

9.2.4. 일본도의 영향?

해외에서는 워낙 높은 일본도의 인지도 때문에 조선의 칼을 보곤 막연하게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물론 왜란 이후 일본도 양식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상술했듯 길이가 길어진다거나, 환도의 장식 방법 중 일본 스타일의 장식, 문양도 선택지에 추가된 정도다.[202] 환도의 기원이나 제법, 기본적인 구조 같은 핵심적인 부분에선 일본도의 영향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은 찾기 어렵다.

다만 일본도의 평가가 높았던 건 사실인 만큼 일본도 제작 기술에 관심을 표한 조선인도 종종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430년에는 선군(船軍)인 심을(沈乙)이라는 자가 일본도 한 자루를 진품과 다름없이 만들어 세종에게 진상해 포상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리고 1445년의 기록에 따르면 '야마사기'라는 대마도 출신의 귀화한 왜인이 칼 만드는 재주가 있어 군기감에서 7년가량 함께 지내며 기술을 공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 두 가지 사례를 고려하면 일본도의 기술이 조선 전기 환도 제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다. 물론 심을이나 야마사기와 교류한 장인들 같은 몇몇은 일본도 제법을 알고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개인 단위에서의 교류일 뿐 그것이 환도라는 무기 양식 자체에는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은 애초에 전근대 한국 도검과 일본 고도(古刀)의 제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203] 그러니 영향을 줬다고 한다면 외형적인 면을 봐야 하는데, 도신의 형상 역시 처인성 출토 도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미 고려 시대에도 칼배에 명확한 각이 진 육각도, 오각도 형태였다. 직도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후대의 환도와 차이가 없었다. 환도의 곡률 역시 거란이나 몽골 같은 북방민족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204] 따라서 칼의 핵심인 도신 제작에 있어선, 일본도가 영향을 주고 싶어도 줄 부분이 딱히 없었다. 그나마 요코테나 화려한 하몬 등 세세한 디자인은 차이가 있지만, 이는 왜란 이후에도 환도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외장 역시 상술했듯 임진왜란 이후에나 일본식 디자인이 차용된 환도가 종종 만들어졌을 뿐이다. 조선 전기의 환도 유물[205]이나 환도 회화[206]들의 외형에선 일본도의 영향이라고 할 부분은 딱히 찾을 수 없다.

심을과 야마사기의 기록들 자체도 따져보면 일본도가 환도에 영향을 줬다고까지 해석하긴 무리가 있다. 일단 심을 같은 경우 세종에게 칼을 바쳐 포상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 딱히 국가의 명령이었던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심을 개인이 외국 공예품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기에 그에 대한 포상을 한 것뿐이다. 야마사기의 사례 역시 자세히 따져보면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데, 사실 조선 초기 군기감의 환도장은 왕실 등 중앙 조정의 의장용 도검을 만드는 게 주요 업무였다. 그런 만큼 군기감 소속 환도장의 수도 매우 적었는데, 야마사기가 활동하던 당시 고작 6명밖에 없었다.[207] 중앙의 군사들이 실전에서 사용한 실전용 환도는 일반적으로 지방의 대장간 등에서 제작한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이후 대마도 도주가 야마사기의 송환을 원하자, 관련된 신하가 “이 사람의 기술은 칼을 만드는 한 가지 일뿐이온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기술을 다 배워 알았으니, 가든가 있든가 우리나라에는 관계가 없사옵니다.”라며 냉대했다는 점 역시 눈에 띈다. 만약 그의 기술을 특별하게 평가하여 보급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원 기술 보유자인 야마사기를 이렇게 냉대하고 쉽게 보내려 할 리가 없다. 군사 목적의 환도는 지방에서 만드는 만큼, 제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할 필요가 있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 점 역시 조선에서 일본도 제법을 진지하게 보급하려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동래에서 걸식하던 왜인이 마침 칼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데려와 일하게 했을 뿐인 만큼, 애초부터 큰 의도는 없었을 확률이 높다.[208]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일본도 제법이 조선 전기 환도 제법에 영향을 줬을 거라 보긴 어렵다. 실제로 일본도를 군사 목적으로 대량 수입하기도 했던 명나라와 달리, 고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진 딱히 일본도를 수입하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일반적인 일본도 입수 루트는 일본 사절 등이 진상한 것을 받거나, 왜구를 상대로 얻는 전리품 정도였다.

9.3. 일본에서의 오해

일본에선 간혹 한국은 왜란 이후 카타나의 영향을 받아 환도 같은 외날곡도를 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다른 해외의 사례들처럼 그냥 몰라서 그런 것일 확률이 높다. 사실 한국에서조차 환도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그 대중적 인지도가 그렇게 높다고 보긴 어려우니 말이다. 다만 간혹 혐한들이 이런 식의 영상처럼[209] 악의적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칼은 전부 양날검이었다는 식의 의미 없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일본도 자체가 일본의 대표적인 상징인 만큼, 넷우익 같은 부류들 입장에선 한국 칼이 일본도와 비슷한 게 달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본에선 접쇠 기술에 대한 환상 같은 일본도에 대한 오래된 편견들이 아직까지 꽤 퍼져 있어 더욱 그런 면이 있을 수 있다.[210][211]

10. 매체에서

사실 한국에서도 환도의 인지도가 낮았던 만큼, 이전에는 매체에서 환도가 제대로 표현된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212] 그나마 00년대 후반 정도부터 환도가 등장하거나 고증되는 사례들이 꽤 많이 늘어난 편이다. 다만 긴 칼 쪽이 화면에 잘 잡혀서 그런지, 매체에서 묘사되는 환도는 대체로 역사 속의 평균 길이보다 길게 묘사되는 편이다. 참고로 이는 일본도 역시 비슷한데, 우치가타나의 평균 길이는 사실 환도와 비슷했지만 매체에선 그보다 더 길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환도나 카타나나 다양한 길이가 있었지만, 특별한 설정 없이 상당수가 평균보다 큰 칼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 위화감이 있다. 일종의 영화적 허용이나 만화적 허용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 대다수의 한국 드라마 사극에서는 환도 칼집을 한손으로 들고 다니는 도수 파지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민간에서 사용된 환도는 패용 장식이 없는 경우도 많긴 했지만, 군대에선 대부분 패용 장식으로 칼을 차거나 뒤꽂이 방식으로 허리띠에 끼웠기 때문에 군인이 한 손으로 칼을 들고 있는 것은 다소 어색한 면이 있다.[213] 추노뿌리깊은 나무에서처럼 칼자루가 뒤로 향하도록 패용하는 방식이 구현된 작품들도 있지만 이들도 장면에 따라 손으로 들거나 띠돈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끈으로 묶어서 뒤로 돌려 매기도 했다.

