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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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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 영전. 물론 후대의 상상화이다.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이치) 대첩비
이름 <colbgcolor=white,#2d2f34>황진(黃進)
명보(明甫)
본관 장수 황씨[1]
출생 1550년(명종 5년)
전라도 남원도호부 주포방 영촌리
(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2]
사망 1593년(선조 26년)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시호 무민(武愍)
가족 부친 - 황윤공(黃允恭)
모친 - 남양 방씨
주요 전투 이치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

1. 개요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2.2. 용인전투2.3. 웅치, 이치 전투2.4. 수원 전투2.5. 죽산, 상주 전투2.6. 제2차 진주성 전투
3. 인물4. 평가5. 여담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당시의 무관. 본관은 장수(長水)로 황희의 5대손이며, 자는 명보(明甫).

임진왜란 전반기에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 엄청난 공훈을 쌓은 명장. 시호는 무민(武愍). 통칭 무민공 황진. 용인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패잔병들을 수습해 전력을 보존하였고,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방어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응전하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초반 일본군 육군의 계획을 망가뜨린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대표적인 장수로, 같은 때 무과급제한 이종인과 함께 조선군 내에서도 무용이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공훈과 영웅담을 보면 조선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용장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지만 인지도는 굉장히 낮은 것이 아쉬운 부분[3].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황대중이 황진의 6촌 동생으로 그는 양건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그 또한 6촌 형 못지않는 활약을 했었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황진은 1550년(명종 5) 전라도 남원도호부 주포방 영촌리(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서 아버지 황윤공(黃允恭)과 어머니 남양 방씨(南陽 房氏) 봉사 방응성(房應星)의 딸 사이의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순위(忠順衛)로 복무하다가 27세 되던 1576년(선조 9) 별시 무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83년에는 니탕개의 난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거산도 찰방, 안원보 권관(安原堡權管)을 거쳐 선전관에 다시 임용되었는데, 이때 황윤길·김성일이 일본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을 때 함께 일본에 갔다. 직위가 직위인 만큼 아마도 호위역이었을 것이다.[4]

무민공실기(武愍公實記)에 의하면 통신사로 따라간 시절에 일본인들이 조선 통신사의 기를 죽이려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놓고 이를 쏘아 맞췄는데 황진이 그 과녁 옆에 작은 과녁을 세우고 명중시킨 다음 화살 두발을 연속으로 쏘아서 새 두 마리를 떨어뜨려 감탄했다고 한다.

일본에 갔다 온 뒤에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다가 동복[5]현감에 임명되었다. 원래 황진의 성격이 호탕하여 주색을 좋아하였으나[6] , 황진도 황윤길이 예상한 바와 같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때부터 무예의 단련에 열중했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진을 동복 현감으로 삼았다. 황진은 무인으로 문자는 알지 못했으나 용략(勇略)이 있었다. 그는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선조 수정 실록 25권, 선조 24년 12월 1일 계사 1번째 기사)
황진은 고상 황희의 5대손으로서 용맹 건장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엄중하고 충신하여 기절이 남보다 뛰어났다.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을 때 적의 상황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살피고는 주머니 돈을 털어 보검 한 쌍을 사가지고 돌아와 말하기를,
"머지 않아 적이 올 텐데 이 칼을 써야 하겠다."
하였다. 동복 현감으로 있을 적에 집무가 파하고 나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용맹을 익혔다.
(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 기사)
참고로 문자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정말 일자 무식이면 조선 시대 과거 제도상 무관 급제가 불가능하니[7] 정말 글을 모른다는 것은 아닐 테고, 문관 수준으로 박식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지장보다는 용장 타입인 듯하다.

2.2. 용인전투

용인(龍仁)의 패전에서는 황진이 별부(別部)의 장수였는데 그의 부대만 군사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고, 호치(湖峙)의 승첩에서는 공이 제일이었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 기사)
임진왜란 당시 임지가 전라도 였는데 고작 종6품 현감에 불과해 그리 높은 직책이 아니다보니, 전라도 관찰사인 이광과 광주 목사인 권율 밑에서 참전했다. 전술에 영향을 미칠 만큼 높은 직책이 아니라 그냥 패전했고, 당연히 그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와해된 삼도 근왕군의 다른 병력과는 달리 휘하 병력을 온전히 하여 돌아왔고, 이후 그 병력을 갖고 권율의 밑에서 이치 전투에 참전했다.

