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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0:20:13

황산벌(영화)

이준익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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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삼국시대 시리즈
황산벌 평양성
<colbgcolor=#8b0000> 황산벌 (2003)
Once Upon A Time In A Battlefield
파일:황산벌.jpg
감독 이준익
각본 최석환, 조철현
제작 이준익, 조철현
기획 조철현
조감독 이성호
촬영 지길웅
조명 한기업
미술 권진모, 강승영
음악 오석준
출연 박중훈정진영이문식, 류승수
장르 전쟁, 사극, 블랙 코미디
제작사 씨네월드
배급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씨네월드
개봉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년 10월 17일
상영 시간 104분
총 관객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771,236명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15세이상_초기.svg 15세 이상 관람가

1. 개요2. 등장인물
2.1. 백제 측2.2. 신라 측2.3. 그 외
3. 줄거리4. 평가
4.1. 사투리4.2. 전통적 영웅상 뒤집기4.3. 관객과 학계의 반응
5. 여담6. 명대사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의 출세작이다. 주요 인물 밖에도 각종 단역과 카메오 등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인다.[1]

포스터만 믿고 "코미디 영화네?"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꽤 있었다.[2] 물론 반은 맞지만... 실상은 전통 사극의 클리셰를 뒤집고 비튼 사극이다.

처음 크랭크인 될 당시 TV 광고로 쓰인 영화의 예고편은 이 영화를 한편의 코미디로 광고했고, 영화의 초중반부가 상당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기에[3] 관객 대다수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평범한 코미디, 혹은 적당한 수위의 블랙 코미디 정도로나 받아들였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고 개그 뒤에 숨겨진 진지한 메시지와 기존 사극의 클리셰를 비튼 점들이 재조명되면서 한국 코미디 영화와 사극 영화의 역사에 남을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2. 등장인물

2.1. 백제 측

결국 전투가 끝나고 왕자들에게 자결하라는 말을 들으며 고민한다. 그리고 당나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다.* 부여태 (임형준 扮)의자왕의 둘째 아들. 한심한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끝까지 사비성에서 싸우자며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아들들은 웅진성으로 도망을 가자느니, 소정방에게 뇌물을 바치자느니, 아버지에게 자살을 종용하며 "우덜이 죽으면 약발이 안먹혀라.~" 라는 희대의 패드립을 날리고 있었다.중신(귀족)들을 대표하는 임자를 상대로도 강도 높은 비난을 하는 등 왕권과 신권이 갈등하는 백제 말기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 중 한명이다.* 임자 (우현 扮)
"대가리?!'' 그때는 얼마전에 죽은 제갈공명 대가리도, 나같이 생각했을 것이여![13]
의자왕의 과격한 왕권 강화정책을 마뜩찮게 여기는 백제의 기득권이자 대귀족계층인 대성팔족 측 좌평. '환관'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로 인상이 다소 알밉고 간사해보이며 목소리와 말투가 진짜 극중 아주 큰 웃음 유발을 할 정도로 엄청나게 우스꽝스러운 연기톤이 정말 일품이고 큰 백미다. 게다가 작중 백제인들은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는 설정인 가운데, 배우인 우현도 광주광역시 출신이라 한층 자연스러운 전라도 억양으로 맛깔나게 연기를 살렸다.의자왕의 국방정책에 계속 비협조적이었고 결국 백제가 멸망해버린 원인을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지만, 동료 신하와 함께 "그 나라가 우덜 나란가? 느들 부여 씨 나라제", "3년 전 왕이 왕자들 마흔한 명 죄다~ 좌평으로 임명해분 뒤로는, 우덜 나라는 없어져부럿제!"라는, 백제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를 깔끔하게 요약한 역사 고증에 상당히 중요한 대사를 날리기 때문에 작중 역할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간간히 회자되는 캐릭터라 할수있다.* 왕자 7 (고규필 扮)* 계백 처 (김선아 扮) - 특별출연* 첩자들 (김승우, 신현준 扮) - 특별출연* 거시기 母(전원주 扮) - 특별출연

2.2. 신라 측

2.3. 그 외

당 고종의 발음과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배우가 중국인이다. 영화, 드라마 뿐 아니라 1급 경극 배우로도 평가받는 40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로 유명한데, 본작에서는 소국을 깔보는 거만한 모습과 대국의 중신으로서의 위엄을 함께 갖추고 있는 소정방의 성격을 명품 연기로 멋지게 표현했다.

여기서는 소정방의 나이가 김유신보다 위라는 것을 잘 묘사했으며 첫 대면시에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나이를 물어보는데, 표정부터 김유신을 대놓고 깔보는 표정으로 "그대는 춘추가 몇이나 되오?" 묻는데 자신이 김유신보다 연장자[37]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김인문이 멋대로 건방진 말투로 통역한 것도 있지만, 김유신이 이런 소정방의 태도를 보고 의도를 눈치채면서 "알거 없다 캐라."라고 불쾌감을 표출한다.

3. 줄거리

5만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나선 김유신은 작은 조카[38]이자 신라 왕자인 김인문의 시건방진 어그로성 통역[39]+당나라 소정방의 어거지로 인해 말도 안 되는 기간 내에 황산벌을 지나 당군의 군량미를 공급해야 하는 일명 '배달' 상황에 놓인다.[40] 덕물도 앞바다까지 조공을 운반하기 위해선 백제군을 뚫어야 하는데, 백제에는 ‘김유신’의 영원한 숙적 ‘계백’이 버티고 있으니...

당나라 배들이 서해 덕물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자 백제 ‘의자왕’과 중신들은 긴장한다. 고구려를 치러 가는 것일 거라고 애써 자위하던 그들은 신라군이 남하하여 탄현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임을 확인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의자왕에게 적개심을 품은 중신들은 자신들의 군사를 내주지 못하겠노라 엄포를 놓고,[41] 의자왕은 자신의 마지막 충신 ‘계백’ 장군을 부른다. 무언의 술 다섯 잔 속에 의자왕으로부터 황산벌 사수를 부탁받은 계백은 목숨 바쳐 싸우기 위해 자신의 일족까지 모두 죽이고 황산벌로 향하는데...

응원전, 욕싸움[42], 두 장수의 일기토(맞짱), 인간장기 게임을 넘나드는 5천 백제군과 5만 신라군의 전투는 의외로 4전 4패로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당나라와 약속한 7월 10일이 다가온다.

그러나 김유신과 계백 간의 "인간 장기"에서 계백이 '거시기'의 진실[43]을 스스로 밝히게 되면서 김유신은 관창을 비롯한 화랑의 카미카제를 연상시키는 자폭 돌격과 진흙을 통해 군복을 벗을 수 없는 백제군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방식[44]으로 스스로 갑옷을 벗게 만든 후에 총공격을 감행, 백제군을 전멸시켜 승리를 거뒀고, 결국 계백은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뒤 마지막에 부인[45]과의 대화[46]를 떠올리면서 김흠순에게 참수당한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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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3.0 / 5.0


요절복통 진행되지만 결국 남는 건 가슴 속 검푸른 멍 하나.
- 이동진(★★★★)
역사와 민중, 웃음과 눈물을 총칭하는 거시기
- 박평식(★★★)

4.1. 사투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사투리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투리로 대화하며, 격식도 거의 갖추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47] 대표적으로 김인문(문무왕의 동생)이 김유신에게[48] "몇 살 묵었노?" 등이 있다.[49] 또한, 계백(박중훈)은 의자왕(오지명)과의 술자리 독대에서는 마치 친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와 격식을 따지지 않고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계백이 의자왕에게 시종일관 깍듯하게 대하면서 "아따, 뭣 헐라고 혼자서 이렇게 술을 자시고 계쇼잉?" 라고 걱정하다가, "근데 이것들은 안주도 안 갖다놓고 뭐하는 것이여!" 하며 시종들을 족치려 하는 등, 챙기기는 한다. 그리고, 의자왕의 입장에서도 계백 장군은 자신을 지켜주는 충신이자 친아들같은 존재였을테니 서로 예의와 격식을 따지지 않고 지내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각 나라의 위치에 맞게 신라는 경상도 사투리, 백제는 전라도 사투리로 대화하며, 본작에선 잠깐 나오고 말지만 후속작에선 주 세력으로 등장하는 고구려는 평안도 사투리로 대화하는데, 이 영화의 모든 대사는 사투리로 이루어진다. 거기다가 추가로 영화 첫 장면에서 잠시 등장하는 유일한 고구려 인물인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가 즉 지금의 이북 땅이었으므로 북한의 말투까지 함께 같이 들을 수 있는 건 덤. 재미있는 점은 당시 백제에서 지배층이 쓰는 말과 백성들이 쓰는 말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게 초반에 말을 통해 보여진다는 점이다. 당시 백제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로 일반 백성들은 '건길지'로 불렀다고 한다. 어찌보면 조선시대 신료들이 '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백성들은 왕을 '나랏님', '상감마마' 등으로 부른 것과도 비슷하다.