도수 파지법이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이유는 촬영 시 그림이 안 나오고 배우들 운신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가 크다. 띠돈으로 패용하고 칼을 뽑은 후 격렬히 액션신을 촬영하는 경우 차고 있는 칼집이 배우에게도 성가시고 화면에서는 보기 거슬릴 정도로 흔들린다, 소품팀에서 고증을 내세워도 연출팀에서 액션 동선의 용이함과 보기 좋은 동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띠돈을 포기하는 것. 또 소품 제작에 필요한 비용 절감 등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배우를 배려하는 측면도 있다. 손에 드는 방식이면 그냥 바닥에 내려놓으면 그만이지만 칼집을 제대로 차면 앉고 일어서는 데 생각보다 불편하다. 갑옷까지 착용하면 더 심해지는데 잠깐 앉아 쉴 때도 불편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도수 파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다. 물론 칼을 허리에 찬다는 게 워낙 기본적인 고증인 것도 사실이니, 무엇이 나은지는 결국 각자의 판단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11. 관련 문서



[1] 동영상의 내용에 따라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으므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2] 염상섭의 1931년 소설 《삼대》에서도 순사가 환도를 차고 있다든가 하는 서술이 있는데, 여기서 환도는 당연히 당시 경찰들이 패용하던 세이버를 말하는 것.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차고 다니는 칼은 다 환도라고 통칭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3] 중동서양에서도 시미터사브르처럼 곡률이 큰 한손 도검 형식은 몽골 제국이 중동과 서양을 침략한 이후로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 동북부의 에미시가 사용하던 궐수도의 영향으로 곡도가 되었다고 추정된다.[4] 다만 러시아 발해 지역에서 이성계의 전어도와 유사한 곡률이 있는 칼이 발견되기에, 이전에도 곡률이 있는 칼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5] 일례로 성종 대에는 4만 필이던 말이 중종 대에는 2만 필로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말의 가격이 치솟거나, 병사들이 남의 말을 빌려 타는 행태도 일어나는 등 말 부족 현상으로 인해 조선의 기병 전력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래 기병은 전투용 말과 짐말, 말 2필을 휴대해야 했지만 1583년에는 짐말 휴대 규정을 없애기도 했다.[6] 흥미로운 기록으로 1517년에 요동의 중국군이 여진족과 싸울 때 일부러 흰옷을 입고 편전을 쏴서 조선의 용군(勇軍)이 지원을 온 것처럼 하여 여진족을 속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여진족은 이에 대해 적군이 흰 옷을 입고 흑초립을 썼으며, 활솜씨와 기마술이 날래고 용맹스러우니 조선군이 지원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 군사 자체는 조선군으로 위장한 중국군이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당시 여진족에게 조선군은 활 잘 쏘고 말 잘 탄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며, 조선군이 궁기병을 크게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7] 물론 그렇다고 근접전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궁기병, 궁병의 비중이 늘어난 걸 보면 역시 비중이 감소하긴 한 듯하다.[8] 실록에선 그냥 길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어 이것이 칼 전체의 길이인지, 도신의 길이인지는 엄밀히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칼자루 길이는 따로 논한 것을 보면 도신의 길이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9] 물론 영조척을 기준으로 해도 너비 2.2cm 정도로 좁은 편이긴 하다.[10] 칼날 길이 65cm에서 70cm 전후는 우치가타나나 조선 후기 환도의 길이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약간 짧은 정도의 길이다.[11] 물론 그럼에도 당시 중국 등에선 조선의 강점을 활쏘기로 봤을 정도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 수준이 낮다고 볼 순 없다.[12] 일본도로 치면 와키자시 같은 포지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때도 우치가타나처럼 70cm에 이르는 칼날을 가진 환도들도 꽤 많았다. 어디까지나 짧은 칼의 비중이 이전보다 커졌다는 이야기다.[13] 류성룡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이여송이 거느리던 병사들 태반이 북방 기병이라 갖고 있던 검이 짧아 무디지만, 일본 보병들은 다 3, 4척 되는 긴 칼을 들고 있어 예리하여 말, 병사를 함께 벨 수 있다는 식으로 길이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조선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나, 짧은 칼을 사용하는 병사가 이전보다 늘었던 조선 역시 비슷한 곤혹을 겪었을 것이다.[14] 물론 명나라 군대나 항왜에게 배운 기술일 수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말 달리는 법(我國馳馬技)'이라면서 마상재를 함께 보여준 것과 검술을 본 명나라의 유격(遊擊)이 좋은 기법이라며 처음 본 것처럼 반응한 것, 그리고 항왜에게서 배운 검술은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따로 왜검보로 정리한 것을 보면 조선 내에서 전승되던 검술일 확률이 높다.출처[15] 선조실록 27년 9월 3일 기사 실제로 평양은 쌍검을 들고 추는 검무인 쌍검대무로도 유명했다.[16] 황진은 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전쟁을 대비해 보검 두 자루를 사오기도 했다. 검술도 익히지 않으면서 굳이 이러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17] 권율은 이치 전투 때 목책이 무너져 왜군이 들이닥치자 칼을 뽑아 도망치던 병사 한 명을 즉결 처형한 뒤 본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서 싸웠다고 하며, 송상현은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이 들이닥치자 활로 한 명을 쏘고, 칼로 두 명을 벤 뒤 죽었다고 한다.[18] 물론 약간의 편차는 있었고, 개인의 기호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길이의 칼들이 사용되었다.[19] 물론 이 시기에도 모든 칼이 짧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때는 세이버 양식과 혼합된 환도도 나타난다.[20] 무예별감(武藝別監)이라 불리며, 무예청은 용호영, 호위청 등과는 별개의 국왕 호위 기관이었다. 구식 군영이 해체된 후인 20세기까지도 현역으로 남아있었으며, 장용위의 초기 구성원들이 이곳 출신이다.[21] 대령무예청, 가대령무예청[22] 다만 영상의 1분 30초 부분에선 전체 길이 61.7cm, 복원 시 예상 약 70cm라고 나오는데 이는 편집 오류로 보인다. 칼을 분석한 도검장은 분명히 칼날이 70cm, 칼 뿌리 쪽이 15~20cm 정도의 대도(大刀)일 것이라 얘기했으며, 실제 복원 결과물 역시 그 정도 크기다.[23] 참고로 부여계의 동병철검 중에도 90cm~1m 전후의 외수쌍수 겸용 칼들이 출토된다. 상술했지만 삼국시대에는 의외로 칼날 길이 70~80cm 대의 긴 칼들이 꽤 출토되는데, 심지어 전장 120cm에 달하는 대형 검들도 적게나마 출토되기도 했다.[24] 기병용은 한 뼘 세 손가락, 보병용은 두 뼘으로 보병용 칼자루는 두 손으로 쥘 수 있도록 하였다.