2.3. 웅치, 이치 전투

이치 전투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치 전투의 날짜는 설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황진 행장에 따라 7월 10일에 병력을 이끌고 이치에 도착한 것으로 판단해 기술한다.

용인 전투에서 패배후 전라도로 돌아온 이광은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김제 군수 정담에게 웅치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정담은 황진과 나주판관 이복남, 전주만호 황박(의병장) 등과 함께 웅치에 머물며 방어 태세를 갖췄는데, 이광은 황진에게는 남원 방어를 위해 잠시 내려가라고 명했다가 다시 귀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이 사이에 웅치로 일본군이 밀어닥쳐 일본군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왔는데 이복남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정담은 부하 장수가 후퇴를 권했음에도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활로 쏘며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포위돼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

다행히 이복남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때 황진의 군사가 도착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해 물러가게 했다. 즉, 일본군이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안덕원을 돌파하지는 못한 것. 징비록에서는 당시 주장인 이광의 공으로만 언급되었으나 포저집과 계곡집, 강한집, 고대일록 인명록에서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왜노들이 전주(全州)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安德院)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맞혀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강한집
적이 전주(全州)로 향하자 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나아갔는데, 안덕원(安德院)에서 적과 만나 접전을 벌인 결과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훈련판관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 -계곡집
진안(鎭安)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으며, 훈련원 판관으로 이치 전투(梨峙戰鬪)에 참가하여 왜적을 격퇴하였다. -고대일록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포저집

패배한 일본군은 소양평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황진은 이를 추격하여 대파시켰으며 이 전투의 공로로 종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했다. 황진은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고개로 향했다.

권율은 황진 부대와 함께 이치 전투를 준비했다. 복병은 물론 목책을 쌓아놓았으며 마름쇠와 깃발까지 동원했다. 일본군이 이치에 도착 총을 쏘며 달려들자, 황진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게 고지에서 맞서 싸웠고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복병으로 일본군을 급습했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
한편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황진이 부상까지 당해가면서 이치 전투에 승리하고 동복으로 돌아가는데 백성들이 나와서는 "황진 장군이 아니면 전주가 어찌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송했다고 한다.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황진의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편 이치 전투의 공로로 황진은 훈련 부정으로 승진했는데 정철이 남쪽 지방을 시찰하다가 이 전투에 관해 알아보고는 격문을 다시 올려 익산 군수(종4품)겸 전라도 조방장(전라도의 군직을 맡는 부장), 통정대부(정3품, 당상)로 승진했다.

파일:일본군전라도진격로.jpg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웅치와 이치를 일본군이 통과하면 전주는 6군 소조천융경(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 이끄는 16,000명의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수밖에 없다. 전라도 최대 도시인 전주가 일본군 손에 떨어지면 호남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한반도 최대 곡창지인 호남평야를 잃으면 조선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여력이 없다.

웅치 전투 직후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 6,700명이 금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지만 패하고 만다. 조헌영규가 이끄는 1,600명의 의병과 승병 역시 2차 금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한다. 결국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을 막은 것은 권율과 황진의 관군이고, 이곳이 임진왜란 초기 최대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도 공을 크게 인정한 것이고 황진의 이례적인 고속승진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정유재란이 시작될 때까지 다시는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으며, 이는 곧 이순신의 수군이 해전에만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2.4. 수원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 뒤 권율이 전라도의 병사들을 데리고 북상해 수원성을 지키다가 행주로 내려가 행주대첩을 벌이는 동안, 황진은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 진을 치고 적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수원 사평에서 정탐을 하던 도중 일본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주변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였는데 전방에 나가있던 황진 혼자 일본군 집단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은 황진을 사로잡기 위해 멀리서 포위만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앞으로 돌격해 하루도 아니라 무려 이틀 동안 분전해 마침내 말을 빼앗아 좌우로 마구 베어내며 진으로 귀환했다.[8] 이 공으로 절충 장군(정3품)겸 충청도 조방장으로 승진했고, 다음해(1593년) 봄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다시 승진했다.
척후(斥候)로 전방에 나가 있던 중에 적을 만나 역전(力戰)을 벌이고 나서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충청도 조방장(忠淸道助防將)이 되었고, 계사년(癸巳年) 봄에는 본도(本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2.5. 죽산, 상주 전투

