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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3:20

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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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李澄玉
파일:충강공 이징옥 위패.jpg
숙모전 좌무에 있는 이징옥의 위패
출생 1399년
조선 경상도 양산군
사망 1453년 10월 20일 (향년 54세)
조선 함길도 경원군 두만강 강변
작위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
시호 충강(忠剛)
원봉(圓峰)
본관 인천(仁川)
가족 부친 이전생
형 이징석, 동생 이징규
아내 벽진 이씨
장남 이자원, 차남 이윤원, 삼남 이연원[1], 사남 이철동, 오남 이성동
딸 이씨[2]
재위 대금 초대 황제
1453년 ?월 ?일 ~ 1453년 10월 20일

1. 개요2. 생애
2.1. 북방에서의 여진족 토벌과 활약2.2. 해동청 사건과 귀양2.3. 북경(北境) 수비2.4. 이징옥의 난과 최후2.5. 사후
3. 성품4. 대중매체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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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관이자 이징옥의 난의 주도자.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중추원지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3] 원래 인천 이씨에서 분적된 양산 이씨로 후에 이징옥의 후손들은 인천 이씨로 환원하였고, 현재는 인천 이씨 충강공파로 불리운다. 양산 이씨는 이징옥의 형인 이징석으로 이어졌다.[4]

무력만으로 놓고 보면 이전 왕조인 고려척준경과 함께 한국 역사상 최강으로 불리는 인물로,[5] 입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야사에 그 초인적인 용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6]도 당대에 무인으로서 3형제가 모두 용명을 떨쳤는데, 어느날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내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멧돼지를 쏴서 생포한 뒤 갖다드렸는데, 이징옥은 더 큰 멧돼지를 몇 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집 앞마당까지 몰아와서 기진맥진해 뻗어있는 걸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이것도 모자라서 호랑이를 10대 시절에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야사니 너무 신뢰하지는 말자.[7] 그리고 덩치가 커서 여진족들에게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고 불렸고 청렴하였다. 출처

2. 생애

2.1. 북방에서의 여진족 토벌과 활약

세종 시대부터 북방에서 근무하여 여진족을 상대로 용맹을 떨쳐 여진족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김종서의 눈에 띄어 북방 정벌을 하는 데 도움을 줬는데, 이때 김종서는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접 전장에 나가 여진을 몰아내는 데에는 이징옥의 노련한 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김종서가 처음 북방에 부임했을 때 둘의 대(對) 여진관은 달랐다. 김종서는 문신 출신답게 다소 온건책을 주장했고, 이징옥은 강경 토벌을 주장했다. 이징옥은 군사적으로 강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결코 여진의 저항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8] 그러나 김종서도 몇 년 후에는 이징옥의 의견을 수용하여 강경 토벌론으로 돌아서게 된다.[9] 그래서 1440년 이후로는 적절한 군사 시위와 적지에 침투하는 작전까지도 구사한 끝에 함경도6진이 완성되어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0][11]

2.2. 해동청 사건과 귀양

세종 시대에는 명나라 사신[12]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는데, 특히 명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의 해동청을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사신으로 온 윤봉[13]이라는 자가 해동청을 제멋대로 잡고 남의 집 사냥개를 빼앗자 이징옥은 몰래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풀어줘 버렸다. 윤봉이 이를 가지고 난리 치자 "저거 그냥 잡종이에요."라고 둘러댔다. 어쨌든 이 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14] 자칫하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말 그대로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도 "매랑 개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뭔 꼴이냐?"라고 이징옥을 깠고, 맹사성이나 허조는 이 일로 "이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뒷감당을 못 한다."고 처벌을 반대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의기 있는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대국적으로 처신하는 안목은 부족했던 모양. 어쨌든 이 일로 10년 넘게 지키던 경흥을 떠나 2년 동안 썩었다.

2.3. 북경(北境) 수비

세종, 문종, 단종 재위기 동안 북방에서 수십 년간 근무했다. 경상우도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가 되어 고향 양산에 있는 98세가 된 아버지 이전생(李全生)[15]을 봉양하기도 하고, 의금부 제조와 중추원사 등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지만, 토목의 변이만주 때문에 북방이 혼란스러워 함길도도절제사로서 계속 북방을 맡겨졌다.

2.4. 이징옥의 난과 최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징옥의 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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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1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 측근 인물들을 숙청하면서, 김종서의 일파인 이징옥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16] 수양대군은 김종서 측근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함경도 도절제사에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했다. 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17]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에 수양대군의 정변 소식과 김종서의 죽음을 듣자 상황을 파악하고[18]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한 다음[19]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징옥의 난이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부하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살해되고 만다.

2.5. 사후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의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1698년(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가 올려졌으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어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3. 성품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는데, 세종부터 그 뒤인 문종, 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으며, 본인은 매우 청렴하여 보다 못한 부하 무관이 "우리 장군님께서는 추운 겨울에도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요."라고 문종에게 직소했을 정도였다. 이에 문종은 좋은 털옷을 이징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 문제로 형과 충돌하기도 했는데[20] 열 받은 형 이징석이 이징옥을 아버지 빈소에서 두들겨 패기도 했다.[21] 북방에서 여진족을 떨게 한 용장(= 이징옥)은 형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맞고만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앓아 누웠다가 겨우 일어났다고 한다. 조선 초의 관리들이 여러 문제로 스캔들에 깨끗했던 인물들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이징옥은 이렇듯 사생활이 매우 깨끗했다.[22]

4. 대중매체

고우영윤승운의 만화로 알려졌으나, 이 시대를 다룬 TV 사극에서는 그다지 영 주목받지 못하거나 폄하에 가깝게 묘사된다. 초인적인 용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있는 데에다 황제국을 칭했다는 등, 극화하기 매우 좋은 흥미로운 요소들을 잘 갖췄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저 그런 역사의 단역 정도로 등장한다.