[25] 당시 논의를 보면 “길이에 대해선 동의하지만, 칼자루 길이는 이래야 한다“라는 식으로 칼자루 길이를 중요하게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병사들의 힘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며 칼의 규격을 정하는 것을 아예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26] 예를 들어 적이 산개해 나무나 바위 등에 엄폐하여 기병으로 잡기 어려울 때는, 조선 기병들 역시 말에서 내리고 활을 쏘거나 육박전을 벌였다.[27] 참고로 수성전에서도 기병은 중요했다. 성문을 열고 적군에 대한 반격 등을 할 때 주로 기병이 핵심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지에서의 활용과는 방식이 약간 다르지만, 산지에서 약하다는 편견과 달리 기병은 산악지대에서도 중요한 전력이었다.[28] 이럴 경우 상술한 문종 시기의 논의에서 양손으로 쥘 수 있는 칼자루가 중요하게 얘기된 것도 이해가 간다. 조선군의 다수이자 주력인 궁병 등이 양손 검술의 주된 사용자였을 테니 말이다.[29] 물론 기병이 많았던 것은 여진 같은 기병이 강한 국가나 민족들과 자주 인접했던 것 등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30] 실제로 환두대도 유물을 보면 한손검부터 한손반검 규격의 칼들이 주로 출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당연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유물 중에는 총 길이 120cm에 달하는 대검도 몇 자루 출토되기도 했으며, 병종 구성 자체도 조선과 꽤 달랐다. 어디까지나 주로 쓰이는 도검의 규격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31] 날길이 2척 5촌, 자루 길이 5촌 5분.[32] 세종 시기 오례에 따르면 원래는 창의 길이가 8척에서 13척까지 다양했으나 11척 5촌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척 기준으로 8척은 대략 1.7m, 13척은 2.7m, 11척 5촌은 2.4m이다. 다만 그렇다고 3m 이상의 창이 없던 것은 아니다. 동래읍성 출토 유물 중에도 3m 길이의 창이 있다.[33] 당시의 부대 편제 단위로 5명이 하나의 오를 구성했다.[34] 세종 16년과 17년 두 번에 걸쳐서 이야기되었는데, 16년에는 창을 가진 자는 기본적으론 창만 가지고 있으면 되나, 아울러 활과 칼을 차고 싶으면 차도 좋다는 식이었다. 17년에는 창과 함께 활을 찬다고 설명하였다. 어느 쪽이든 창병의 도검 패용을 필수적으로 보고 있진 않다.[35] 팽배수는 아니지만 조선 후기의 방패병인 등패수의 경우 한손검을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6] 예시@ @ @[37] 예를 들어 이치 전투를 지휘하던 권율은 왜군이 목책을 뚫고 들어오자 칼을 뽑아 선두로 돌격하기도 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해 부사 이종인은 활로 대응하다가 적이 성벽 안으로 침입하자 활을 버리곤 창과 칼을 들고 육박전을 벌였다고 한다.[38] 일례로 세조가 겸사복과 내금위의 부관 등을 두고 궁술과 검술을 익히는 것에 대해 언급한 적도 있으며, 외에도 장수나 무관은 칼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꽤 있다. 예시@ @ @[39] 또 큰 칼 자체가 장수의 위엄 등을 나타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종서가 쓴 시를 보면 “만리변성(萬里邊城)에서 일장검(一長劍)을 짚고 서서”라는 표현이 있다.[40] 당장 위에서 언급한 이징옥은 화기, 투사 무기 등이 주 전술이 된 당시 상황을 인식해서인지 그냥 급한 상황을 대비하는 수준의 짧고 곧은 칼이 쓰기 편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 만큼 왜란 직전에는 칼에 익숙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장수들도 있었다.[41] 물론 동래성 출토 유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왜란 이전에도 한손반검 규격의 칼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다만 비교적 짧은 칼이 이전보다 많아졌다는 이야기다.[42] 날 길이 3척 3촌, 자루 길이 1척, 무게 1근 8량을 주척 기준으로 환산한 것이다. 무게가 900g이라고도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1근을 600g으로 봤을 때의 기준으로 조선 시대의 1근은 641.946g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비슷한 길이의 일본도가 1.2kg 내외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43] 유물이나 기록 등을 고려했을 때 대략 칼날 길이 60cm 중반에서 70cm 초중반, 자루 길이 10cm 중후반에서 20cm 초반 정도의 길이로 보인다.[44] 참고로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유행한 곡률이 있는 일본도와 달리, 환도는 같은 시대에도 직도에 가까운 것부터 크게 휜 것까지 다양한 곡률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45] 다만 타치처럼 휨이 큰 것은 유물 상으로는 그렇게 흔하진 않았다.[46] 일본도에서 칼끝과 칼날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말한다.[47] 환도는 일본도와 마무리 연마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요코테가 생기지 않았다.[48] 현재 출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전 서술에 따르면 칼등이 각지지 않고 곡선을 그리는 오각도가 더 많았다고 한다. 다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오각도나 육각도나 그냥 칼등에 각이 서 있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인지라 크게 다르진 않았다.[49] 실제로 당시의 일본도를 이렇게 갈면 내구력이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일본도는 무른 철(신가네)을 고탄소강(하가네)으로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졌기에 칼등과 경사면을 갈게 된다면 가운데 박힌 무른 철이 노출되어 검이 부러질 확률이 높았다.[50] 카타기리즈쿠리(片切刃造り)라고 부른다.[51] 비슷한 사례를 비변사등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제신들이 각궁은 습하면 사용하기 어려우니 교자궁으로 대체하자고 했는데, 이때 무관 정찬술이 교자궁도 소뿔을 어교로 붙여 만드는 거라 습기에 약한 건 매한가지라며 반박했다. 조선이 가장 중시한 활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식의 차이가 있던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 무조건 확실하다고 보긴 어려우며, 비판적으로 기록을 분석해야 한다.[52] 삼국시대 환두대도 역시 칼날과 칼자루를 따로 제작해 고정한 경우 이런 방식의 고정이 많다.[53] 과거 고동(古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코등이로 바뀌었다던가, 혹은 고동이 코등이의 음차였다고 보기도 한다.[54] 자체가 날밑을 뜻하는 한자다.[55] 환도막이나 주석막이, 혹은 칼날매기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막이는 두루마기의 ‘마기’와 같은 용법으로 보인다.[56] 물론 어피로 칼자루를 감싸는 경우에도 칼집처럼 옻칠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57] 일본도 칼자루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마름모꼴 문양이 칼자루를 따라 늘어선 형태로 끈을 묶는 방식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보통 자루에 어피를 감싸고 끈을 그 위에 감는다.참고[58] 아래의 유물 항목에서 동래성 출토 환도 중 80.9cm의 칼에서 볼 수 있다.[59] 사실 환도의 칼자루가 짧다기보다는 흔히 검도에서 사용되는 우치가타나가 도신의 길이에 비해 칼자루가 긴 편이다. 