사투리는 표준어에 비해 촌스럽고 투박하다는 편견이 널리 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이 걸린 "진지한 역사적 상황"에 '세련된' 표준어가 아닌 '투박한' 사투리는 뭔가 어색하다. 보통 퓨전사극 열풍이 불기 이전인 이 시기의 역사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련된' 표준어[50]로 "무게잡는" 배우, 시적 대사를 읊는 영웅들의 모습과는 정 반대였다. 물론, 그 "진지한 사극"들도 엄밀히 말해 현대의 역사관과 표준어관에 맞춰 개편된 이미지였음은 당연하고, 모델이 되는 역사 속 인물들은 현대의 표준말 따윈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위대한 대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현대의 기업가, 혹은 정치인과 같이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춰 행동하는 인물에 가까웠을 것이므로 영화 속 사투리라는 장치와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계산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그런 "현대식으로 개편된" 이미지들을 제거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이러한 사투리의 활용이 현대의 영호남 지역갈등에 끼워맞추고 이걸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또한 삼남의 한 축인 충청도 사투리[51]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비교해서 보여주는게 영화의 재미를 더 줄 수 있어서 그랬다 하더라도 영호남에 비해 충청 지방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것에 섭섭함을 토로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이 시기 백제는 현 충남지역[52]에 수도[53][54]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전라도가 비교적 오롯이 백제의 영토였던 것은 맞으나, 당시 백제 왕족과 대다수 중앙 귀족의 근거지는 금강유역인 현대의 충남지역과 전북 일대였다.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백제인물 대부분이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지방의 역사를 고려하여 설정하는 것이 영화 내 대칭구도와 함께 중요한 요소로써 판단한 것 같다.[55] 전라도와 경상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지만, 충청도는 500년 뒤 조선에 와서야 고려의 양광도를 경기도와 나누어 구획되었다.[56] 또한 호남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금강일대까지는 원래 전라도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전라도의 사투리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하였을 것이다. 사실 신라의 김유신도 출신은 진천이고, 선대의 땅은 금관가야가 있던 경남이라서 영화에서의 경북 사투리보다 경남이나 오히려 충북 사투리가 더 고증에 맞다.[57][58]

신라군이 탐색전 때 응원가로 사용한 옹헤야와 쾌지나 칭칭나네는 사실 경상도 토속 민요라는 깨알같은 디테일도 있다.

전체적으로 두 주요 사투리 뿐만아니라 이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점을 반영해서 소소하게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병사가 있다든지, 초반 백제왕궁에서 전령이 충청도 사투리로 보고하는 장면 등을 통해 다양한 사투리로 하여금 영화를 다채롭게 하였다.

4.2. 전통적 영웅상 뒤집기

기존의 영웅상 비틀기는 영화 초반부에 고구려, 백제, 신라, 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방 사투리를 쓰면서 대화하는 정상회의 장면부터 매우 확실하게 드러난다. 당 고종과 연개소문이 서로 논박하면서 싸우는 장면인데 의자왕은 연개소문에게 붙어서 눈치만 보고, 김춘추는 당에 붙어서 따까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4국가의 지도자가 한데 모여서 정상회의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부터 국가적 정상회담이라는 것 자체가 지금에나 가능하지, 옛날 시대에는 이러한 정상회담이 더더욱 위험한 자리였다. 아주 드문 일부 상황을 빼면 왕은 자기 영토 밖으로 절대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사신을 시켰다.
당고종: 현재 동북아[59]의 긴장은 우리 당나라가 정한 국제 질서를 변방의 약소국인 너희 고구려와 백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60]
연개소문[61]: 니네 당나라 몇 년 됐서. 50년도 안 됐디, 우리 고구려는 700년 됐시야, 700년!
당고종: 연개소문! 그대가 천하의 질서를 어기려 하는가?
연개소문: 질서? 하하하하. 그거이 누구래 정하는 건디?
당고종: 그 질서는 하늘이 정했고, 짐은 하늘의 아들 천자다!
연개소문: 보라. 니 아바디 당태종이가 형제들 쳐 죽이고 황제 된 것도 하늘이 정한 질서네?
김춘추: 황제께선 지금 이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말씀하고 안있나.
연개소문: 정통성? 기래, 내래 쿠데타[62] 일으켜서 정권잡았다, 와? 김춘추, 너레 반 쪽짜리 왕족 주제에[63] 김유신이랑 짝짝꿍이 해서리 정권 잡디 않았서? 의자왕, 니 아바디도 서자디?[64]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래 누구래 있어야?[65] 전쟁은 정통성 읎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 아이야!
의자왕: 아, 고것이 정치적 경륜이제.
김춘추: 하루가 멀다하꼬 쳐들어와, 남의 백성 쳐 쥑이는게 정치적 갱륜이가? 니놈 왕 되고 지난 20년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낼이 없었데이!
의자왕: 아, 즉위 초기에 정권 장악하고 국론통일할라면 다들 하는거 아녀?
김춘추: 대야성에서, 내 딸내미 죽이삔거[66] 벌써 잊아삣나?
의자왕: 느그 신라 쒸벌럼들 554년[67][68] 옥천[69] 땅에서 우리 고조할아버지 성왕죽여서 어따 묻었어?[70][71] 지난 100년동안 느그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전쟁하믄서 있었던 일, 한번 씨부리 보까?!
김춘추: 니캉 내캉은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읎는 존재데이![72]
당고종: 그만! 너희들이 막 나가니까 나도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강대국이 까라면 까!
의자왕: 아, 뭘 까라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랑께?
당고종: 조공은 강대국이 정한 국제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약소국들의 의사 표시다.[73] 왜 고구려와 짜고 신라의 조공길을 막나?
의자왕: 아, 김춘추 저것이 싸가지 없이 노니께!
당고종: 너희 고구려는 왜 하지 말라는 천리장성을 쌓아 주변국을 긴장시키는가?[74]
연개소문: 내래 성을 쌓든 까 부수든 너래 무슨 상관이야! 함 해보자 이기야!?
김춘추: 저 놈이 감히 황제에게!
연개소문: 뭐이 어드레? 야, 김춘추!
김춘추: 야, 연개소문!
당고종: 그만! 짐은 오늘 고구려와 백제를 천하의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한다![75]
김춘추: 하모! 절마들은 저거 악의 축 정도가 아이라, 악의 덩어리라 카이!
연개소문: 뭐이야? (의자를 집어던지며) 이런 썅...
의자왕: 저새끼 저거 축에도 못끼는 새끼가 저거 말하는 것 좀 보랑께헤헿~!
연개소문: 야, 김춘추! 너 떼놈들한테 알랑방구 고만 뀌라우! 썅.(퇴장)
김춘추: 의자 너 이 새끼, 니는 내 손에 죽는데이.
의자왕: 뭐? 시방 선전포고 하는 거여, 뭐여?
영상 버전

이런 의도적인 메시지는 황산벌 전투에서 가장 극적인 두 장면들, 화랑 관창의 출진 직전 장면계백이 가족들을 베는 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관창: 아부지, 지금 누가 시켜가 이러는 거 아이지예?
김품일: 하모. 시상에 누가 시킨다고? 지 새끼 디지라고 등떠밀 애비가 어딨겠나?[76]
관창: 아부지, 이거 진짜 개죽음 아니지예?
김품일: 장난하나? 니는 뜬데이. 뜬데이. 반드시 뜬데이. 화랑 관창. 역사에 길이 남으리. 관창아. 꿈은 이루어진데이. 그럴라믄 니 그냥 죽으면 안 된데이. 정신 바짝 차리고 죽어야 한다. 폼~나게. 비~장하게. 장~렬하게!

