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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7:18:05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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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100%]]| 신라 환두대도 레플리카

1. 개요2. 명칭3. 상세4. 역사5. 종류와 분류
5.1. 소환두대도5.2.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5.3. 삼루문 환두대도5.4. 용봉문 환두대도
6. 유물 사진7.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환두대도8. 미디어에서의 환두대도9. 기타10.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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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리칼, 고리자루칼, 고리자루큰칼, 환두대도(環頭大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리칼)

한반도를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에서 흔히 사용된 무기다. 환두대도란 당시에 사용된 자루머리에 고리 모양 장식이 있는 외날 도검을 '전부' 이르는 명칭이다.[1] 한국 역사에선 기원전 1세기 경부터 등장하였으며, 기원후 3세기 정도부터 주된 군도의 위치를 차지하여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2. 명칭

환두대도란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칼자루의 끝에 고리 모양 장식이 달린 큰 칼이란 뜻이다. 순우리말 표현으로 '고리자루큰칼', '고리칼', '고리자루칼'라고도 하나 이들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쓰인 말은 아니고 환두대도를 번역한 말이다. 대개 환두대도로 부른다.

일본의 고서에는 다른 표현도 있다.
백제국의 임금 조고왕(照古王)이 숫말 한 필과 암말 한 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2]에게 바쳤다. 또한 횡도(橫刀)[3] 및 대경(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의 이름은 화이길사(和邇吉師)이다. 즉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합쳐 11권을 이 사람에게 보내 바쳤다.
고사기오진 덴노
백제를 하대하는 듯한 말투로 쓰였으나 실제로는 이런 내용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는 의도적인 왜곡이 꽤 포함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의 진보장(AD 755년)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정창원에 모두 100자루의 대도(大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정창원 소장품은 모두 55자루이며 이 중 진보장에 기록된 것은 단 1자루뿐이다. 나머지는 언제 정창원에 입고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도검의 명칭도 명치(明治) 때 정해진 것이다. 진보장의 대도 100자루는 당대도(唐大刀) 13자루, 당양대도(唐樣大刀) 6자루, 고려양대도(高麗樣大刀) 2자루, 흑작대도(黑作大刀) 41자루 등인데, 거의 모두가 금은으로 장식된 뛰어난 예술품이다. 특기할 것은 칼집에 달린 염색된 가죽끈은 당시 일본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것이며 칼을 넣어 둔 주머니가 거의 모두 고려금(高麗錦)이란 것이다.
검도역사의 중세~대한검도회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옛 일본에서 환두대도를 횡도(橫刀)[4]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으며, 고구려의 것은 따로 맥검(貊劍)[5] 또는 고려양대도(高麗樣大刀)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6] 여기서 樣이란 한자는 양식이란 뜻이다. 고려양대도라고 하면 고구려(고려) 양식 큰 칼이란 뜻.

다만 위의 명칭들 역시 환두대도 고유의 명칭이라고 보긴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일단 위에서 제시된 이름 중 맥검, 고려양대도, 당대도 등은 환두대도와 상관없이 그냥 그 칼의 국적에 따른 표현 혹은 그 국가에서 주로 사용된 양식에 따라서 만든 칼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9세기 초 당나라 시인 이섭(李涉)이 지은 신라에서 얻은 보검에 대한 시를 보면, 그냥 국적을 따서 신라검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횡도(橫刀)라는 명칭 역시 의문점이 있다. 739년에 편찬된 당나라의 행정 관련 법전인 '당육전(唐六典)'에선 당시 중국에서 사용된 도(刀)의 종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횡도는 병사들이 주로 착용한 패도(佩刀)라고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환두가 있는 칼과 환두가 없는 칼이 혼용되었기 때문에, 횡도를 환두대도만을 지칭하는 명칭이라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횡도라는 명칭은 수나라 때 생겼다고 언급한다. 다른 칼들 역시 의장용 칼인 의도(儀刀), 대형검이나 참마검 종류로 추정되는 맥도(陌刀) 등 외형보단 그 용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7]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현재로선 당대에 환두대도를 의미했던 명칭을 정확히 알긴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환두대도가 대중적으로 쓰이던 당시에는 특별한 고유명사 없이 그냥 칼이나 군도, 장검, 대도, 고리가 달린 칼 등 일반적인 단어들로 막연하게 지칭됐을 가능성도 있다.