우치가타나는 도신의 두께가 두꺼운 편이었는데 동시에 카시라(퍼멀)가 딱히 무게추 역할을 할 만큼 무게가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무게중심이 칼날 쪽에 많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조작성을 위해서 칼자루 길이를 늘렸고, 이것이 보편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60] 파일:청무사.jpg[6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nchuguard.jpg[62] 예를 들어 성종선릉이나 문정왕후태릉, 17세기 중반에 사망한 효종영릉의 무인석에서 고리매기 방식이 조각되어 있다. 17세기 말에 사망한 장렬왕후의 휘릉의 무인석에선 띠돈이 조각되어 있다.[63] 주로 조선 군사사를 연구하며 실제로 전통무예를 복원 수련 중인 박사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의 자문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64] 예를 들어 칼을 찬 상태에서 잠깐 앉아서 쉰다고 가정해보면, 칼자루가 뒤로 가는 쪽이 훨씬 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공병들이 일하면서 개머리판 접고 소총을 뒤로 메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65] 위 gif 파일들의 출처. 띠돈에 관한 여러가지 설명을 찾을 수 있다.[66] 고리 하나로 칼을 매단 패용 방식을 말한다.[67] 물론 적응되면 나름대로 제어가 되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다.[68] 실제로 회화를 보면 뒤꽂이 패용을 한 경우 대부분 보병인 조총수나 창수이며, 궁병, 기병들은 전부 띠돈을 사용해 제대로 패용하고 있다.[69] 여담으로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뒤꽂이는 칼자루를 정면으로 회전시켜 뽑았다. 따라서 평소에 칼날이 아래를 향하게 찼다면 칼을 뽑을 때는 칼날이 위를 향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우치가타나 특유의 발도와 비슷한 모양세가 된다. 다만 딱히 패용 방식이 규정된 것은 아닌 만큼, 회화를 보면 평상시에 칼날이 위를 향하게 찼던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발도할 때 다른 패용법들처럼 칼날이 아래를 향했을 것이다.[70] 이 벽화는 현재로선 직접 고구려 사신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고구려 사절이 묘사된 중국의 사절도를 보고 모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이와 별개로 고리매기 자체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던 만큼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71]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이상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리매기는 2점 고정이기 때문에 띠돈 패용에 비하면 흔들림이 덜하며, 띠돈이 없으니 당연히 칼의 비용도 더 쌀 수밖에 없다.[72] 물론 끈으로 고정했으니 뽑으라고 하면 못 뽑을 건 없겠지만 불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띠돈이 고안된 것이기도 하다.[73] 또 실제 도검 사용을 고려한 경우에는 구한 말에도 이전처럼 긴 칼을 쓰기도 했다. 상술한 쥐베르의 그림들이나 도검을 사용하는 구한 말의 경찰인 순검들의 사진을 보면 양손으로 잡고 휘두를 수 있는 길이의 칼을 착용한 것을 알 수 있다.[74] 원료인 철을 손수 녹이고, 접쇠 과정을 통해 강재를 제련하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이은철 도검장은 학계의 학자들과 협력하여 도검이나 제련로의 유물, 유적 등을 조사,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시대의 제철 기술이나 도검 복원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한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검 제작, 제련 기술들을 참고했다는 점 하나만으로 넷 우익, 혐한 성향 일본인들로부터 '일본 베껴놓고 한국 전통 운운하는 사기꾼' 라는 식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75] 실제로 구한말 조선에서부터 이어진 전통 야금 기술을 지금까지도 전승해왔으며, 현재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76]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62호 환도장.[77] 자연상에서 얻을 수 있는 철은 대부분 산화철이다.[78] 이때 불순물, 슬래그 배출에 도움을 주는 조개 껍데기 등을 같이 넣기도 했다.[79] 괴련철은 보통 800~1100도에서 만들어지는데 이 온도로는 숯의 탄소 성분이 철광석에 잘 흡수되지 않아서 탄소량이 비교적 낮은 철들이 주로 만들어진다.[80] 물론 철을 만드는 과정 자체는 지역이나 장인 개인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81] 동양권에선 현대와 비슷하게 액체 상태의 무쇠에서 탈탄 공정을 통해 강철을 생산하는 초강법의 발견 및 전래가 빠르기는 했는데, 당시 초강법의 의의는 강철의 품질보다 다량의 강철을 쉽게 뽑아낼 수 있는 물량, 생산성에 있었다. 또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로는 초강법을 사용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82]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여러 철장에서 철이 대량 생산되어 공급, 유통되었다.[83] 부분 열처리 역시 접쇠처럼 상당히 보편적인 방법으로,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들도 부분 열처리를 사용했다.[84] 무쇠 부엌칼, 낫, 호미 등 연장을 주로 만들지만 장검, 창 같은 병기류 역시 만들며 숭례문 철엽 복원 등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제작 범위가 다양하다.[85] 이때 철 사이에 황토를 발라주는데 이는 산화피막이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현대에는 황토 대신 붕사 가루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86] 대표적인 유물로 조선 말기 유명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이 썼던 죽장도가 있다.[87] 링크[88] 링크[89] 예를 들어 전어도의 칼집은 나무 위에 한지를 감싸고 위에 어피를 둘렀는데, 어피 위에 두꺼운 주칠로 마감하여 어피인 게 잘 느껴지지 않는다.[90] 질 좋은 현대 강재를 쓰는 도검에도 패턴 웰디드 등을 적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화려한 외형이 주목적이며 성능적으로는 그렇게 이점은 없다. 다만 부분 열처리는 하기에 따라 다르므로 지금도 고급 도검에는 가끔 쓰이기도 하는데, 통열처리에 비해 번거로움도 있고 내부에 잔류 응력이 남을 가능성이 많은 단점은 분명하다. 번외로 강재의 표면 등 일부분에만 탄소/붕소 등 특정 원소를 침투시키는 기법은 현대에 도검 아닌 산업용 판재나 장갑용 철판에서도 제법 흔하다.[91] 참고로 이러한 기공은 철을 압착시키는 단조 작업을 통해 없앴다.[92] 다만 16세기까지 일본에선 도검 제련에 사용할 철을 무역이나 왜구를 통한 약탈로 중국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많았다.참고[93] 그리고 당연하지만 철광석에도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차이다.[94] 진한이나 가야, 신라의 철 등이 삼국시대에 수출된 것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에도 그러한 인식이 있었다.[95] 출처[96] 출처[97] 출처[98] 기사[99] 일본의 경우 일본도/생김새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몬을 형태에 따라 상당히 자세하게 분류했고, 또 하몬의 각 부위에 대한 명칭도 존재한다. 특정한 하몬의 형태를 의도하고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하몬의 형태를 보고 도공을 유추할 수도 있으며, 도공 유파별로 유행한 하몬 같은 것도 존재한다.