중간엔 관창과 함께 전사한 화랑 반굴과 그의 아버지 김흠순과의 대화에서 "나도 죽고 싶다. 죽고 싶어 미치겠다. 그런데, 늙은 놈은 죽어봤자 약발이 안 먹힌덴다."같은 대사도 있었다. 이 약발 타령은 의자왕 마지막 신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젊은 왕자들이 아버지보고 죽으라며 우덜이 죽으면 약발이 안 먹혀라라고 나온다.

모두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희생하는 전통적 역사적 영웅상을 잘알고 있지만 결국 위나 아래나 약발 탓하며 남에게 떠밀려는 인간군상들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도 정치니 전쟁이니 떠들고 있는 기득권들의 이야기고 백제군의 거시기나 신라군의 뻐꾸기 주변을 통해서 보여주듯이 그저 끌려왔을 따름인 병사들은 처자식과 농사 걱정, 이유도 모르고 삽질이나 하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한탄으로 가득하다.
반굴: (자신의 개족보 가문과 일가친척 등의 혈통을 한창 읊조린다.)
백제군 병사 : 뭔 굴?(다른 병사 : 혼자왔네?) 어린 놈의 새끼 식전부터 염병을 하네.
거시기: (반굴의 혈통 자랑을 묵묵히 듣다가)(다른 병사 : 뭔 놈의 아들이랬다가, 마빠닥엔 하얗게 처발라갖고 새끼가)아가~ 울지 말고 살살 얘길 혀봐~. 근디 의심나는 점~! 조카면 조카고 사위면 사위제, 조카면서 사위는 어느 나라 개족보 얘기여??
다른 백제군: 그라제
관창: (반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개족보 혈통을 읊조리며)화랑 관창이다!
거시기: (관창의 말투를 따라하며)괜챙이다~~! 얌마! 오늘 니그 할아버지 제사냐? 뭐땜시 아침부터 족보를 씨부리고 지랄이냐 지랄이~ 얼굴 허얘가지고~ 확!
백제군 동료: 에이에이 그러지 말고...그려 곱창아! 뭐덜라고 왔냐??

여타 사극과 역사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혈통이 그 인물의 중요도를 강화하는데에 치중하여 혈통의 고귀함을 따지는 옛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관점을 보인다. 그러나 근친혼, 족내혼을 않는 서민들과 나아가 현대인들 앞에서는 의미없는 족보놀음에 불과하다. 더불어 소위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의 비장함과 죽음을 각오한 모습은 강제로 끌려나와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에겐 죽고 싶어 환장한 또라이짓 그 이상 이 이하도 아니다.
계백: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어야지... (독약을 가리키며) 그거... 마시고 먼저 가소.
계백의 아내[77]: 머시라고라잉? ...아, 시방 이녘[78]이 그런 말 할 자격있당가요잉? 아 그라믄, 우덜이 아이고 서방님 아이고 아부지 이 약사발 쳐먹고 다 뒤져불라요... 아, 이랄줄 아셨소? 예끼, 이 냥반아.
계백: 길게 끌면 추해지오... 깨끗하게 갑시다.
계백의 아내: 오매~ 아 긍께 시방 생때거튼 내 새끼들한테 자진해서 다 뒤져버리라고라잉? (계백의 아이들이 불안해 한다.) 씨만 뿌려놓고 밤낮 칼싸움(전쟁)하러 싸돌아댕긴 인간이 말이여, 인쟈 와갔고 뭣이 어쪄고 저쪄?!
계백: (일어서며 칼을 뽑는다) 그거 마시고 죽을껴, 내 칼에 죽을껴?
계백의 아내: (무섭지만 참으며 꿋꿋하게 아이들을 뒤로 보호하며 계백을 막아선다.) 나가 시집와가꼬... 이날 평생 악밖에 안남은 년이여! ...염병하곤... 그라고 인간아 니가 뭣을 해준게 있냐? 뭣을! 응? ...전쟁을 하든가 말든가, (울분에 차서) 아! 나라가 쳐망해불든가 말든가! 아, 그것이 뭣인디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분다 살려분다 그래야!!!
(말을 잃은 계백.)
계백의 아내: (구슬프게 말하며) 느그 애비 애미도 살았서도... 느그 애비 애미도... 이라고 죽여불라냐잉?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냉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냉긴다고 혔다![79] (절망스러워하며 울부짖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장께?![80]
계백의 아내: (눈물을 흘리며) 뭣이 어쩌고 어쪄?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절망스럽게 울부짖는다)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
(계백, 고개를 돌리며 이를 악물고 아내와 아이들을 벤다)
영상 버전

일반적인 역사책에서는 계백의 처와 아이들이 계백의 뜻에 따라 순순히 죽어 준 것으로 미화되어서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는 그런 거 없고 가장 현실에 가깝게 묘사했다. 정말 비정하고 슬프게 연출되었다.

계백과 김유신, 그리고 관창이 활약한 황산벌 전투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사의 무수한 영웅담 중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목들에서, "황산벌"은 "황산벌 전투"를 영웅들의 이야기로 해석하길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역사적 영웅들을 자신의 욕망을 가진 평범한 인물들로 그리고, 그들이 역사에 남을 이름에 집착하는 모습을 그린 점 등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웅이어야 마땅할 이들인 관창, 그리고 계백의 삶과 최후, 그리고 역사에 남은 그들의 "영웅적인 행적"은 용기가 아닌 광기를 끌어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쯤 강요받은 가엾은 젊은이의 자살돌격이 되고, 계백의 경우 가족들에겐 그저 위선적이고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 됐다.

이것은 후반에 미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김유신의 자조적인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 전까지의 탐색전 등에서 나오던 음악들과 달리 이때부터 배경음악부터 굉장히 슬프고 어둡게 변하면서 영화분위기가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김유신:(관창의 시체가 수레에 실려온다)"화랑들을 계속 보내라."
김흠순: 행님 니 미칬나?
김유신: 그래 미칬다. 자식 죽으라고 내보낸 니는 안 미칬나? 제 식구들 쳐 죽이고 나온 계백이는 제 정신이가? 다 미친기야... 미쳐야 하는기야! 전쟁은 미친놈들 짓인기야!!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81]

결국 관창을 비롯한 화랑들은 아버지의 부추김에 넘어가 백제군 진영으로 무작정 말타고 달려나가서 죽어버리고, 이 모습을 보면서 사기충전하여 백제군을 쳐부숴야 할 신라 병사들은 "이라고 있는 거 인제 나는 무십다..."라고 중얼거리며 출전하는 화랑들을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다.

화랑들의 자살돌격을 목격하는 계백과 백제군조차 '대체 이런 미친 짓거리를 왜 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며 분위기가 무거워진다.[82] 거기에 초반에 나왔던 즐거운 분위기의 식사시간과 달리 주먹밥으로 처연하게 간신히 식사하는 백제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본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메시지 또한 크게 두드러진다. 그리고 백제군과 신라군, 두 군대의 마지막 사기충전하는 모습 또한 초반의 응원전 분위기가 아니라 피를 입에 묻히거나 '점령하고 나면 백제의 땅은 너희의 것이다' 라는 등의 말로 전쟁의 분위기를 한껏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처절함의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순간에 부인의 유언을 떠올린 계백 역시 이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미친 짓인지를 깨닫고 다른 누구도 아닌 평범한 병졸, 이름도 모르는 병사 거시기를 탈출시키며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하나는 남겨야지. 난 자네를 남기고 싶네"라는 말을 남긴다.