충청 병사로 승진한 황진은 휘하 병력을 안성으로 옮기고 죽주산성[9](현 안성시 죽산면)에 있던 칠본창으로 유명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군 4000여명과 대치하여 일본군의 죽산 이북으로의 진격을 막았다. 당시 죽산은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이 1593년 1월에 자기 휘하 병력 2000명 + 홍계남의 병력 500 합계 2500의 병력으로 1차 공격했으나 크게 패한 상태였다. 변이중은 죽산 공격 과정에서 '복개전차대'라고 불리는 특이한 병기를 만들었는데 황소가 끄는 철갑 덮개를 씌운 수레로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현대의 장갑차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병기였다. 복개전차대는 안성 주민들과 천안, 아산에서 모은 소 200여 마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마구 베자 아군이 패해 흩어졌고 불을 던져 수레를 태우니 수레 위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2월 1일 병술 12번째 기사)[10]

황진은 이끌고 온 병력 천여 명으로 후쿠시마 군에 대해 여러 차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했고 군량마저 탈취했다. 결국 이에 견디다 못한 후쿠시마는 안성을 공격해 황진 군을 잡으려고 전군을 이끌고 죽주산성에서 나왔는데, 이를 매복해 격퇴하고는 오히려 빈집이 되다시피한 죽주산성을 점령했다. 이에 후쿠시마는 음죽(이천시의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려했으나 역시 여의치 않자 경상도 방면으로 총퇴각하였고 황진은 경상도 상주까지 계속 추격해서 이를 대파했다
적이 퇴각하자 공이 적의 뒤를 추격하였는데 상주(尙州)의 적암(赤巖)에 이르러 적과 전투를 벌여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죽산은 삼남 지방과 한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11]인데다가 지세가 험난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으므로, 이미 신라 때부터 성을 쌓았던 곳이었고, 후삼국시대 무렵에는 기훤의 본거지였으며, 고려 대몽 항쟁 시절에는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을 격파한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당시는 이미 완전히 요새화되어 있던 곳이었다. 죽주산성은 그냥 벽하나 덜렁 세워놓은 곳이 아니라, 둘레 1700m, 높이 2.5m의 성으로 험난한 산지에 본성 1.7㎞, 외성 1.5㎞, 내성 270m의 세 겹의 석성을 둘러쌓은 천혜의 요새[12]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선군 최후의 방어선으로 진을 친 곳이기도 하다.

황진이 4배나 많은 병력을 상대로 이런 곳을 탈환했으니 대단한 전공이며 이 전투로 죽산과 이천의 적을 완전히 몰아냈고, 충청 부근을 지키던 일본군 활동이 봉쇄되어 군량 부족으로 결국 4월에 한양에서 일본군이 퇴각하고 만다.

2.6. 제2차 진주성 전투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 행주 대첩 등의 연이은 패배로 수세로 돌아서 결국 부산포로 총퇴각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일본의 장군들은 하다못해 전쟁이 고착화되기 전에 진주성이라도 함락시키려고 했다.

마침 상주까지 내려온 황진은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기로 결의를 하고 휘하 병력 700명과 함께 진주로 갔다. 그러나 일본의 병력은 거의 10만에 달했기에 권율,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다른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조차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물러나고 만다.
당초 진주에 이르러서는 나아가 밖에서 지원하려고 하였는데, 김천일이 특별히 머물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는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옳겠다."
하니,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창의사(倡義使)와 더불어 공약(公約)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하였다.
(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 기사)
조선 왕조 실록에 말한 '어떤 사람'은 다름 아닌 의병장 곽재우다. 국조인물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초에 공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이때 진주성에 들어간 병력은 창의사 김천일이 3백 명, 충청 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 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명이었고, 그외 진주성 내의 병력이 군민이 있었다.

