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34455><colcolor=#fff> 고정욱 高廷旭 | Go Jung Wook | |
이름 | 고정욱 (高廷旭, Go Jung Wook) |
출생 | 1960년 11월 4일 ([age(1960-11-04)]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제주 고씨 (濟州 髙氏) |
학력 | 서울창천초등학교 (졸업) 경성중학교 (졸업) 경성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 / 학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1] / 석사[2]·박사[3]) |
가족 | 배우자, 슬하 3명 |
소속 | 국제장애인연맹 한국지부 이사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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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바시에서의 강연 모습.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 |
참고로 고정욱은 고태잠, 박호생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맏형이 어릴 때 죽어서 둘째가 맏이가 된 경우다. #
2. 생애
2.1. 장애를 얻다
돌 무렵, 소아마비로 인하여 장애를 갖게 되었다. 참고로 소아마비의 원인은 백신을 잘못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5] 그래서 어렸을 때는 내내 "왜 나만 장애인이 되어야 했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고정욱이 어렸을 때 옆집 할머니가 고정욱의 어머니에게 찾아와 "고양이는 쥐라도 잡지만 이 아이는 공부도 못하고, 직업도 못 가지고, 결혼도 못하는 사람이 될테니 아이를 차라리 홀트 아동 복지회에 데려가 해외로 입양이나 보내버려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정욱의 엄마는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로 맞받아쳤다고 한다. 친할머니마저 "아이가 크면 시계수리나 도장 파는 걸 가르쳐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그런 환경 탓에 실제로 어렸을 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단다. 그 덕분에 고정욱의 주된 일과는 독서였다. 책을 자주 접하게 되니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란 책은 다 읽어버렸단다. 부모도 독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간섭하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고정욱의 어렸을 때의 풍부한 독서 경험은 나중에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 독서 말고도 공부도 했는데 아버지가 휘하의 사병인 방식님을 (후에 유학까지 다녀온 선생은 유명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아들 가정교사로 데려와 그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가르쳤다. 그런데 너무도 인격적인 방식선생은 고정욱의 처지에 안쓰러움을 느껴 율동까지 가르쳤단다. 여기서부터 고정욱의 인생에 희망적인 반전이 생긴다.
2.2. 학교 생활
걷지 못하여 학교에 가지도 못할 뻔했던 고정욱은 그의 어머니 덕에 학교에 간다. 집에서 창천초등학교*까지 거리는 500미터였다. 장애가 아니었다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목발도 없이 기어가기에는 너무 힘겨운 거리였다. 사실 당시에도 휠체어가 있었으나 당시엔 자동차 한 대와 맞먹는 값이었기에 개인이 소유하는 건 흔치 않았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고정욱의 어머니는 '비록 장애아이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을 참아내며 6년간 고정욱을 업고 꾸준히 등하교를 했고, 철없는 아이들의 괴롭힘을 막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큰 주전자를 들고 와 반 아이들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돌리기도 하였을 정도로 헌신을 하였다. 참고로 고정욱의 아버지는 당시에 베트남 전쟁에 육군 대위로 파병되어서 집에서 장애 아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고정욱의 어머니는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종양에 걸리신다.고정욱은 늘 고민을 안고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같은 반 아이들에게 '절름발이'나 '병신'같은 말놀림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관하지 않고 쾌활한 성격으로 다른 친구들을 대해 주었다고 한다. 체육 시간이나 운동회 때에는 남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마음만큼은 운동장을 달리던 순진무구한 여느 아이였다. 체육 시간에는 체육관에 이동하지 않고 항상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자리를 지켰는데, 당시 소위 '일진'이라고 생각되는 아이도 수업을 듣기 싫어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와 진솔한 얘기를 한 것이 후에 소설의 모티브로 쓰였다고 한다. 학교 생활에선 화장실을 가는 것이 어려워 소변을 참기 위해 의식적으로 국과 물을 피했지만 바지에 소변을 보고마는 일이 있었단다. 그래서 그는 지금 팔십쯤 되었을 1학년 때 신영숙 담임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업고 다니며 소변을 누였다. 고정욱은 "참으로 고마우면서도 괴로웠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그의 고민은 두 살 아래 덩치 큰 동생이 한 살 앞당겨 같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소되었단다.
