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3년(중종 28) ~ 1592년(선조 25)
1. 개요
원호는 조선 중기 활약한 무신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원주(原州)[1], 자는 중영(仲英). 시호는 충장(忠壯).임진왜란 때 여주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김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2]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원호는 1533년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아버지 원송수(元松壽)와 어머니 순흥 안씨 안순(安珣)의 딸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원량(元亮)이 있었는데, 또한 무관이었다.[3] 그런데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김덕수에게 학문을 배우고 윤두수, 이해수와 친하게 지냈다. 원호는 이순신처럼 문과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내가 종유한 사람은 오직 이 세 사람의 벗뿐인데, 모두들 나보다 먼저 수립한 바가 있다. 그러니 어찌 다시 나이 어린 사람들을 따라서 붓을 들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의 선조들께서는 대부분 무(武)로써 현달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었다. 그러니 어찌 문(文)에만 종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붓을 내팽개치고 무술 배우기에 전념했으며, 충순위(忠順衛)에 입속하여 복무하다가 35살 되던 1567년(선조 즉위) 식년시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선전관, 경주 통판, 운산 군수, 단청 군수, 경흥 부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단천 군수에 있을 때는 첩이 은가락지를 낀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어디서 난 것이냐? 이 고을은 은이 생산되는 고을이다. 내가 이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어찌 집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소유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가락지를 빼앗고, 가락지를 사온 종을 곤장친 뒤 인근의 기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경원 부사에 있을 때는 니탕개의 난을 맞이해 아들 원유남과 함께 여진족 부락 깊숙이 들어가 큰 활약을 펼쳤고,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이광이 순시할 때 다른 지방은 기생들을 바치며 아부를 떨었지만 원호는 그러지 않아 파직당하기도 했다.
1587년 정해 왜변 때는 전라 우수사였는데, 이때 녹도를 구원하지 못한 죄로 강진에 유배되기도 했다.
2.2.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강원도 조방장으로 임명된 그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동로(東路)를 수비하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와 조우해 여주 북쪽 기슭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강을 못 건너게 했다. (신륵사, 구미포 전투) 이천, 광주, 지평, 양주가 일본군에게 밟히지 않은 것은 원호가 길을 막은 덕분이었다.그러나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공문으로 그를 불러 강원도를 수비할 것을 명하자, 탄식하며 강원도로 발길을 돌렸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동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영길의 공문에는 춘천의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되어 있었다. 이에 원호가 군대를 이끌고 춘천으로 가다가 김화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마주쳤다. 그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명을 받아 왜적을 토벌하니, 힘을 다하고서 죽는 것이 의리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죽을 필요가 없다. 각자가 흩어져 도망가라.
라는 말을 남긴 뒤 신립처럼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 투신 자살하였다. 6월 19일 김화읍에서 10리 떨어진 곳이었다.
일본군은 원호의 머리를 잘라서 현청의 문에 걸어 놓고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군민들이 이미 모두 다 귀순하였는데, 원호(元豪)만 홀로 나라를 위하여 우리에게 대들었다.
아들 원유남(元裕男)과 김화의 백성들은 몰래 그의 시신을 수습해 우두산에 장사지냈다. 정유재란 때 만력제가 절개를 지킨 장수들을 포상할 때 백금 20냥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