그 뒤 계백과 부하들[83]은 장렬하게 뛰쳐 나가지만 궁병들에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진다. 무수한 영웅담의 영웅이 아닌, 일당백의 장수로 단 한 명으로 수십만을 상대한 장비와 같은 존재가 아닌, 너무나도 나약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4.3. 관객과 학계의 반응

역사에 대한 해석에 엄격하고, 그에 따라 영웅서사에서 벗어난 역사극의 시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이런 "영웅 없는 역사극"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영화 개봉 이후 영화평은 "감독이 역사를 단순한 코미디로 만들었다."#는 의견과 "훌륭한 역사극이다."란 의견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역사학계의 입장은 후자에 가까웠다. 사실 역사라는 학문이 제일 좋아하는 게 사서를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거꾸로 보고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근거 없이 떠들어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재해석하라는 건데, 이 영화는 여기에 훌륭하게 부합한다.[84]

황산벌 전투에서 전해지는 건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고 결사대 5천을 이끌어 김유신의 5만 대군과 맞섰고, 4차례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에 화랑들이 자살 돌격으로 신라군의 독기를 올려 결국 신라가 승리했다' 정도밖에 없으니, 어떻게 싸웠는지, 계백의 최후가 어땠는지, 신라와 백제의 언어가 어떻게 달랐는지 등은 해석과 상상의 범위인 것이다. 굳이 고증을 따지자면 김인문이 친당파처럼 나오는 등 몇 가지 지적할 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십수 년 뒤와 달리,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백제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백제, 신라와 관련해서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던 인식은 그저 '의자왕이 삼천궁녀 끼고 술이나 퍼 마시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더라', '신라는 당나라에 영혼까지 팔아서 동족을 핍박한 민족 반역자 집단이더라' 정도였다.

그러나 극중에선 의자왕 이야기, 특히 백제 멸망의 원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라면 삼국사기 등에 묘사된 의자왕의 타락 이야기를 근거로 으레 나올 법도 한 궁녀라고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며, 그 대신 백제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전술적 오판 등을 묘사한다. "그 나라가 우덜 나란가? 느들 부여씨 나라제.", "3년 전 왕이 왕자들 41명을 죄다 좌평에 앉혀 놓은 뒤로는 우덜 나라는 없어져부렀제![85]"란 백제 귀족들의 대사 등을 통해서는 백제 왕실과 귀족 집단의 분열과 반목 양상을 입체적으로 묘사해 주고, 나당 연합군의 진로를 두고 고구려로 갈지 백제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백제로 온다는 소식에 대경실색해서는 패닉 상태에 빠지는 백제 지배층의 모습 또한 묘사했다.

백제 지도부가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오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실제에 가깝다. 일단 한반도 서쪽 연안을 지나 중국으로 가는 연안 항로를 대체하는, 황해를 직접 가로지르는 직항 항로는 삼국시대 말기에야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그 새로운 항로로 13만 대군이 날아오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기 어렵다. 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백제의 충신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성충의 상소문인데, 그걸 읽어보면 "어라하,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여자들이랑 그만 노세요!" 라는 식의 언급은 전혀 없으며, "어라하! 당나라와 신라가 분명히 쳐들어옵니다! 그러니 대비를 꼭 하시고, 특히 이러저러하게 준비하세요!"라는 것이 골자다.

또한, 신라와 백제를 두고 같은 민족 어쩌고 하는 일반 대중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려 1세기에 걸쳐서 이어진 지긋지긋한 피의 원한 관계뿐이다. "의자, 네놈이 왕 되고 지난 20년 동안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데이!" 라는 김춘추의 노기 어린 대사라든가, "느그 신라 씨벌놈들, 554년 옥천 땅에서 우리 고조 할아버지 성왕을 죽여서 어따 묻었어? 지난 100년 동안 느그 조상이랑 우리 조상이랑 전쟁하면서 있었던 일들 한 번 씨부려 볼까?" 라는 의자왕의 욕설섞인 대사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나당 연합군 내부 사정을 두고도 객관적이고 적절한 묘사가 이어진다. 신라 왕인 김춘추를 관등서열의 말단에 놓고 당나라 사람들을 그 위에 놓으면서, 신라군을 당군의 지휘 하에 두어 당나라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실히 하려는 모습과, 그걸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배 돌려 그냥 갈까?"하고 묻는 당군의 질문 앞에서는 뭐 씹은 표정만 지어 보이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따를 뿐인 신라군의 처지를 잘 묘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신라가 당나라에 길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땐 당나라 대장 소정방에게 칼을 뽑아 들며 "느그 당나라 개새끼들, 내 언젠가는 이 땅에서 싸그리 쓸어버릴끼다!" 라고 외치는 신라 대장군 김유신의 대사로 신라도 마냥 끌려다니기만 했던 게 아니며, 약소국임에도 최소한의 자존심만큼은 분명히 지키고자 했다는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실제로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이후 불과 2년 뒤에 670년 나당연합은 깨지고 나당전쟁이 시작된다. 이유는 당이 여전히 백제땅과 대동강 이남에 당군을 주둔시키고 한반도 자체를 복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신라 역시도 당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나당전쟁이다. 670년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2만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하며 시작된 전쟁은 7년간 이어지고 그 막바지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에서 대패한 당나라는 때마침 일어난 토번의 발호로 여러전선을 유지하기 힘들어 결국 물러난다. 물론 병력은 물렸지만 여전히 백제와 고구려 왕족들을 내세워 한반도 복속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전쟁 후 신라와는 완전히 적국으로 돌아선다. 이 관계는 성덕왕 시절까지 이어지고 이때쯤 당은 측천무후 시대를 거치며 여러 외세와의 전쟁으로 한반도에 신경을 쓰기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신라의 영토를 인정해주고 사실상 손을 털었다. 성덕왕 시절 다시 국교를 회복한 신라와 당의 관계는 당의 멸망시까지 이어진다.

비판 중에서는 이 영화가 애국심을 훼손하는 풍자와 비틀기라며 이준익 감독이 좌빨이라는 등 아니꼽게 보는 극우보수 쪽의 시각도 있다. 즉 '관창과 계백의 장렬한 애국심'을 조롱하며 폄하하고 '국가허무주의'를 부르짖는 영화라는 것. 극우 논객 조갑제도 이런 시각으로 월간조선조갑제닷컴을 통해 악평을 남겼다. 조갑제닷컴의 글, 그에 대한 반박을 담은 대자보, 누가 관창을 아름답다 캤노?.

하지만 관객들에겐 대체적으로 그럭저럭 잘 만든 코미디 영화로 받아들여졌고, 황산벌은 한국 코미디 영화 역사에 길이남을 흥행에 성공하며 대박을 거두었다. 이 흥행으로 키드캅 같은 나홀로 집에의 아류작을 만든다든가 성스러운 피 같은 영화를 수입해왔다가 큰 손해를 본다든가[86] 하며 듣보잡 감독으로 전전하던 이준익 감독의 명성을 크게 알린 영화다. 참고로,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로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제작자로서 참여한 달마야 놀자가 대박을 거뒀었다.