3. 상세


삼국시대 초기의 환두대도의 제작을 재현하는 동영상.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런 식으로 슴베 끝을 고리 형태로 구부리거나, 고리를 따로 만들고 거기에 슴베를 감아 연결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후에는 도신과 환두를 따로 만들고, 리벳으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환두대도를 묘사한 그림이나 몇몇 유물을 보면 곡도처럼 휜 칼날도 없지는 않지만[8] 도신이 곧게 뻗은 직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대에 만들어진 칼인 만큼 칼날 단면은 단순한 삼각형이 많았다. 다만 일본에서 대략 6세기 정도의 시기에 단면이 오각형인 칼들이 소수 발견되었고, 일본 정창원에서 보관된 중국 당대도 역시 오각도처럼 각진 칼배를 지니고 있다. 당시 주변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고려하면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오각형의 단면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5세기 초에 조성된 약수리 고분 벽화에 묘사된 칼을 든 평복 무사의 칼을 보면 오각도에서 볼 수 있는 칼배의 각진 부분[9]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있다. 5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구 12호분 벽화의 고구려 중갑기병의 칼에도 마찬가지로 각진 칼배를 지닌 듯한 묘사가 있다.[10]

환두대도는 보병의 경우 방패병이 주무장으로 썼다.[11] 물론 도검인 만큼 활, 창 등 주무장과 함께 사용하는 부무장으로서의 역할 역시 했다. 다만 당시에는 철이 귀했던 시기인 만큼 철 생산량이 어느 정도 발전하기 전까지는 장수나 귀족, 하급 군관 같은 자들이나 도검을 부무장으로 차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 고구려 벽화 등을 보면 중형~대형 환두대도만을 소지하고 있는 무사들 역시 보이는데, 그중에는 행렬 등을 호위하는 호위무사 등을 묘사한 경우가 많다.

날밑(코등이)은 대부분 없지만, 후기 유물에서는 작은 날밑이 달린 것들도 나타난다.[12] 칼자루 끝의 고리는 장식이기도 하면서 고리에 끈을 매어 손목에 고정한 뒤 싸우다가 칼을 놓치더라도 바로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다만 벽화에 끈이 없는 경우들도 있는 만큼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구조상 칼이 손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과 어느 정도의 무게 중심 조절 역할도 했을 것이다.

칼의 길이는 전장 60cm 전후부터 90cm 내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13] 환두대도는 한손검이란 인식이 많지만, 실제 출토 유물이나 벽화 등을 고려하면 한손검과 두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한손반검이 함께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물들을 보면 60~80cm 정도의 칼날에 10cm 후반에서 20cm 초반 정도의 칼자루를 가진 칼들이 꽤 있다.[14][15] 벽화나 조각에서도 쌍수 파지가 가능한 길이의 칼들이 종종 묘사된다.[16] 심지어 전장 1m를 넘는 대형 장검들 역시 존재했다. 예를 들어 김해 양동리 고분군의 철검은 전장 120cm로 후대의 쌍수도에 비견될 만한 길이를 자랑하는데, 이 외에도 비슷한 규격의 대형 검들이 소수지만 의외로 출토된다.