황진은 21부터 28일까지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5일에는 직접 의관을 벗어던지고는 백성들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고,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해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격퇴한 성벽 밖의 적 동향을 살펴보던 중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총을 쏘았고 황진은 왼쪽 이마를 관통당해 즉사했다. 8일간 굳건히 버티던 진주성은 황진 사후 하루만에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 기사)
사후에 황진은 의정부 우찬성[13]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3. 인물

공은 사람됨이 엄중(嚴重)하였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였으며, 장대한 체격에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어 모습이 매우 기위(奇偉-특별히 아름다움)하였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으며, 여력(膂力- 완력 또는 근육)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건하며 민첩함이 비호(飛虎)와 같아서 이종인(李宗仁)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벗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로 약속했었는데, 결국은 그 뜻대로 되고 말았다.[14]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사료에 체격이 장대하고 근육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강건하다고 특별히 기술한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신체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종인과는 니탕개의 난 때 함께 싸운 전우의 인연으로 평생 친구가 되었다가 하루 차이로 함께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이종인 역시 황진에 필적하는 무용을 가진 장수로 황진과 서로 실력을 인정하는 관계였다.
계미년(1583년)에 시전의 전역(니탕개의 난을 말함)에 참가하여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죄를 지어 충군(充軍)[15]되었는데, 공을 세워야만 죄를 면하고 돌아갈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자 공이 참획한 것을 모두 그에게 주기도 하였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니탕개의 난 때도 친구가 죄를 짓자 죄를 무마시켜주기 위해 전공을 전부 주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의리가 강했던 듯 하다.

4. 평가

보시다시피 황진은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일신의 무력도 훌륭한 장수였고 의리도 있던 장수였다. 승진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인데 임진왜란 전에는 고작 종6품 현감[16]에 불과했으나 1년 만에 종2품 충청 병마 절도사[17]까지 승진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위에서 1년 만에 중장까지 승진한 셈이다.

사후 추증된 우찬성은 종1품. 그만큼 조정에서도 황진의 공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이례적인 고속 승진이지만, 줄이나 인맥 덕분이 아니라 정당하게 공을 세워 승진한 것을 사료상의 기록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활약상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인지도가 낮다.

인품도 훌륭하여 종2품 병마절도사의 높은 벼슬에 있었으면서도,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보수할 때 함께 병사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공사에 참여할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황진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하길,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했다.

훗날 황진의 손자인 황위가 비석을 세우면서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우의정 장유에게 묘비글을 써줄 것을 부탁했는데, 장유도 평소 황진을 높이 보았는지라 사양하지 않고 글을 썼는데 다음과 같다.
열장부(烈丈夫) 우리 황공 씩씩한 풍모에 출중한 무예 강궁(强弓) 그대로 명중되고 힘은 범과 같았어라. 충성으로 방패 삼고 의기(義氣)로 병장기 삼았나니 삼군을 뺏을 수 있을망정 이 뜻은 어지럽힐 수 없었도다. 진주성 지키는 일은 공의 직분이 아니었지만 한 번 승낙한 이상 죽을 줄 알고도 뛰어들었지. 왜적이 새까맣게 기어오르고 포성은 잇따라 진동하는데 포위된 열흘 동안에 하루에도 열 번을 더 싸웠어라. 공이 큰소리로 부르짖자 병든 사졸 떨쳐 일어나고 악다문 입 피로 물든 얼굴 귀신도 통분하여 울부짖었지. 성을 짓누르는 흉악한 기운 공의 이마를 꿰뚫은 흉탄에 거목[大樹]이 쓰러짐에 금성탕지도 함께 무너졌네. 공은 죽어도 죽지를 않아 늠름히 생기가 흘러넘쳐서 하늘을 찌르는 의열(義烈)의 그 기운 무지개를 쏘고 천둥이 울리도다. 공의 혼령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속에 묻혀 있나니 비석에다 이 비명을 새겨 후대에 공의 풍모 전하리라.