5. 여담

6. 명대사

정통성? 기래, 내래 쿠데타 일으켜서 정권 잡았다, 와? 김춘추, 너레 반쪽자리 왕족 주제에 김유신이랑 짝짝꿍이 해서리 정권 잡디 않았서? 의자왕, 니 아바디도 서자디?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래 누구래 있어야? 전쟁은 정통성 읎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야야!
연개소문
거시기 손자병법에는 말이여, 지키는 쪽 군사가 10분지 1만 돼야도 이길 수 있다고 혔어.[103] 저짝 5만, 이짝 5천. 5만 대 5천, 간단한 산수 아니여? 우리는 명색이 결사대여! 아, 결사대가 일당 십도 못혀?! 아그들에게 단단히 일러라. 죽기 전에 신라 놈들 열놈 죽였는가 나한테 확인받고 뒤지라고! 알겠능가! 할당량 못 채우고 뒤진 놈은 나가 아주 죽여버릴겨 그냥...
계백
그러니께 이번 여그 황산벌 전투에서 우리의 전략 전술적인 거시기는 한 마디로, 뭐시기 할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104] 바로 요거여. 알겄제?
계백
우리는 한 끼를 먹어도 반찬이 40가지가 넘어! 이 X벌놈들아![105]
거시기
점마들, 얼라가 어무이 뱃속에서 나올 때도 '워메 X벌!' 그카고 나온다 카는 놈들 아이가...[106]
신라 병사
니(계백)는, 전쟁은 알아도 정치는 모른데이. 정치를 모리는 장군은, 부하들을 개죽음하게 만드는 아주 무책임한 장군이데이.[107]
김유신
계백아. 인간은 지가 아무리 날고 긴다 캐도, 지 입으론 지 팔꿈치도 핥지 못하는 존재데이.
김유신
직위해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슥이. 가 적진에 뛰어들어 목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칼로 내 목을 치라!! ...니나 니 애비는, 정치는 알아도 전쟁은 모린데이.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기야!
김유신
금일부로 붕우유신, 임전무퇴, 화랑도 세속오계, 그거 다 개소리다. 화랑하면 관창, 관창하면 화랑. 그거면 끝!
김품일
아가! 울지 말고 살살 얘길 혀봐~! 근디 의심나는 점! 조카면 조카고 사위면 사위지, 조카면서 사위는 도대체 어느 나라 개족보 얘기여?
거시기
거시기:(신라어로)니 주둥아리에서 존대말이나 좀 나오라 캐라~ 계백이가 니 친구가?
동료 병사:(거시기 투구를 한 대 때리며)"그럼 계백이가 니 친구여?"
거시기와 동료 병사
총공격? 지금 할까? 전구운~! 돌겨억!! 공격하라! 전군 공격하라! 전구운~! 총~ 돌격하라! 공격하라! 공겨억!! 어엉? 총공격 안 하네~? 전쟁엔 말이다. 절차가 있는 법이데이.[108]
김유신
(계백: 관창이라고 혔냐. 야야, 니 몇 살이여?)
묵을 만큼 묵읏다 와!
(계백: 시방 누가 시켜서 이러는가?)
니는 누가 시키가 니 가족을 몰살시킸는갑제? 앙?!![109]
관창
좋아, 김유신. 핥아주지. 목을 쳐라.
계백
그래 미칬다. 자슥 죽으라고 내보낸 니는 안 미칬나? 제 식구들 쳐 죽이고 나온 계백이는 제정신이가! 다 미친 기야. 미쳐야 하는 기야. 전쟁은 미친 놈들 짓인 기야!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110]
김유신
자랑스러운 백제의 아그들아! 뭐달라고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발란 것이더냐... 시방. 그것이 바로 죽음의 맹세 아니여?! 사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여!! 이 징헌놈의 인간 시상에! 확실한 건 딱 하나뿐이다! 고것은 바로! 사내가 미련과 변명을 버리고, 우리 오늘 여그 황산벌에서 (칼을 뽑으며) 아쌀하게!! 거시기 해불자!!!문맥이 이상하지만 넘어가자
계백
그랬구마. 거시기 해버렸구마.[111]
김유신
우린 당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기다. 알긋제? ...우리는...우리 자신을 위해... 살(쌀) 배달 가는 기다.[112]
김유신
(최후의 돌격 직전에) 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장기판을 싸게 걷어야제! 전군! 돌격!!
계백
"와 이리 덥노...?"
"겁나게 덥구마이..."
김유신과 계백의 최후의 문답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냉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냉긴다고 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장께?!)
뭣이 어쩌고 어쪄?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
계백의 아내
우리들이 죽으면 약발이 안 먹혀라!!!
의자왕의 아들들
느그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믄... 고구려보다 느그들을 먼저 칠 끼다! 느그 당나라 개새끼들... 내 언젠간 이 땅에서 싸그리 쓸어버릴 끼라!!![113]
김유신
인자 당나라하고 고구려는 대장군하고 내가 맡을기여. 아부진 빠지소!
김법민(후일의 문무왕)