[100] 물론 이게 전근대 한국인들이 부분 열처리로 인한 칼날 무늬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의 탱화, 무신도, 채색된 조각상 등을 보면 칼을 비롯한 무기류의 칼날에 부분 열처리 방식의 담금질로 인한 칼날 무늬가 채색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따로 이름을 정하고 개념화할 정도로 특별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101] 환도만이 아니라 일본도인 권응수 장군의 칼 역시 하몬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102] 링크[103] 일본도의 하몬은 그 형태에 따라 크게 스구하(直刃)와 미다레바(乱れ刃)로 나뉜다. 전자는 하몬이 칼날을 따라 직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후자는 흔히 일본도의 하몬 하면 생각나는 곡선이 반복되는 형태다.(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이들 안에서도 상당히 다양한 분류가 있다.)[104] 물론 유행한 길이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한손검 유물들도 실제로 발견되니 한손검술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검술을 연구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선 조선 후기에 주로 민간층을 중심으로 한손검을 다루는 기법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105] 물론 이는 방패 없이 칼만 사용하는 경우를 의미한다.[106] 물론 그렇다고 전장에서 칼의 입지가 다른 무기에 비해 특별히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고 진형을 이루기 어렵거나, 공간이 좁거나, 난전이 벌어지는 등 단병접전이 요구되는 상황에선 많이 사용되었다. 어디까지나 주 무장은 아니었다는 것.[107] 조선 후기에는 무과 종목에 조총이 추가되거나 격구가 빠지는 등 변화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검술은 추가되지 않았다.[108] 실제로 태종 때 갑사 2명이 목검 대련 중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109] 적어도 수백에서 수천은 됐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심지어 3만 명 이상이 응시한 적도 있다.[110] 실제로 세종대의 기록을 보면 무과에서 대련 형식의 창술 훈련인 갑을창을 시험했다가 이를 다시 추인(허수아비)를 대상으로 한 시험으로 바꾼 사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실록에 나오지 않지만, 운영상 모종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111] 조선 초 태종이나 세종 대에도 목검 등을 사용한 격검 교습 관련 기록이 있고, 조선 후기 일성록 등에는 월도, 쌍검, 신검, 예도, 제독검 등의 무예를 척계광식 9등급(상상~하하)으로 시험한 기록이 있다.[112] 물론 그럼에도 중국 등 타국 입장에서는 조선은 뛰어난 궁병이 많은 축에 들었으며 조선 스스로도 활을 가장 장기로 여겼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제독인 마귀가 일본이 칼을 잘 다루나 결국 짧은 단병기이고, 조선의 활과 화살은 멀리까지 닿는다며 치켜세운 적도 있다.[113] 활쏘기 역량이 그나마 유지된 것에는 원래 활이 중시되기도 했고 여기에 당시 전투 환경이 활이 주로 활용되었다는 점, 무과를 비롯한 시험 등에서 활쏘기는 지속적으로 평가받았다는 점 등이 영향 끼쳤을 것이다.[114] 역으로 말하면 궁술 역량은 조선군이 평균적으로 타국보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조선에서 궁술은 군 훈련 외에도 대중적인 취미처럼 향유되었기에 더 그런 면이 강했을 수 있다.[115] 예를 들어 무관이나 군관, 갑사 같은 전문 군인이나 정예병 등.[116] 예를 들어 원나라의 일본 원정 때 한희유는 선봉장으로 나서며 아예 일본군의 칼을 맨손으로 뺏고 몇 명이나 베었다고 한다. 최영 역시 칼을 뽑고 선봉으로 돌격해 활약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도 이러한 사례들이 존재한다.[117] 영조 9년 5월 12일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훈련대장 장붕익의 격검 기록이다. 그의 집에 자객이 들었는데, 이를 장붕익 본인이 환도를 뽑아들어 직접 맞선 것이다. 비록 제압은 못 했지만, 격퇴에는 성공한다. 당시 장붕익은 군영대장급의 고위 지휘관이었고, 당시 나이도 50대 후반이라 적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장교의 검술 실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참고[118] 물론 그렇다고 단병접전을 반겼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강점인 궁시를 두고 굳이 유혈사태를 피할 수 없는 데다 상대방의 강점이기까지 한 단병접전을 우선시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필요하다면 단병접전을 수행할 능력은 있었다는 것이다.[119] 물론 검술 같은 무술의 영향도 있었고, 무술에 대한 자신감 자체도 사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단순히 무술 숙련도 하나만으로 단병접전의 승패가 모두 정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120] 예를 들어 조선 수군 같은 경우 전근대 해상전의 특성상 선상 백병전을 해야 했겠지만, 이에 앞서 화살과 총통, 화포 등을 사용하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121] 여담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철이 귀해 칼의 보급률이 떨어지긴 했으나, 이때도 장수, 군관 등은 활이나 창 같은 주무장과 함께 칼을 차는 게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김유신이 매서운 추위와 주둔한 고구려군들을 따돌리고 소정방에게 정보를 전할 별동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이때 보낸 15명의 군인들이 활과 칼을 찼다고 언급된다. 벽화의 중장기병 등도 창과 함께 부무장으로 칼을 차고 있다.[122] 정확하게 말하면 벽에 걸린 활과 칼을 어루만지며 “그대는 대장부다. 지금 이 시절에는 이 물건으로 재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아녀자들처럼 하찮게 살아가는가?”라면서 속을 떠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는 13세기 중반으로, 무신정권 시기였다.[123] 게다가 이 말이 나온 상황 자체도 윤기가 칼을 차고 길을 지나던 중 화려한 칼을 차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볼품 없는 칼을 보고는 비웃자 수긍하며 한 말이다. 다만 이야기 자체는 화려한 칼을 자랑했던 자가 윤기의 말을 듣고는 이를 부끄러워했다는 식으로 교훈적으로 끝난다.[124] 유명한 장군인 김종서남이, 이순신 등이 지은 시 중에도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 문신인 서거정의 시에서도 칼을 보고 즐기며 술 마신다는 시구가 적혀있다. 참고로 이순신의 시 중에도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춘다면서 활과 칼을 함께 언급하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125] 예를 들어 설화에선 산신령이 김유신한테 신검을 주거나 검술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유명한 장군이 바위를 벴다는 등의 이야기도 꽤 있으며, 하늘의 번개를 번개칼, 불칼 같은 칼로 비유하거나 묘사하기도 했다.[126] 유명 인물 중 가볍게 몇 명만 열거해봐도 김유신, 척준경, 한희유, 이성계, 최영, 온달, 권율, 황진 등이 있다.[127] 예를 들어 한희유, 이성계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다고 했으나, 칼을 사용해 상당한 무용을 보여준 적이 있다. 심지어 한희유는 창을 들고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벤 적도 있다.[128] 일본의 경우 원래는 활이 무사들의 주 무기였기 때문에, 아예 유미토리(활잡이)라는 단어를 사무라이나 무명이 뛰어난 무사를 이르는 관용어로 쓰기도 했다.