4. 역사

파일:sarmatiansword.jpg
기원전 2세기 사르마티아 도검
파일:hwansoodo.jpg
후한 시대의 환수도

이전까지는 환두대도 양식이 중국 한나라의 환수도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엄밀히는 사르마티아유목민족의 고리 달린 칼이 시베리아중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키타이의 도검 유물 중에서도 고리 달린 형태가 적잖게 나오며, 오르도스식 동검 중에도 환두가 달린 경우가 있다. 중국 기록에서는 흉노들이 고리가 달린 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중국의 환두대도는 내구성이 비교적 좋고 생산에 용이한 외날도 형태가 널리 쓰였는데[17], 이것이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추정된다.[18]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말엽부터 당나라 때까지 주류를 이룬 군도(軍刀)였다. 일본의 경우 고분 시대 때 한반도와 교역하면서 환두대도 양식이 전해졌으며 후대에 당태도(唐太刀)에 영향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도(타치) 양식이 나타나기 전까지 주된 도검으로 썼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환두대도가 출토된다. 다만 이때는 의례용의 측면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길이도 단검 수준으로 짧은 게 많았다. 원삼국시대까진 전투용으론 양날검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약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대에 이르러 환두대도의 길이가 길어지고 군도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초기의 환두대도 유물들은 대부분 장식이 단순한 실용적인 형태에 가까웠지만, 갈수록 이런저런 장식들이 붙으면서 소유자의 신분과 지위를 함께 상징하는 면이 커졌다. 특히나 , 봉황 등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들은 왕족 같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는 병권(兵權)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환두대도의 장식성이 부각 되면서 역으로 장식을 최소화한 양식도 등장했는데, 대략 4~5세기 정도부터 환두가 없는 무환두대도들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학계에선 이러한 칼을 목병도, 목병대도라고 부른다. 이러한 목병도는 같은 지역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장식대도보다 열처리를 적용한 유물의 비율이 높은 등 실전을 염두에 둔 경향이 더 컸다. 환두대도의 장식성이 강화되며 점차 의장이나 지배층의 위세품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군도로서의 역할은 점차 목병도로 이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환두대도가 실전에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며, 지역에 따른 차이 역시 있었다. 다만 실전용 군도가 무환두대도로 완전히 대체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유물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기 어렵다.

어쨌든 6세기 후반부터 날밑이 달린 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19] 이후의 환도로 이어진다. 다만 조선 시대에도 무당의 신칼이나 사인검 같은 의례용, 의장용 칼 등에는 종종 칼자루 끝에 고리 장식을 다는 경우가 있었다.[20]

파일:external/res.heraldm.com/20140211000655_0.jpg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또는 신라 사신. 허리에 패용 고리를 이용해서 찬 환두대도가 보인다.

5. 종류와 분류

그림으로 보는 환두대도
환두대도 패용법

지금까지 출토한 환두대도 유물들 중 초기 것은 대부분 장식이 없는 소환두대도 형식이다. 시대가 흐를수록 장식성을 더해 이엽, 삼엽 형식이 등장하고 점차 화려해지면서 삼루, 용봉, 쌍용 형식이 나온다.

횡도의 고리 장식과 삼국시대의 군제(軍制, 군사제도)를 연결지어 연구한 사례가 있다. 일단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신라의 군제를 기준으로 추측했을 때는 아래와 같다. 출처

(유물 출토지가 불명확하거나 고분 피장자(무덤 주인) 정보 부족 등 아직 역사적인 고증을 정확하게 거쳐 확정한 분류는 아니기 때문에 삼국별, 시대별, 학자별 분류 기준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환두대도는 피장자의 몸, 그것도 허리춤 부근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무덤 주인이 생전·생후에 직접 소지한 무기신분 증명서라고도 볼 수 있다.

5.1. 소환두대도

'민무늬 둥근머리 큰 칼'이라고도 한다. 자루머리의 고리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대도이다. 소환두대도는 출현기부터 길이가 90cm 내외인 대도였고, 고리부터 칼날까지 일체로 제작한게 특징이다. 손잡이로 만들 부분에는 천이나 가죽끈으로 감쌌던 것으로 보인다.

소환두대도는 칼몸체가 일직선을 이루는 직도가 대부분이지만, 4세기 초에는 칼몸체가 칼날 방향으로 약간 안으로 굽고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또한 칼자루 속으로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인 슴베가 칼몸체와 각을 이루면서 안으로 꺾인다. 이는 이나 쿠크리처럼 베는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5.2.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는 고리 안에서 뻗어나온 부르봉 왕가 백합 무늬와 닮은 이파리 2개, 이파리 3개 금속제 장식 문양이 있는 대도이다. 특히 삼엽문(三葉文) 환두대도는 삼국시대 지역 골고루 발견되지만 가야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하였다.

삼엽문(三葉文)이라 해서 나무 등의 식물 이파리 세 개를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보니 모양이 이파리 같아서 편의상 그렇게 명명했을 뿐, 정말로 이파리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인동초 문양이라고 하는 한국의 삼국시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러한 문양 요소를 가미한 금속공예품들이 많이 있긴 하였다. 그런 시대적인 디자인적 유행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은 있다.