5. 같이 보기



[1] 남자 형제 중 유일하게 후사를 남겼다.[2] 월성인 녹사 이지에게 출가[3] 100세를 넘겨 살았다고 실록에 언급된다.[4] 고려 때 흥성했던 인천 이씨조선 때 쇠락하게 된 원인 제공자라고 판단되기도 한다. 인천 이씨는 고려 숙종 즉위와 관련한 이자의의 난, 인종외척이자겸의 난 등과 관련하여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황하에서도 고려 말까지 흥성했고 태종~세종 연간에도 이문화를 중심으로 흥성했다.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군주공양왕의 세자 의 비가 인천 이씨로 고려의 마지막 외척 세력이라는 상징성과 이징옥의 난 이후로 가문이 크게 쇠락하게 된다.[5] 거기다 두 인물 모두 다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이 있다는 것도 같다.[6] 그런데 이 둘은 계유정난수양대군을 지지했다.[7] 다만 사냥감을 탈진할 때까지 추적하는 지구력 사냥법은 실제로 있는 사냥법 중 하나다. 자세한 것은 사냥 항목 참조.[8] 때문에 여진족은 이징옥을 멧돼지라 불렀다-무식하게 힘만 쓰는 놈으로 비하하기 위해.[9] 중앙의 세종과 황희 같은 정승도 웬만하면 전면적 군사 행동은 자제할 것을 주문했지만 여진의 침입이 지속되자 필요에 따라서는 적절히 군사 행동을 하라고 지시했다.[10] 6진은 종성군 · 온성군 · 회령시 · 경원군 · 경흥군 · 부령군의 여섯 진이다. 이곳은 현재도 군청 소재지일 정도로 큰 읍이 되었다.[11] 다만 이런 김종서의 강경 방향은 세종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서 김종서는 해임되는데 얼마 후 형조판서에 오른다.[12] 당시 조선에 사행을 온 명나라 사신은 주로 태감급의 환관들이 대부분이었다. 명나라는 강력한 황제 중심 체제를 지향했기에 환관들이 직급과 상관없이 측근 심복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환관을 보냈다고 하여 조선을 낮게 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조선에는 주로 조선 출신으로 환관이 된 자들이 사신으로 보내졌다.[13] 이자도 조선 출신의 환관이다. 세종 말년에 조선이 조공품에서 금과 은이 빠지게 되는 큰 역할 해 주었다. 물론 받아먹은 게 너무 많은 덕이 크지만. 다른 사신들처럼 여러 물품은 기본이요. 여기다가 동생을 재상급에 앉히고 은퇴하면 조선에서 살겠다고 집과 땅까지 뜯어냈다.[14] 뜻밖에도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요청하여 귀양 정도로 끝난 것인데, 윤봉의 입장에서는 일이 너무 커지면 물의를 일으킨 책임으로 자신도 처벌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이것 저것 많이 챙길 수 있는 조선 사신의 자리는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이징옥이 이런 부분까지 계산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15] 나이가 많아 특별히 명예직으로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16]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계유정난 이전부터 한명회, 홍달손이 대놓고 이징옥도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는 무리라 말하고 수양도 동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징옥이 계유정난 후 수양 일파로 전향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거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17] 과거 김종서를 모함했던 인물이다.[18] 한양으로 가면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 잘해봐야 숙청뿐이다. 이징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19] 이징옥한테 참수된다.[20] 아버지가 북쪽 산에 묻어달라고 했는데도 이징석은 '그곳에 자기 땅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묘를 쓰려 했다. 이징옥은 '그래도 아버님의 유언을 들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대했다. 그러니까 저 형이란 놈이 지 땅이 탐나서 아버지 유언을 어기겠다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짓을 하려 했다는 것. (원하는 곳이 흉지라면 옮겨도 아무 말이 안 나오겠지만 흉지라는 언급도 없다.) 거기에 이놈은 막내동생하고 같이 계유정난에 동조했다.[21] 현대에 와서도 부모 빈소에서 이런 짓 하면 욕먹는 것을 넘어서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데, 조선 시대면 당연히 패륜이 맞다.[22]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 익히 알려진 황희마저도 실제로는 부정부패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거다. 이징옥 말고도 4군 개척에서 활약한 명장 최윤덕과(이 시대 무장들의 유행(?)인 폭행 사건조차 없어서 무신들을 무시하는 문신들도 그를 존중했다.)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했던 재상 허조 정도가 있다.[23]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황지사 주지역을 맡은 원로 배우다.[24] 이 등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징옥이 저때 무과에 급제했다면, 1399년생이 맞을 경우 2~3살 유아일때 무과에 급제했다는 뜻이 된다. 아무래도 야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면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