[129]척준경이나 유금필도 전공이 대단한 것이지, 무예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130] 물론 문관 출신 장수는 김종서강민첨처럼 무예 자체는 능하지 못했다는 경우도 있긴 하다. 다만 그렇다고 문관 출신 장수를 무작정 얕보기도 어렵다. 반대로 양규처럼 뛰어난 용맹을 보인 경우도 있으며, 애초에 과거로 갈수록 문무관의 구분이 희미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라의 교육 체계인 화랑만 해도 어진 재상과 장수, 군졸 등 문무 양면으로 인재를 배출했다고 평가받았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지휘관에게 무예나 용맹을 요구하여 문관을 변방의 절도사 등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경계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예외는 있으나 문관 출신이라도 장수의 역할을 맡았을 정도면 일반적으론 무예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은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대표적인 문관 출신의 조선 장수인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왜군이 침입하자 직접 칼을 뽑아 선두에 나서 싸우기도 했다.[131] 최영이나 원충갑, 김경손처럼 실제로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기록이 있는 경우, 혹은 활을 잘 쐈다, 무예를 부지런히 익히고 단련했다, 용맹이 뛰어났다, 힘이 세고 날랬다는 등 무(武)와 관련된 덕목을 칭찬하는 기록이 있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132] 예도 관련 기록에는 고후점이 어디서 검술을 배워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무반 출신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고, 김체건, 김광택 역시 실록 등에서 군관 출신임을 확인 가능하다.[133] 민수용 환도 유물은 꽤 남아 있어, 박물관에서 낸 도록 등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134] 활쏘기가 유교의 육예 중 하나였고, 정신수양의 측면이 있었다곤 해도, 이건 활쏘기를 배울 여러 명분이나 활쏘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 중 하나일 뿐, 조선 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활쏘기를 무예로 인식한 측면이 강함을 알 수 있다. 당장 정조만 해도 무예 역시 익히라는 의미에서 문관들에게도 활쏘기를 장려하기도 했다.[135] 사실 전근대 기준으로 문관이 무술을 익히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직책이란 건 언제든 바뀔 수 있었고, 과거의 귀족은 그 자체로 사병 집단의 수장이나 일종의 전사 계층에 속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문무 양면으로 인재를 키운 화랑에서 그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사병 집단이 혁파되고 문무관의 구분이 강해진 조선에서조차 문관이면서 무술을 익힌 사례를 나름 찾아볼 수 있다.[136] 예를 들어 조선은 이전까지 기병은 기병으로 대항한다는 방식을 취해왔다. 그러나 임란 이후 목장이 파괴되고 그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137] 이순신 역시 원래 문과를 준비했으나 장인어른의 추천을 듣고 무과에 응시했다.[138] 당장 무사 계층이 주류였고 전국 시대를 보냈던 일본조차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 들어서며 무사들의 문관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동북아시아 자체가 예로부터 덕이나 예, 문(文)을 통한 통치를 이상적으로 여기기도 했다.[139] 전쟁이 일상이었고, 일자무식의 전사 계층이었던 유럽의 귀족들조차 시간이 지나며 철학 등 학문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일종의 특권 같은 것처럼 여겼다.[140] 당장 일본만 해도 검술 유파의 등장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도장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한 것은 에도 시대지, 전쟁이 일상이던 전국시대가 아니었다. 어차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전쟁의 핵심인 군대에선 나름의 무술을 가르치며, 민간에서도 필요한 사람들은 어떤 루트로든 무술을 배웠다. 택견만 해도 딱히 도장은 없지만 동네 택견꾼이나 어르신 등에게 배웠듯이 말이다.[141] 현실적으로 조선 팔도의 도검을 소지한 사람이 전부 군영에서 검술을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군영에서 배운 검술이 기원이라 해도 나름의 변형을 거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당장 택견도 지역 각지에 택견과 유사한 무술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142] 사실 전통 무술의 전승이 마냥 특별한 것도 아닌 게, 막말로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무술도 우리 입장에선 전통 무술이라 생각보다 허들이 그렇게 높지 않다. 당장 택견만 해도 여러 증언이나 기록이 있어서 그렇지, 현대의 택견 전승 자체는 송덕기 옹이란 어르신 한 분에 의해 1970년대 정도에나 겨우 이루어졌다.[143] 의외로 18기가 20세기 중반까지 어째저째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 '정구장에서 역도와 18기 등 우리나라 고유의 연무'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의 부재로 세부 사항(이를 테면 군영의 그 18기가 맞는지,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등)은 알 수 없다. 원문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144] 유자광의 경우 변방의 군에서 근무하던 시절 남자로 태어나고, 또 미천한 몸으로 왕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니 변방에서 싸우다 죽지 않으면 장부(丈夫)가 아니라는 맹서(盟誓)를 했다고 한다. 한명회의 경우 계유정난 때 손수 칼을 뽑고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병들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냐며 병사들을 독려했다.[145] 다만 일본도를 재활용해도 요코테는 그냥 갈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권응수 장군이나 곽재우 장군의 칼 역시 일본도지만 요코테가 희미하다.[146] 다만 결국 경향성의 차이인지라, 두꺼운 경우도 있었다.[147] 흔히 퍼져 있는 낭설로 혈조가 적을 찔렀을 때 피가 흐르는 길이라거나 공기가 들어가서 뽑기 쉽도록 한다는 것은 별다른 근거가 없다.[148] 환도만 취급하지 않고 사인검, 카타나 등 또한 제작하시는 경우가 많다. 경우에 따라 박물관 소장의 유물을 실측하여 재현하기도 한다.[149] 화랑도검 또한 주문제작을 받는다.[150] 중국제의 경우 30-80만원, 국내산의 경우 100-130만원 정도에 판매된다.[151] 아무래도 이런 칼들이 대체로 외견이 화려하고 가치가 높은 만큼 그나마 지금까지 보관된 게 많다.[152] 이러한 의장용 칼들은 보통 전장 50cm에서 70cm 정도가 많다. 그런데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환도 중에 '제일 짧은 것'으로 대체해서 쓴다는 쌍검에 사용하는 칼의 규격이 전장 65cm 정도다. 이를 감안하면 이런 짧은 길이는 일반적인 환도의 규격이라고 보긴 어렵다.[153] 운검이라는 명칭은 검의 이름이자 동시에 검을 소지한 호위무사의 직책이기도 하다. 별운검(別雲劒)이라고도 부른다.별순검이 아니다.[154] 드물게 소유주의 이름과 사용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유물로, 1721년에 태어나 1744년에 무과를 급제한 이택주 소유의 검이다. 