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83년(성종 14년)
1. 개요
조선 출신의 명나라 내시.2. 행적
원래 황해도 사람으로 명나라에 조공 내관으로 들어갔는데 황제의 신임을 얻어서 내사(內史), 봉어(奉御), 태감(太監) 등을 지내면서 품계가 정1품에 이르렀다.태종, 세종때는 명나라 사신 중 가장 많이 왔는데 이때 윤봉은 조선 신하들에게 “동생인 윤중부[1]에게 벼슬자리를 하나 맡아줄수 있겠나?”라고 묻는 등 급기야 물건이 아닌 것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른다.[2] 그러나 윤봉은 이렇게 받아먹은 만큼 명나라로 가서는 조선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한편 조선이 늘 어려워하던 금은 세공을 면제 받게 했다.
이외에도 농사에 꼭 필요한 소를 조공 품목으로 보내지 않도록 중국의 허락을 받아냈다. 농업 사회에서 소가 없으면 농사짓기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른 소득 감소가 불을 보듯 한데 이를 해결해 준 셈이다. 또 명나라에서 활의 주원료인 물소뿔을 금수품목으로 정했을 때 제한적이나마 수입량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왕실 계승문제에도 개입해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후 명에게 고명을 받게 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후 1483년 (성종 14년)에 윤봉이 노환으로 은퇴를 신청해 조선으로 귀국하자 성종은 윤봉에게 노비와 땅을 하사 시켰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에게 각각 정평공이란 시호를 내려주었고 과의장군이라는 벼슬까지 주었다.
이렇게 사신으로 와서 제일 유명한 일화는 윤봉이 사람을 시켜서 해청을 잡아서 가려고했는데 그걸 본 이징옥이 이걸 풀어줬는데 이때 윤봉이 “아니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해청을 풀어주면 어쩌자는거야?!”라고 하자 이징옥은 “제가 가까이가서 봐보았는데 저건 해청같이 생긴 잡종입니다.”라고 둘러대자 윤봉은 화가 나서는 이 일을 국왕에게 말했고 세종은 결국 이징옥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뜻밖에도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요청하여 귀양 정도로 끝난 것인데, 윤봉의 입장에서는 일이 너무 커지면 물의를 일으킨 책임으로 자신도 처벌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이 있다.(이것 저것 많이 챙길 수 있는 조선 사신의 자리는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이징옥이 이런 부분까지 계산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1] 서흥 윤씨의 시조로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이 같은 상황이 고려되어 승진을 거듭한끝에 최종적으로 명예직이긴 하나 지중추원사를 지내면서 품계가 무려 정2품까지 올랐다.[2]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윤중부를 대호군에 재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