7. 관련 문서



[1] 김승우, 신현준, 전원주, 오지명, 김선아 등 호화 캐스팅이다. 도깨비, SKY 캐슬로 유명해진 김병철도 신라측 첩자로 등장한다.[2] 실제로 15세 치고는 상당히 잔혹한 전투씬과 18세로 때려도 블러 처리가 될 각종 욕설로 인해, 비디오가 나올 때 가벼운 코미디인 줄 알고 아이들과 보다가 난리난 부모들이 많았다고 한다.[3] 중반에 펼쳐지는 욕지거리 배틀은 이 영화의 등급(15세)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성인적 개그를 보여 준다. 특히 하얀 물 뿜는 그 장면이 대표적이다.[4] 본인이 아프리카TV에서 밝혔다.[5] 실제로 중국인이다.[6] 반말이 아니라 '네', '예'의 사투리.[7]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계백의 출생 시점은 물론 황산벌 전투 이전까지 어디에서 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패망하면서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데다 현재 남아있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도 신라 중심의 기록이 많기 때문.[8] 일본어 무텟포(無鉄砲)에서 유래한 말로, 텟포는 철포, 즉 조총을 뜻한다. 이 시기엔 조총은 고사하고 핵심 재료인 화약조차도 생소하다시피 간신히 존재하니 당연히 무대뽀라는 표현도 없었다.[9] 자신과 왕자들이 가진 병력으로 사비성을 방어하고, 중신들 휘하의 군사를 둘로 쪼개 탄현과 기벌포를 방어하라 하였다.[10] 실제 영화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백제와 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적절한 표현일지도?[11]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도 비록 황산벌에서 패한 이후이긴 하지만, 한반도 전역을 지배할 의도가 있었던 당군이 여러차례 백제가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며 '쇼부'를 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거절하며 무조건적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을 보아 황산벌 전투의 결과와 관계 없이 계획은 실패할 운명이었다.[12] 실제로 백제는 들이닥친 소정방과 당군에게 사신과 예물을 보내며 망국을 막아달라고 애원했으나 소정방이 거부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13] 제갈량의 사망은 서기 234년, 황산벌 전투는 660년이므로 얼마전 치곤 상당히 시대 차이가 난다.[14]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역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15] 사실 이 부분도 말투와 행동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지 내용을 찬찬히 보면 하나같이 뼈가 들어 있다. 그야말로 온갖 실전 경험을 겪은 신라 최고의 명장다운 베테랑의 관록이 묻어 나온다.[16]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한 매제이므로 손아래 서열이다. 그런데 또 김유신의 장인이기도 하다![17] 신라는 진골귀족들 간의 근친혼이 성행했고, 이는 당시 김유신 휘하 신라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다.[18] 백제, 고구려[19] 직후 의자왕한테 축에도 못 꼈다고 디스당한다.(...)[20] 정상회담에서도 나오지만 의자왕이 자신의 딸을 죽였다 라면서 계속 의자왕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언급한다[21] 여담이지만, 서동요 설화가 사실이라고 전제하면 의자왕과 무열왕은 둘 다 진평왕의 외손자로 사촌 간이다(...). 다만 2009년에 미륵사지 서탑에서 무왕의 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명시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어 서동요 설화가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는데, 이 영화는 2003년 작이다.[22] 백제측 대표가 황산벌에서 자신들이 4번 승리했다며 득의양양하자 고작 한다는 반론이 "첫끗빨 = 개끗빨"이어서 작품 초반에 당나라의 이익을 우선하겠다고 대놓고 선포한 신라왕자 김인문조차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흘겨볼 정도였다.[23] 문무왕이 되어 등장하는 후속작 평양성에서는 황정민이 담당한다.[24] 거시기의 정체를 간파한 김유신이 총공세 전 갈등이 있었던 지휘부를 하나로 다잡기 위해 주변 신라군 지휘관들이 혈통과 친인척 관계로 엮인 '가족(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김법민에게 "법민아. 니 내 조카제?" 라고 질문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이전까지 적극적인 공격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김유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던 김법민 조차도 이 장면을 이후로 김유신을 따르고 마지막에는 김춘추 대신에 자신이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공격을 맡을 것임을 선포하는 부분이 백미이다.[25] 실제 역사에서는 아버지 무열왕뿐만 아니라 문무왕 역시 백제 멸망 전쟁에 직접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마지막 태자인 부여융에게 침을 뱉으면서 백제가 자신의 누이죽였음에 대해 일갈하기도 하였다.[26] 그렇긴 해도 신라인으로서 정체성은 있는지 전후 협상 회의에서 백제 사신 상대로 기를 못펴는 신라측 외교관이 뻘소리를 하자 눈치를 주기도 하고, 김춘추가 당나라 마음대로 백제를 처리하겠다는 것에 분노하여 "인문이 니는 그동안 뭐했나!"라고 호통을 치자 (신라에게 불리한)상황을 만든 김유신이 아닌 자기 탓을 하는 것에 대해 어처구니 없어 하기도 한다. 즉 신라에게 불리한 상황이 된 거 자체에 대해서는 자신도 신라의 왕자로서 불쾌하지만,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김유신에게 있다는 것이라는 입장.[27] 이건 사실 공직자로써의 기본적인 자세다. 한국계 최초로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철저히 미국대사 신분을 강조하며 공식 석상에서는 무조건 영어로 발언할 정도였다.[28] 그런데 이 장면 앞에서 김유신 본인이 "신라는 말투가 위아래가 없다."는 왕인 김춘추의 말에 대해 "살갑고 좋다."고 쉴드를 쳐버려서 자업자득이 되어 버렸다.[29] 거시기 암호 해독을 위해 글자 조합을 하기도 하는데, 까막눈이라기보다는 그냥 천자문을 전부 다 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장군이라면 어명을 받는 문서를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전문적인 교육도 받았을테니 글을 모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암호 해독관이 거, 시, 기 자가 발음되는 한자를 다 모아놓았던 나무 조각을 김흠순이 자기도 한 번 해보려는 김품일이 뭐라고 하자 "아, 내도 많이 맞췄다. 거시... 기!"라며 한자를 보여줬는데 전부 '기'자로 발음 되는 한자다. ()[30] 김품일의 형인 대야성주 김품석은 김법민의 누이 고타소의 남편이다.[31] 김유신도 그 자리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김품일이 "그럼 우리도 계백처럼 처자식 다 죽이고 오면 총공격 할거냐?"고 무대뽀로 공세를 주장하자, "가만있어봐라, 진골~" 하며 비꼰다.[32] 뒷날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조영규 역을 맡은 배우다.[33] 이 직후 전쟁은 정통성 없는 것들이 정통성 세울라고 하는 기야야!!라는 대사 또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명대사다.[34] 한국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배우라 사극 '정도전'에서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역할을 맡기도 했다.[35] 오프닝부 사자대면 씬에서 김춘추와 의자왕이 과거의 일로 욕으로 티격태격하자 듣다못해 내뱉은 말[36] 그리고 이 발언을 김인문이 "배 돌려 그냥 갈까?" 라고 간결하게 초월 번역한다. 와 보는데? 통역 다 했구마[37] 소정방이 592년생, 김유신이 595년생이다.[38] 큰 조카는 당연히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으로 극 중 배역은 안내상이 맡았다.[39] 해당 배역 배우였던 류승수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예를 들면 소정방이 "그대 춘추가 어떻게 되오?"라고 물으면 "몇살 묵었노"라고 통역하는 식.[40] 이 장면에서 고증오류가 있는데, 그려져있는 세계지도가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삼국시대의 지도를 구하기 힘들었던 듯.[41] 심지어 그 지출하는 군대도 왕실 쪽의 군대는 사비성을 지키고 귀족측의 군대가 탄현과 백마강에서 신라군과 당군을 상대하라는 누가봐도 귀족들이 손해볼 지시를 의자왕이 내렸다. 이러니 귀족들이 "해준 건 쥐뿔도 없으면서..."라고 투덜댈 수밖에.[42] 신라군 선발대 6명이 백제 진영에 와서 창과 방패를 내던진 다음에 먼저 섹드립을 위주로 백제군을 도발한다. 그러나 백제군 측에서 거시기를 포함한 보성 벌교 출신 병사 세 명을 앞세워 수위 자체가 다른 패드립과 잔인한 욕을 퍼부으며 곧바로 응수한다. 신라군 선발대는 결국 멘탈이 나가서 리타이어...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신라군은 욕을 할 때 가볍게 폴짝거리는데 백제군은 기합을 넣고 가오를 잡은 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며 욕을 퍼붓는다. 벌교 병사 세 명의 욕에 맞춰서 "X벌놈들! X벌놈들!"하고 합창하는 나머지 백제군도 압권.[43] (승리하거나)죽을 때까지 갑옷을 벗지 않는다. 그동안 계책 없이 우직하게 밀고들어오던 계백이지만 나라의 사활을 건 전투이기에 혹시 모르는 비장의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수를 두고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 없었던 김유신은 계백의 입으로 '거시기'가 무엇인지 듣고, 남겨둔 비책따윈 없이, 평소처럼 우직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영화 초반부에 계백이 휘하 장군들에게 '전쟁터에 나갈 땐 아예 갑옷을 꼬매입고 와 부러라.'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사가 있으므로, 관객들은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을 신라인들만 골머리를 앓았다.[44] 부관이었던 천존에게 '병사들에게 지시해서 투석기를 전진배치시키고 구덩이를 파다 찰흙덩어리를 만들라.'고 시킨다.[45] 김선아[46] 계백이 속담 중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하며 가족들에게 자결을 종용하자, 아내는 이 속담을 비틀어서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겨, 인간아!"라고 절규하며 말하고, 이에 계백은 고개를 돌리고 칼을 내리친다.