방형계 삼엽문 환두대도는 모두 신라 지역에서만 출토하여 신라 삼엽문 환두대도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백제 지역에서는 아직 이런 환두대도가 출토하지 않았다. 이엽문 환두대도는 중국 한나라 시기 대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5.3. 삼루문 환두대도

C모양 고리 세 개로 이루어졌다. 경주 대릉원에 소재하는 대형 적석목곽분과 대구달성 고분군 · 경산 임당 고분군 · 창녕 교동 고분군 · 양산 북정리 고분군 · 부산 복천동 고분군신라 지방의 큰 무덤에서 출토된다. 칼자루에는 금동판 또는 은판에 비늘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신라 중앙 정부는 지방의 수장층들을 포섭·지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무늬가 장식된 칼을 하사하고, 지방의 수장층들은 칼을 하사받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5.4. 용봉문 환두대도

고리 안에 또는 봉황을 새겼다. 세공이 화려한 칼자루에는 하늘을 나는 용 두 마리가 서로 얽힌 모습을 새겼다. 비늘 무늬가 있다면 은을 상감하여 연꽃무늬·당초무늬·주작무늬 등을 장식했다. 용환두대도는 백제신라의 가장 큰 무덤에서 나온다. 특히 무령왕릉에 부장되었음을 보면 들이 패용했던 칼이었음을 보여준다.

봉황이 한 마리만 있으면 단봉문이라고도 한다. 고령군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한 단봉문 환두대도가 대표적이다.

6. 유물 사진

파일:대한민국의환두대도.jpg

파일:WRIT0002_267M000183.jpg

파일:984153.gif

대한민국 유물[25]

파일:external/images.metmuseum.org/DT304541.jpg

중국 유물[2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_straight_swords_6th_7th_century_Kofun_period.jpg

일본 유물

7.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환두대도

8. 미디어에서의 환두대도

대한민국삼국시대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며, 고구려부여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 바람의 나라에서도 등장한다. 전사의 70레벨 무기로 아주 초창기부터 있어왔던 일명 '깹무기'라 불리는 템. 북방템으로 환두대검-진성검 순으로 강화할 수 있다. 다만 외형은 실제 환두대도와는 전혀 다른 순수 판타지형 검이다.

9. 기타

머리장식이 고리 모양이 아닌 대도로는 고리 없이 둥글게 생긴 원두대도(圓頭大刀), 네모지게 생긴 방두대도(方頭大刀), 5각형 모양인 규두대도(圭頭大刀) 등이 있다. 규두대도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에 유행하였던 일본계 유물이기도 한데, 한국에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규두대도 유물이 확인되어 한일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0. 관련 항목



