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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신라의 고총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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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93호 | ||
양산 북정리 고분군 梁山 北亭里 古墳群 Tumulis of Bukjeongdong\, Yangs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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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면적 | 25,994㎡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삼국시대 | |
위치 |
1. 개요
北亭里 古墳群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위치한 신라의 고분군이다. 사적 제93호로 1963년에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북정리였기 때문에 북정리라고도 하지만 지금은 북정동이 되었으므로 북정동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밑의 이유로 북정동·신기리 고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양산시립박물관과 공원화된 북정리 고분군 뒤로는 신기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신기리 고분군도 같은 해에 사적 제 94호로 지정되었다. 신기리 고분군과 맞닿아서는 신기리 산성[1]이 있는데, 역시 사적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신기리 산성의 남쪽 아래로는 신라가 축조한 북부동 산성이 있어서 사적 제98호, 그 바로 앞으로는 신라의 고분군인 중부동 고분군이 있어서 사적 제95호로 지정되었다. 여담으로 중간에 낀 사적 제96호는 경주읍성이다.
2. 조사 내용
신라의 고분 유적의 한 가지 특징은 고분군과 산성이 조합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이다. 영남은 분지가 많기 때문에 어떠한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을 설정하여 5~6세기 신라의 지방 영역을 구분하는 주된 방식으로 삼았다. 그러한 중심 고분군에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측하는 산성이 인접했다면 완연한 통치와 행정의 거점으로 추정한다.[2] 특히나 북정동·신기리 고분군+신기리 산성, 중부동 고분군+북부동 산성의 조합이 광범위하고 인접해서 나타나는 점은 고대에 지금의 양산 일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삽량주와 하주(오늘날 양산시)라는 신라의 당시 남부 지배 거점으로도 지금의 양산이 거론되는 것과도 어느 정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그러한 유적 전체의 맥락 속에서 발굴이 이루어진 양산 북정동 고분군에서는 부부총, 금조총이라고 불리는 5세기 후엽, 6세기 초반의 경주 중심의 고분 즉, 왕족급의 무덤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위에서 설명한 유적 전체의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부부총은 지금의 정비된 북정동 고분군이 자리한 성황산 북서쪽의 능선 척릉에 위치하고 있는 둘레 20m급 고총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일본인들이 발굴조사하여 보고서를 내었고, 광복 이후 90년대에 한국 학자들이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부부(夫婦)로 추정되는 인골 두 구가 조사되었으므로 일본인들이 일본식 작명법을 따라 '부부총'이란 이름을 붙였다. 보통 "양산 부부총"이라고 지명을 붙여 말하곤 한다.
양산 부부총은 횡혈식 석실과는 약간 형태가 다르다. 외관은 석곽이랑 똑같지만 석실처럼 입구가 별도로 설치된 고분을 '횡구식 석실'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묘도(墓道)라고 불리는 회랑이 없는 석실이 횡구식 석실이다. 위의 도면에서 오른쪽에 입구처럼 보이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이 무덤에서 금동관과 금제 이식(耳飾), 경식, 삼엽문대금구, 금동식리(飾履)[3], 마구류와 토기류 등이 다량 확인되었다. 出자형 금동관의 완형이 나왔는데, 특히 금동관모(冠帽)는 조익형(鳥翼形) 관장식과 함께 낀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부부총으로부터 남쪽으로 20m 지점에 있는, 구조와 규모가 거의 같은 금조총(金鳥塚)이란 고총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다. 금동 새발장식[鳥足]이 확인되었으므로 '금조총'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양산 북정리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양산북정리고분군
- 고고학사전: 북정리 고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양산 북정리 고분군
- 대한민국 구석구석: 양산 북정리 고분군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양산 북정리 고분군
- 두산백과: 양산 북정리 고분군
4. 사적 제93호
오봉산의 중심이 되는 산등성이 일대에 있는 무덤들이다.
대형무덤은 산의 윗부분에 퍼져 있고 소형무덤은 비탈진 곳이나 산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같은 무덤의 위치는 시기적인 차이에 따라 무덤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들 가운데 부부총과 금조총은 1920년에 조사되었고, 1990년에 내부구조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의 무덤들은 모두 관을 보관하는 돌방(석실)의 앞면이 트인 앞트기식굴방무덤(횡구식석실분)임이 밝혀졌다.
부부총과 금조총은 앞트기식굴방무덤인데, 부부총은 산 위쪽에 자리잡은 대형무덤으로 돌방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흰색으로 칠하여 장식하였다. 반면 금조총은 산의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소형무덤인데 무덤들이 자리잡은 위치와 형태가 다른 것은 무덤 주인들의 신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제장식품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은 경주지방의 대형무덤에서 나오는 유물과 비슷하다. 부부총의 경우는 추가장으로 남편이 5세기 중반 이후에 먼저 사망하여 무덤을 만들고, 5세기 후반에 부인이 사망하여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 금조총의 주인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전반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의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 친족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측된다.
대형무덤은 산의 윗부분에 퍼져 있고 소형무덤은 비탈진 곳이나 산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같은 무덤의 위치는 시기적인 차이에 따라 무덤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들 가운데 부부총과 금조총은 1920년에 조사되었고, 1990년에 내부구조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의 무덤들은 모두 관을 보관하는 돌방(석실)의 앞면이 트인 앞트기식굴방무덤(횡구식석실분)임이 밝혀졌다.
부부총과 금조총은 앞트기식굴방무덤인데, 부부총은 산 위쪽에 자리잡은 대형무덤으로 돌방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흰색으로 칠하여 장식하였다. 반면 금조총은 산의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소형무덤인데 무덤들이 자리잡은 위치와 형태가 다른 것은 무덤 주인들의 신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제장식품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은 경주지방의 대형무덤에서 나오는 유물과 비슷하다. 부부총의 경우는 추가장으로 남편이 5세기 중반 이후에 먼저 사망하여 무덤을 만들고, 5세기 후반에 부인이 사망하여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 금조총의 주인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전반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의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 친족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