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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6:20:41

난중잡록


파일:난중잡록.png
1. 개요2. 내용3. 번역4. 외부 링크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1. 개요

亂中雜錄. 조선 중기의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선조 15년(1582) 12월부터 인조 15년(1637)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 속잡록까지 합쳐 총 8권 4책.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임진왜란 당시 남원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자신이 13세이던 1582년 12월부터 1637년까지 약 57년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실들을 일기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 중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두 차례 전화가 책의 주요 기록을 차지하기 때문에 난중잡록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조경남의 호를 따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도 하고, 뒤에 덧붙여진 속잡록 4권 2책을 합쳐서 대방일기(帶方日記)라고도 부른다.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적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로 국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했다고 인정받는다. 난중일기가 이순신 휘하 직속부대의 전황을 주로 기록한 것에 반해, 난중잡록은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 등 나라의 주요 사료들을 참고하는 한편, 직접 전란의 경험자인 저자가 조선 팔도 전역의 상황과 심지어 국외 상황까지 수많은 이들로부터 상세히 전해받으며 적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뿐만 아니라 그 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썼고, 그 외에도 각종 나라의 중요 사건들, 당시의 민간 풍속 등 모든 잡록들까지 모두 담아놓았다. 다만 이 때문에 다른 역사 기록과 마찬가지로, 교차검증이 꼭 필요하다. 조경남은 전란의 혼란 속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인 각종 소문들도 나무위키마냥 '혹시 모르니까 일단 기록하고 보자'라는 생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난중잡록의 내용을 잘못 검토하면 원균 옹호론과 같은 역사 왜곡에 오용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난중잡록은 원균을 비판한 내용이 더 많기 때문에[1] 난중잡록 기반으로는 원균 기록을 옹호론으로 역사왜곡하기 어렵다. 난중잡록 전반의 내용이 사건 날짜까지 최대한 정확히 기록하려고 노력했기에 완벽한 검증은 못하긴 했어도 헛소문을 기본적인 검증도 없이 그냥 쓴 것은 아니다. 오류야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 지역의 일을 제외하면[2] 조선팔도에 널리 퍼질 정도의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은 쓰지 않았기에 근거가 전혀 없는 헛소문 수준인 기록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난중잡록 본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중심으로 하여 1582년 12월부터 1610년 2월까지 저술한 것이다. 제1권이 1582년 12월부터 1592년 7월까지, 제2권이 1592년 8월부터 1593년 6월까지, 제3권이 1593년 7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제4권이 1599년 1월부터 1610년 2월까지의 분량이다. 총 4권 2책이다.

이후 저자가 광해군인조 시기 경험한 사건들을 속잡록이라 하여 난중잡록에 덧붙여 기록하였다. 속잡록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한 것으로 제1권이 1611년 1월부터 1621년 12월까지, 제2권이 1622년 1월부터 1628년 11월까지, 제3권이 1628년 12월부터 1635년 12월까지, 제4권이 1636년부터 1638년 12월까지의 분량이다. 총 4권 2책으로 난중잡록과 속잡록을 합쳐 총 8권 4책이다.

그 내용이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하여 훗날 선조수정실록을 만들 때 사료로 참고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가져갔는데 효종 8년(1657)에 후손들에게 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손들이 400여년간 자필 원본을 소중히 보관해 왔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조경남의 10대손인 조성민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관계로 일본 경찰이 집 주변을 자주 수색하자 항아리 속에 담아 땅 속에 몰래 묻으면서까지 후세에 남긴 것이다.

자필 원본과는 별개로 대동야승 권26 ~ 권34에도 난중잡록의 내용이 전해내려온다. 대동야승본은 59종목의 각종 중요한 작품을 한데 엮은 것으로서 총 9책, 1232면을 차지하는 대작이다.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당쟁, 외교, 군사 등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남긴 사료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3. 번역

1971년에 민족문화연구회에서 최초로 번역했고 2002년에 민족문화연구회판을 저본으로 삼아 윤문해서 2002년에 출간했다가 절판되었다.

4. 외부 링크

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13세인 선조 15년(1585년)부터 인조 15년(1637년)까지 57년간의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부분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졌으며, 이 밖에도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중요 전란과 당시의 풍속 및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편의상 후반 5권을 『속잡록』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그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데 그 원문이 공개되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것은 조선 시대 전쟁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 원균의 폭음폭식, 때를 가리지 않는 주폭(酒暴), 주둔지의 백성들이나 장수들에게 한 패악질, 그리고 원균이 전장에서 도망친 것이 알려지자, 분노한 권율 장군이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린 사실도 기록되었다.[2] 전라도 사건은 상황상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매우 높다. 즉 자기 지역 일들은 작은 일도 정확히 썼다.