[1] 장도, 타치, 레이피어, 롱소드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는 도검 종류가 아니라 조선시대 때 군용 칼이라면 전부 환도라고 불렀듯이 그냥 고리모양 장식이 있는 칼을 모두 폭넓게 부르는 표현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사용한 고리 장식 칼 전부 이렇게 부른다. 다만 '○두대도'라는 표현은 본디 근대 일본의 분류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옛날 그 당시에 사용하던 정확한 실제 명칭은 알 수 없다.[2] 아직기(阿直岐)[3] 일각에서는 칠지도로 비정하기도 한다.[4] 비슷한 명칭으로 고대 동아시아 악기들 중에서 가로로 부는 기다란 목관악기를 '횡적(橫笛)' 또는 '횡취(橫吹)'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5] 비슷하게 고구려을 당시 중국에서 '맥궁(貊弓)'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나온다.[6] 그러나 '횡도'와 '맥검'이라는 명칭은 출처를 알 수 있는 옛 기록에서 나온 만큼 신빙성이 있지만 '당대도', '당양대도', '고려양대도', '흑작대도' 등의 명칭은 정확한 출처를 알기 어렵다.[7] 그나마 의도(儀刀)는 설명 중에 용, 봉황이 장식된 고리를 단다고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의장용 칼의 양식이 화려한 환두대도였단 것을 알 수 있을 뿐, 의도라는 명칭이 특별히 환두대도를 뜻하는 고유 명사라 보긴 어렵다. 게다가 의도 역시 횡도처럼 수나라 때부터 생긴 명칭이라 하며, 이전에는 '어도(禦刀)', '장도(長刀)'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8] 다만 의도적으로 곡도 형태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열처리 과정에서 휘어진 것인지는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9] 일본도로 치면 ’시노기’에 해당하는 부분.[10] 열처리의 흔적인 하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해당 벽화를 보면 마찬가지로 열처리를 했을 창날에는 하몬이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 창날 중심부의 각져서 도드라진 부분을 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환두대도에 그려진 선 역시 각져서 도드라진 칼배를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11] 전한시대 토우나 고구려 벽화에서도 환도를 지닌 병사들은 긴 방패를 같이 지니고 다닌다.[12]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속 고구려 사신들이 차고 있는 환두대도에는 코등이가 달려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13] 참고로 한반도에서 환두대도는 약 3세기 정도부터 군용 도검으로 사용되며, 이때부터 전장 60cm 이상의 환두대도가 제작되기 시작한다.[1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환두대도.@@@ 칼자루 길이가 측정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 길이와 칼날, 칼자루의 비율을 계산해보면 칼날 길이는 60cm 중후반, 칼자루 길이는 20cm 초반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중 칼자루 길이의 3~5cm 정도가 환두 부분임을 감안해도 충분히 양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규격이며, 사실 환두 부분 역시 필요하면 손잡이의 연장선으로 활용할 수 있긴 하다. 이 세 유물들 말고도 비슷하거나 더 큰 규격의 칼들이 상당히 발견된다.[15] 부장품으로 전장 90cm 전후의 칼과 그보다 작은 60cm 전후의 칼이 같이 매장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16] 김유신묘십이지상에 조각된 환두대도를 보면 한손용과 함께 경우 양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길이의 환두대도가 조각되어 있고 당시 사천왕상 등에 조각된 검들 역시 꽤 길이가 되는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도 환두대도로 땅을 짚고 서 있는 무사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말고도 장검이 묘사된 벽화들이 꽤 있다.[17] 물론 그렇다고 스키타이 등의 칼 유물 중 외날검이 없던 것은 아니다. 양날과 외날 두 양식 모두 유물로 확인되며, 심지어 곡률이 있는 칼들도 있었다.[18] 예를 들어 부여 유적에선 동병철검과 함께 철제 환두대도 역시 발견되곤 하는데 보통 중국과의 교류를 통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환두대도와 별개로 외날검 자체는 부여 등에도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소수지만 외날의 동별철검 유물들도 출토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상술한 스키타이나 오르도스 문화 등과의 관련성을 고려하면 외날검이 있었어도 이상하진 않다.[19] 심부대도라는 표현도 있는데, 칼자루 끝에 환두가 달린 칼을 이르는 환두대도처럼 심부대도는 날밑(코등이)이 달린 칼을 이르는 표현이다.[20] 예를 들어 사인검 중에는 칼자루 끝에 삼루문 환두와 삼엽문 환두가 합쳐진 것과 비슷한 장식을 단 양식도 존재한다.[21] 1. 신라 때에, 각 군영(軍營)의 군사를 거느리던 무관 벼슬. 감사지의 다음으로 위계는 대사(大舍) 이하이며 육정(六停), 구서당, 십당, 오주서의 기병이나 보병을 거느렸다. / 2. 신라 때에, 패강진전에 속한 외관(外官) 벼슬. 보감(步監)의 다음으로 위계는 대사 이하이다. <네이버 국어사전>[22] 한반도 국가들을 포함한 북방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를 숭배한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솟대, 조우관, 망새 등에서 이러한 문화가 잘 드러난다.[23] 1. 신라(新羅) 때의 무관(武官)의 벼슬. 진흥왕(眞興王) 10년(549)에 베풀었는데 각 영(營)에 다섯 또는 네 사람씩 도합 62명이 있었음.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의 진골(眞骨)이나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내마(柰麻)까지의 사람으로 시킴. <네이버 한자사전>[24] 1. 봉황을 아울러 이르는 말. / 2. 뛰어난 인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25] 1번째 사진은 백제신라, 2번째 사진은 가야, 3번째 사진은 고구려 것이다.[26] '环柄长刀' 또는 '环首刀'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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