사실 고정욱은 남들만큼 마음껏 뛰어놀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밖에서 많이 놀곤 했다. 아이들 사이에 '깍두기'가 되어야 했지만 머리가 좋아 명석함으로 아이들을 조종했단다. 이런 방법으로 고정욱은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 책을 많이 읽은 나를 잘 알게 되면 무턱대고 나를 놀리지는 못하겠지....." 란 생각으로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초등학교 때엔 집에서 미리 교과서를 다 읽어버려 전교 1등 이어서 체육을 제외하고 항상 전과목에서 수를 독차지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1등 자리를 빼앗겼을 뿐 여전히 성적은 우수했다.
고정욱이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학교에선 졸업식에서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화를 냈단다. "어미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왜 상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도 했다. "정욱아, 장애는 부끄러운 일도 상 받을 일도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학교가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고정욱은 이 때까지도 휠체어가 아닌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석우라는 친구가 고정욱의 가방을 들어줄 아이로 반에서 뽑히게 된다. 실제로 1년 동안 가방을 들어주었고, 그렇게 친해진다. 하지만 2학년 때 반이 갈렸다. 고정욱은 그 친구가 자신을 찾아와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석우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결국에는 오지 않았다. 2학년부터는 김철환 이라는 친구가 가방을 들어주어 졸업식날 교장선생님 앞에 올라가 모범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소재가 되었다.
참고로 고정욱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의 개근상을 수여했으며 중학교를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자료는 현재 2022년 3월 인터넷 검색 프로필에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2.3. 대학 이후
고정욱의 장래희망은 사실 작가가 아니라 의사였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활해보면서,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지지도 받았다. 고정욱은 철저한 이과생이었다.[6] 그러나 장애라는 이유로 의대에 원서 접수를 거부당했다. 사실 의대가 아니더라도 이과 계열에는 장애인이 입학할 만한 과가 없었다.[7]하지만 담임 교사가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신은 인간이 문을 닫으면 창문을 열어주신다."며 문과 계열로 가 보라는 제안을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그렇게 처음 서강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했고 아버지의 결정으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갔다. 사실 세바시 강연에 따르면 고정욱은 당시 의대 진학을 거부당한 이후 가고 싶은 과가 없었다고 한다.[8]
대학에서는 사실 은근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말을 아주 잘 하는 데다가 기타도 제법 쳤고 노래를 잘해서다.
2.3.1. 교수 임용의 좌절
박사 학위를 얻기 5년 전에 1987년 박사학위 5학기 때 원생들에게 학부생 강의를 배정하는데 고정욱에게는 배정되지 않았다. 교수는 "칠판에 판서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며 [9] 퇴짜를 놓았다. 아버지가 달려가 항의한 덕에 다음 학기에 강의를 배정받긴 했지만 나중에는 교수가 아니라 그냥 강사로서 일하며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어 교수가 되어보려다 예비된 교수를 정해두고, 연구실적물 1위인 고정욱을 이순위로 올려 장애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수임용을 거부하던 대학들에게 자존심에 상처만 받고 끝내 교수가 되진 못했다.3. 작가 활동
사실 작가가 된 것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남에게 들이대는 자세 덕분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서 글 잘 쓰는 동기들이 많았고 수업에서도 글쓰기 수업이 많아 글을 쓸 기회가 많았다. 어릴 때의 이 풍부한 독서 경험과 대학 수업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대학교 2학년 때 교내 소설 공모전에 작품을 내었지만 안타깝게 1차 심사에서 떨어진다. [10] -사실 고정욱은 소설 합평을 받을 때마다 항상 붉은 펜 투성이가 되었다. 동기들은 캐릭터가 부실하다거나 스토리가 빈약하다거나 등등의 이유를 대며 소설에다가 붉은 펜으로 난도질하였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을 써나가 4학년 때에 교내 대회에서 마침내 수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후 당시 담당 교수가 고정욱에게 신춘문예 응모를 권했다. 역시 한 번에 붙진 않았고 10년 가까이 한 우물 파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1992년에 33세의 나이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다. 동시에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아동문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참고로 고정욱은 독자들의 메일에 답장을 잘 해주기로 유명하다. 또한 일 년에 책을 몇 십 권씩 쓰는데 '가방 들어주는 아이'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 만에 썼고 동화는 대개 200자 원고지 100장 내지 150장 분량이고 자신은 녹음하는 방식으로 동화를 쓴다고 한다. [11]
그리고 고정욱의 꿈은 노벨상을 타는 것이라고 한다.