5. 여담

6. 대중매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치전투 때 등장하며, 왜군들과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1] 호안공파(胡安公派)-양정공계(良靖公系)-무민공파(武愍公派) 파조.[2] #[3]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직도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 장수라면 이순신과 권율한테만 인지도가 집중되고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무지한 것이 현실이다[4] 같은 장수 황씨 황희의 5대손으로 인척인 황윤길의 주선으로 함께 갔을 확율이 높다. 설사 관직이 없는 신분이라도 사신의 인척이 자재군관 등의 신분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5] 同福. 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6] 출처 :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7] 무과에 급제하려면 필기 시험인 강서와 실기 시험인 무예를 모두 통과해야 했다. 필기 시험은 유교 경전인 사서 오경과 병법서인 무경칠서, 기본 법인 경국대전 등이 출제되었다. 당연히 문과보다야 난이도가 낮았겠지만 꽤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없다.[8] 일성록 정조 23년 기미(1799) 8월 22일(무신)의 기록과 목민심서에서 나타나는데, 이때 선거이도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는 유생도 1명이 있으나 정작 다수의 기록에서는 황진이 홀로 2일 동안 분전했다고 되어있어 사실상 황진 홀로 무쌍을 찍은 것.[9] 중부고속도로 일죽IC에서 1.5km 서쪽에 있다.[10] 참고로 변이중은 본래 문관이지만 병기 제작에 특기가 있었는지 화차도 300량이나 만들어 권율에게 전해주어 행주 대첩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변이중 화차라 하는데 조선 화차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11] 현재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한다[12] 선조실록 66권, 선조 28년 8월 23일 계해 2번째기사: "유성룡이 이어 아뢰기를, (중략) 우리 나라의 산성 중에 안성(安城)의 무한성(無限城)(서안성IC 옆에 위치한 무양산성), 죽산(竹山)의 취봉(鷲峰)(죽주산성이 세워진 산봉우리) 같은 곳은 형세가 매우 웅장하여 참으로 이른바, 한 장정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군사도 뚫고 들어올 수 없다는 험고한 곳이라고 할 만하니.." 황진은 이런 성을 천 명의 병력만으로 4천 명을 상대로 별 피해도 없이 탈환했다는 말이다. 만약 황진이 탈환하지 못하고 조선군이 정면에서 공성전을 벌였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13] 조선 왕조 실록에서는 우찬성에 추증되었다고 하는데 국조인물고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둘 다 종1품으로 품계는 같다.[14] 이종인 역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무관으로 궁술과 창술이 뛰어난 용장이었다. 황진이 죽자 시신을 수습하였고, 그 다음날 진주성 함락과 동시에 성에 들어온 왜군을 칼로 죽이면서 싸우다가 양팔로 왜군 한 명씩 붙잡고 “김해 부사 이종인은 여기서 죽는다.”고 말하면서 남강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15] 죄인을 졸병으로 변방군역에 복무하게 하는 형벌[16] 우리가 흔히 아는 시골 사또가 보통 현감. 현대로 치면 면장, 군사적으로는 독립 중대의 중대장 정도. 이 둘은 현대에도 사무관과 대위(고참 한정. 신참 대위는 말이 좋아 5급이지 실제 현장에서는 6급 취급한다.)라는 5급 공무원이므로 급이 맞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감은 품계는 낮아도 엄연히 국왕을 대리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수령이었기 때문에 현대 직급과의 단순비교는 무리다. 조선시대에는 6품관인 참상관부터 제대로된 관료로 쳐주기 때문에 현감은 승진 코스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이순신 장군도 현감을 지낸 덕분에 전라좌수사까지의 고속승진이 가능했다. 또한 현대 면장이나 대위와 달리 조선시대의 현감은 관할지역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지위였다.[17] 충청도의 군사 총 책임자. 현대로 치면 군단장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