출처는 강화전쟁박물관[155] 영빈 이씨의 제사를 위해 영조 40년에 세워진 선희궁에서 발견되어 흔히 영빈 이씨 패월도라 불리는 유물로, 실제로 영빈 이씨의 소유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패월도는 한 자루가 아닌 거의 동일한 형태의 두 자루의 유물이 전해진다.출처는 국립고궁박물관[156] 사진 출처[157]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세조 실록에서 류큐의 칼을 보고 본국의 환도와 같다는 감상을 남긴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류큐에서 사용된 칼은 대개 일본도였다. 일본의 경우 ‘통항일람(通航一覽)’의 ‘異本朝鮮物語’에 환도를 보고 자신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감상이 기록되어 있다.[158] 중국 양식이 적용된 유물도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도의 양식을 도입한 유물들도 있다. 다만 이렇게 영향을 받은 유물들 역시 도신은 기존 형상을 유지한 게 대부분이며 외장 같은 장식 측면에서 영향을 받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그 수가 매우 적긴 하나 청나라의 곡도의 디자인이 도입된 도신도 나타난다. 이형상 장군의 유품은 만주식 안모도와 유사하다.[159] 어찌 보면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외장을 사용해도 고증에 어긋나지 않는단 점이 환도의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160] 학계에서 삼국시대의 도검 중 환두 없이 나무 칼자루만을 슴베에 결합해 만든 칼을 지칭하는 용어다. 목병대도라고도 하는데, 대략 4세기부터 출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두대도는 지배층의 칼이나 의장용으로서의 측면이 강해졌으며, 전투용 도검의 역할은 목병도로 이전되는 경향이 있었다.[161] 날밑(코등이)이 달린 삼국시대의 도검 유물을 뜻한다.[162] 물론 이쪽도 추정일 뿐이긴 하다.[163] 칼 하나에 한국식, 중국식, 일본식 양식 셋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164] 일본도와 신군도는 외형상으론 흡사하지만 엄연히 다른 칼이다.[165] 일본도의 칼자루 끈감는 방법을 두고 흔히 '츠카마키'라고 부른다. 다만 이는 통칭이며, 끈을 묶는 양식 자체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166] 다만 무조건은 아닌데, 예를 들어 사쓰마 번의 칼은 칼자루의 형태가 거의 직선형에 가까웠다고 한다.[167] 특히 일본도의 하몬 하면 생각나는 규칙적으로 구름이나 물결같은 곡선을 그리는 하몬은 보통 일본도에서 나타나며, 타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168] 다만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처럼 임진왜란에서 노획하고 사용한 일본도는 요코테가 희미하거나 없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선 딱히 요코테를 신경 쓰지 않아 칼을 갈 때 요코테도 그냥 같이 갈아냈기 때문이다.[169] 참고로 이순신 장군의 의장용 장검에도 요코테의 흔적이 존재한다. 조선인인 태구련(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든 칼인데, 태구련의 후손 태씨 문중에 구전되어 내려온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태구련(태귀련)과 이무생은 임란 이전에 해안에서 노략질로 인해 일본에 잡혀가 비젠에서 풀무질과 매질을 하며 10년 동안 도검 제작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임란 때 조선 안내역으로 뽑혀 조선행에 동참하게 되었고, 다른 왜병들과 함께 이순신의 포로로 잡혔다가 거두어졌다는 이야기다. 이게 사실이면 요코테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후손들의 구전 증언일 뿐이기에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다. 물론 이게 아니어도 왜란 당시는 일본도가 흔하던 시기인 만큼, 일본도의 외형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170] 물론 쇼부즈쿠리가 있는 만큼, 요코테가 없다고 무조건 일본도가 아닌 것은 아니니 이 부분은 주의가 필요하다. 또 만화나 게임 등 창작물에선 제작자가 요코테를 묘사하지 않아 의도치않게 쇼부즈쿠리가 되는 경우도 꽤 된다.[171] 다만 마지막 예시는 현대에 만들어진 복원품이다.[172] 이때가 임진왜란과 맞물리던 시기였기에 훈련 부족 등과 함께 조선군이 전쟁 때 고생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다.[173] 무예도보통지 등에서 제시된 군용 환도나 일본의 타치, 우치가타나 등.[174] 다만 이는 우치가타나가 길이에 비해 꽤 무거운 것이지, 환도의 무게 자체는 평범한 편이다.[175] 무예도보통지에서는 환도의 규격을 칼날 69cm, 칼자루 21cm으로 잡고 있다.[176] 일단 동래성 출토 환도 중 한손반검 규격의 칼을 보면 측면 너비가 2cm 중후반 내지는 2cm 후반 정도인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3cm에서 3cm 초중반 정도가 많은 편이다. 물론 환도나 일본도나 케바케긴 하다.[177] 에도 시대 카타나의 정촌 길이가 무예도보통지의 환도와 거의 동일하게 69CM 정도였다. 다만 이는 동호인을 제외한 길이로, 동호인을 더하면 약 72cm 정도가 되어 우치가타나가 약간 더 길긴 했다.[178] 물론 에도 시대 이전에는 길이가 더 다양했고, 이후에도 사쓰마 번에서 사용한 칼처럼 더 긴 경우도 있었다.[179] 도검의 두께는 손잡이 근처에서 가장 두껍고, 칼끝으로 갈수록 그 두께가 좁아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를 디스털 테이퍼(Distal Taper)라고 한다. 일본도 역시 칼끝으로 갈수록 두께가 좁아지지만, 그 정도가 비교적 덜했다. 예를 들어 손잡이 쪽의 두께가 6~7mm의 칼이면 칼끝 근처의 두께는 보통 약 3mm대 정도인데, 일본도는 손잡이 근처가 7mm면 칼끝 근처는 약 5mm 정도였다.[180] 환도에도 20cm 중반대의 칼자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 칼날이 평균보다 길어서 칼자루 역시 이에 비례해 길어진 것이다. 도신 길이가 일반적인 환도와 별반 차이 없는 70cm 정도여도 칼자루가 확연히 길었던 우치가타나와는 차이가 있다.[181] 이렇게 도신의 측면 너비가 칼끝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프로파일 테이퍼(Profile Taper)라고 한다.[182] 비슷하게 손잡이 끝에 나름 질량이 있는 환두대도의 경우, 80cm 대의 긴 날을 가진 유물이라고 해도 칼자루 길이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환도의 뒷매기 역시 이와 비슷하게 질량이 비교적 있으며, 중국 역시 그랬다.[183] 재료 등의 차이로 칼집 역시 보통 환도 쪽이 더 가볍다고 한다.[184] 예를 들어 군용 환도 유물 중에는 길이 93.4cm에 무게가 무려 약 1.8kg인 것도 있다.@[185] 어떤 의미론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을 논한 것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186] 다만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신도(新刀)는 일본의 국내 상황 변화와 제법의 변화로 칼의 평균 성능이 이전보다 떨어지긴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턴 전쟁이 거의 없어 전근대 동북아에서의 일본도 평가에 딱히 반영되진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이를 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187] 이때 기술을 가르치게 하자고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인 '심회'는 5년 뒤에 "일본도는 하품(下品)도 예리하여 중요한 군사용품인데 쉽게 매매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다만 이는 군영의 일본도가 무분별하게 매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해서 말한 측면이나 오해가 있었을 수 있다. 