4. 유명 저서
고정욱의 목표는 책 500권 이상, 100 여개국어로 자신의 저서 번역, 장애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등이다. |
-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1권 사라졌다, 2권 돌아왔다, 3권 열받았다, 4권 달라졌다, 5권 폭발했다, 6권 결심했다, 7권 깨달았다, 8권 소리쳤다, 9권 성장했다.)
-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 피아니스트 이희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 살려 쓸 우리말 4500 - 기존 국어사전에서 낱말들을 추려냈다. 토박이말의 비중이 매우 높지만 한자어도 섞여 있다. 예문은 고정욱이 직접 썼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참고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 아주 특별한 우리 형 - 70만부가 팔렸고, 6개월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 안내견 탄실이 - 30만부가 팔렸고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추천도서', '조선일보 선정 좋은책'으로 뽑혔다.
- 가방 들어주는 아이 - 100만부가 팔림.
- 원균 그리고 원균 - 사실상 고정욱의 흑역사이자 대표적인 비판 요소를 보여 주는 책으로 1994년에 출간되어 당시 학계에서도 사장되어가던 원균옹호론을 대중들에게 다시 일깨운(...) 책이다. 당연히 역사 왜곡이 많은지라 비판을 받았으며 불멸의 이순신이 나오고 나서 원균이라는 이름으로 재발간 되었다. 이후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에서도 언급되는데 참신한 내용을 위해선 원균 옹호론도 괜찮다는 발언이었다. 이를 보면 옛날처럼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원균 옹호론을 주창한 것 자체를 본인은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거나 단순히 참신함을 위해서[12] 원균옹호론을 이용한 듯 하다.
- 난 너와 친구하고 싶어 - 장애인을 대하는 43가지 에티켓에 대한 책
- 다정한 말, 단단한 말
- 빛나는 말, 힘 나는 말
- 버그소년 우완구
[1] 국문학 전공[2] 석사 학위 논문 : 『禽獸會議錄』(금수회의록) 硏究(연구)(1985. 12).[3] 박사 학위 논문 : 韓國(한국) 近代(근대) 歷史小說(역사소설) 硏究(연구)(1992. 10).[4] 참고로 팔다리가 절단된 경우는 3급 내지 4급이 된다.[5] 그 당시에는 한국에선 예방접종으로 인하여 소아마비가 사라지던 때였으며, 참고로 고정욱은 소아마비 백신을 두 차례나 접종한 바 있다.[6] 고정욱은 항상 이과 수업만 들었고 3학년 막판에 문과로 전향했으나 사회는 외우면 되지만 국어의 고전 과목 때문에 문제였다.[7] 사실 이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물론 장애인 의사도 있으나 극히 드물다. 다만 현재 같은 경우엔 장애라는 이유로 의대에 원서 접수를 거부하면 그날로 소송 크리다.[8]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고정욱은 철저히 이과생이었기에 문과 쪽에는 가고 싶은 과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9] 결국에는 장애 때문이다.[10] 그 내용은 거리를 질주하던 외제 스포츠카가 여공 한 명을 치는데 알고 보니 스포츠카를 몰던 사람은 재벌 2세였다. 그 여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구해주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재벌 2세가 여자의 매력에 넘어가 청혼을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결혼을 거부한다. 그러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면 결혼해주겠냐고 묻지만 결국 여자는 떠난다. 여자가 떠난 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남자는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서 스포츠카 열쇠를 바다에 빠뜨리고 돌아선다. 요즘 흔하게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들과 유사하다[11] 그러다 보니 망하는 작품도 생기는데 예를 들면 <자전거 태워주는 형>이다. 5천 부 정도 팔렸다.[12] 참신하면 책이 더 많이 팔리니까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돈 때문에 역사왜곡을 벌인 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