[47] 김춘추 왈, "우리 신라는 다 좋은데, 이 위아래 없는 말투는 싹 뜯어 고쳐삐야 한데이" 이에 답하는 김유신 왈, "어데, 이기 우리 전통아이가, 얼메나 살갑고 좋노?"[48] 김유신은 660년 기준 김인문보다 나이가 2배 이상 많으며, 김인문의 외삼촌이기까지 하다.[49] 이 경우는 김인문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질문을 통역한 것이라서 격식을 따지기에는 좀 문제가 있어보이긴 하지만 일부러 굉장히 건방진 말투의 초월번역이다. 사실, 소정방의 말투가 건방질지언정 아랫사람에게 격식있는 말투로 위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50] 사실, 과거 한 때 방영되던 TV사극 중에는 배우들 대사가 옛 궁중 말투를 땄다 주장하려는 듯한 특이한 말투를 쓴 작품도 있었다. 한중록을 드라마로 만든 KBS의 '하늘아 하늘아'의 말투가 꽤나 유명하다. 하지만 시청자 반응이 별로라 이어지지 못했다.[51] 백제왕궁에 당의 침공을 알리러 온 전령이었다. 말 하는 걸 듣다가 답답해서 속터져하는 백제 조정이 나온다.[52] 나당연합군의 침공 당시 영토기준으로 현 충남 대부분은 백제, 충북 일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53] 서울(BC18년~475년), 공주(475년~538년), 부여(538년~660년)[54] 우리가 주로 백제를 사비시대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큰 사건 위주로 다루는 역사교육의 영향이 크다. 백제의 존속기간 중 가장 오랫동안 중심지였던 곳은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이다. 수도가 남하하였다 하더라도 주요 관리와 사직(社稷) 그리고 상당수 백성을 이끌고 가기 때문에 왜 영화 속 서울말씨(표준어)를 구사하는 백제인물은 없냐는 식의 딴지도 나와야한다.[55]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무왕의자왕은 즉위 전 지역기반이 외곽인 지금의 익산시인 금마저였고 백제 핵심부의 대성팔족과 화끈하게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당시 왕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호남 사투리를 써도 고증오류는 아니다.[56] 때문에 '왜 1500년 전 백제가 현대의 지방 사투리를 안 썼냐'라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57] 타 지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경상도의 두 권역. 해안의 경남과 내륙의 경북 사투리는 많이 다르다.[58] 아무래도 현실적 한계로 사투리의 차이로 진영 내 갈등요소를 세세하게까지 보여주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두 주연배우가 모두 서울 출신인 탓인지 사투리 구사는 발연기이기도 했고, 주제의식을 사투리로 100% 표현해낸 것은 김법민으로 분한 대구 출신의 안내상 뿐이다. 김인문 역의 류승수는 영남 사투리 자체는 정확하게 구사하긴 했는데 부산 출신이라 사로계 진골이 아닌 가야계 말투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김춘추 역의 이호성(호남 출신이다)은 연기톤은 위엄있게 잡았지만 수도권 억양에 어휘만 경상도 사투리를 넣은 것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들려줬다. 다만 이호성과 정반대로 대구 출신인 김선아의 악에 받친 호남 사투리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59] 아시아(아세아, 亞細亞)라는 단어가 실제로 한중일 지역에 알려지게 된 것은 마테오 리치가 Asia를 한자로 번역하면서부터이다. 외국어 대사이긴 하지만 영화 시작부터 정통 사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다.[60] 이하 고종의 대사는 모두 중국어로 이루어져 있다. 담당 배우 김육룡은 중국에서 연기를 배웠거나 중국어를 따로 배운 듯한데, 이후 필모를 보면 대부분 사극에서 당나라 장수나 명나라 사신 등 중국어 연기를 하는 중국인 배역을 다수 맡아왔다. 현재 의정부에서 중식당을 영업하는 중이다.[61] 참고로 여기 있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군주가 아니다. 그러나 군주는 아니어도 그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해 권력자가 되었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주나 다름없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62] 쿠데타는 프랑스어에서 정변(政變)을 뜻하는 Coup d'État 에서 유래된 말로, 실제로는 몇백 년 후에 만들어진 단어인데다 한반도에서는 개화기 전까지는 쓰일 일이 없는 단어였다. 다만, 코미디 장르인 이 영화의 특성상 고증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고,4국 회담하는것 부터 고증은 날아갔다. 한번에 알아듣기 쉽도록 쓰인 것이다.[63] 김춘추신라 역사상 최초로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왕이 되었다.[64] 무왕의 출신이 불확실한 것을 반영한 대사인 듯.[65] 연개소문이 말했듯 여기 4명은 정통성을 따지기엔 죄다 좋지 못한 출신배경을 가졌다. 영화에서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당고종과 의자왕도 모두 자기만의 문제점이 있어서 당고종은 원래 왕위계승과 먼 9남이었지만(적자로서는 3남) 태자의 지위 불안정과 이에 따른 도전 속에서 양자 모두의 몰락과 정치적 고려 속에서 어쩌다 보니 태자가 되고 계승도 한 것이다. 의자왕의 경우도 모계혈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40살이 되어서야 태자로 책봉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아래에 말하는 의자왕의 '정치적 경륜' 등의 말은 그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부러 시선을 외국으로 돌린 것으로 여길 여지가 있다.[66] 대야성 전투 당시 무열왕의 딸 고타소가 사망한 것은 백제군의 침공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고, 남편인 김품석이 내분으로 인해 대야성문이 열려버리자 아내 고타소를 죽여버리고 자신도 자결한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은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기도 했고, 어차피 김춘추로선 구실이야 갖다붙이면 될 일이었다.[67] 서력기원을 인용했는데 쿠데타처럼 관객을 위한 대사다.[68] 참고로 예군묘지명에는 의자왕이 참제(僭帝) 했다는 것을 토대로 의자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69] 여담으로 옥천의 삼국시대 당시 명칭은 고시산군으로, 옥천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시기부터이다. 이 역시 관객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표현이다.[70]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낮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군은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 물론 의자왕에겐 어따 묻은 것인지보다 그냥 죽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근데 실제 역사에서 먼저 뒤통수를 치고 나선 것은 백제 측이었다. 국경선에 목책을 건설하거나 가야, 왜 측과 신라를 선제공격하려고 모의를 하거나, 스스로 포기한 한강유역을 신라가 먹었다는 이유로 딸을 시집보내 신라를 안심시켜 놓고 군사행동을 성왕이 벌였다.[71] 성왕 재위기 초부터 나제동맹에는 균열이 가고 있었는데 까보면 신라 책임이 더 크다. 예를 들어 도살성-금현성을 두고 공격을 주고받던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끼어들어 두 성을 죄다 탈취한 적이 있었고(두 성이 이미 고구려에게 빼앗겨 있었지만 그렇다고 신라가 차지할 일은 아니었다.) 안라회의, 사비회의 등에서 신라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한 신라 몰래 고구려와 관계개선을 한 적도 있고. 그리고 한강유역 문제는 사실 백제 쪽에서 할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백제는 죽 쒀서 신라 준 꼴이 돼버렸다.[72] 보면 알겠지만 의자왕이 '니가 니 딸과 사위 죽였다고 이카는데 느네 조상이 우리 조상 죽인건 생각 안 나냐?' 식의 논박에 정론으로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서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아직 관산성 전투가 신라의 통수로 촉발되었다는 당시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73] 실제로 조공-책봉 관계는 주나라 시기의 천자국-제후국 관계가 중원을 넘어 국제 단위로 개편된 확장팩 버전(?)이다. 이러다 보니 조공책봉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는 없고 조공을 바치는 쪽이 조공을 받는 쪽에서 어느 정도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를 취했다.[74] 정작 천리장성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영류왕 때 일이었다. 다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도 공사가 계속되었기에 연개소문에게 문제를 삼는 건 합리적인 일이며, 삼국유사에는 아예 장성 공사 자체가 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되어 있다. 덧붙여 링크에도 나오지만 천리장성이라는 말도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던, 관객들을 배려한 용어다.[75]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부시 미 대통령의 그 발언에 대한 패러디.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대본에는 왜 당나라 기술자들을 빼돌려 초강력 쇠뇌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냐는 대사도 있었다.[76] 사실 김유신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고위층의 아들들을 자살돌격시킨 것이다.[77] 배우 김선아카메오로 출연했다.[78] 당신을 뜻하는 사투리.[79] 사실 이 대사는 고증 오류다. 후량 시기의 용장 왕언장에게서 유래한 말이니 약 300년 뒤의 일이다. 몇 백년 후에나 나오는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연도를 세거나 '쿠데타' 같은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작품에 이 정도는 별 의미도 없지만..[80] 더욱이 계백은 일개 졸병이 아니라 그야말로 백제의 마지막 충장(忠將)이었기 때문에 그가 전사하면 유가족들은 적들로부터 죽음보다 더욱 치욕적인 능욕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또한, 그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반굴과 관창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81] 이게 생각보다 의미심장한 장면인게 김흠순은 관창의 시체를 보자 마찬가지로 죽은 아들을 떠올리고 분노한 나머지 상관이자 사령관인 형에게 미쳤냐고 대들고, 김유신은 너나 계백은 안 미친줄 아냐고 반박하면서도 하극상에 대해선 그냥 넘어간다. 