후술할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선 왜란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하품 일본도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등 다른 평가를 보이기 때문이다.[188] 물론 그냥 기록만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왜인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일이 실록에서 누락 됐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189] 실제로 이은철 장인이 조선시대의 도검을 갈거나 부러진 도검의 단면을 조사한 바로는 성능 면에서 일본도와 비교해 딱히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190] 나름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세종 12년의 실록에 따르면 중국 사신을 맞아 작은 연회인 온짐연(溫斟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중국 사신인 '창성'이 돌아가는 길에 쓰기 위해 세종에게 호신용 왜검을 빌려달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후 운검을 보고는 치사(致謝)하며 운검을 가져갔다. 작은 해프닝일 뿐이지만 17세기에 청나라가 조선에게 환도 대신 일본도를 요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풍경이다. 참고로 잔치 중에 왕에게 칼을 빌려달라 하고, 진짜 운검을 가져가 버렸으니 이후 이로 인한 논쟁이 생기기도 했다.[191] 실제로 조선 초기 실록에선 일본인들이 크고 작은 다툼이나 분함으로 칼을 뽑았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나온다. 당시 일본은 좋지 않은 치안과 전란, 문화적 배경 등 여러 이유로 도검의 소지는 물론 도검의 사용 자체도 익숙한 환경과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192] 실제로 관련 유물을 보면 군사 용품인 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하자가 있어 보이는 칼은 딱히 없다.[193] 물론 일본에서도 군인들의 주무기는 창이나 활이었다. 그리고 중국이나 조선에서도 칼은 몸을 지키는 호신 무기이자 백병전 대비 보조 무기로서는 가장 보편적이었다. 상징성 측면에서도 중요했으며,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다만 일본은 그 성향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194] 전국 3영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도 도검 수집이 취미였다.[195] 물론, 조선에도 꾸준히 군납의 수요를 담당하던 장인들은 있었고, 상술했듯이 실력 있는 장인들이나 칼이 부족하지 않게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군사, 민간 양쪽에서 도검에 대한 수요가 높았으며, 활발하게 도검이 소모되는 일본에 비하면 그 수가 적었을 확률이 높다.[196] 당시 한반도 역시 많은 전란을 거치며 병장기 관련으론 이골이 났을 가능성이 높고, 최치원이 신라에선 칼 차는 것을 숭상한다고 할 정도로 칼과 관련된 문화가 나름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197] 사실 1kg 근처의 칼을 다루는 양손 검술은 세세한 기술이나 스타일, 무기에 따른 특성의 차이는 있어도 기본적인 틀은 동서양 불문 대동소이했다. 그 검술이 기본적인 수준만 된다면 병사들이 어떤 검술을 익히냐는 전쟁에서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다.[198] 다만 이 부드러운 것을 강하게, 강한 것을 약하게라는 말의 의미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생각하면, 전자는 직접제련의 침탄법, 후자는 초강법 등 간접제련의 탈탄법을 연상케 하지만, 조선은 무기를 만들 때 숙철을 사용한 침탄법을 주로 사용했다. 혹은 사철과 철광석의 이미지에도 나름 끼워 맞춰지긴 하지만, 역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조선 도검을 직접 살펴보고 칭찬한 것 자체는 사실이니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199] 또한 화국지는 18세기 중반의 기록인데, 실제로 당시 일본도는 평균 성능이 이전보다 비교적 떨어져 있는 상태기도 했다.[200] 사실 중세 기준 특별한 기술을 뽑자면 중국의 초강법일 것이다. 다만 초강법도 생산성 면에서 이점이 있는 것이며, 사실 평균적인 질 자체는 오히려 약간 떨어졌다.[201] 검술 역시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여러 기록처럼 일본 쪽의 장기를 검술로 인식하면서 그 평균적인 역량을 높이 평가하되, 동시에 조선에서도 검술을 제대로 익힌 자들이나 정예병의 역량은 부족하지 않다는 식의 표현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202] 중국식 외장을 차용한 스타일도 있었다.[203] 정확하게는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둘 다 큰 틀은 저온환원법을 기반으로 한 세계 보편적인 제법을 사용했다.[204] 다만 러시아 체르냐치노 발해 고분 유적에서 곡도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고,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환두대도 역시 한눈에 봐도 휘어진 곡도인 경우가 있다. 압도적인 주류는 직도였겠지만, 예전부터 곡도가 병존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205] 동래성 출토 환도 등.[206] 세종실록이나 국조오례의서례 등에 실려 있는 환도 회화 등.[207] 심지어 이것도 수를 늘린 것이다. 원래는 고작 2명에 불과했다. 이후 1434년에 6명으로, 1460년에 33명으로 늘렸다가 1485년에는 그 수가 12명으로 줄고 환도장들의 소속이 상의원으로 옮겨갔다. 상의원은 왕실의 의복이나 재물을 제작, 공급, 관리를 맡는 관청이다. 아예 공식적으로 왕실의 의장용, 하사용 환도 제작을 맡게 된 것이다.[208] 이후 야마사기의 송환을 보류하긴 했는데 이것도 칼과는 상관없이 야마사기가 군기감에 지내면서 화약 관련 지식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209] 참고로 댓글창에선 진실을 아는 일본인들이 영상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210] 서양 칼은 둔기에 가깝다는 등의 편견들도 최근까지 꽤 퍼져 있는 편이다.[211] 무비지의 조선세법이 양날검으로 그려져 있음을 근거로 왜란 이전에는 양날검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박 사례가 너무 많아 딱히 의미 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리고 조선세법 자체도 사실 외날검으로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기도 하며, 실제로 조선군에선 외날검으로 수행했다.[212] 무인시대용의 눈물, 황산벌(영화) 등 2000년대까지 만들어진 한국 사극을 보면 아예 양날검을 사용한 경우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중화권 사극과 일본 사극 또한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전자는 청나라 초중기 배경 사극에 청나라 말기 스타일 의상이 나오는 게 대표적이며, 후자는 20세기에 제작된 전국시대 배경 사극에서 다이묘의 갑옷이 오오요로이 등 전국시대 시점에서 구식이자 의장용이었던 갑옷으로 묘사된 게 대표적이다.[213] 다만 구한말에 촬영된 순검의 사진인데 왼쪽 사람의 경우 손으로 들고 있다. 파일:57795e9130d1271799f8854139a9a3a9.jpg 순검의 경우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된 듯 하다.[214] 물론 당시 수군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칼을 패용했는가에 대해선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215] 모티브는 현충사 소재 이순신 장검으로 추정된다.[216] 트레일러에 나온 하몬의 형태도 전형적인 일본도 식의 하몬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