김유신 또한 이런 짓이 좋아서 하는게 아니며 김흠순에게 혹시라도 있을 해코지를 막기 위해 적절한 대처를 했다는 의미.[82] 이미 한 번 생포되었다가 계백의 명령으로 풀려난 관창이 다시 한 번 찾아와 잡히자 거시기 옆에서 나름 비중있게 등장하던 백제군 병사 한 명은 자신의 지휘관을 모욕한 적군임에도 '이놈아, 뭣 헐라고 또 왔냐잉?'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한다.[83] 계백을 포함해도 단 넷 뿐이다. 심지어 계백을 제외한 3명 다 간부들이다. 즉 순수하게 일반 병사는 거시기 혼자만 살아남았고 그 이후엔 간부들도 모두 죽고 거시기만 살았다.[84] 사료를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는 순간 학문이라고 할 수 없고, 차라리 종교에서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마 정도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장금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좋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도전보다 몇 줄 없는 기록을 근거로 미시사적 측면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대장금 쪽이 현대 역사학의 흐름에 더 맞다.[85] 삼국사기에도 나온 실제 기록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왕자 41명'은, 원문을 따르자면 '서자 41명' 을 모두 의자왕의 친자식들이라기보다는 의자왕의 종친이나 왕실의 친위세력들을 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인데, 의자왕이 "우리는 모두 가족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줬을 것으로 추정한다.[86] 그나마 황산벌의 성공으로 이때 진 빚을 겨우(제작한 흥행작 달마야 놀자 흥행도 이 빚을 갚는 데 썼다고 한다.) 갚았고, 왕의 남자의 흥행으로 비로소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한다.[87] 계백의 자식들이 옥수수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88] 옥수수가 유럽에 전래된 건 콜럼버스의 교환이 이루어진 시기이고, 한반도에서는 조선 시대에 (정확히는 16세기쯤에)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알려졌다.[89] 보성군 벌교읍은 원래 낙안군 소속이었다. 참고로 낙안읍 지역은 순천시로 병합됐는데 현재는 낙안면으로 떨어진 상태다.[90] 이 말을 들은 계백은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안쓰러운 표정으로 관창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관창의 목을 치라고 명령한다. 어차피 살려서 보내 봐야 또 다시 자살 돌격에 내몰릴 게 뻔하고, 그러면 관창이 한없이 더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에 남은 명예라도 지켜주기 위해 죽여준 것.[91] "계백이 갸~ 작전? 그른게 어뎃노? 계백이 금마 작전은 그냥 열씨미 싸우는거데이. 맨날 행님 니 혼자 잔머리쓰다가 깨진 거 아이가?" 대사가 나온다.[92] 실제 김인문은 신라의 왕을 시켜준다는 것도 거부하는 등 신라인으로서의 자세는 지켰다고 한다.[93] 순정만화 리젠드에서도 비슷한 수법을 쓰기는 했지만 묻혀버렸다.[94] TK - 민주정의당, 부울경 - 통일민주당, 호남 - 평화민주당, 충청 - 신민주공화당[95] 차라리 전근대 시기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는 지역갈등은 서울(경기권)-평양(서북권) 간 관계이다. 이쪽은 고려 때 개경파와 서경파로 나뉘어 권력 투쟁을 벌였던 것에서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서북민에 대한 차별로 홍경래의 난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말에는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널리 전파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조선 관료 사회를 장악했던 서울-경기권과 경쟁하였고, 일제 시대에도 경성부-평양 간 갈등은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심지어, 이는 현대에 들어서서 이념갈등군사적 충돌대립까지 합쳐지면서 오늘날 남북관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96] “현존하는 한자 중엔 '거'자가 77개, '시'자가 89개, '기'자 176개가 있심더. 이 글자들을 조합해보면……. 모두 1,206,128가지의 '거시기'(...)가 존재합니더”[97] 암호해독관이 막대기를 들고 거시기와 머시기를 해독하는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수능 영어 듣기평가가 시작할 때 나오는 루이지 보케리니미뉴에트 E장조가 흘러나온다. 물론, 관객들은 영화 초반에 계백이 부하들에게 명령하는걸 봤으니 알고 있다.[98] 사실 갑옷의 주목적은 이러한 베기 공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온몸에 힘을 실어 점으로 뚫는 공격은 몰라도 선으로 휘두르는 베기 공격은 일반인들의 상상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일선의 병사들은 상당히 안전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99] 그리고 이 병사(이문식 분)가 어머니와 상봉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어머니역이 전원주. 영화가 개봉하던 무렵의 통신사의 CF를 패러디했다. 영화 개봉당시 유행하던 것을 패러디한 부분이 여기저기 들어가 있어서 시간이 흐른 지금 보면 과장되거나 쓸데없는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100] 신현준은 이전에 박중훈이 주연을 맡은 '불후의 명작'에도 카메오로 출연한다. 답례로 손목시계를 받았는데, 황산벌에서는 추어탕 한그릇을 얻어먹었다.[101]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갑옷을 벗고 편히 저승으로 가 달라" 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침 황산벌 전투는 한여름인 음력 7월에 벌어진 전투였다.[102] 다만 천년지애에선 황산벌 전투씬이 안 나왔다.[103] 손자병법을 잘못, 혹은 일부러 틀리게 인용했다. 손자병법 모공편에서는, 10배가 되면 포위하고, 5배가 되면 그냥 공격하고, 2배이면 적을 나눠서 공격하고, 비슷하면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전력이 적으면 지켜보고, 그래도 안 되면 피하라고 했다. 즉, 손자병법에서는 적과 병력차가 너무 크면 지키려고 하다가 적에게 포위섬멸당하기 때문에 피하라고 하고 있다. 계백이 몰랐거나, 혹은 알면서도 사기 진작을 위해서 일부러 틀리게 인용한 것이다. 다만 백제군은 포위된 게 아니라 길목에 해당하는 지형에 목책성을 짓고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있는데다 계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5천으로 5만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는 판단은 그렇게까지 틀리다고 볼 수는 없다.[104] 신라군이 이 작전을 해독하는데 상당히 애먹는데 '죽을때까지 갑옷을 벗지 않는다'이다.[105] 위에 언급한 보성 벌교 출신 병사들이 한창 욕질을 할 때. 순간 백제군에서도 정적이 흐르다가 거시기에게 다른 병사가 "이 X벌놈아!"하며 꾸짖어 간신히 흐름을 유지한다. 보성 출신이 다소 뜬금없이 전주 특성을 얘기해서 그런 듯. 그 전에 신라군이 하나씩 욕설을 해댈 때 말빨 딸리는 병사가 "이~ 빙시야~"라고 어설프게 욕설을 하자 동료 병사가 "뭐고 이 빙시야?"하면서 뒤로 밀쳤는데 양국이 한 병사씩 어설픈 짓을 하는 걸로 대비시키기 위한 대사로 볼 수 있다. 앞의 두 병사가 끔살 수준의 욕설을 했는데 뜬금없이 엉뚱한 반찬 이야기가 나오니 리듬이 끊길만도 하다. 근데 어떻게 보면 사기저하라는 목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인 욕이기도 하다. 이 당시 신라군은 농사 때려치고 올인 러시를 온 것이며, 당군 식량도 대야 했기 때문에 보급에 온갖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은 전쟁터에서 한끼에 반찬 40가지씩 곁들여서 배부르게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편 이 대사는 배우 이문식이 신라군을 도발할 수 있는 대사를 밤새 연구한 끝에 전라도 지방이 상대적으로 평야가 많다는 점에 착안하여 만들어낸 대사라고 한다. 이준익 감독은 백제 병사들의 분량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며 대부분 배우에게 일임했다고 한다.출처[106] 보성 벌교 출신 병사들의 욕 세례에 멘붕해 실려나가며 한 말[107] 바로 계백이 "너는 정치를 잘 아는 장군잉게, 쌀 배달 다니는구만."이라고 되받아치고, 이에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지만 결국 김유신의 말대로 됐다.[108] 계백이 농성을 하는 바람에 당군과 합류하기로 약속했던 날까지 못 갈 것 같자 신라군 부관들이 초조해하기 시작하고, 결국 이기느냐 지느냐는 다음 문제고 바로 총공격을 해야 한다는 파와 적의 본의를 알 때까지는 일단 대치해야 한다는 파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김유신은 병사들의 사기도 영 엉망이고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은 무리라고 주장하지만, 김법민(훗날의 문무왕) 등이 계속 반발하자 총공격을 외치며 진중 곳곳을 뛰어다니는 몸개그를 보인 것이다. 물론 병사들은 "저 양반이 갑자기 미쳤나?"라며 수군거리기만 할 뿐. 결국 본영으로 돌아온 김유신은 숨을 헐떡거리며 "어엉~? 총공격 안 하네~!" 한다. 그렇다고 마냥 개그 장면인 것도 아닌 것이, 무작정 돌격한다고 한들 병사들이 제대로 따를 리가 없으니 먼저 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09] 인간 장기와 반굴의 죽음으로 분위기 전환이 시작되던 영화는 관창이 계백을 이 말로 도발하고 죽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반전되기 시작한다.[110] 이 장면 이후, 명령을 내리는 김유신의 위엄이 서게 되면서 장군들이나 병사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있는 모습이 나온다.[111] "거시기"가 생각보다 별 뜻 없음을 알게 된 후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112] 약소국도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울분어린 대사. 이때 김유신의 눈을 보면 눈물이 살짝 맺혀 있다.[113]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이 소정방하고 한판 붙으려는 기세로 친히 도끼를 메고 당군 진영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소정방의 면전에서 검을 뽑아 탁자에 내려찍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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